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21일 금요일 오전 04시 19분 45초 제 목(Title): 한홍구/ 가랑잎으로 압록강을 건너시고 출처: 한겨레21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1년12월19일 제389호 가랑잎으로 압록강을 건너시고… 스타가 없던 1940년 전반의 식민지조선을 강타한 ‘김일성 전설’을 다시 본다 사진/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 김일성에 관한 신화 자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만 신화의 탄생은 규명돼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세기와 더불어) 필자는 북한사회의 이해란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물이 ‘내가 아는 김일성’이다. 많은 학생들은 여기서 이북이 김일성을 모래알로 총알을 만드시고, 가랑잎으로 압록강을 건너시며, 축지법을 쓰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필자도 어린 시절, 같은 내용을 듣고 기막혀 하면서 친구들과 이북식의 경건한 말투를 흉내내며 낄낄댔던 기억이 또렷하다. 왜 전설이 널리 퍼졌을까 우리는 김일성의 신화를 벗겨내려는 그간의 연구 덕분에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신화나 전설은 그 자체가 과장이기 때문에 김일성 신화가 실제와 달리 과장되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가 갖는 문제점은 김일성 신화 벗기기에 주력했을 뿐, 왜 한국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전근대적인 영웅설화와 유사한 김일성의 신화가 발생하고 널리 퍼져나갔는가에 대한 해명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화 자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만 신화의 탄생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가령 스칼라피노나 이정식의 주장처럼 김일성보다 뛰어나거나 더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100여명도 더 있었다면 왜 하필 김일성에게만 신화가 형성되었던 것일까? 지구의 반대쪽에서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 20세기의 중엽에 축지법이요, 둔갑술이요,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고 가랑잎으로 군사를 실어 날랐다는 전근대적인 영웅설화가 출현한 배경은 무엇일까? 김일성 전설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역사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김일성 부대의 창작품도 아니고 1945년 이후 이북의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다만 김일성 우상화에 이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김일성 전설은 1936년 김일성 부대가 장백으로 진출한 이후 본격적으로 장백현의 조선인 이민들 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보천보전투 등의 성과에 힘입어 국경지대로 퍼지기 시작했다. 김일성 전설은 그의 군사활동이 다시 신문을 통해 보도되고 구전되는 속에서 전국적으로,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이후에는 일본의 조선인 이민사회에까지 유포되었다. 물론 허황된 이야기이나… 남쪽의 관변 반공 사학자나 북쪽의 관변 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신화에 따르면 김일성은 백두산을 근거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면서 간단없이 한·만국경을 넘나들며 왜놈과 친일 앞잡이를 도살했으며,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각지에 출몰했고, 축지법을 썼으며, 산중과 산림을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녔다. 그는 또 둔갑술을 부리거나, 분신술을 쓰며, 천리안을 갖고 있었고, 부대를 땅에서 솟구치게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했다. 김일성은 가랑잎이나 종이 한장으로 강물을 건너고,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고, 모래알로 쌀을 만들었다. 그는 한때 만주의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 자신이 김일성이라는 쪽지를 남겼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또는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노장군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지도자 군상>이나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북한방문기> 등 해방 직후 국내외의 문헌에도 김일성이 일본 육사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거나, 그의 유격전술은 홍길동의 전법을 연상케 한다거나, 그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땅을 주름잡으려 축지법을 썼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물론 이같은 전설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길림의 육문중학 중퇴가 최종학력인 김일성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또 만주나 국내, 또는 일본의 어느 병원에 입원한 사실도 없다. 축지법이니 둔갑술이니 하는 온갖 도술이나 하늘로 솟구쳐올랐다든가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것은 물론 허황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허황된 이야기라고 배척해버릴 경우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을 닫아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전설과 같은 구전자료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이 구비문학계의 공인된 주장이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 말기의 대중의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서 김일성 전설은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김일성 전설의 핵심은 김일성은 반드시 승리해서 조선의 독립을 이룬다는 것이다. 축지법이니 둔갑술이니 하는 것은 그 승리를 이루는 수단일 뿐이다. 당시의 대중의 상당한 부분은 축지법이나 둔갑술 등에 기대를 걸 만큼 낙후된 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이 일제의 강대함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대중은 또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싸우면 강한 자가 승리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독립의 소망을 꿈도 꿀 수 없단 말인가? 대중이 김일성에게 도술을 부리는 능력을 만들어줌으로써 정의로운 약자가 사악한 강자를 누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김일성이 어떤 병원에 나타났다든가 어느 지방에 출현했다는 이야기는 대중이 김일성이 바로 우리의 곁에 멀리 있지 않다는 일종의 친근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특히 김일성이 부대를 이끌고 소련으로 피신한 시기에 널리 퍼졌는데, 아마도 대중은 김일성이 과거와 같은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고, 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국내의 신문이 폐간되어 김일성의 활동소식을 접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은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김일성이 출현한 지역이나 입원했다는 병원의 소재지만을 달리하여 만주, 국내, 일본 등에서 채록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각지의 대중이 김일성의 근황을 궁금해하면서도, 그가 무사하며, 자신들 곁에 있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더욱 과장되어 사진/ 유격대원들과 함께한 김일성(가운데). '전설'은 그의 군사활동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고 구전되는 속에서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이후에는 조선인 이민사회에까지 유포됐다. 그런데 김일성의 전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전설의 내용이 완전한 허구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 말기의 김일성 전설은 사실 전설 형성의 첫 단계를 밟고 있었다. 전설 형성의 첫 단계에서는 전설의 내용이 ‘사실과 사실의 과장에 의한 전설적 전환이 함께 이야기되는’ 시기로 ‘사실에 관한 것이기도 하면서 사실의 전설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것도 섞여 있는’ 상태에서 ‘일단 과장이 시작되면 상상력이 발동되어’ 더욱 윤색되어가는 것이다. 즉 당시의 대중은 김일성의 군사활동에서 무언가 신기하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이를 부풀려 이야기했고, 이렇게 과장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더욱 과장되어 전해졌다. 대표적인 예가 축지법에 관한 것이다. 1939년 5월 함경북도 무산 지구에 진출할 당시 김일성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일제가 닦아놓은 갑산과 무산 사이의 갑무경비도로를 100여리가량 백주에 행군하여 두만강 연안의 무포로 진출하였다. 일제는 국내에 진출한 김일성 부대가 감히 자신들이 닦아놓은 경비도로를 백주에 행군해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산악지대에 포위망을 쳤는데 김일성 부대는 어느새 멀리 무포 일대에 나타난 것이다. 일제에야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는 격이 되었지만, 이러한 사실은 대중에게 축지법에 대한 신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소재였다. 또 분신술의 경우 토벌대 사령관이었던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의 증언과 같이 “김일성 부대는 여러 개의 분대로 나누어 행동하면서 저마다 김일성 부대라고 칭해 이쪽에도 저쪽에도 김일성 부대가 있는 것 같은 위장전술을 잘 썼던 사실”과 관련이 깊다. 실제로 김일성 휘하의 제2방면군 7단장 오중흡은 일만군경의 토벌이 극심했을 당시 자신이 이끄는 7단이 마치 2방면군 사령부인 것처럼 위장하여 토벌의 예봉을 김일성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리도록 하는 위장전술을 쓰곤 했다. 솔방울로 폭탄을 만든다는 신화는 동만의 조선인 군중과 유격대의 자력갱생의 노력과 관련이 있다. 거의 맨손으로 유격전쟁을 시작한 동만의 조선인 군중은 창의력과 굳은 의지로 흔히 연길폭탄이라고 불리는 작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대중은 김일성 부대나 그와 연관된 유격대의 활약을 보면서 이를 과장하고, 전설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설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고 고무되었던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줄 영웅을 기다린다. 19세기 말엽 이래 영웅대망론이나 영웅예찬론은 한국의 일반 민중뿐 아니라 지식인, 민족운동가에게도 널리 퍼진 중요한 화두였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영웅에 대한 전기의 출간은 이를 증명한다. 그러면 왜 하필 김일성이 대중의 영웅대망론의 주인공으로 부각되었을까? 사실 대중은 김일성에게만 특별히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한말의 심남일(沈南一)이나 전해산(全海山) 같은 의병장들의 예에서 보면 대중은 이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하면 날개를 달아주고 도술을 부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에 패배하여 잡혀 죽음으로써 대중이 달아준 날개와 도술을 그들의 육신, 그리고 대중의 기대와 함께 땅에 묻었다. 영웅설화의 특성상 군사활동과 결부되지 않고서는 영웅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조직, 선전활동에 치중해온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나 외교활동에 주력해온 국외의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일정한 기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영웅설화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의병항쟁에 이어 만주에서는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여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양세봉(梁世奉) 등 수많은 독립군의 지도자들이 명멸해갔지만 김일성이 대중의 영웅으로 부상한 1940년대 초반 이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활동을 중단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인물전설이란 “과거의 인물을 회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현재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하며 듣는” 것이기 때문에 인물전설을 만들어내는 대중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난날의 영웅보다는 살아 있는 영웅에게 기대를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종석, 신창원, 김일성… 사진/ 김일성에 대한 민심동향을 담은 일제 관헌과 경찰부 자료들. "김일성 부대는 위장전술을 잘 썼다"는 기록은 축지법 신화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추측하게 해 준다. 김일성이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1940년대 전반의 식민지 조선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이렇다 할 인물이 없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문화계의 스타였던 이광수(李光洙)나 최남선(崔南善)은 이미 노골적인 친일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주연이었던 나운규(羅運奎),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의 김정구(金貞九), <황성옛터>의 고복수(高福壽), <사의 찬미>의 윤심덕(尹心悳),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사이클 선수 엄복동(嚴福童) 등이 1920년대, 30년대의 대중스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들은 대개 비극적인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다. 기쁨과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오늘날의 의미의 대중스타는 식민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바로 이런 시기에 대중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스타로 부각할 수 있었다. 서태지도, HOT도, god도, 비틀스도, 마이클 잭슨도, 이승엽도, 마이클 조던도 없던 시대, 그 시대를 김일성이 강타한 것이다. 1989년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하이틴> 잡지의 인기도 조사에서 1위를 한 사람은 매일같이 매스컴의 조명을 받는 기라성 같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아닌 전대협 의장 임종석(현재 민주당 의원)이었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온 여고생들이 임종석에 매료된 것은 그의 통일운동을 지지해서는 아니었다. 임종석이 인기인이 된 것은 수배중인 그가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신출귀몰하며 여러 집회에서 연설하면서 경찰을 웃음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스컴과 대중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1990년대의 임종석이 불과 1년여의 신출귀몰한 도피행각 때문에 기라성 같은 인기인을 제치고 일약 스타가 될 수 있었다면, 신창원이 불과 몇달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바람에 그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까지 출간될 수 있었다면, 단순한 도피행각이 아니라 철통같은 국경 경비망을 뚫고 조선인 유격대를 거느린 채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 일제 토벌 제일의 목표가 되어서도 끝까지 항쟁하며 살아남은 김일성, 그리고 마땅히 인기를 다툴 만한 대중스타도 그다지 많지 않았던 시대를 산 김일성에게 얼마큼 폭발적인 인기가 집중되었을 것인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흔히 이북이나 중국의 사회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할 때 자본주의의 충분한 발전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사회주의를 건설한 것을 꼽는다. 그런데 이북이 갖는 문제점은 단순히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북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 주도세력인 유격대원 출신들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 중에서 교육이나 근대문명의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집단 출신들이었다. 물론 간도라는 지역은 식민지 조선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는 데에서 중요한 길목 역할을 한 곳이지만, 유격 근거지의 주민들의 대다수는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문맹들이었다. 더구나 유격근거지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 중 지식인들이나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층들은 민생단 숙청 시기에 집중적인 타격을 받았다. 민생단 사건이 종료될 무렵 동북항일련군 제2군 소속의 조선인 대원들 중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특히 김일성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사람들은 그나마 유격대원 중에서도 신문물의 세례를 가장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상당수는 김일성에게서 글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이북 정치문화의 어두운 그림자 1930년대 후반 이후 김일성은 그 자신의 유격활동을 통해 전설적인 명장으로 부각되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의 막바지에 대중의 김일성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으며, 이같은 기대는 김일성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에 반영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군웅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런 초자연적 능력에 관한 전설들은 주로 장백이나 풍산 등 문화적으로 낙후한 외진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김일성의 주된 활동 무대도 바로 이런 지역이었다. 이 사실은 김일성에 대해 열광적인 지지와 기대를 보낸 층의 의식이 반일정서는 매우 강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매우 낙후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근대교육이 일제의 노예교육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교육의 세례를 좀더 많이 받은 층일수록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에 오랜 기간 포섭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제가 가진 근대적인 군사경제력의 힘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압도되어 독립의 꿈을 포기하는 경향이 좀더 큰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런 카리스마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김일성 주변의 유격대원들이 이북의 국가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시기 저항민족주의의 가장 견결한 담당층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의 주역이 된 인물들이 문화적으로는 매우 낙후한 집단에 속해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할퀴고 간 깊은 상처로서 이북의 정치문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