[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3월 29일 금요일 오후 12시 33분 24초 제 목(Title): 정태욱/ 위험한 보,혁 대결 출처: 한겨레 21 [ 논단 ] 2002년03월27일 제402호 위험한 보혁 대결 사진/ 정태욱ㅣ 영남대 교수·법학 나는 진보고, 너는 보수다 라고 하는 규정들은 엄정한 척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편가르기의 혐의가 짙다. 원래 이념적 구호에는 감정의 과잉이 따르기 쉽다. 정치과정의 역동성이 봄의 약동을 더해주고 있다. 이 땅의 정치적 생명력이 겨울의 시련을 넘어 새순을 틔우는 창조적 요동을 보이고 있다. 이런 즈음 수상쩍게도, 이른바 보혁 대결 또는 보혁의 정계개편이란 용어가 운위되고 있는데, 마치 계절의 환희를 방해하려는 불청객 황사와도 같이 마땅치 않게 느껴진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역사철학의 본질적 논법으로서, 의식 있는 시민들의 필수 교양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먼저, 비록 역사적 평가는 그런 용어로 규정될지라도, 현재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논법을 구사하는 것,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것은, 미래의 평가를 가불받으려는 성급함이나 자기중심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규범적인 것이 진보적인 것 나아가 요즈음 정치현실에서, ‘나는 진보고 너는 보수다’라는 규정들은 엄정한 척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편가르기의 혐의가 짙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념적 구호에는 감정의 과잉이 따르기 쉽고, 그것은 자칫 도를 넘는 험악한 전선을 만들곤 한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정치사에서 보혁 대결의 담론에 내포된 위험성이다. 진보와 혁신의 이름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스러운 정치사의 단면을 보자. 진보당 당수로서 이승만과 대결하던 조봉암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른바 혁신계를 대변하고자 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은 어떤 최후를 맞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정치구도가 보수와 진보의 구분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발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정치지형에서 보혁 대결은 아주 위험한 극약과도 같은 논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반도의 통일이 있기까지 보혁 대결의 길은 선의의 경쟁이 되기보다 증오와 타자화의 통로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보혁 대립은 유럽에서와 같이 변증법적 통일을 체득하지 못하였다. 6·25를 전후로 한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은 아직도 남북의 분단과 남남의 분열로 계속되고 있으며, 저간의 많은 사연과 곡절들은 언제 어떻게 파괴적 울분으로 터져나올지 모른다. 그 상처를 덧내지 말자. 무의식의 근저에 단단히 박힌 그 고통과 공포보다 우리의 이성은 아직 너무 연약하다. 내 얘기를 단순히 진보의 패배주의로 오해하는 이가 있다면, 한마디 부연해보겠다. 누적된 희생에 의한 피해의식과 좌절된 도덕적 우월의식에서 나오는 진보의 구호에도 사나운 기운이 서릴 수 있는 것이다. “가장 규범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것이다.” 1980년대 말 진보가 시대의 화두였으며, 진보가 곧 도덕으로 통하던 시절, 방송대 강경선 교수의 이 같은 얘기는 내 머리에 섬광처럼 박혔고, 지금까지 내 어두운 눈은 그 빛에 의지하고 있다. 이는 이를테면 ‘진보이면 옳다’라는 도식을 ‘옳은 것이 진보다’라는 식으로 도치한 것이다. 보편적 원칙에 대한 충실성을 중심에 놓은 것이다. 무엇? 진보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지독한 독선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규범적 패권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도대체 보편성 자체가 거부될 수 있는 것인가? “너의 행위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명제가 단지 패권주의로 읽혀도 좋은가? 근대 이성의 독선과 억압의 혐의는 보편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에 생길 뿐이다. 소유권의 주장이 아니라 원칙에 대한 귀의, 그리고 타인에 대한 승인과 협동을 통해 구현되는 보편성은 패권의 억압이 아니라 연대의 기쁨을 낳는다. 원칙만을 지향하라 세력의 구분과 나눔에 애쓰지 말고 원칙에 대한 견결한 충실을 보이자.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원칙만을 지향하자. 우리 편이 되거라!라는 구호에 모이는 이들은 당파성의 셈법과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의 우리 민주공화국의 주된 걸림돌이자 동시에 민주주의의 전진을 증명해준 언론개혁과 지역주의의 극복을 생각해보자. 그러한 당위의 실현을 위해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구호를 개입시킬 필요가 있었던가? 그를 위한 노력이 폭넓은 감동과 호소력을 얻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바로 보편적 가치인 민주공화국의 헌정질서 그리고 그 토대인 정치적 진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인식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소원은 다른 것이 아니다. 역시 강경선 교수의 염원대로 후세에 “진보진영이 견인불발의 정신으로 보수반동적인 인사들까지도 감동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그 결과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대장정이 비로소 반환점을 돌 수 있었다고 기록되기를 간절히 희구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