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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2월  6일 목요일 오후 03시 31분 45초
제 목(Title): 정리/ 국어순화주의에 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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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오늘예감 2호(1995. 봄)에 <이오덕의 우리글 쥐어짜기는 정당한가>라는 
타이틀 아래 실렸고, 비평집 "상식으로 상식에 도전하기"(1996. 토마토)에 
재수록한 글입니다. 
각주는 각 문단 아래에 오도록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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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보면 말도 못본다 


8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니거나 또는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해 이른바 
'사회과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들을 접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골방에서 숨을 죽여가며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어야 했던 문서들의 대부분은, 
고작해야 번역이라고 하기조차 낯뜨거울 만큼 난삽한 문장들의 짜깁기였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운동권 사투리'라는 다분히 비아냥이 섞인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엉성한 말투가 횡행하기도 했고, 또한 필연적으로 '대중'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이들에게 그 말버릇은 스스로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리고 '글을 쉽게 쓰자'는 가장 실용적인 요구로부터 거창하게도 '민중'의 
언어라는 심오한 철학(?)까지 담고 있으며 게다가 친절하게도 구체적인 사례를 
세심하게 열거한 '작문지침(?)'이 바로 그곳에 던져졌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의 속삭임'이었고, 아무런 의심도 제기될 수 없는 
'절대선'이었다. 한심한 일이지만, 이 '성서'의 권위에 이의를 표시한다는 것은 
곧바로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대의에 도전하는 '먹물의 현학적 태도' 나아가 
'민중'을 무시하는 '천박한 엘리트주의'를 뜻했다. 

기억에도 새로운 몇 년전의 사건을 새삼 떠올려 보자. 패기만만하게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던 한 연구자는, 그 나름대로 정연하게 제시한 과학적 근거에 
대한 성의있는 반론 대신 오히려 마치 '더불어 토론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예의 '작문지침'으로 자신의 글이 난도질(?)당하는 '친절한 가르침'만을 
되돌려 받았다.* 가능하면 아니 심지어는 가능하지 않더라도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이야기하지 말자는 주장에 대해, '과학'이라는 인류 역사가 이룩한 
고도의 추상능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반론을 들이댄 것 자체가 
무모했으리라. 
* 월간 사회평론 91년 12월호 및 92년 1월호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이 작문지침의 작성자나 그것을 성서인 양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한결같이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인데, 
유감스럽게도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도 또한 그나마 쟁점이라도 될 만한 
구체적인 언어표현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 만큼 정밀한 틀거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학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구체적 현상을 방대하게 분석한 체계에 
추상적인 원론만으로 덤볐으니 변변히 싸움조차 못해보고 패배하는 것이 백번 
당연한 일이다. 
* 이 점은 언어학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연구과정에서 인접 
사회과학과의 유기적 연관에도 천착하지 못했으며(최근 유행이다시피 한 
'담론'이론의 수용과정에서 언어학자들의 이름을 볼 수가 없다), 교육 등 연구 
성과의 대중화에도 초연(?)한 태도로 일관했다(소위 '학교문법'은 이러저러한 
이론들을 정치적(?)으로 절충한 앞뒤도 제대로 안 맞는 짜깁기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밝혀야 할 것은 '신성한' 작문지침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허구라는 점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평생을 교단에 바친 성실한 
교육자의 치밀한 작업이 사실은 전혀 치밀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국어를 배웠지만 단 한번도 한국어를 
과학의 대상으로 바라볼 기회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문지침이 
금과옥조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성실하게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연구의 
성과물까지도 옳으리라고 무의식중에 미루어 판단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본론에 앞서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갈 전제가 있다. 이 작문지침의 작성자 이오덕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하여 성실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특히나 그가 주장하고 몸소 평생을 
실천했던 교육은 무척이나 뜻깊고 존경할 만한 일이다. 또한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왔을 '글을 쉽게 쓰자'는 논지나 '글말보다는 입말을 중심으로 
보는' 언어관, 나아가 '헛된 관념이 아닌 참된 삶에 뿌리박은 민중언어'를 향한 
지향 등은 오히려 더욱 강한 어조로 강조해 두고 싶은 원칙이다. 

이렇게 그의 핵심주장을 다 긍정하고도 할 말이 남아 있는가. 물론 있다.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야말로 본론이다. 전혀 뜻밖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이른바 대항언론을 표방하는 월간지에 고정란으로 장기간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으로만도 벌써 여러 권이 출간된 이오덕의 작문지침은 그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지침을 어김없이 지켜서는 결코 '쉬운 글'을 쓸 
수도, '입말'에 충실할 수도, 나아가 '민중언어'에 이를 수도 없으며, 거꾸로 
그가 주장하는 바를 따르고자 한다면 그 방대한 지침들은 심한 말로 '노인네의 
잔소리'(?)쯤으로 무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어휘론은 많은 긍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입말로 했을 때 뜻이 
드러나지 않을, 다시 말해 한글로 써서는 뜻을 모를 한자어'는 글에서도 쓰지 
말자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 보기를 보면 '입말로 
했더라도 뜻이 드러나며 한글로 써도 이해에 지장이 없는' 한자어까지 
도매금으로 넘기고 있다. 어휘의 의미는 어휘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역동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쯤은 언어연구에서 상식에 속한다. 
그러하기에 스스로도 '관념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말'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 명백한 전제를 잊었는지 고의로 
무시했는지 모든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거의 
신경질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는 '쉽다=단순하다'는 그야말로 단순한 등식이다. 언어행위의 사회적 
기능은 정보의 전달이며, 적어도 '바르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추상적 
가치가 아닌 '쉽다'는 실용적 가치를 말한다면 그 효율성을 문제삼겠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정당하다. 그리고 단순한 대상은 단순하게, 복잡한 
대상은 복잡하게 말하는 것이 표현하기도 이해하기도 쉽다. 단순한 것을 어렵게 
돌려말하는 것은 물론 고쳐야 할 태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것까지 
단순하게 말해야 한다면 그것을 표현하기도 이해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대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며,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쪼개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있다>는 
말이 있는데 굳이 <존재한다>, <위치한다> 같은 '어려운' 한자어를 왜 쓰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맥락에서 이 세 어휘의 뜻이 정확히 같은 대상을 
일컫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나의 어휘가 국적(?)을 불문하고 사회적으로 힘을 얻어 쓰일 때는 반드시 그 
특유의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다. 대상을 단순하게 표현하려는 쓰임새도 있을 수 
있고 좀더 정교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쓰임새도 있다. 어떠한 대상도 가능하면 
단순하게 인식하자는 것은 세계관에 관한 문제이니 그의 '사상의 자유'라 
하더라도 이미 입말에서도 폭넓게 쓰이는 어휘를 '쓸데없는 군더더기'로 
몰아세우는 것은 누가보아도 '참된 삶'과는 거리가 먼 그의 '관념'이다. 
<있다>도 소중하게 지켜가야 할 낱말이지만 <존재한다>, <위치한다> 또한 
<있다>의 어떤 측면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자 할 때 무척이나 쓸모 있는 
낱말들인 것이다. <푸르다> 하나에도 서로 다른 말맛을 가진 낱말이 수없이 
쓰이는 따위의 '풍부한 어휘'는 우리 말의 자랑거리가 아니었던가. 

물론 하필 한자어로 인해 토박이말의 의미영역이나 실제 쓰임새가 좁아지는 
것은 원통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난 한자실력일랑 덮어두고 본다면 
'입말'에서도 버젓이 쓰이고 '한글'로 써도 아무 지장이 없는 이 낱말들의 
어원이 한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쯤에 이르면 '쉬운 말'을 
제대로 가려 쓰려면 한자도 많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거나 적어도 무식한 
민중들은 '어렵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니, 생생한 
'입말'을 살린 민중언어는커녕 한자실력의 자랑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 
* <미명으로>를 <아름다운 이름으로> 또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로 써야 한다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나 과연 <미명>이라는 낱말을 쓰는 사람중에 그것이 
<美名>임을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는 <미명>이 허울좋든 아름답든 
<이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뜻의 영역이 달라진 
것을 어원, 그것도 한자의 어원만을 가지고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 심지어 '순우리말'이라는 말에는 순(純)자가 들어가서 안되고 '토박이말'은 
토(土)자를 연상시키므로 곤란하다고 여기는 극단적 국수주의자들까지도 있는데 
그야말로 '아는 게 병'이다. 

그렇지만 이오덕은 한자어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어렵다', '입말에서 안 쓰인다'고 말할 뿐이다.* 이미 여러해 전에 정년을 
넘기고 은퇴한 '어른'의 경험을 낮보는 것은 젊은 후학으로서 차마 못할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분명히 쓰이는 말을 안 쓰인다고 하니 그가 경험이 짧아 
보지 못했거나 보고도 못본 척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할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물론 그는 여기에 대해서도 그럴듯한 방패막이를 마련해 두고 있다. 
먹물들의 못된 글습관이 입말에까지 잘못 배어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멋 
모르고 끄덕이기 꼭 좋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다가도 웃을 궁색한 
변명이다. 불행한 역사이긴 하지만 못된 글버릇을 가진 먹물이 하나둘이 
아니고, 그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말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건만 하필 어떤 
말은 '난삽하다'고 욕만 실컷 얻어먹고 마는데 어떤 말은 또 입말에까지 
배어들기조차 한단 말인가. 이놈저놈이 하도 많이 써대니 그렇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말은 왜 먹물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데 어떤 말은 그렇게도 
많이 쓰이게 되는가.** 
* 그는 <납득하다>를 <이해하다>, <알아듣다>, <곧이듣다> 등으로 고치라고 
한다. 물론 뒤 세 낱말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는 맥락에 따라서 결정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뒤의 세 낱말이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면 <납득하다> 또한 그렇지는 않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감각의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납득하다>가 
<이해하다>보다 '어렵다'는 객관적 근거를 굳이 찾자면 우습게도 <納得>이 
<理解>보다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한자에서 놓여나자'는 이 주장의 핵심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 게다가 말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주입한다고 해서 널리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한 때 방송에서 그렇게도 목터져라 <문지기>, <모서리차기>를 
떠들었지만 <골키퍼>와 <코너킥>을 대체하지 못했다. 먹물들이 탁상머리에서 
만들어낸 억지 조어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대답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 
그야말로 '억지 조어'라면 배어들 리가 없는 것이다. 

어휘가 대상에 대한 개념의 표현이며, 어휘 의미의 변화는 곧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어휘가 사회적으로 의미가 
공유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건 추상적이건, 쉽건 어렵건 그러한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이고 단순한 어휘만 참된 
개념이고 추상적이고 복잡한 어휘는 헛된 관념일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본질적으로 생산 대중의 활동에 의해서밖에는 생겨날 수 없는 인식의 진보는 늘 
새로운 낱말 또는 이미 있는 낱말의 의미변화가 사회적으로 공유됨으로써 생산 
대중에게 되돌려져야 한다. 동시에 그것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는 활동을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사회에서라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임무이기도 하다. 

먹물에게 말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 책임을 방기하라는 뜻이며, 
심지어 기존 개념의 변화(인식의 진보)를 시도하지 말고 낡은 세계관을 
고수하라는 엄청난 주장이 된다.* 먹물들이 담지한 지식은 민중의 것이 
아니므로 가치가 없다는 논리는 얼핏 가장 민중의 편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소수에 의해 독점된 지식이 본질적으로 민중의 것임을 부인하고 민중의 
소외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인식의 진보, 역사의 진보를 불신하고 낡은 
가치와 질서를 옹호한다. 
* 추상적, 분석적인 낱말이 구체적, 포괄적 낱말에 대하여 현학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또한 공식적 표현이 사적 표현에 대하여 권위적인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동일시하는 등식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현학이나 권위주의는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쉬운 말'을 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쉬운 말'로도 얼마든지 잘난 
척하고 짓누를 수도 있다. 물론 이오덕은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말고 삶을 바꿔야 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관계를 다름아닌 '말'이 매개하고 있다는 전제부터가 '현학'이나 '권위주의'의 
실체를 은폐하는 것은 아닌가. 


문장론으로 들어가 보면 이러한 반동적 역사관이 더욱 잘 드러난다. 물론 
어휘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장론 또한 많은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김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일본책들을 마구잡이로 베껴먹는 통에 도무지 뜻이 
통하지 않는 낱말의 나열이 문장으로 둔갑하는 현실에 대한 통렬한 지적은 
지당하다. 그러나 어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뜻이 통할 뿐 아니라 더욱 정교한 
말맛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까지도 단지 '전에는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투로 몰아세우고 있다. (누구나 대화를 녹음해서 들어보면 알겠지만 
'입말'에서는 완결된 문장을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글말'이 잘 조직된 
문장을 지향하는 것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거리 
때문에 생겨나는 지극히 당연한 언어활동으로서 오히려 뜻을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배려이다. 따라서 문장론에서는 더이상 '입말'에 가까운가는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실 해방 이후 교육 세대에게 우리 옛말을 전공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면, 어떤 
표현이 예전에 우리말에서 쓰이고 있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전공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서양말투이건 일본말투이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표현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에서 가지는 의미작용일 것이다. 이를테면 <-로의>와 같은 
이중조사는 일본말투이니 쓰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성실하게 다듬어 
"얼마나 시원스럽게 읽히는가"라고 제시한 문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시원하게 읽히기는커녕 원래 표현이 가지고 있던 정교한 말맛을 
무시해버려 허전해지기 때문이다.* 
* 같은 보기로 <-적>, <-화>, <-성> 등의 어미를 아예 쓰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그같은 어미를 모조리 떼어내고 고쳐쓴 문장들은 본래 문장의 분석적인 
말맛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직화하다>는 <조직하다>와는 뜻이 
다르며 굳이 말하자면 <조직해가는 일을 하다>일텐데, 이렇게 뜻을 분명히 
하자면 오히려 <조직화하다>가 훨씬 '시원스럽게' 읽힌다. 

그는 그만큼 왜말, 양말에 깊숙이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어떤 표현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필요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표현의 풍부함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엉뚱하게 중독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낱말이 대상에 대한 개념을 
나타낸다면, 문법은 개념과 개념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대상에 대한 
인식이 복잡해질수록 관계에 대한 인식은 정교해진다.* 이를테면 조사를 
두세개씩 겹쳐쓰는 것은 무작정 왜풍을 따른 결과가 아니라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정교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활동의 발로이다. 
* 일본말에서 <-의>에 해당하는 <の>가 자주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인 흉내를 낼 때 <-노>를 자꾸 붙인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예전보다 
<-의>가 자주 쓰이는 것은 일본말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전에는 좀체로 명사로 
쓰이지 않던 낱말을 명사화하여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를 수식하는 
낱말과의 관계도 '우리 문법에 따라' 바뀐 것이다. 그는 왜 본디 명사가 아닌 
말을 굳이 명사로 쓰려 하느냐고 한번 더 반문하겠지만, 이 또한 어미 활용을 
하지 않는 명사일 때 음상과 의미의 결합이 공고해지는 '우리 문법'의 
작용이다.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 말에서 쓰는 말까지도 단지 '일본에서도 
그렇게 쓴다'는 이유로 회피해야 하는가. 우리말 가려쓰자고 한자도 모자라 
일본말까지 배워야 한다는 것인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쉽다=단순하다'의 어처구니없는 등식이 개입하고 있다. 
세상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마도 그는 
정말로 '답답한 문장'과 '시원한 문장' 사이에 존재하는 뜻의 차이를 모를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것을 굳이 복잡하게 표현하여 답답하게 한다고 불평할 
수밖에.) 그러나 지금은 자급자족적인 농경사회가 아니다. 물론 하필 우리말의 
표현이 정교해지기 위해 왜말이나 양말이 스며들어야 하느냐는 항변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그것을 몽땅 쓸어버리자면 역사를 구한말로 
되돌려놓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식의 억지밖에 남는 것이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근대적 인식은 자본주의가 그러했듯이 안에서 
자라나기보다는 밖에서 강제로 이식되었다. 그것은 현실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역사나 또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정치, 
군사, 문화적 압력이 정당한 일인가를 묻는 것과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아니 때로는 외래적 요소에 대한 맹목적 백안시가 오히려 
더욱 치열해야 할 역사적 현실을 향한 직시를 방해하기도 하고, 어설픈 
자기위안으로 대체함으로써 문제의식 자체를 희석시키기도 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더 풍부한 보기를 들어보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오덕의 작문지침의 대부분이 그 자신의 원칙을 배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성실한 노력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왜곡된 언어관과 시대착오적 역사관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 이래로 수십년을 우리 글 다듬기에 바쳐온 
그에게는 다소 억울한 일이겠지만, 왜 이 작문지침이 '지금 여기'에서 새삼 
각광을 받고 있는가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실현가능성도 그다지 
보이지 않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전혀 의미있는 힘을 가지지 않은 공허한 
작문지침에 굳이 고역스러운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뻔히 들여다 보이는 
자가당착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지침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딱한 '사회 
분위기'(?)를 향한 것이다. 

이오덕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구체적 표현이 '우리 말'인가 아닌가이다. 이러한 
사고틀을 무비판적으로 좇아갈 때의 폐해는 사못 심각하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복고주의적 태도이다. 그의 '우리 말'은 
무척이나 편협하며 퇴영적일 뿐 아니라 '민족의 순수성'이라는 허깨비를 씌워 
자본주의화 이전의 농촌사회를 신비적으로 미화한다. 그에게는 기형적 
고도성장으로 피페한 농촌의 현실만 안타깝고, 6백만 농민만 '순수한(?) 
민중'이다. 일제나 미제 기계를 돌리면서 일본인이나 미국인으로부터 기술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부정되고, 1천만 노동자는 외래 기계 문명에 '물든' 
불순하고(?) 가엾은 식민지의 사생아들이다. 그가 주장하는 '우리 말'만을 
'우리 말'이라고 믿는 광신자들에게는 노동자란 (그 언어를 교정함으로써) 
'순화'해야 할 대상일 뿐, 역사 발전의 주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문제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말'이건 그 무엇이건 
언어 기호는 의사소통의 매개일 뿐이다. 그것은 '헛된 관념'이 아닌 '참된 
삶'을 언어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이오덕 자신도 이미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또한 '말'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은 '말 너머에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말'인가 아닌가를 시시콜콜히 따지는 동안 
그 성실한 분석의 방대함에 넋이 나간 시선들은 역설적이게도 '말'에만 머물 뿐 
'말 너머의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철저하게 봉쇄당한다. 심지어 <경제적 
사회구성체>와 같은 말도 '현학적인 먹물이 어거지로 만들어낸 쓸데없이 어려운 
말'이라면 도대체 어떤 개념의 잣대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인가. (그는 
"나는 무식하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식의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못 
배운 사람이 무식하다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김을 받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그러나 무식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가 '말'보다 말을 만들어 내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말'만을 끊임없이 트집잡는 작문지침에만 골몰하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자기 
모순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물며 '참된 삶'은 그만두고라도 
그토록 공들여 온 '말'에 대해서조차도 과학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환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즉 전혀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가상의 '우리 말'을 전제하면서 
이에 합치하지 않는 말은 무조건 배제하고 그렇게 남겨진 것만을 '우리 
말'이라는 전제로 되돌려 놓는데,* '우리 말'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 조사 <-보다>만 우리말이고 부사 <보다>는 일본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미 
폭넓게 자리잡은 그 쓰임을 나무란다. 나아가 이를 반영한 남북한의 사전까지 
싸잡아 왜풍을 따른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현재 쓰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면, 
말의 변화에 보수적인 우리말 사전에까지 버젓이 올라간 표현이 우리말이 
아니라면, 그의 우리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진정 그에게 '교육자적 양심'이 있다면, 이러한 자기 모순과 순환 논리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야말로 '헛된 말장난'으로 그나마 '올바른 언어생활'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일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작문지침에 얽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보다 
훨씬 뒤늦게 '삶'과 '말'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그와는 견주기조차도 민망할 만큼 어린 후학들이 늘 마음에 담아 두고 스스로를 
경계하는 경구를 헌사한다. "말만 보면 말도 못본다!" 

이오덕에 대한 강준만과 변정수의 생각에 대한 반론

/김영진(군산 영광여고 교사)
 
이 글은 월간 인물과 사상 창간준비호에 실린 <이오덕의 국어관에 대한 
변정수의 반론>이라는 제 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반론이 늦어지게 된 것은 우편 
배달 사고로 김 교사――이렇게 호칭을 해도 괜찮은 건지 나중에 김영진 
선생님께서 `유권해석'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께서 창간준비호를 늦게 
받아보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제가 김 교사께서 원래 주신 글의 논점을 벗어난 
답을 드린 것에 대해 김 교사께서 다소 당황스럽게 생각해 반론을 할 것인지 
망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논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저의 무례하고 
교활한(?) 수법을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고 성의 있는 반론을 주신 김 교사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창간준비호에 실린 글을 읽지 못한 독자들께서도 이 글을 
이해하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오덕은 우상이 아니다

제가 교수님 글의 형식을 거론했던 것은 이오덕 선생님에 대한 인물 논쟁이나 
선생의 국어관에 대한 논쟁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좀더 바른 우리 말글을 
쓰자는 뜻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반성문 몇 마디 
써 놓으시고는, 제가 제 글에 이오덕 선생님 이름을 한 번 거론했다는 사실 
하나만을 붙잡고 저한테 이오덕 변명론 정도의 글을 요구하는 노련함을 
보이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제 글의 논지를 분명히 잘못 읽으셨습니다. 아니면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수님의 선의를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구요. 

잘 보셨습니다. 저는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 말 사랑과 국어관을 많이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이' 지지하는 것이지 전적인 지지는 아닙니다. 물론 
변정수씨의 생각에는 `많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서 빌리신 변정수씨의 
권위는 그리 탄탄한 게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오덕 선생님을 `우상'이 되었다고 하신 교수님 말씀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우상 타파'를 주장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오덕 선생님을 우상으로 지목하시고 조건적으로는 
타파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교수님께서는 이오덕 선생님을 우상으로 생각하십니까? 우상은 결코 
긍정적인 뜻을 지닌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교수님께서 자주 쓰시는 
`문화권력'이라는 말로 바꿔 쓰실 용의는 없으신가요? 저는 이오덕 선생님은 
문화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오덕 
선생님은 그리 큰 문화권력은 못 됩니다. 강준만 교수나 이문열씨 같은 
문화권력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이오덕 선생님이 
문화권력으로서 가치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우리 말과 글에 
관해서 문화권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만큼 자주적이지 못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글 바로 쓰기 라는 책이 `바이블'이 되었다구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 책 3권을 보고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 말 사랑을 제대로 읽었거나 옳은 
지적을 삶에 써먹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아닙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이오덕이라는 인물을 강준만이나 이문열처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힘을 믿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서 권력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오덕 선생님도 문화권력 
강준만, 이문열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책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책을 
살갑게 읽는 사람을 저는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강 교수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오덕 선생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강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철퇴를 가한 이문열 씨 같은 사람이 우상이 아니던가요? 우상은 
타파해야 좋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오덕 선생님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이 오롯이 문화권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권력은 많은 사람이 그 권력 뒤에서 떠받쳐 주어야 
가능하니까요. 우리 말글 바로 쓰기를 목구멍이 터져라 떠들어대도 들은 체도 
않는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을 저도 많이 해 봐서 잘 
압니다. 

 

강준만의 독설과 이오덕의 독설은 다른가?

이오덕 선생님과 차분한 논쟁이 어렵다는 말씀은 결코 강 교수님답지 않습니다. 
독설이 심해서요? 자신의 논리만 튼튼하다면 독설이야말로 좋은 논쟁 도구가 
아닙니까? 강 교수님의 글에 독설이 없다면 아마 글이 많이 건조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오덕 선생님이 독설이 심하다고 해서 논쟁하기가 
겁난다면 강 교수님이 논쟁에서 치명타를 입을까 겁내신다고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야에 지식과 논리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독설이 무에 그리 
겁이 나겠습니까? 

국어를 이렇게 쓰자 저렇게 쓰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할 때 독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건 너무 쉽게 말씀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말과 글을 이렇게 쓰자 저렇게 쓰자 하는 글들을 많이 읽어 보았는데, 
정말 독설이 아니고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한자로 
쓰면 한글로 쓰는 것보다 글자를 다섯 배 적게 써도 된다는 따위의 주장에 독설 
없이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한국일보 4월 16일치 <발언대>에 그런 글이 
실렸기에 반박하는 글을 길게 써서 보냈더니 원고지 2장 정도로 줄이고 
내용까지 가위질해서 실어 놓았더군요.)

교수님께서 빌리신 변정수씨의 글도 독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국어를 어떻게 
쓰자고 주장하는 글에 독설이 가능하냐고 하시면서 독설이 가득한 글을 빌려 
교수님도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변정수씨의 글 마지막 독설 부분을 제외하곤 
그 글에 동의한다고 하시는 보호막을 만드시면서 말입니다. 국어 쓰는 일에 
대한 독설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면 차라리 변정수씨의 글 마지막 부분은 빼 
버렸어야지요. 

91년 한 젊은 국어연구자가 자신의 국어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자 이오덕 
선생님이 아주 무서운 독설을 퍼부으셨다고 하셨는데, 그 국어연구자라는 
사람이 혹 고길섶씨가 아닙니까? 그 글에 대한 이오덕 선생님의 반론을 두고 
무서운 독설이라고 하셨다면 그 말씀을 하신 교수님이 저는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닙니다. 자기 글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다시 반론을 
하는 건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제가 보기엔 강 교수님이 쓰시는 반론들에 비하면 이오덕 선생님의 그 글은 독 
기운이 많이 부족한 글이었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그 글은 반론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던 글이었습니다. 물론 이오덕 선생님의 `백성'과 `민중'에 대한 
생각엔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길섶씨의 글은 너무 마구 써 댄 
글이었습니다. 여기서 그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접겠습니다. 독설에 대해 
말하려다 보니 이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게 자랑인가?

저는 안타깝게도 교수님께서 인용하신 오늘예감 에 실렸다는 변정수씨의 글을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용된 글만으로도 그 분의 국어관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인용된 글에 대해 제 생각을 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오덕의 `한글 쥐어짜기'는 정당한가?:말만 보면 말을 못 본다> 제목이 
이렇더군요. 저는 이오덕 선생님의 국어관을 `많이'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이 
독설 가득한 제목을 빌려 제 생각을 이렇게 담겠습니다.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는 한글 쥐어짜기가 아니다:말을 제대로 봐야 말이 보이고 삶이 
보인다"

저도 변정수씨와 마찬가지로 `글을 쉽게 쓰자'는 논지나 `글말보다는 입말을 
중심으로 보는' 언어관, `헛된 관념이 아닌 참된 삶에 뿌리박은 민중 언어'를 
쓰자는 이오덕 선생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또한 "그의 지침을 
어김 없이 지켜서는 결코 `쉬운 글'을 쓸 수도, `입말'에 충실할 수도, 나아가 
`민중 언어'에 이를 수도 없다"는 변정수씨의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변정수씨가 인용한 예나 반론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있다'는 말보다 `존재하다'나 `위치하다'가 알맞을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있다'라고 쓰면 될 것을 많이 배웠다는 사람일수록 유식한 티를 
내려 `존재하다'나 `위치하다'를 즐겨 쓴다는 사실을 변정수씨는 부인하실까요? 
철학 용어로 쓰이는 `존재론' 따위의 말은 당연히 쓸 수밖에 없지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회화해서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상 생활에선 
`존재하다'나 `위치하다'가 그리 많이 쓰이지 않잖습니까? 특히 `위치하다'는 
거북하게 들릴 때가 많습니다. `미소하다'처럼 말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우리 말을 쓰자는 말이 그리 배 아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쉬운 말을 쓰자'를 굳이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자'고 해야 
합니까? 물론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자'가 더 적합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만.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우리 말 `고맙다'를 더 많이 쓰도록 하자고 하면 이것을 
`감사하다'를 아예 쓰지 말자는 주장으로 오해하시지는 않을지……. 

"사실 해방 이후 교육 세대에게 우리 옛말을 전공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면, 어떤 
표현이 예전에 우리말에서 쓰이고 있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전공으로 연구하지 않은 다음에야, 서양말투이건 
일본말투이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표현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에서 가지는 의미 작용일 것이다." 

강 교수님이 인용하신 변정수씨의 글을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참 부끄러운 
말입니다. 이게 어디 지식인, 그것도 국어학을 전공했다는 지식인이 할 
말이랍니까? 모르니까 죄가 없다고요? 그건 아니지요. 모르면 부끄러워하고 
배우려 애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나라 언론을 제대로 읽지 못한 부끄러움을 다독이며 강준만 교수님의 글을 
읽는 제가 그리 잘못은 없겠습니다. 이 글대로라면 저는 언론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언론이 무에 그리 중요한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군요. 이오덕 
선생님은 초등학교 선생이셨지 대학에서 국어학을 전공하신 분도 아닙니다. 
그런 분이 우리 말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어떤 표현이 예전에 우리 말에서 
쓰이고 있었는지' 알려 주면 그랬구나, 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이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일본말에서 온 말, 서양말 번역한 말투 따위는 우리 말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이건 관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국어 전공하는 사람들은 현재 쓰는 말의 의미에만 빠져 있을 뿐, 서양 
말투나 일본 말투를 가려 내는 일에 별 관심을 쏟지 않는 게 사실 아닙니까? 
국어 전공한 사람들 글까지 서양 말투, 일본 말투가 범벅이 되어 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서양 말투나 일본 말투로 오염된 우리 말이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전공으로 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국어학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서슴없이 하는 게 우리 국어가 놓인 
현실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와 `아예'의 차이

변정수씨 말처럼 '조직하다'와 '조직화하다'는 분명히 다르게 쓰입니다. 이들을 
때에 따라 다르게 써야 한다는 변정수씨의 말에 저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오덕 선생님이 `-적', `-화', `-성' 등의 접사를 아예 쓰지 말자고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잘못 인용하셨습니다(인용된 글을 보면, `-적', `-화', 
`-성'을 어미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어미가 아니라 접사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말자고 했지 `아예' 쓰지 말자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말 바로 쓰기 2』 283쪽에 있는 말을 인용해 
놓겠습니다. 

"이 `-적'도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우리가 따라 쓰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우리 말로 글을 쓰려면 이런 말도 아주 깨끗이 없애야 할 터이지만 
워낙 오랫동안 써온 것이라 갑자기 죄다 없앨 수는 없겠지. 다만 글을 쓰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요란스런 일본식 중국글자말 문장의 틀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해서 안 된다."

변정수씨는 우리 말에서 예전보다 `-의'가 자주 쓰이는 게 이오덕 선생이 
지적한 일본말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만, `나의 살던 고향은 ∼' 
하는 노래나 `혈의 누', `귀의 성', `연의 각' 따위에 쓰인 `-의'가 진정 
일본말의 영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명사가 아닌 말을 명사로 쓰는 것이 어미 활용을 하지 않는 명사일 때 음상과 
의미의 결합이 공고해지는 `우리 문법'의 작용이라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용언을 명사화한 다음 `-의'를 붙이고 다음에 오는 명사를 꾸미는 형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음상과 의미가 공고해집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쓰는 게 우리 말다운 표현이라는 겁니까? 여기에 `음상'은 또 뭡니까? 
음상은 여기에 쓰일 개념은 아니잖습니까? 

우리 말 가려쓰자고 한자도 모자라 일본말까지 배워야 하냐고 주장하는 변정수 
씨의 글을 읽으며 말문이 막혔습니다. 우리 말 가려쓰자고 모두가 다 한자와 
일본말을 배우자고 이오덕 선생님이 주장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들 말을 
잘 아는 사람이 많이 공부하여 우리 말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도우면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며 공부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외국말까지 죄다 공부해야 
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저도 국어 순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우리 말을 
살려 쓰려는 노력과 우리 말답게 쓰려는 노력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엔 강 교수님도 변정수씨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오덕 선생님이 갖고 있는 이만큼의 순정을(이보다는 조금 더한 순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왜말이나 양말을 `몽땅 쓸어버리자'고 했다고 하거나 `역사를 
구한말로 되돌려 놓자는 식의 주장'이라고 매도하는 변정수 씨의 글은 정말 
다가서기 어렵습니다. 

 

삶과 말의 관계

변정수씨는 이오덕 선생님의 유일한 관심이 어떤 구체적 표현이 `우리 말'인가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살려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구체적인 우리 말 표현을 통해 우리 말다운 우리 말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어찌 이 일이 복고주의적이란 말로, `민족의 순수성'이라는 허깨비를 
씌워 자본주의화 이전의 농촌 사회를 신비적으로 미화한다는 말로 짓밟힐 수 
있습니까?

"`우리 말'인가 아닌가를 시시콜콜히 따지는 동안 그 성실한 분석에 넋이 나간 
시선들은 역설적이게도 `말'에만 머물 뿐 `말 너머의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철저하게 봉쇄당한다."라고 강 교수님도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인용해 놓으셨겠죠. 강준만 교수가 어떤 인물이나 언론에 대해 시시콜콜히 
따지는 동안 그 성실한 분석에 넋이 나간 시선들은 `인물'이나 `언론'에만 머물 
뿐 `인물이나 언론 너머의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철저하게 봉쇄당한다고 누가 
말했다면 교수님께서는 이 말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저는 이오덕 선생님이나 강준만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자료 수집의 성실성과 
방대함 때문에 더 진지하게 그 글들을 읽었고 믿음이 커졌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 말 씀씀이에 대해 스스로 반성도 많이 하고, 말이 
이루는 우리 현실의 문을 활짝 열고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현실의 말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허위 의식이 가득한 지식인들의 말과 글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강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시시콜콜히' 따지는 일이 대범하지 못한 일인 것처럼 쓴 
글에 저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말'보다 말을 만들어내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말'만을 끊임없이 트집잡는 작문지침에만 골몰하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자기모순은 어떤 논리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정말 어떤 논리로든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정당화되다'는 피동의 
뜻이 두 번 겹쳐 있습니다.) 삶에서 말이 나오지만 말은 또 삶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그 삶을 가꾸기 위해 그 말을 가꾸는 것입니다. 문법보다는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 훨씬 앞서고 중요합니다. 문법은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문법은 다시 그 말과 글을 규정합니다. 우리 삶이 있고 그 삶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법이 있지만, 그 법은 또 우리 삶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문법이나 법을 잘 정돈하고 가꾸는 일이 인간의 삶을 
정돈하고 가꾸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삶과 말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올바른 언어 생활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일을 중지해야 할 것'이란 말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도 올바른 언어 생활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이오덕 선생님에게서 올바른 언어 생활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삶과 방법을 배웠다고 말하면 변정수씨는 제가 이오덕 선생님에게 
현혹되고 기만당했다고 하실까요?

변정수씨가 이오덕 선생님한테 쏘아댄 `교육자적 양심' 어쩌고 `헛된 말장난' 
저쩌고 하는 말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건 아니다고 말하다 
보면 변정수씨가 이오덕 선생님에게 퍼부은 심한 말 이상의 심한 말을 
변정수씨에게 내뱉을 것 같아서입니다. 또한 강 교수님께서도 이 독설 부분에는 
공감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띄어쓰기 잘못이 너무 많다

저는 먼저 앞서 보내 드린 글이 의도했던 바를 다시 한 번 실천하려 합니다. 
교수님 글의 형식을 튼실하게 가꾸시도록 하고자 했던 저의 의도 말입니다. 
내용을 담는 그릇도 중요하니까요. 월간 인물과 사상 창간준비호와 창간호에 
보이는 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외람된 짓임을 잘 알면서도 저의 
선의를 충분히 믿어 주시니 이번에도 용기를 내서 쓰겠습니다. 

독자들의 투고도 편집권은 교수님께서 가지고 있으시니 그런 글들의 맞춤법, 
띄어쓰기 따위의 잘못에 대한 책임도 교수님께 묻겠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창간준비호에 제 글을 옮겨 실으시면서 제 글에 쓰인 
조사와 어미 표기를 잘못해 놓으셨더군요. `-보다', `-과(와)', `-ㄹ수록', 
`-ㄹ망정'으로 써서 보내 드렸는데 `-'이 죄다 `∼'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의존 형태소 표기는 `-'로 합니다. 

이름이나 성에 덧붙는 호칭어나 관직명 따위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띄어 
써야 합니다. 그런데 월간 인물과 사상 창간준비호와 창간호에는 이들 표기가 
많이 잘못되어 있습니다(국립국어연구원이 손질중인 어문 규정 개정 시안에는 
현재 띄어 쓰도록 한 호칭어를 붙여 쓸 수 있도록 한다고 합니다).

`한 변호사'라고 쓰셨다가 `한변호사'라고 쓰시는가 하면, `강 선생님'이라 
쓰셨다가 `강선생님'이라 쓰셨다가 왔다갔다 합니다. `주철환 PD', `제정구 
의원'을 달리 쓸 때는 `주PD', `제의원'이라 붙여 쓰시고는 `김한길 의원'은 
`김 의원'이라 쓰셨더군요. 잘못 쓰신 것을 떠나 일관성조차 없습니다. `김 
선생님, 이 선생님, 추 의원, 변 부장, 박 의원'은 띄어 쓰시고 `조총재, 
김대통령'은 붙여 쓰고 있습니다. 

`불행중 다행이다', `복역중인', `그중 하나를', `물건중의 물건이었습니다', 
`기사 내용중', `교수님중 한 분은', `대선 기간중' 따위로 `중'을 앞말에 
붙여쓰면서도 `피디 중에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따위로 써서 이 또한 
일관된 띄어쓰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쪽이 바르게 쓴 것입니다. 이런 
일관되지 못한 보기들은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과 `그 동안', 
`몇가지'와 `몇 차례'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나라'도 그러하며 
`우리사회'와 `우리 사회'가 또한 그렇습니다. 

수관형사 씀씀이도 아무런 일관성도 없이 쓰였습니다. `한두번인가'와 `한 두 
번'이 같이 나옵니다. 이들은 `한두 번인가', `한두 번'으로 써야 합니다. 
`10여명, 1천여명'은 `10여 명, 1천여 명'으로 써야 합니다. 

`속', `전', `하' 따위는 앞에 명사가 올 때 모두 붙여 쓰셨더군요. `괄호 
속에', `오래전부터', `전제하에'와 같이 말입니다. 이들도 띄어써야 합니다. 

`-ㄹ망정'이란 어미를 쓰면서도 붙여 썼다 띄어 썼다 어지럽습니다. 
`무력할망정', `맹목적일망정', `않을망정' 따위로 제대로 쓰시다가도 `있을 
망정'과 같이 잘못 쓰시기도 했습니다. 

`알 만 하다'는 `알 만하다'로, `양립 할 수 없습니다'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로, `이바지 할 수 있게'는 `이바지할 수 있게'로, `동감 할 수 
있었던'은 `동감할 수 있었던'으로,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로, `부족 할 것입니다'는 `부족할 것입니다'로, `주장 
하기에만'은 `주장하기에만'으로, `연기 할 뻔 했는데'는 `연기할 뻔했는데'로, 
`무엇보다 중요 할 것이다'는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로, `제시 할 수 
있겠다'는 `제시할 수 있겠다'로,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로 각각 고쳐 써야 맞습니다. 이와 같이 `-하다'를 띄어 쓴 잘못은 너무 
많아 하나하나 늘어놓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뒷부분, 뒷발톱'과 같이 붙여써야 할 것을 `뒷 부분, 뒷 발톱'이라고 띄어 써 
놓기도 하셨더군요. `눈엣 가시'도 `눈엣가시'로 써야 합니다. `오랫 만에'라고 
쓰기도 했는데, 혹 이 말이 맞다고 해도 두 말을 잇는 사이시옷을 두고 띄어 쓸 
수 없는 일인데 띄어 쓴 것도 잘못입니다만, 이 말은 `오래간만'의 준말이므로 
`오랜만'으로 써야 합니다. `한번씩'은 `한 번씩'으로 쓰셔야 하며, `아홉 살 
짜리'는 `아홉 살짜리'로 써야 합니다. 

`만큼'과 `대로'는 관형어(용언의 관형사형)의 꾸밈을 받을 때는 의존명사가 
되어 앞말과 띄어 쓰지만, 체언 뒤에 쓰일 때는 조사이므로 앞말에 붙여 써야 
합니다. 그러나 월간 인물과 사상 에서는 이들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선 만큼은', `이것 만큼은', `사실 만큼은', `프로그램 만큼은', `비뚤어진 
시각 만큼은', `그 만큼', `말씀 만큼은', `언론 만큼', `약속 만큼은', 
`세익스피어 만큼이나' 따위에 쓰인 `만큼'은 앞말이 체언이므로 당연히 앞말에 
붙여 써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좋을 만큼'과 같이 바르게 쓰시기도 
했습니다. 이는 `만큼'이란 말을 어떤 환경에서든 무조건 띄어 썼다고밖엔 달리 
볼 수 없습니다. 

`쓰셨던대로', `잡히는대로', `해오시던대로', `설정하신대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따위의 `대로'도 관형어의 꾸밈을 받는 의존명사이므로 당연히 
띄어 써야 하는데 다 붙여 놓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존명사는 꾸미는 말 뒤에서는 띄어 써야 합니다. `별 
생각 없는 정치인인줄 알았던'의 `줄'도 띄어 쓰셔야 하고, `직접 강의를 
들은바 없으면서'의 `바'도 띄어써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 한 바 없었고(`생각 
한'도 붙여써야 합니다)'라고 쓰인 문구도 보입니다. 너무 일관성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될텐데'도 잘못 쓰셨습니다. `텐데(터인데)'의 `터'도 
관형어 `될'의 꾸밈을 받는 말이므로 띄어써야 합니다. `TV를 안 본지가 두어 
달 되어간다.'에서도 `본'의 꾸밈을 받는 `지'도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합니다. 

일관성을 잃은 띄어쓰기 보기를 몇 개 더 들어 보겠습니다. `정치뿐이었을까'와 
`나 혼자 뿐인 것 같다'를 견주어 보십시오. `뿐'이 같은 명사 뒤에 
쓰였으면서도 하나는 띄어 써 있고 하나는 붙여 써 있습니다. 관형어(용언의 
관형사형)의 꾸밈을 받을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하고, 체언 뒤에 쓰일 
때는 접미사이므로 붙여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앞의 두 보기는 모두 붙여 쓰는 
게 옳습니다. 

`전제 할 수밖에'(`전제할 수 밖에'가 맞습니다)라 쓴 경우가 있는가 하면 `왜 
그렇게 할 수 밖에'라고 쓴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의 `밖에'는 조사이므로 앞 
체언에 붙여 써야 합니다. 당연히 `유구무언일 수 밖에', `특성일 수 밖에' 
따위의 글에서도 `밖에'는 붙여 써야죠. `지지자 일 수도 있습니다'(이것도 
`지지자일 수도 있습니다'가 맞습니다)처럼 의존명사 `수'를 바르게 띄어 
썼는가 하면 `비명횡사한 가난한 이웃일 수도 있다'나 `또 다른 전체주의의 
모습일수도 있으니까요'처럼 잘못 쓴 경우도 많이 눈에 뜨입니다. `그런게 
아닌가'와 `지적한 게'를 함께 놓고 살펴보세요. 일관성이 없습니다. 의존명사 
`것'과 조사 `이'가 합쳐진 `게'는 관형어 뒤에서는 당연히 띄어 써야 합니다. 

`겸연쩍어 하실 지도 모르겠네요'와 `있을지도 모른다'의 경우 서로 띄어쓰기가 
다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ㄹ지'는 어미입니다. 그러니 어간에 
붙여써야 합니다. 

조사를 앞말에 붙여쓰지 않은 잘못도 여러 군데서 보았습니다. `중앙일보가 
가로쓰기를 하고 나서 부터는', `하실 때 부터인 것 같습니다'라고 쓰셨는데 
`부터'는 조사이므로 앞말에 붙여 써야 합니다. `통찰력 있는 분석 보다는', 
`그 보다 더 불타는 적개심으로' 따위에 쓰인 `보다'도 역시 조사이므로 앞 
체언에 붙여 써야 하구요. 띄어쓰기 잘못이 너무 많이 보여 모두 다 적기도 
힘이 듭니다. 

 

맞춤법 잘못도 너무 많다

표기를 잘못한 경우도 많이 눈에 뜨입니다. `명예훼손이 될는지도 모르겠다'와 
같이 어미 `-ㄹ는지'를 맞게 잘 쓰시다가도 `동에서 서로 기울런지', `그러한 
태양 아래 한국 사회는 언제까지 놀아날런지' 따위로 틀리게 쓰시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건 결국 또 다른 `김대중 죽이기'는 
아닐른지요'(창간준비호 93쪽)처럼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음 글들을 읽어 
보십시오. 

 

대학 입시를 다섯 번이나 치룬 끝에(창간준비호 33쪽)

추 의원이 그 질의로 인해 얼마나 곤욕을 치뤘을지는(창간준비호 75쪽)

그는 그야말로 법대로만 선거를 치뤘다(창간준비호 81쪽)

10대 후반에 한번 치룬 시험으로(창간준비호 103쪽)

 

위의 보기들에서 밑줄 그은 말들은 잘못 쓰였습니다. `치룬'은 `치른'으로, 
`치뤘을'은 `치렀을'로, `치뤘다'는 `치렀다'로 각각 바꾸어 써야 합니다. 이런 
잘못은 이들의 으뜸꼴(기본형)을 `치루다'로 생각한 탓입니다. `치르다'가 
으뜸꼴입니다.(두 번째 예에서 `치뤘을 지는'은 `치렀을지는'으로 붙여 써야 
합니다. `-을지'가 어미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이 펴내신 책은 시간과 돈이 닿는 데로 사 읽으며'(창간호 106쪽)의 
`데로'는 `대로'가 맞습니다. `한국사회학회의 연구 성과를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좌파적 경향성을 띈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창간호 85쪽)에서 `띈'은 
`띤'으로 써야 맞습니다. `뜨이다'와 `띠다'는 분명히 다르잖습니까? 창간호 
62쪽을 보면 `시민운동 단체가 시민의 문화 생활에 깊숙히 개입해'라는 글이 
보입니다. 여기서도 잘못 쓴 낱말이 눈에 뜨입니다. `깊숙히'가 그것입니다. 
`깊숙이'가 맞습니다. 

`현실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자리엔 전혀 적합치 않다는 것이었다'(창간호 
55쪽)에서 `적합치'는 `적합지'로 써야 합니다. 어간의 끝 음절 `하'가 아주 줄 
적에는 준 대로 적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한글 맞춤법 제40항 붙임 2). 이는 
안울림소리(무성음) 받침 뒤에서 나타납니다. `ㅂ'이 안울림소리이므로 그 뒤에 
오는 `하'는 생략해야 합니다. `그들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뜨거운 설전을 
벌렸다'(창간호 53쪽)는 문장에서는 `벌렸다'가 잘못 쓰였습니다. `벌리다'와 
`벌이다'는 다릅니다. 문맥상 `벌였다'가 맞습니다. 

`서슴치'와 `서슴지' 가운데 어느 게 맞을까요? 참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서슴지 않고 `서슴치'라고 씁니다. `서슴하다'가 으뜸꼴이라면 `서슴치'가 
되겠지만 이것의 으뜸꼴은 `서슴다'입니다. 교수님의 글에서도 이런 잘못이 
보입니다. 창간준비호 79쪽에 `진상 규명 노력을 이적 행위로 몰고 가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고 써 놓으셨습니다. 

`두텁다'는 인정이나 사랑이 깊다는 뜻이고, `두껍다'는 두께가 크다는 뜻을 
지닌 말로 `얇다'의 반대말입니다. 그래서 `두터운 우정'이나 `신임이 
두텁다'와 같이 써야지 `수구 기득권 세력의 층이 너무 두텁고 그들의 힘이 
너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창간준비호 45쪽)와 같이 쓰면 안 됩니다. 층은 
두꺼운 것이지 두터운 것은 아니지요. 다음 글들을 보면 잘못 쓴 말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제발 윤 교수가 걸어나가기를 바랬지만(창간호 52쪽)

시사매거진이나 PD수첩 같은 좋은 프로그램엔 한번씩 출연하셨으면 하는 작은 
바램입니다.(창간호 112쪽)

제 욕심 같아선 인물과 사상이 주간지로 나왔으면 하는 약간 허황한 바램도 
있습니다.(창간호 112쪽)

 

`바랬지만, 바램'이 바로 그것입니다. 용언의 활용형을 쓸 때는 항상 그 용언의 
으뜸꼴을 생각해 보는 게 좋습니다. 이들의 으뜸꼴은 `바래다'가 아니라 
`바라다'이기 때문에 `바랐지만', `바람'과 같이 써야 합니다. `바래다'는 
`볕이나 습기를 받아 빛이 변하다'는 뜻입니다. 

창간호 143쪽에 또 이런 문장이 보입니다. `비판자가 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라는. 여기서 `되야'는 `되어야'로 써야 합니다. 이를 줄이면 
당연히 `돼야'가 됩니다. 창간호 101쪽에도 잘못 쓰인 낱말이 보입니다. 다음 
문장에 쓰인 `전혀'를 `아예'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문장에 쓰인 
`전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것은 선거라는 정치적 고비를 넘기고 나니 굳이 선생님께 통일전선의 연대를 
졸라댈 이유가 전혀 사라져 버린 인민주의자의 (자유주의자에 대한) 오만한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말장난과 말도 안 되는 말

 

창간호 56쪽, 85쪽, 86쪽, 121쪽, 125쪽 등에 쓰인 `및'은 그 글들을 정말 
어색한 글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및'을 빼 버리고 쉼표를 쓰든지 조사를 
적절하게 넣어 쓰면 참 깔끔하게 읽힙니다. 우리가 말할 때 이 따위 낱말을 
어디 씁니까?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글에 많이 나타나던 이 낱말을 이젠 
아이들 글에서마저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창간호 74쪽에는 참 말 같지도 않은 말 하나가 보입니다. `농간에 다름아닐 
것이다'의 `다름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인일수록 이런 말을 즐겨 씁니다. 앞의 말도 `농간이다'나 `농간이라 
하겠다' 정도로 쓰면 참 명쾌하고 깔끔하지 않습니까? 이오덕 선생님도 이런 
낱말은 쓰지 말자고 주장하셨는데, 저는 그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음 글을 읽어 보시겠습니까?

 

이씨의 문학세계가 아닌, 그의 능수능란한 처세술에 관해서는 이 나라에 나를 
따라 올 전문가가 없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창간준비호 55쪽)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씨의 능수능란한 처세술에 관해서는 이 나라에 나를 
따라 올 전문가가 없다'라뇨? 이씨의 능수능란한 처세술에 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 나라에는 없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는데, 좀 이상해지지 
않았습니까?

오타로 보이는 글들도 많이 보입니다. 이런 것들은 지적하지 않겠습니다. 책이 
여러 권 나오다 보면 오타는 많이 줄어들겠죠. 

교수님께서 쓰신 글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체에 거르는 일을 하는데, 
내용을 담는 형식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너줄하게 써 
보았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이 글을 썼으니 큰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오덕 선생이 문화권력으로 우뚝 서는 게 왜 불가능합니까?

김 선생님의 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상하게 
제 마음을 잘 알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김 선생님의 지적을 
통해 많이 배우면서 제대로 된 글을 쓰고 말을 하기 위해선 `부끄러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잘못된 걸 지적해 주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하는 태도를 보이거든요. 제 
주제에 민망합니다만, 제가 남을 가르쳐 주는 입장에서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 
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공부를 하겠습니다. 

김 선생님의 글 가운데 저와 관련된 부분은 변명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김 
선생님은 이오덕 선생님이 문화권력으로 우뚝 서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그 분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는 한 저 
역시 그렇게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저의 그런 뜻은 제 글에 드러나진 
않았습니다만, 저는 그런 문제의식을 제 글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어떤 운동이건 일의 우선 순위와 경중을 가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는 원칙을 지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글쓰기가 
엉망이긴 합니다만, 저는 크게 보아 이오덕 선생님 편입니다. 변정수씨나 
고길섶씨도 같은 편일 겁니다. 애들처럼 편가르기를 해서 좀 민망하게 생각하는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연대'라는 말을 쓰면 느낌이 좀 다를까요?

저 같은 사람도 개탄해 마지 않는 그런 식의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우리 나라에 참 많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런 사람들을 공동의 
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은 너무 근본주의적인 국어 
운동을 하시기 때문에 그 분 앞에선 아주 나쁜 놈이나 조금 나쁜 놈이나 다 
똑같이 나쁜 놈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 분은 실제로 아주 나쁜 놈이나 조금 
나쁜 놈을 구분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주 나쁜 놈들은 그 분을 아예 무시해 버리지만 조금 나쁜 놈들은 그 분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 분을 두려워하는 조금 나쁜 놈입니다. 제가 쓴 
`우상'이니 `바이블'이니 하는 표현은 크게 보아 `우리 편'만을 대상으로 해서 
한 말입니다. 나보다 훨씬 더 나쁜 놈들이 수두룩하게 많은데다 그들은 
콧방귀를 뀌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두려워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독설'도 그렇습니다. 한자로 쓰면 한글로 쓰는 것보다 글자를 다섯 배 적게 
써도 된다는 따위의 주장을 하는 사람에겐 당연히 독설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아예 이오덕 선생님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이오덕 
선생님을 존경하면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 이의 제기를 했는데 독설 비슷한 게 
그 사람을 향해 날아간다면 이건 `내분'이 아니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꼭 독설이 필요하겠느냐 하는 것이지 제가 감히 어찌 독설의 효용 
자체를 부정하겠습니까? 고길섶씨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이오덕 선생님의 
편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이오덕 선생님의 국어관에 대해 부분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언어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언어라는 게 
우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무리 어색하고 
순수하지 못한 말이라도 절대 다수의 대중이 그 말에 이미 익숙해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 말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거니와 포기하는 게 꼭 바람직하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이수열 선생님이 절대 쓰지 말라고 제 칼럼에 빨간 줄을 여러 번 
그은 `입장(立場)'이라는 단어를 포기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영 그 맛이 살지 않더라구요. 

`-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선생님은 이오덕 선생님이 그걸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말자고 했지 `아예' 쓰지 말자고 하지는 않았다고 하시면서 우리말 바로 
쓰기 2 283쪽을 인용하셨습니다만, 우리말 바로 쓰기 3 328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 일부를 여기에 
인용하겠습니다. 

"`-적'이 정말 우리의 적입니다. 그러니 이 `적'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노 선생님처럼 이것이 우리 말을 아주 꼴사납게 만드는 일본말이라고 
깨우쳐 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두 따라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 따라오더라도 그런 사람들 자꾸 걱정할 것 없고 우리만 바로 쓰면 
됩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아니 백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깨끗한 
말을 쓰면 나머지 아흔 아홉 사람이 병든 말을 쓴다는 것이 언제나 나타나게 
되니까 어느 땐가는 바로잡힐 것입니다."

`-적'을 쓰면 어떠냐고 항변을 하면 그건 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가 
아닐까요? 그러나 이오덕 선생님에겐 그런 이의 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건 `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이의 제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이치에 맞지도 않는 온갖 변명을 합니다. 
지금까지 써 놓은 글, 지어 놓은 책을 모두 고치기가 귀찮고, 그런 손해볼 짓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물론 저도 `-적'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이라는 그 편리한 표현도 안 
된다면 그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어떤 경우든 `-적'을 쓰는 
이유가 단지 `손해볼 짓은 못하겠다'는 심뽀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오덕 
선생님은 언어의 주된 목적을 커뮤니케이션으로 보는 게 아니라 민족적 순수성 
보존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엄청나게 잘못된 말이 
아니라면, 아흔 아홉 사람이 쓰는 말은 나머지 한 사람이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로지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한 명의 외로운 선각자가 아흔 
아홉 사람을 상대로 꼭 성전(聖戰)을 치러야 하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는 더이상 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김 선생님과 
변정수씨의 활발한 논쟁을 위해 저는 빠지겠습니다. 아마 8월호에 변정수씨가 
김 선생님의 글에 대해 재반론을 할 것입니다. 제가 그 글을 쓸 때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만, 지금 변정수씨가 다행스럽게도(?) 월간 인물과 사상 
에 합류해 저와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이 지적해 주신 월간 인물과 
사상 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도 앞으로 변정수씨 덕분에 크게 나아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글 바로 쓰기' 이전에 우리 글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먼저 
불러일으켜야 `우리 글 바로 쓰기'도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어야 이오덕 선생님 같은 분도 문화권력으로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저는 그 이전에 두 분이 문화권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취지에서 저는 앞으로 두 분이 비단 이오덕 선생님에 관한 논쟁뿐만 
아니라 우리 국어 전반에 대해 논쟁과 논쟁을 할 게 없으면 `우리 글 바로 
쓰기'에 대해 차분한 대화라도 지속적으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독자들께서도 
국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자주 전개될 두 분의 논쟁과 대화를 지켜봐 
주시고 또 의견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 이 영향을 미쳐 
다른 잡지들에도 국어에 관한 글이 고정적으로 많이 실린다면 그게 바로 
`우리글 바로 쓰기' 운동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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