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21일 금요일 오전 04시 10분 12초 제 목(Title): 퍼온글/ 르네상스 아트 출처: 김정곤 미술갤러리 http://myhome.shinbiro.com/~jmjh 르네상스 ( Renaissance Art ) 미술사전 서양미술사 르네상스의 의미와 미술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유럽을 정정으로 이르렀던 미술 경향이다.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고전 학문의 부활을 기술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슐레가 프랑스 역사의 한 절에 '르네상스'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르네상스가 특정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인간 정신의 회복을 바탕으로 신앙 위주의 미술에서 인간 위주의 미술로 변화하고자 했으며, 초자연적인 중세 미술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의 현세적인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사실적인 미술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전반에 전성기였다. 동서 중개 무역에 의한 상공시민세력의 대두로 새로운 의식이 싹튼 것이 사상적 배경이다. 예술적으로는 의식적으로 고전적인 모범을 모방하려 하거나, 고전적 가치 기준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것은 고전 라틴 양식의 모방과 모든 고전적인 유물에 대한 무한한 찬양을 의미한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 기베르티와 알베르티, 필라레테 등의 저술에도 그러한 사관(史觀)이 계승되어 있었으나,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바사리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美術家列傳)》(1550년 초판)에서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거친 고트인(人)에 의하여 ‘독일양식’,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양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조토 및 조각가 피사노와 디 캄비오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르네상스라고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이어서 영어·독일어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토(rinascimento)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어이며, 더욱이 그 개념이 형성된 단서는 그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자각과 의욕을 보여준 미술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대의 재생과 이탈리아 당시 이탈리아인은 고대의 가장 정통적인 계승자라는 자각 아래 타국민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대에 대한 동경과 향수에 빠져서 조상의 위업을 회상하는 민족적 자부심과 그 위업을 재현할 후예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 운동을 펴나갔다. 물론 고전 고대의 부흥이라는 현상이 중세에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면, 9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고대 부흥이나 12세기의 프로트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현상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레노바티오(renovatio:라틴) 또는 리내슨스(renascence:영국) 등으로 불리는 이러한 고대회귀현상(古代回歸現象)이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와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비록 명확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고대를 자기 자신과 역사적으로 연속한 것으로서 파악한 데 대하여, 이탈리아의 그것은 고대를 먼 과거에 잃어버린 유산으로 파악한, 역사적 이념을 통하여 보았다는 점이다. 당시의 이탈리아인은 자기 자신과 고대인 사이에 ‘1,000년의 암흑시대’라는 개념을 삽입함으로써 고전 고대의 세계를 머나먼 과거로 보고 취급한 점이며, 이와 같은 르네상스의 인식은 당연한 귀결로 부정적인 중세개념을 잉태케 하였다. 그런데 이미 14세기 말의 화가 치에니니는 그의 《예술의 서》(1400년경)에 조토의 회화활동 가운데 그 때까지도 없었던 자연탐구에 의한 새로운 풍조와 고대의 재흥(再興)을 인정하였다. 이 자연탐구에 의한 사실(寫實)과 앞에서 든 고대연구를 2개의 큰 기둥으로 삼아 극히 이지적(理知的)·논리적으로 추진해나간 르네상스 미술은 우선 정치·경제의 근대화에 따라 시민의식이 왕성한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그 후 이탈리아 각 도시로 파급되었고, 다시 16세기 이후에는 알프스 이북의 여러 국가에까지 퍼져나갔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싹은 이미 13세기 후반~14세기 초에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 카발리니, 조각가 피사노와 캄비오 등의 활동으로 명확하게 인정된다. 이것이 조기(早期) 르네상스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그 후 국제적인 북방 고딕 양식으로 단절되었으며 그것을 극복하여 참다운 르네상스 미술로서 의식상으로나 양식으로나 본격적인 개화를 본 것은 1420년대부터이다. 이것은 피렌체 출생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 조각가 도나텔로, 화가 마사치오 등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3인의 혁신자 건축에서는 미(美)와 힘을 통합하여 조화와 율동의 공간질서를 드러낸 브루넬레스키에 의하여 비롯된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마리아)대성당의 붉은색 대형 돔은 역학상의 난점을 훌륭하게 해결한 걸작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건축 중에서 빛나는 최초의 수확이기도 하였다. 또한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기술(架構技術)을 채용하여 돔을 설계하고, 조화를 이룬 당당한 볼륨을 공간에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고딕건축의 수직적 상승성을 배제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장중한 공간을 살린 르네상스 건축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조각에서는 조각을 건축의 부속적 지위로부터 해방하여 조각 본래의 양체성(量體性)을 올바로 자각하고 고딕양식으로 회화화(繪畵化)한 조각을 정도(正道)로 되돌려 고전정신과 사실주의(寫實主義)를 융합시킨 도나텔로에 의하여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 《성(聖) 조르조》와 《다비데》나 《성고(聖告)》를 비롯한 대표작은 모두가 고아(高雅)한 고전적 품위와 사실에 따른 엄격한 양체성의 훌륭한 융합이다. 그리하여 파도바의 일 세인트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은 장중한 건축적 구성 가운데 사람과 말이 일체가 되어 위용이 넘친 용감한 자태, 상(像)과 대좌(臺座)의 뛰어난 균형, 또한 말을 탄 장군의 날카로운 성격의 각출(刻出)로 그의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두드러진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회화에서는 15세기 초기임에도 이미 지배적인 국제 고딕 양식의 유행을 물리치고 피렌체화파(畵派) 본래의 힘찬 조형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마사치오에 의하여 르네상스의 회화는 막이 열렸다. 앞의 두 위대한 선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 공기와 빛과 색채에 의한 엄격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주제의 본질을 추구한 1427년경의 카르미네성당 브란카치 예배당의 《헌상의 동전》 외에 5장면 정도의 벽화는 조토의 조형적인 엄격성을 훌륭하게 재생·발전시킨 작품이며, 당대의 수준을 능가한 획기적인 양식이었다. 27세 요절하였으나, 그가 피렌체화파에 끼친 영향은 컸다. 미술활동의 전개 그 후 건축에서는 알베르티, 필라레테, 미켈로조, 마야노 형제, 크로나카, 상갈로를 거쳐서 브라만테에 이르고, 조각에서는 반코, 로비아 일족, 세티냐노, 로셀리니 형제,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베르톨도를 거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고, 회화에서는 우첼로, 안젤리코, 리피, 카스타뇨, 베네치아노, 발도비네티,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등을 거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르렀다. 단적으로 말하여, 15세기 초의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파(派)의 주도 아래 각 분야와도 긴밀히 교류하면서 원근법과 인체균형론(人體均衡論) 등의 여러 탐구와 그를 위한 기법을 확대하여 자연주의적 주류 아래 전개해 나갔다. 더욱이 피렌체에서 탄생·양육된 르네상스 미술은 앞의 3대 예술가를 비롯한 같은 파(派)의 미술가들이 이탈리아의 각지에 초대받아 여러 곳에서 눈부시게 활약했기 때문에 지방에도 확산되어, 15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각기 지방적 특색을 보유하면서 새시대의 예술운동에 참여한 유파가 서로 그 특색을 겨루어 활기를 띠었다. 예를 들면 토스카나와 에밀리아 지방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그의 문하생인 멜로조 다 포를리, 루카 시뇨렐리, 페루지아의 두초와 페루지노, 핀토리키오, 우르비노의 루치아노 라우라나, 만토바의 만테냐, 페라라의 코스메 투라, 코사, 볼로냐의 프란치아, 파피아의 아마데오, 나폴리에서의 라우라나, 베네치아에서의 벨리니 일가(一家)와 롬바르도 부자, 안토넬로 다 메시나, 크리벨리 등의 활동이 현저하였고, 거의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각기의 분야에서 유니크한 예술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전양식의 달성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이룬 객관주의는 1450년 전후에 태어난 세대의 미술가들에 의하여 달성되었으나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것을 지양하여 한층 더 높은 주관과 객관의 융합으로 형성된 전아(典雅)한 고전적 예술로 향하는 길을 연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그의 천재성은 15세기 말에 이미 그 세기의 객관사실(客觀寫實)을 심화하여 주관적인 정신 내용과의 통일을 기도하여 《최후의 만찬》을 비롯하여 그 후의 여러 작품에서 이상주의적 고전양식을 완성하게 하였다. 70년과 80년대에 출생한 미술가들, 예를 들면 피렌체파의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미켈란젤로, 사르토, 우르비노 출생의 라파엘로, 베네치아파의 조르조네· 티치아노·피옴보, 에밀리아파의 코레지오, 시에나파의 소도마 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실현한 업적을 계승하고, 고대미술에서도 많은 것을 배워 대상을 주관적으로 잘 순화하여 우연적이고 특수적인 것을 제거, 고전적 이상을 추구하여 여기에 고전양식의 전성기를 구축하였다. 이때가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하는 16세기 초의 4반기(四半期)이다.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는 이 시기의 대표적 미술가로서 각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못지않는 개성적인 고전적 예술을 이루어놓았다. 말기의 두 경향과 북유럽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당시의 국제정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겹쳐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고전적이고 조화있는 양식이 무너지면서 동적인 바로크 양식의 싹(프로토 바로크)이 나타났다. 한편, 마니에리스모라 불리는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주관주의 양식이 나타나 16세기 중엽에는 건축·조각·회화의 주류가 되었다. 특히 피렌체파의 화가 폰토르모와 브론치노, 바사리, 조각가인 첼리니, 안마나티, 장 볼로냐 등을 대표적인 마니에리스트로 들 수 있으나, 페라라파(派)의 도소 도시, 에밀리아파의 파르미자니노, 베네치아파의 틴토레토 등도 만년에는 마니에리스모로 옮겨갔다. 또 베네치아파의 최후를 장식한 파올로 베로네제는 바로크적 경향으로 끝나, 결국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미술은 16세기 중엽 이 두 경향이 교차하면서 실질적으로 끝났다. 한편, 알프스 이북의 여러 국가에서도 15세기 말 이후 뒤러 등의 북방(北方)미술가의 이탈리아 방문, 1527년의 카를 5세 군대의 ‘로마 약탈’ 등으로 인한 이탈리아 미술가의 도피 등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북방 여러 나라에도 전파되어 16세기 중엽부터 르네상스적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본래부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역사적 현상으로, 고대미술이나 학예(學藝)를 갖지 않은 북방 여러 나라의 그러한 현상을 르네상스 본래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리이며, 동시대적 파악은 가능할지 모르나 특별히 북방 르네상스라는 개념으로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르네상스의 새로운 열광이 가져온 가장 본격적인 결과는 피렌체의 건축가 브르넬레스키가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건물이다. 그는 고딕 양식의 세부 조항을 떨쳐버리고 자신이 로마적이라고 생각한 건축물들을 본따 지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기술을 채용하여 돔을 설계하고 조화있는 볼륨을 공간에 세우는데 성공했다. 고딕 건축의 수직적 상승성을 배제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장중한 공간을 살린 르네상스 건축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사람은 브라만테로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후에 '고전'으로 간주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의 웅장함은 그 양식과 규모에 있어 로마제국의 장엄함을 필적하고자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야심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캐피톨과 꼭대기의 둥근 지붕을 변형시켜, 성 베드로 사원 건물에 반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고전적인 규범의 변형을 시도했다. 이러한 옛 양식은 맨 처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곳인 왕실과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에서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여 책이나 예술작품을 통해 전파되었고, 16세기 중기에는 북유럽 전역에서 고딕 양식에 대치되기 시작했다. 고전적 모범과 규칙에 의존하는 르네상스의 건축은 특성을 기술하기가 용이한 반면, 르네상스의 조각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조각에 르네상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은 15세기 초, 도나텔로에 가서이다. 도나텔로는 고전적인 모티브를 모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대 작가들이 격찬했던 고전 조각의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가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젊어서부터 고전 작품과 경쟁 의식을 느끼며 규모가 큰 대리석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인「다비드」「잠자는 큐피트」「바쿠스」「죽어가는 노예」등에서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조각은 토리지아노, 첼리니같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여행으로 북유럽까지 전파되었다.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은 고전적 원형을 참조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고, 르네상스의 조각은 적어도 고대 유물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특징을 말할 수 있지만, 르네상스의 회화를 구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규정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된 것은 이탈리아 회화가 처음으로 비잔틴 전통의 종교적 상징에서 탈피하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관례이다. 이 변화를 일으킨 사람이 지오토이다. 그를 필두로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고전 세계의 재창조 작업이 일어났다.그리하여 고전적 주제의 그림이 많이 나왔으며, 그 한 예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한편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회화에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 넣어 화가가 재현한 장면의 분위기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 화가로 지오반니를 들 수 있다. 우리에게 르네상스 성숙기로 알려진 이 시대의 특징은 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의 숙달과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재발견에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등 위대한 대가들의 시대인 이 때의 예술에서 지오토 이래 화가들이 추구해온 모든 이상이 실현된 것을 보았다. 완벽한 기법의 숙달로 회화에서는 이전 시대의 부자연스러움과 대조되는 편하고 우아한 조화를 낳게 되었다. 거친 윤곽은 레오나르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양에 의해 사라지고, 페루지노의 엄격한 대칭적 수법은 라파엘로의 균형잡힌 피라밋 형의 구도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알프스 북부의 회화는 르네상스와는 별개로 발달했으나, 소수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르네상스의 이상이 수용되기도 했다. 그 대표가 뒤러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난 예술을 독일 토양에 이식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고전적인 미의 신비를 탐구하는 저술과 작품 제작을 하는 데에 전 생애를 바쳤다. 네덜란드에서는 고딕 전통이 강해서 르네상스의 수용이 늦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이어서 르네상스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설정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왔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도 지배하여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존 봉건귀족층과 토지소유자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에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의 시민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와 초기 르네상스 고대문화에 대한 동경은 중세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이나 오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도 사실은 고대 로마황제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로마의 정통성 계승 의도를 르네상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신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자각적인 태도로서, 고대가 지난 후 암흑시대가 있었고 이제 새로운 재탄생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역사의 3분법(三分法:고대·중세·근세의 시대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운동의 근거는 고전연구로부터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고전은 수사학·역사·도덕·철학 등의 인문학이며, 이와 같은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휴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피렌체의 L.브루니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시인 F.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텍스트의 발견과 교정에 전력을 쏟았다. 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문주의의 전통은 페트라르카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이탈리아에는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와 조각이 등장하였는데,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데에 고대의 스타일을 부활시켰으며, 조토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G.바사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고대의 재탄생이란 고대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능력까지를 일컬었다. 법률 분야에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는데, 볼로냐대학을 중심으로 부활한 로마법 연구는 바르톨루스에 의하여 새로운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인문주의 시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일제히 전개되었다. 피렌체공화국의 서기장관(書記長官) C.살루타티는 키케로의 서간(書簡)을 발견하여 고전기(古典期) 라틴어의 수사법(修辭法)을 처음으로 공문서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소위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시민의 자유와 그것을 보호하는 공화정(共和政)을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었는데, 공화정은 로마의 귀중한 유산이며 그것을 보존하는 일은 피렌체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로마공화정시대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대였으나, 카이사르를 비롯한 독재자들이 국민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으므로 피렌체의 이상은 로마공화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북이탈리아를 지배한 비스콘티가(家)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살루타티는 적(敵)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하여 독재자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자유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시민적 인문주의는 역시 서기장관으로 봉직한 살루타티의 후계자 L.브루니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저서 《피렌체국민사》에서 피렌체의 자유의 역사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자유도시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투스카니(Tuscany)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박혔다고 주장하고, 평등은 정의의 균등한 기회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라노 쪽의 인문주의자들은 로마공화정 말기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를 수습한 것은 카이사르라고 찬미하고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치정(治政)을 합리화시켰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에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정의 정통성을 고대에서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현실이 과거에 투영된 결과, 고대문화의 부흥은 단지 학문상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보다 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역사와 학문을 배우고 여기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와 도덕의 원리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생각과 생활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본(寫本)을 비교하고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문헌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연구의 보조수단이라기보다 참다운 전체적인 인간성을 추구하여 자기를 자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寄進狀)’을 후세(後世)의 위작(僞作)이라고 밝혀낸 L.발라는 이러한 언어문헌학의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에도 고전주의적 이상주의가 확립된 시기로서 회화의 마사치오, F.안젤리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S.보티첼리가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뛰어났으며, 건축분야에서는 F.브루넬레스키 등이 배출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 르네상스의 변질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현실경정(現實更正)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활동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식인들 간에 현실도피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고대문화 부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코무네 체제가 쇠퇴하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고 있던 군주국현상(君主國現象)이 발달하였다. 피렌체의 경우 명목상 코무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434년 이후 메디치가(家)의 지배하에 놓임으로써 시민적 인문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판도는 비교적 단순하였는데, 북에는 스포르차가의 지배를 받는 밀라노와 귀족지배의 공화국 베네치아가 있었고, 중부에는 피렌체와 교회국가, 남에는 아라곤가의 나폴리 등 강국 간에 일종의 세력 균형이 성립하였다. 비교적 소규모의 도시에서도 각기 군주국을 형성하고 화려한 궁정생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공화정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으며, 지식인은 궁정에 기식하는 궁정문화인이 되거나, 현세를 도피하는 자세를 택하였다. 또, 비잔틴 학자들의 영향이 더해져서 지식인들은 학문연구 중심의 사변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전후하여 플레톤이나 베사리온과 같은 다수의 뛰어난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그들의 학문, 특히 플라톤 철학을 전하였고, 그 영향으로 C.메디치는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창설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의 시민적 인문주의는 도덕철학·정치학 등에 주된 관심을 두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C.란디노와 같이 명상적(瞑想的)인 생활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중심인물인 M.피치노의 학문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신학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친 문화는 군주들의 보호 아래 궁정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B.카스틸리오네가 쓴 《정신론 Il Cortegiano》은 이상적 인물로서의 궁정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문학도 단순한 고전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상을 나타냈으며, 중세 기사도에 대한 로맨틱한 관심은 귀족적인 서정시의 경향을 띄게 되었고, T.타소와 L.아리스토의 작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술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개성과 활력에 넘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이 배출된 뒤로는 차차 바로크 미술양식으로의 전환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반이 쇠퇴함으로써 르네상스에도 변화가 왔다. 오랫동안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국상인, 특히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위를 떨어뜨렸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정치적 관여로 이탈리아 내 국가간의 세력균형과 타국가간의 관계가 힘에 의해 지배되어 그들의 독립성조차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샤를마뉴의 꿈을 재현해 보려는 듯 나폴리에 침입하였으나, 그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관여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 및 프랑스 발루아 왕가간의 세력 다툼 속에 끼여 정치적으로 쇠퇴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1521년부터 44년까지 네 차례 되풀이되면서 이탈리아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서도 이탈리아의 지배는 매우 중시되었다. 후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1527년 황제군(皇帝軍)에 의하여 약탈당하면서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점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로 보고 있다. 인문주의자의 활동과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 시민적 인문주의자가 르네상스 초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다. 고대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문주의자가 코무네와 군주국에 관직을 구하는 예가 증대하였다. 인문주의적 교양이 출세의 수단이 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는데,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알프스 이북의 절대군주국가에서도 인문주의자를 관료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외국으로 나가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로써 알프스 이북에서의 인문주의의 보급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가 그들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결합된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대부분이 종교문제에 무관심했거나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융합을 도모하였음에 반하여,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언어문헌학적 방법을 성서연구에 적용하여 신앙문제를 취급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지역의 르네상스는 종교개혁과 연결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는 구약성서의 이해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연구에 헌신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했던 독일의 J.로이힐린과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J.르페브르 데타플 등이 있다. 영국의 J.콜레트와 T.모어도 이들의 범주에 속하며, 북방의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D.에라스무스도 초대 교회의 순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인문주의자였다. 이러한 종교적 특징과 더불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절대왕정의 전단계적 과정이라는 특징을 띠었는데, F.라블레와 M.몽테뉴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강한 귀족적·궁정적 성격을 띠며, 이는 곧 루이 14세의 절대왕조문화에 연결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E.스펜서의 《선녀왕(仙女王)》과 같은 대서사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송시(頌詩)였으며, 셰익스피어가 낳은 드라마의 극치는 절대주의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파냐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는데, 세르반테스의 소설도 가톨릭 신앙과 기사도 정신이 강조되었던 에스파냐 절대주의의 산물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는 나라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던 복잡한 문화현상이고, 따라서 근대문화와의 관계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고전고대(古典古代)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인문주의자들은 공통의 교양과 언어와 이상을 통하여 공동영역을 분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의 지식인에 국한된 것이지만 에라스무스가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주유했던 것과 같이 종교 이외의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공통의 지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뿌리를 르네상스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실상 르네상스시대에는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이나 창조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기(手記)에 나타난 견해를 근대과학의 예견(豫見)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생각도 수정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록은 중세 말기의 스콜라 학자에 의하여 이미 발견되었던 것을 다만 메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에서 보는 르네상스의 중요성은 근대과학의 진원지로서가 아니라, 종래의 학자적 사고의 전통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職人)의 전통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실험과 실용의 정신을 낳았다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중세를 이어온 과학의 변화와 더불어 16·17세기의 J.케플러, 갈릴레이 등을 낳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뉴턴으로 이어졌다. 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견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J.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55년 J.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의 제7권을 ‘르네상스’라고 이름붙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미슐레는 르네상스에 대한 근대적 사상을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시대를 중세와 정반대되는 시대로 묘사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관(觀)은 프랑스 중심적인 데에 문제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보다 보수적이며 초연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던 스위스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미슐레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이나 중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 즉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그 자신의 어머니를 가진’ 문화 시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주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이 이 무렵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장기간의 투쟁은 양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 자극하였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사상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탈리아 중심적인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유럽의 다른 지역,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북부 제국의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그것과 평행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사의 등장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고, 르네상스 사가(史家)들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도전해왔다. 도시사회와 자본주의가 고대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재해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사포리는 서유럽의 결정적인 르네상스는 11세기 십자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12세기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는데, 이때는 도시중심, 상업자본주의, 자치적인 도시국가, 대중의 새로운 문화의 출현으로 특징짓는 시대이다. 레인 또한 르네상스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 페거슨의 시대 구분에 동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는 재생이나 시작의 국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르네상스는 1000년간의 문화적 불모상태가 끝난 후, 14·15세기에 이르러 문학과 예술의 큰 부흥 혹은 재생 운동은 중세의 봉건적이며, 종교적인 문학과 고딕예술과 대립하여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에 대한 동경의 증가로 발전하고 이러한 고대의 부흥은 대체로 르네상스와 중세를 가늠하는 기본적 표지임에 분명하다. 이전 시대와는 다른 큰 변혁으로, 사상과 예술의 측면에서 종교에 속박 되어왔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고, 영구(永久)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문화들을 찾아내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그 유산을 남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사에서 자연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농업사회에서 교역을 주업으로 하는 도시 상인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의 결과인 이와 같은 문화의 변질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유럽문화의 새로운 도시적· 세속적 요소가 중세문화를 지배해온 봉건적·교권적(敎勸的) 요소를 누르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기간은 고전 고대 미술에 비견되고자 하는 태도의 탄생 또는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고전 문학과 그림은 이러한 새로운 목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때 이후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저서들은 인간 자신이 바로 지배적인 주제임을 암시했으며, 종교화에서조차도 드라마와 감정은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회화는 종종 스스로에게 불리할 정도로 점점 더 지적(知的)으로 변해갔으며, 교훈이나 장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아각성과 자아확신의 표현형태로 바뀌었다. 르네상스 미술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양미술사에는 본격적인 회화 양식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서서히 미술은 원시시대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향유의 예술, 상징의 예술로 부활하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간 중심 미술을 부활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르네상스는 당시 중세의 미술이 신 중심인 것에서 인간 중심의 미술로 전화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표현 중 가장 큰 특징은 원근법의 발명과 이를 회화 속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인체를 보다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해부학을 연구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실제로 많은 거장들이 직접 시체 해부를 했다고 하는데 이런 원근법과 해부학 등을 기본으로 하면서 화가들은 현실적인 세계를 그려 나갔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르네상스의 회화 표현에서 가장 중요시 된 것은 이상미였다. 르네상스 미술은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그려졌지만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이상적인 몸매와 얼굴을 그려낸 것이다. 모나리자 역시 현실의 여인을 모델로 하지만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탄생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연유에서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또다른 특징은 그 어떤 시기보다도 유명한 화가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해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등 서양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들이 이 시기에 대거 탄생했다. 이들은 각자 표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경건하고 장대한 분위기로 압도하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이 완전한 미술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완전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았는데 이로써 매너리즘 미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매너리즘은 흔히 더 이상 발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를 말할 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말로 매너리즘 미술 역시 부정적인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들은 르네상스의 미술을 변형시키고, 형태를 왜곡하거나 변형시키면서 르네상스 미술의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반발했다. 하지만 결국 매너리즘 미술은 미술사적으로 현실에 있어 계속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면서 변화되어 온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1420경~95)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는 각 예술가들의 개별적인 양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맞은 피렌체는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지적·문화적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교회의 브랑카치 예배당에 그린 마사치오의 프레스코 <봉헌금 The Tribute Money>은 성 베드로의 생애를 서술적인 연속장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마사치오는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택해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감동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는 작품과 관람자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원근법의 발명에 근거한 것이었다. 원근법 체계에 의하여 회화의 소우주와 관람자의 실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15세기초 이탈리아의 화가들빛의 효과, 인체의 해부학과 비례, 세계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로는, 마사치오를 비롯해 세속성과 부드러움을 지닌 마돈나를 그린 프라 필리포 리피, 최초의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를 보여준 프라 안젤리코, 원근법의 실행자 파올로 우첼로, 마사치오로부터 영향을 받아 조각적인 인물묘사와 빛에 대한 관심, 합리적으로 고안된 공간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책형>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하고 합리적인 공간을 통해 수학·원근법·비례 등 15세기초의 관심을 요약해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있다.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가 보여주었던 낙관주의, 합리성, 조용한 인간적 드라마 등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를 통해 좀더 개인적·표현적·선적인 양식으로 이어졌다. 1465~75년경 피렌체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화가들이 부각되었다. 폴라이우올로는 움직이는 근육의 표현을 강조했으며, 보티첼리는 <봄 The Primavera>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우아한 선의 움직임을 통해 세련된 양식을 창출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페루지노의 스승으로 알려진 베로키오, 프레스코 기법을 피렌체 화가들에게 전해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있었다. 15세기초 피렌체의 발견과 혁신들은 15세기 중반경에 다른 중심지들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파도바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가, 베네치아에서는 조반니 벨리니가 피렌체로부터 온 영향에 부드러운 빛의 효과를 더함으로써 독특한 양식을 이루어냈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에 있어서 고전기라 불리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조화와 균형을 성취하려는 열망과 더불어 15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운동감이 매우 중요한 필수 요소였던 반면 구성은 상당히 자제되었으며, 알베르티가 말한 '더하거나 덜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닌 부분들의 조화'를 실현하고 있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우르비노 태생의 라파엘로, 그리고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이 있다. 풍부하고 다양한 15세기의 피렌체 회화는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나타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변형되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연구함으로써 얻은 모든 지식은 그의 예술을 풍부하게 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특징인 피라미드 구도를 도입한 <동굴의 성모 Madonna in the Rock>는 피라미드 구도의 안정감 속에 운동감과 장엄함,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미묘한 모델링과 암시적인 안개 낀 분위기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좀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명암을 이용하여 구성적 요소를 통일시킨 점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유화 재료로만 가능했다. 유화는 그림에서 분위기의 명암의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투명성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회화기법을 벽화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옮겨보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도는 <최후의 만찬 Last Supper>이라는 승리이자 비극을 낳았다. 즉 벽화에 유화 기법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영구적이지 못한 것이어서 그의 생전에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리스도의 안정된 피라미드 구도와 원근법적 실내묘사, 동요된 제자들의 모습과 감정 및 운동감 표현 등의 새로운 종합을 보여주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범으로 삼아 성공한 화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라파엘로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굴의 성모.로부터 새로운 마돈나 유형을 발전시켜 부드러운 풍경을 배경으로 성모를 그렸다. 교황 서명실의 벽화 <아테네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에 속한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인물의 운동감과 균형 및 질서를 성취했으며 공간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라파엘로가 교황궁의 서명실에서 작업하던 당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장식을 맡기로 수락했다. 그는 천지창조 장면부터 그리도록 요구받았는데, 창세기의 연대적 순서와 상관없이 제단의 끝부분에 <술 취한 노아>를 그렸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당대에 이미 걸작으로 유명해졌고, 그는 '신(神)의 미켈란젤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1513년경 율리우스 2세가 죽고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피렌체·로마의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은 그 원래의 모습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들은 <헬리오도로스의 성전 추방>에서처럼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로마의 약탈과 종교적 체험들은 그로 하여금 미학적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러한 사건들의 공포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에 나타나 있다. 15세기 후반경 베네치아의 회화는 피렌체에서처럼 전성기 르네상스로 향하고 있었으며, 한편에서는 여전히 순수하게 베네치아적인 취향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성모와 성자들에는 '성스러운 대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 벨리니에게서 배운 조르조네는 목가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스승을 능가했다. <전원의 합주>·<폭풍우>에서 그는 베네치아인들의 질감 표현과 부드럽게 확산되는 빛, 전원풍의 효과를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풍경 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르조네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은 티치아노는 <바코스 축제>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적인 색채와 질감을 통해 신화적 주제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16세기말 베네치아에서 가장 뛰어났던 화가로는 베로네세와 틴토레토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티치아노의 양식을 받아들여 그것을 발전시켰다. 베로네세는 티치아노에게서 배운 풍부한 색채와 복잡한 구성으로 유명하다. 틴토레토라고 불린 자코포 로부스티는 1594년의 <최후의 만찬>에서 대각선 구도를 사용하고, 극적인 효과와 명확한 형태를 나타내도록 빛을 잘 구사했다. 마니에리스모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에 대한 반작용이 1515~24년 피렌체와 로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자연주의로부터 약간 벗어난 이러한 양식을 ' 마니에리스모'라 한다. 그후 유럽 전역으로 퍼진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예술적 기교, 우아함과 유용함에 대한 자기확신과 세련됨, 이상스러운 것에서 느끼는 체변적인 즐거움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에 관한 바사리의 표현을 들자면, 인물 양식에서 형식적인 복합성의 기준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설정된 것이었고 이상화된 미(美)는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취한 것이었다. 또한 예술기법상의 복잡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데 큰 가치를 두었으며, 완성된 작품에는 제작과정에서 고심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로마에서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폰토르모, 로소 피오렌티노 등이 형태와 색채의 조화 속에서 미묘하고 모호한 감정적 긴장을 나타냈으며, 파르마 출신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은 가늘고 섬세한 우아함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렌체에서는 코시모 메디치의 궁정화가였던 바사리와 브론치노가 우아하고 세밀한 형태의 초상화로 명성을 떨쳤다. 이탈리아 밖에서의 르네상스 16세기초 스페인에서는 페르난도 야녜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후안 데 마시프와 그의 아들 후안 데 후아네스의 작품들이 베네치아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스페인의 마니에리스모는 페드로 캄파냐와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의 그림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엘 그레코는 <성모 승천>에서 보여주듯이 인체의 형태를 길게 늘인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생하고 감동적인 색채를 구사함으로써 베네치아 미술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알브레흐트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 및 이론을 깊이 이해했던 독일 최초의 주요예술가였다. 뒤러의 그림들은 <네 사도.에서 볼 수 있듯이 북유럽인들의 세밀묘사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이탈리아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16세기 독일의 르네상스 회화는 뒤러에 의해 완성된 양식을 따랐는데, 그중 루카스 크라나흐는 공들여 충실하게 묘사하는 전신 초상화를 발전시켰으며, 한스 홀바인은 후에 영국에 정착하여 모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16세기초 플랑드르에서는 ' 안트웨르펜 마니에리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과장적·환상적 구성은 후기 고딕 예술의 장식성을 물려받은 것이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건축가·금세공인들의 책을 통해 전달된 이탈리아적인 묘사도 지니고 있었다. 얀 호사르트(마뷔즈라고도 함),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얀 반 스코렐, 메르텐 반 헴스케르크, 안토니 모레 경 등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곳의 양식을 흡수하여 자신들의 독특한 예술을 만들어냈다. 피테르 브뢰헬은 1551~53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알프스 북부의 시골풍경화를 꾸준히 그리면서 대중적 주제와 일상생활, 농부들을 다루었다. 그러한 예로 1568년의 <농부의 춤>을 들 수 있다.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와는 달리, 플랑드르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소화되기 시작했다. 바사리와 함께 수학한 프레데리크 수스트리스, 추카리의 동료였던 헨드리크 골치우스, 요한 폰 아헨,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게르 등이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북유럽의 마니에리스모를 발전시켰다. -------------------------------------------------------------------------------- 피렌체파 ( Scuola Fiorentina )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14~16세기에 르네상스 미술활동의 주도적 지위에 있었던 유파. 건축· 조각·회화의 각 분야에서 각기 공통된 피렌체적 성격을 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주로 회화의 유파로 쓰이는 수가 많다. 이 화파(畵派)는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형태주의와 합리주의를 특징으로 하였다. 시원(始源)은 치마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창시자는 마사치오로서, 그는 치마부에의 제자 조토의 조형적 엄격성으로 돌아가서 사실의 본질과, 공기·빛· 색채에 의한 엄격한 조형성을 추구하여, 거기에서 혁신적인 양식을 수립하였다. 마사치오는 당시에 유행한 국제 고딕 양식을 배제하여 조토의 전통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F.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의 성과와 도나텔로의 조형적 엄정성을 흡수하여 회화적 표현의 진수를 구함으로써 획기적인 르네상스 양식에 이르렀다. 그의 영향은 그 후에 피렌체파 화가들에게 절대적이었으며, 이 파는 메디치가(家)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 사회의 번영에도 뒷받침되어 1세기 동안이나 르네상스 회화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마사치오의 뒤를 이은 이 파의 화가들은 마사치오의 자연에 대한 신선한 직관이 포착한 사실적 성과를 이지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거기에 자연주의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15세기의 이 유파의 중요한 특질이며, 거기에 여러 경향이 개재하였다 하더라도 항상 자연주의적 주류 위에서 전개되고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 P.우첼로와 D.베네치아노나 A.카스타뇨 등 선천적으로 과학적 성향을 상당히 지니고 있던 화가는 물론, 프라 안젤리코와 F.리피 등과 같이 정서적 성향이 강한 화가들까지도 그 흐름에 끌어들었다. 더욱이 15세기 후반이 되면 그 자연주의적 경향은 더욱더 박차가 가해진다. A.발도비네티와 A.폴라이우올로나 A.베로키오 등은 한층 더 적극적으로 사실탐구에 있어서 과학적 정확성과 기법적 개발을 추진하고, 전형적인 정서주의의 화가로 지목된 S.보티첼리마저 한때 자연주의적 사실탐구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자연주의적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하여 완성을 보지만, 더 나아가서 레오나르도는 그 사실주의를 지양하여 주객(主客)융합의 이상주의적 고전양식까지 가져왔다. 미켈란젤로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더욱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추구되지만, 여기에 이르러 이 유파는 이미 그 발전의 극한에 도달해 있었다. 16세기 초기에 벌써 발전의 가능성이 사라진 때부터 피렌체의 정치 불안도 화근이 되어 이 유파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처음의 4반기는 F.바르톨로메오, 알베르티넬리 그리고 안드레아 델 사르토 등이 전아한 고전양식을 펼쳐서 옛날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중엽부터 후반에 걸쳐서는 I.로소 피오렌티노, J.폰토르모, A.브론치노 등 마니엘리스트들의 활동을 볼 수 있으나, 베네치아파나 로마파 등의 활동상황에는 못미쳤다. 페렌체미술관 ( Firenze Museo Nationale )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미술관. 우피치미술관과 피렌체대성당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 바르젤로라고 부른다. 우피치의 수집품 가운데 조각·공예품이 정리되어 옮겨진 것이 많고, 메디치가(家) 수집품에는 그 방면의 일품이 많다. 도나텔로의 《성 조르조》 《다비드》,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합작으로 유명한 《이사크의 희생》, 그리고 베로키오의 《다비데》를 비롯하여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이름난 조각품과 도화류(陶畵類)가 전시되어 있다. 페렌체 ( Firenze ) 이탈리아어로는 플로렌스라고도 한다. 로마 북서쪽 233 km, 아르노강(江)의 양안(兩岸),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근교의 아르노강 연변의 저지는 신흥공업지대로 상공업의 중심을 이룬다.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역사는 BC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도시로서의 발전은 BC 2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街道)의 중심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와 일치하며 폰트베키오(다리)의 우안(右岸)에 해당한다. 제정(帝政)시대에는 토스카나·움브리아의 중심이 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는 백작령(伯爵領)의 중심이 되었으나, 11세기 후반 마틸데의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停滯)상태였다. 마틸데 사망 후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서 독립하고 좌안의 보루고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하였다.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나 귀금속상인이 각기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피렌체는 유럽의 상공업· 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황당(敎皇黨:겔프)과 황제당(皇帝黨:기벨린)과의 싸움이 피렌체시(市)뿐만 아니라 전(全)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는 전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 1300년에 비롯된 백당(白黨)과 흑당(黑黨)은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家)가 시정(市政)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지모 및 손자인 대(大)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어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인구는 10만 이하에 머물렀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고 65년부터 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1944년 8월에는 영국·독일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었다. 상공업이 성하며 식품·의료·가구 등의 일용품공업 외에 자동차부품· 자전거·냉장고·농업기계 등의 제조공업과 전통적으로 이름높은 가죽제품공업이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市政)의 중심이었던 시뇰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지금은 국립미술관·도서관·고문서관(古文書館)이 들어 있는 우피치 궁전, 독특한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교회,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교회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한때 메디치가(家)의 저택이었던 팔라초-피티(궁전)는 현재 미술관이고, 그 밖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름높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이라는 통칭으로 알려진 국립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마르크 미술관 등이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기관·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1966년 가을에 아르노강이 범람, 우피치 궁전 등 시가의 중심부가 침수되어 귀중한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