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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1월  7일 수요일 오후 08시 25분 47초
제 목(Title): 정혜신/ 정일성의 치열한 장인정신 


출처: 신동아 

권노갑의 숙명적 충성주의 정일성의 치열한 장인정신 

‘터널시야’는 다양한 시각을 차단하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를 재촉하여 
모든 것을 자기 필터로 ‘끌어당겨’ 바라보게 한다.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터널시야’의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준다.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정신과에서 심리치료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이코 드라마에서는 ‘역할 
바꾸기(role reverse)’라는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부모와의 갈등이 심각한 
청소년이 드라마 상에서 자신(청소년)에게 하소연하거나 호통치는 부모의 
역할을 맡는 식이다. 한 심리학자는 금연학교에서 ‘역할 바꾸기’ 기법의 
효과를 실험했다. 흡연자에게 흡연으로 인한 폐암 발병 사실을 통보하는 
의사역할을 하게 한다. 실험에 의하면 금연학교에서 이런 역할극을 경험한 
흡연자들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서 금연율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역할극을 경험한 흡연자는 한동안 담배를 피울 때마다 자신이 맡았던 의사의 
역할이 떠올라 ‘담배를 끊어야 할텐데’ 하는 심리적 ‘태도’가 생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스스로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긴장과 불안을 
느끼면서 심리적인 부조화 상태가 되는데 그게 바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장과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태도나 행동 중 하나를 바꿔 한 방향으로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흡연과 폐암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들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페스틴저(Leon Festinger)의 연구결과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두 정보가 입력될 때 우리의 뇌정보시스템에는 
긴장상태가 발생하고, 에너지 소모가 증가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뇌는 두 
정보 사이의 부조화를 어느 쪽으로든 합치시켜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쪽으로 
작동한다. 그건 뇌의 생리적 기능이기도 하다. 

‘자기합리화’란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 그렇다면 ‘자기합리화’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는 가설도 성립된다. 특히 
남자들인 경우에는 더 그렇다. 왜 그런가. 

영국의 한 연구결과는 그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한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남자는 선천적으로 시야(視野)의 각이 여자보다 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시야를 ‘터널시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앞만 보고 달리도록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의 질주를 연상하면 된다. 








남성의 ‘터널시야’ 
‘터널시야’는 다양한 시각을 차단하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를 재촉하여 
모든 것을 자기 필터로 ‘끌어당겨’ 바라보게 한다. 그런 현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터널시야’의 빛과 그림자를 비교적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정감독이 1929년생이고 권 전최고위원이 1930년생이니까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는 조금 다르다. 권노갑 전최고위원이 DJ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해석한다면 정일성 촬영감독은 자신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재해석한다. 

그런 자기만의 필터를 통해 정감독은 ‘만다라’ ‘태백산맥’ ‘서편제’ 
‘춘향뎐’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를 만들어 대종상을 7번이나 
수상한 한국영화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자리잡았으며, 권 전최고위원은 본인이 
인정하든 안하든 국민의 정부 들어 당대 최고의 ‘막후 실세’로 불리운다.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두 
사람의 삶은, ‘자기합리화’라는 삶의 코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일까. 

먼저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 
생략.. 

‘촬영감독’ 정일성 
이번에는 정일성 촬영감독을 살펴보자.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고 제작 스태프의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영화판의 끝자리에 청춘을 담보한 젊은 
스태프들은 바로 그때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보면서 “나도 저 
장면을 찍을 때 저 구석에 있었지”하는 짜릿함 때문에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도 영화현장을 떠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은 성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관객들이 너무 야속할 것이다. 

그런데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본의 아니게(?) 제작 스태프의 자막을 보게 
된다. 영화의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거나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져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게 되는 까닭이다. 바로 그런 
경우에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 중의 하나가 ‘정일성’이다. 

1957년 28세의 나이에 촬영기사로 영화계에 데뷔한 정일성은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국영화사에 ‘의미’가 있는 모든 
영화를 정일성이 찍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반대로 그가 찍은 
대부분의 영화가 ‘한국적 영상’을 담은 문제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올릴 만한 
영화라는 말은 절대 의례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다. 

1950년대 ‘10대의 반항’을 시작으로 ‘화녀’, ‘파계’, ‘바보들의 행진’, 
‘사람의 아들’, ‘만다라’, ‘길소뜸’, ‘황진이’,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그리고 1999년의 ‘춘향뎐’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략적인 영화이력은 곧 엄선된 우리 영화의 목록을 일별하는 듯하다. 









한국영화의 보물 
어떻게 보면 정일성 만큼 ‘끌어당기기’의 대가도 다시 없을 듯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늘 자신의 카메라로 끌어당긴 세상을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스크린에 펼쳐 보였다. 그의 ‘끌어당기기’가 권노갑과 달리 자기합리화로 
비난받지 않는 것이 그가 예술가이어서만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남들이 예술로 인정을 해줘야 예술이지 자기가 예술한다고 생각해 
예술이 되는 건’ 아닐 터다. 특히 그것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대중예술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습관적인 ‘자기합리화’는 인식의 실체를 외면한다. 객관적 사실이나 인식과 
관계없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논리만 
키워 나가면 그뿐이다. 필연적으로 ‘자기합리화’나 ‘터널시야’는 ‘선택적 
사고’와 짝을 이룬다. 내가 보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개인적 취향의 자유와는 조금 다른 문제다. 

정일성은 “요즘 젊은 감독들 영화에 자기 목소리는 없고 어디서 본 듯한 
영상만 난무한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분석한다. 

“요즘 하루에 비디오 20편을 보는 젊은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리모컨을 손에 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치우는 겁니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요.” 

나이든 사람이면 으레 하는 잔소리겠거니 하는 생각을 잠시 거두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해질 것이다. ‘감각’이 어느 직종 
못지않게 요구되는 영화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사람이 아직까지도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인정받는 게 단지 연륜 때문이겠는가. ‘외눈박이 영상시인’이니 
‘영상철학가’니 ‘완벽한 화면을 찾아 구도자의 길에 나선 예술인’ ‘그 
이름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들이 괜히 정일성을 
별칭하는 게 아니다. 

‘감각’의 정당성은 그것이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통해 제자리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확보되는 것이므로 얄팍한 감각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게 그의 철썩같은 
믿음이다. 2년전 한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그는 ‘정일성표 감각론’을 
역설한다. 

“늙으면 감각이 죽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감각이 죽는 게 
아니죠. 용기가 죽는 거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찍는 
일입니다…. 균형의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시기라서인지 1000만관객을 
돌파하는 영화가 곧 등장할 것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대두된다. 그러나 아직도 
30대 중반을 넘긴 사람들은 1년에 1∼2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정도란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일성이란 인물은 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더구나 
촬영기사가 아닌 촬영감독이라는 그의 호칭조차 어쩐지 어색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혹시 1990년대 초반 도저히 6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근사한 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카메라를 들고 등장한 지프 CF를 기억하는가. 그 
사람이 바로 정일성이다.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제작 
스태프들이 거의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정일성은 CF에 출연할 만큼 
이례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 









한국적 영상의 본보기 
정일성은 촬영을 ‘기술’에서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1년 반송장 같은 상태에서 ‘만다라’를 찍을 때 영화현장의 
사람들은 그전까지 ‘촬영기사’라는 용어만 있었던 우리 영화계의 관행을 깨고 
최초로 정일성에게 ‘촬영감독’이란 호칭을 헌사(獻辭)했다. 그의 치열한 
예술혼과 독특한 예술감각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독이 ‘이미지 작가’라면 촬영감독은 ‘표현작가’로 생각하는데,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를 다치지 않으면서 영상언어를 만들어가는 일을 
과학이라고 믿는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 렌즈라는 기계적 논리와 예술의 논리에 
마음을 사로잡혀 영화계에 뛰어든 사람의 말답다. 

40년이 넘도록 카메라를 통한 자신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면서도 독선과 아집 혹은 지나친 끌어당기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당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그의 영화에 여백이 많은 
탓일 것이다. 그래서 정일성의 눈을 통해 새롭게 해석된 세상을 보면서도 
관객들은 자기 나름으로 장면을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만다라’의 주촬영기술은 공간촬영이란다. 
다시 말해 사람을 중심이 아닌 주변에 두어 여백을 최대한 많이 두도록 한 
촬영기법이다. 정일성은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가장 고민하는 것은 
‘인간의 아픔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라 영화를 찍으면서 결단코 인물을 중앙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정일성은 촬영에서 작품해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대본에 없는 
부분까지 생각하면서 촬영에 임해야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며, 
‘해석’과 ‘격’이야말로 예술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영화라고까지 일컬어지던 ‘서편제’에는 청명하고 푸른 하늘이 단 한번도 
화면 가득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분석한 후 전체적으로 흐린 날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문이다. 그는 해석의 고민 없이 억지로 아름답게 
찍으면 달력 그림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며 카메라를 잡을 때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물론 그런 해석에 걸맞은 그림을 잡을 때까지 그가 감내하는 
엄격함과 성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만다라’를 촬영할 때는 불과 몇 초간의 눈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눈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안성기, 전무송 등 일류스타들을 며칠이고 붙들어 두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공눈은 티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일단 
촬영장소가 결정되면 오전, 정오, 오후 세 차례씩 가본다고 한다. 오전과 
오후의 광선이 다르며 일몰 때 느낌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일성은 일관되게 ‘한국적 영상’의 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요즘 정일성은 조선 말기의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이란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 산수화엔 자기 땅에 대한 
화가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나도 영화를 그렇게 찍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필자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정일성이 펼쳐보이는 그림에는 늘 
‘한국적 느낌’이 묻어나온다. 









목숨을 걸고 찍는다 
‘서편제’ 촬영 당시 정일성은 임권택 감독과 함께 원작에서 명시한 장소와 
우리 소리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 배경을 찾기 위해 2400km 이상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헌팅을 했다고 한다. ‘서편제’를 보고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특히 전남 완도군 청산도 
당재언덕에서 촬영한 ‘진도아리랑’ 장면은 5분40초가 단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졌는데, 영화속 감동과 함께 우리 땅에 대한 정일성의 애정어린 시선을 
그대로 실감할 수 있는 한국영화의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지난해 ‘춘향뎐’을 본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는 “이전의 어떤 한국영화도 
이만큼 총체적으로 한국인의 미감을 극대화해서 보여준 사례가 없었던 것 
같다”며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여기에도 전통미에 어울리는 영상을 위해 
3중필터를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멜로톤의 색조를 만들어낸 정일성의 
기술적 안목과 우리 산하에 대한 그의 뜨거운 애정이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정일성이 유달리 한국적 영상을 고집하는 것은 일본에서 태어나 17세가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온 그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귀국 
후에야 그는 자신이 한국말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두려워 6개월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ㄱ, ㄴ, ㄷ 부터 
시작해 역사, 지리 등을 배워 나갔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시간만 나면 한국사 
책을 읽는데 벌써 7번째 정독하고 있단다. 예전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한국사를 읽었지만 지금은 그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연인 정일성은 육체적으로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1977년 촬영지로 
향하던 중 자동차 전복사고가 일어났는데 특별한 외상(外傷)이 없었던 정일성은 
그 길로 속초에 내려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4시간이나 촬영을 강행했다. 그 
바람에 교통사고로 상한 내장이 썩어 대장과 소장을 15cm, 위를 3분의 1이나 
잘라냈다. 그후 정일성은 다시 촬영현장에 뛰어들었는데 3년이 지난 1980년에는 
직장암 선고를 받고 11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당시 가족들이 장례준비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수술실에 들어가던 정일성의 후일담을 듣고 있노라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니 다시는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했어요. 
그런데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병원 장면을 찍을 때 이런 심리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회한도 스쳤습니다.” 









外地에서 돌아온 거장 
혹시 정일성이 촬영한 1980년 이후의 영화 중에 병원 장면이 나온다면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수술 후에도 체중이 30kg이나 빠지는 등 심각한 후유증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수면제를 사모으던 정일성은 수술 한달 후 배에 붕대를 두르고 
임권택 감독을 따라 ‘만다라’의 촬영현장으로 나간다. ‘임감독이 송장하고 
영화를 찍는다’고 수군거릴 만큼 그의 몸은 허약했지만 그는 영화를 찍으며 
건강을 회복해 나가는 기적을 보여준다. 지난 1986년 정일성은 ‘만다라’를 
가리켜 자신의 촬영인생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내가 나를 
테스트한 작품이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작품이었으며, 제2의 인생의 첫 
출발작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직장에서 항문까지를 잘라낸 이때의 수술 이후 그는 배꼽 아래 
인공배변기를 지니고 다니게 되었지만, 영화적으로는 이때를 기점으로 
정일성만의 독특한 시각이 확고해진 듯하다. 그의 독특한 시각은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이 적성이 맞았다는 공대 출신답게 일방적인 ‘끌어당기기’가 
아니라 엄밀한 객관성과 끝없는 열정을 전제로 한다. 

1960년대 초반 극장에 올라가는 거의 모든 영화를 보며 촬영기법을 기록하고 
헌책방을 뒤져 영화관련 책자를 닥치는대로 읽으며 영화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절의 일이다. 정일성은 한 영화재단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서 
‘아키몽’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스태프로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소감은 이렇다. 

“작품에 대한 철저한 몰입 등 질식할 정도로 완벽한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생 동안 나를 
지배했다고 하기보다는 탄탄한 기초가 됐던 것같다.” 

탐욕이라고 할 만큼 영화공부에 몰두하던 시절이라 자칫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거장에 함몰되어 ‘터널시야’에 사로잡힐만도 한데 정일성은 단지 그것을 
자신의 베이스캠프로만 이용한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정일성의 시각은 독특한 
것일 게다. 

결혼 직후인 1960년대 중반 정일성은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서 4년 
동안 카메라를 놓은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영화계는 ‘중국무협’ 영화를 그대로 베껴 극장에 올렸다. 
파렴치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카메라를 들면 그같은 영화를 찍을까 
두려웠다”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자연인 정일성보다 촬영감독 정일성으로서 작품을 
통해 후배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영상을 남기고 싶다’는 소망을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영화현장에서는 못말리는 고집쟁이로 통하지만, 될 수 있으면 
카메라에서는 자신의 고집도 덜어내고 싶다는 이 만년 청년작가의 영상철학을 
들으면서 얘기를 끝맺자. 

“영화를 통해 ‘나’를 발견했듯이 내가 만든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삶을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래서 항상 대상을 찍기보다는 그 마음을 
찍으려고 노력합니다”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찍는다 
모든 사람은 자기매력의 책임자라고 했다. 필자는 이 매력적인 사내가 가장 
오랫동안 촬영현장을 지킨 촬영감독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외눈박이 영상시인’이라는 별호처럼 말 
그대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우리네 마음을 찍어, 문득 졸음을 깨우는 
죽비처럼 무뎌진 일상의 삶을 일깨워 주기 바란다. 아주 오랫동안.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말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커진다. 자기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하는 상대는 ‘자기자신’인 것같다. 일단 한번 마음먹으면 모든 게 
일사천리다. 

변절은 적응으로, 뇌물은 수수료로, 욕심은 희망으로, 비겁은 신중함으로 
둔갑한다. ‘사랑이 지나치면 폭력’이라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폭력도 
사랑일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의 또다른 표현이다. 

‘인지부조화’ 상태가 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심리적 긴장과 불안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행동과 태도를 일치시키고 싶어진다. 
그러나 혹시 ‘인지부조화’ 현상이란 과부하를 방지하여 더 큰 누전사고를 
예방하는 두꺼비집의 퓨즈 같은 것이 아닐까. 만장일치를 위험한 의사결정으로 
간주하여 부결 처리하는 어느 부족의 관습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섣부른 ‘자기합리화’를 경계하자는 말인데 이 또한 필자의 ‘끌어당기기’식 
해석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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