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3월 29일 금요일 오후 12시 30분 02초 제 목(Title): 이정우/ 피카소 출처: 한겨레21 [ 이정우의 철학카페 ] 2002년03월27일 제402호 전통을 뒤엎은 끝없는 실험 이정우의 철학카페 l 피카소 현대 미술의 독창적 흐름 선도… 일상의 존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사진/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1922). 피카소미술관, 파리. 20세기 미술사가 전통을 전복시키는 끝없는 실험과 창조의 연속이라 할 때, 피카소야말로 그런 경향과 흐름을 한몸에 구현했던 인물일 것이다. 피카소는 하나의 화풍에 안주하기보다는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새로운 창조방식을 끊임없이 실험에 부쳤다. 20세기 전반의 미술사는 피카소와 더불어 진행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사물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발견 마티스와 피카소는 둘 다 세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통적인 공간개념을 무너뜨리고 사물들의 심층 구조를 새로이 발견한 세잔의 작업은 색의 힘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 마티스와 사물들을 끊임없이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해내고자 한 피카소에게 이어진다. 마티스와 달리 피카소는 철학적 교양이 거의 없었으며,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교양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더 존재론적이다. 사물들의 ‘존재’를 그만큼 독창적으로 발견하고 또 창조해낸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피카소를 통해 사물들은 이전에 드러내지 못하던 존재를 계속 새롭게 드러냈다. 마티스가 하나의 존재론을 최고의 경지로 다듬어냈다면, 피카소는 수많은 존재론들을 끊임없이 실험에 부친 것이었다. 이런 작업을 예술의 주관화나 탈인간화, 탈감정화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피카소는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즉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끝없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베르그송은 사물에 대한 지각(단순한 경험론적 지각이 아니라 지속철학에 입각한 지각)은 사물들을 탈은폐의 밝은 빛 아래 드러낸다고 했다. 20세기 예술은, 적어도 존재론적 함축을 지닌 예술은 이런 탈은폐의 작업을 줄곧 행했으며, 피카소의 미술사적 위상은 그가 이런 작업을 누구보다도 줄기차게 펼쳤던 데서 찾아진다. ‘청색 시대’와 ‘장미빛 시대’의 그림들은 젊은 피카소의 눈에 비친 ‘인생’을 농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인생>(1903)은 대표적이다. 왼쪽에는 나상의 두 남녀가 서 있다. 그러나 행복하고 에로틱하기보다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은 분위기에 따라 가장 아름답고 밝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추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남녀의 살색은 밝고 화사하다기보다는 어둡고 칙칙하다. 맞은편에는 나이 든 여인이 아기를 안고 그들을 처량한 눈으로 보고 있다. 그 여인은 이들의 어머니로 젊은 남녀가 생각하는 장밋빛 인생이 얼마나 힘겹고 고달픈가를 알려주는 듯하다. 아니면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 아기를 안고 달려간 본처일지도 모른다. 초췌한 그녀의 얼굴이 인생의 비애를 말해준다. 이들의 뒤쪽에 두장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의 남녀들 또한 나신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인생에 대한 피카소의 청색의 표상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인생의 비애감 절절하게 표현 사진/ <맹인의 식사>(1903).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늙은 기타리스트>, <맹인의 식사>는 이런 비애감을 더 절절하게 나타내고 있다. 장밋빛 시대의 그림들도 마찬가지다. ‘장밋빛’이라는 표현은 색의 변화를 말할 뿐 내용의 변화를 말하지는 않는다. <곡예사 가족>(1905)은 이 시대를 대표한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곡예를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던 곡예단은 이 시대 피카소의 눈에 비친 ‘사람들’이었다. 시대적으로는 ‘아름다운 시절(belle poque)’이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지배계급(부르주아지 계급)의 시각에 비친 시대였을 뿐이다. 사진/ <아비뇽의 처녀들>(1907). 현대미술관, 뉴욕. <아비뇽의 처녀들>(1907)은 새로운 실험들의 서곡이었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아비뇽의 매춘부들’로서 주제면에서는 사실상 그의 청색 시대, 장밋빛 시대를 이어간 작품이었다. 그러나 미학적 기반은 전혀 달랐다. 피카소는 세잔의 미학을 좀더 근본적으로 밀고 나갔다. 1908년에 그린 <두 인물이 있는 풍경>은 그가 세잔을 어떻게 이어받았으며 어떻게 변형시켜 나갔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얼핏 보면 세잔의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화풍이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자연을 원기둥과 구, 원뿔로 표현한다”고 했던 세잔의 생각을 세잔 자신보다 더 멀리 밀고 나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세잔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인상파적인 운동성은 훨씬 미약해졌고(<생빅투아르> 연작과 비교해볼 것), 색은 더 차갑고 냉정해졌다. 그러나 그 냉정함은 마티스에서처럼 화사하기 그지없는 절제가 아니라 더 노골적으로 차가운 것이다. <오르타의 공장>(1908) 역시 피카소와 세잔을 비교해보기에 매우 적절한 작품이다. 아비뇽의 매춘부들은 손님을 기다리면서 치장을 하고 있으며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피카소는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인문적인 의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하학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세잔이 시도한 공간의 복수화가 더 철저하게 이루어졌으며, 마치 다양한 관점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듯이 화면이 구성되었다. 보색의 사용도 뛰어나 화면 오른쪽의 파란색은 화면 전체에 질서를 가져다주며 단조로움을 탈피하게 하고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인물들의 얼굴이다. 그 얼굴들은 피카소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아프리카·오세아니아 등에서 건너온 ‘미개인들의 예술’을 연상시킨다. 오른쪽 위의 매춘부 얼굴은 마치 아프리카의 가면을 쓴 것과도 같다. 이 작품은 초기 시대의 관심사, 새로운 미학적 실험, 그리고 탈서구적 영향이 골고루 배어 있는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이후 피카소는 독창적인 미학적 시도를 계속 새롭게 시도했다. 사물들의 새로운 배치를 추구하는 콜라주, 강렬하게 굴곡진 조각들(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피카소는 조각 작가로서도 손가락에 꼽힌다), 더 극단적인 입체파적인 실험들, 온갖 다양한 재료들로 만든 작품들(자전거의 안장과 앞손잡이는 황소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중간에 실행된 매우 고전적인 화풍들(고전이 이미 무너진 시대에는 새로운 고전적 화풍 자체가 실험이 된다. 유명한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이 대표적이다)을 비롯한 온갖 형태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중에는 스페인 내전을 그린 <게르니카>도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과 더불어 <게르니카> 또한 피카소의 모든 것을 종합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카소는 세계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무질서에서 나온다는 것(그가 평생 집안을 어지러울 정도로 난장판으로 하고 살았던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사물의 존재 방식은 그저 우리가 보는 방식을 넘어서 훨씬 심층적이고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존재 방식들을 화면을 비롯한 예술공간에 모을 때 새로운 미학적 효과가 창출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