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6일 목요일 오후 03시 35분 03초 제 목(Title): 이정우/ 이오덕과 고종석 <통소리> 이오덕과 고종석 <국어의 풍경들>, <언문세설>, <감염된언어>… 한글에 관한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관심이 투영된 책들이다. 이들 책에 나타난 그의 언어관은 조금 색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색다르다고 하는 것은 <우리글 바로쓰기>로 널리 알려진 이오덕의 주장과 관련해서이다. 무리가 있는 구분이라는 점은 알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선을 그어 보자. 고종석은 세계주의자이고, 이오덕은 민족주의자이다. 이오덕은 일제에 의해 '언어상실'의 경험을 가졌고, 원초적인 순수의 말글을 가르쳐야 하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고종석은 영어로 기사를 쓰는 <코리아헤럴드>를 거쳐 유럽 유학까지 섭렵했다. 그러니까 이들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개인적인 이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동시에 이들의 개인적 이력은 '조선과 조선어'가 겪은 역사적 경험과 큰 틀에서 일치한다. 일제-해방-조국근대화라는 민족주의의 시대와 10.26-6월항쟁-민주주의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세계화의 시대에 이오덕과 고종석은 각각 자신들의 '언어론'을 다듬었던 것이다. 이오덕의 주장은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것" 그리고 "논문 등의 서적류와 외국어 번역에서 유래한 문어체에서 탈피, 알아듣기 쉬운 구어체를 최대한 활용하는 글쓰기"로 요약할 수 있다. 고종석은 정반대의 논리를 제시한다. 그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쉬고,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의 입장을 따라야 한다면 기자는 이오덕의 추종자이지만, 말과 글을 대하는 '입장'을 묻는다면 반대로 기자는 고종석의 편이다. 언어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우리말글을 다듬고 보호해야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쳐 언어적 폐쇄주의로 흐른다면 우리말글의 풍요와 세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프트웨어를 '무른모'로 '민족화'한다는 발상은 일견 애국적으로 보이나, 그것은 단순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라는 외래어가 내포하고 있는 풍요로운 뉘앙스를 우리는 잃게 된다. 이와 반대의 예, 즉 좋은 우리말이 외래어를 밀어낸 경우는 '써클'이 '동아리'로 대체된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말을 죽이고 살리는 심판관은 국가도 아니고, 민족도 아닌, 이른바 불특정 다수의 '언중言衆'이라는 점이다. 언중은 말을 '순화'시키기도하고 '오염'시키기도 하는 가치중립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글과 연관지어 말하면 이오덕이기도 하고 고종석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어묵을 오뎅이라 부르고, 테레비를 텔레비젼으로 고쳐부르지 않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고전에서나 발견되는 사랑이라는 뜻의 '생각'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엄마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는 줄 알아?"할 때 '생각'은 곧 '사랑'의 뜻인 것이다. 이점에서 이오덕과 고종석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중의 언어습관에 대한 존중이다. 그래서 이오덕은 토마토의 표준표기를 도마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고종석은 이미 자리잡은 외국어까지도 뜯어 고치려는 언어순결주의는 일종의 파시즘이라고 경고한다. 좋은 글을 쓰려면, 혹은 어느 글이 좋은 글인지 잘 판단하려면 이오덕과 고종석 둘 다를 읽어야 한다. 어느 한 쪽만 읽으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독소조항'에 빠지기 슆다. 다시 둘을 편의상 가른다면 이오덕은 말글의 형식(소통)을 중요시하고, 고종석은 내용(문화로서 말글)에 강조점을 찍는다. 고가구를 헌가구로 고쳐야 한다는 게 이오덕의 주장이고, 고가구라는 말은 헌가구라는 말과는 달리 쓰인다고(값비싼 골동품을 연상케 하는) 갈파하는게 고종석 스타일이다. 내가 보기엔 둘다 맞다. 다만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히 써야 할 것이다. 2000.11.18 <이정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