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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1월  7일 수요일 오후 08시 33분 42초
제 목(Title): Re: 정혜신/ 정일성의 치열한 장인정신 


% 윗글 생략된 부분입니다. 
별로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서 
제하려고 했는데, 글이 짜투리가 되길래 
따로 퍼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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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김대중 정부에서 ‘권노갑’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을 일컫는 고유명사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권노갑은 흔히 ‘DJ의 움직이는 심경 지도’, ‘DJ 본인과 
똑같은 무게의 대리인’, ‘DJ의 분신’, 부통령이라는 뜻의 
‘권부(權副)’등으로 불릴 만큼 최고권력자 DJ와의 관계가 유별난 사람이다.

권노갑이 DJ를 처음 만난 건 두 사람이 목포공립상업학교 재학중이었던 
194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이다. 정치적 선후배이자 사제간의 관계를 
맺게된 건 DJ가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한 1961년이니 정확하게 40년 
전이다. 함께 한 세월의 무게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는 주위 사람을 
압도할 만하다. 한 기자는 부부간에도 가끔씩 다투고 화해하는 법인데, 40여 
년을 함께 하면서 이들이 다투거나 사이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듣지 
못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연구대상이 될 만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 
연구의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얻기 위해서는 DJ보다 권노갑 쪽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DJ만큼 똑똑하고 존경받는 사람은 또 있을 
수 있지만 권노갑처럼 ‘DNA적’으로 DJ를 추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동지 김대중   
 권노갑은 자신을 ‘김대중 신도’라고 말한다. 나이는 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DJ는 자신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아버지이자, 형님이자, 스승이었고, 
자신은 그런 DJ란 인물의 그늘 밑에서 그를 닮으려 노력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주님이 DJ에게 베푸셨다는 은총을 자신도 받고 싶은 생각에 교리를 
배우고, 숨도 DJ가 쉬라고 하니까 쉬며, DJ가 찾으면 비행기에서도 뛰어내릴 
사람, 그게 바로 권노갑이다. 비아냥거리자고 확인도 안된(?) 뜬소문을 나열한 
게 아니고 권노갑이 주위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자신에 대한 평가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권노갑의 ‘묘비명 신조’는 그런 인식과 평가의 
집대성이다.

“내가 죽거든 다른 것은 필요없다.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는 이 한마디만 
비석에 써달라.”

권노갑은 자신이 정치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DJ를 일편단심으로 모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DJ나 권노갑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들의 권위주의적 관계나 맹목적 추종을 
험담할 좋은 소재일 수도 있지만, 권노갑이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는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 반론조차 예상못할 만큼 어두컴컴한 
‘터널시야’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권노갑은 “세간에서는 내 생각과 
태도에 대해 ‘종속적 인생’ 또는 ‘맹목적 충성’이라고 비판하지만, 나를 
포함한 소위 동교동 가신들도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고, 누구 못지않게 냉철한 
이성을 가졌으며, 권위주의를 싫어하고 못 견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특정인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DJ에 대한 충성은 “옳은 것에의 복종”이며 “실증적 진실에 대한 
복종”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긴 하지만 
지난 40년 동안 권노갑이 보여준 초지일관한 충성심과 그림자 보좌는 진지하게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음지의 家臣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권노갑은 단지 DJ와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 
하나로 모진 시련을 겪은 사람이다. 박정희정권 이후 2년여의 감옥생활을 했고 
1985년까지 형사들의 미행에 시달렸으며, 한때는 구청에서 주는 라면과 쌀을 
얻어다가 끼니를 해결할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1980년 
5·17사건으로 연행되었을 때 지독한 물고문으로 극심한 위통을 호소하자 
‘인간백정들’은 진통제를 강제로 먹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계속했단다.

권노갑에 관한 자료들을 찬찬히 살피다보면 ‘만일 내가 DJ였다면’ 대통령이 
된 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권노갑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권노갑은 DJ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떠나자 DJ가 1963년에 만든 ‘한국내외문제연구회(내외연)’를 부활하여 
결과적으로 DJ가 정계에 복귀할 발판을 구축해 놓았다. 

그런 와중에 권노갑은 1993년 2월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례 하나를 남긴다. DJ의 장남 김홍일씨에게 지역구를 넘겨준 것이다. 당시 한 
칼럼니스트는 ‘권노갑 미담’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이 모시던 지도자가 은퇴하자, 그 지도자가 일선에서 차마 못했던 2세의 
정계진출을 터주기 위해 자기의 자리를 버렸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얘기다.”

일생을 음지의 가신처럼 지내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59세)에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지역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노갑의 말처럼 지역구란 정치인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영양을 
공급하는 일종의 모태가 아니던가. 김홍일 의원이 지금까지도 권노갑을 가리켜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분”이라고 말하는 게 빈 말이 아니지 싶다.

그런데 문제는 DJ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발생한다. 권노갑이 말 그대로 
권부(權副)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권노갑 본인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만큼 억울한 일일테고,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펄펄 뛰는 
권노갑이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실상 한 잡지의 기사처럼 현정권 들어 권노갑이 맡은 당직은 1999년 2월의 당 
고문직과 지난해 8·30 전당대회 당시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된 것이 전부다. 
총선조차 출마하지 않아 금배지도 달지 못했고, 모든 당직에서 물러난 지금 
그는 민주당 평당원 중 한 명일 뿐이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권노갑과 그의 
측근들은 ‘비선라인’의 존재와 ‘궐밖 대신’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항상 ‘인민재판식’으로 정국타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강변한다.

첫 출발부터 정치가였던 사람에게 민주화 ‘운동가’에게나 적합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무리한 요구를 하자는 게 아니다. 정치가의 제1목표는 정권을 
잡아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원대한 꿈을 펼쳐 보이는 일일 것이다. 권노갑이 
그토록 존경하고 숭앙하는 DJ는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앞서 살펴본 권노갑의 
전력을 감안하면 당연히 권노갑의 위상도 그에 걸맞게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청와대에 세배도 다녀올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권노갑은 필요에 의해 자신을 재야인사 DJ, 야당총재 DJ의 최측근 정도로 
규정하는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호감을 주는 인간이 되자”   
 암묵적인 ‘비공식 라인’이라는 그의 별칭처럼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형적인 권력 행사도 구설수에 오른다. 대선을 3개월 앞둔 1997년 9월, 
권노갑은 동교동의 맏형으로서 만일 DJ가 집권하더라도 가신들은 모든 임명직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선언에 참여한다. 한때는 족쇄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권노갑은 그 선언을 자신에 대한 공격을 막는 좋은 방패로 활용하고 있다. 
‘막후 실세’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선언을 들먹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도대체 임명직 진출 포기선언의 참뜻이 무엇인가.

실상 DJ의 그늘이 워낙 커서 그렇지 권노갑은 단지 DJ의 비서출신 이상이다. 
그만큼 독자적이고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는 말이다. 권노갑의 힘은 40년간 DJ의 
오른팔로 정치의 핵심인 ‘돈과 조직’ 양쪽을 모두 관리하면서 축적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리’를 배정받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고, 1999년 3월 한 시사잡지는 “현역의원의 80% 이상이 
지난 총선에서 권고문을 통해 공천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의 당내 위상도 위상이려니와, 돈이 없는 당직자들에게 셋방을 
마련해 주고, 당직자 자녀들에게 학비를 보조해 주는 음덕 등으로 20∼30년간 
쌓아온 끈끈한 인간관계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권노갑은 젊은 시절부터 “남에게 호감을 주는 인간이 되자”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원래부터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에 좀이 쑤시는 사람이란다. 
지역구였던 목포나 당내에서는 권노갑의 호칭을 부르는 사람보다 그냥 ‘노가비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심지어 권노갑이 노씨인지 아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 권노갑의 ‘마당발적’ 친화력과 
인명백과사전이라고 불릴 만큼 천재적인 기억력이 보태지면 ‘궐밖 실세’가 
안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2000년 4월, 권노갑이 상임고문에 임명된 직후 그의 한 핵심측근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고 말해 권노갑의 파워를 
짐작하게 했다. 덧붙여 그 핵심측근의 다음과 같은 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권고문은 한시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권고문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일 
것이다.”

당연히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다. 1998년 말 한보사건의 여파로 
외유를 떠난 지 4개월만에 권노갑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현역의원 30명을 
포함해 환영인파와 취재진 300여 명이 몰려 30m도 안되는 길을 빠져나오는 데 
15분이 넘게 걸렸다. 권노갑 본인은 자신 앞에 있는 밥그릇에만 몰두하지 
않아서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막강파워와 관련된 해프닝은 계속된다. 1999년 3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과정에 권노갑이 등록하자 공기업대표, 대기업 간부, 개인사업가에 
이르기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다투어 지원하여 결국 정원을 20명 더 늘리고도 
막판에는 지원자를 선별하기까지 했단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그런 
‘힘쏠림’ 현상이 권노갑의 개인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권고문(정치권에서는 보통 그렇게 부른다)은 성격이 모질지 못하다. 그래서 
누구든 찾아오면 내치지 못하고 다 만나준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더욱이 인사개입이나 당무전횡 같은 일을 권고문이 즐긴 
측면이 있다. 일종의 과시욕이라고 할까,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같다.”


   
   


   
  
   
 권노갑을 중심으로 도는 권력   
 그가 한보사건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는 구치소 면회실, 구속집행정지로 병상에 
있을 때는 병실, 사면복권된 후에는 그가 있는 곳이 바로 당의 중심이고 
정치현장이었다.

지난해 초 공천작업이 막바지에 오른 민주당사에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이 권노갑 고문을 찾아왔다. 그 인사는 무려 7시간이나 방 앞에서 권노갑을 
기다렸지만,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낙담한 채 돌아갔다. 당시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정말 권노갑이 세기는 센 모양”이라고 
말했다.

‘일오회’라는 모임이 있다. 15대 국회의원 가운데 권노갑이 ‘저승사자’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출마포기를 권유했던 사람들의 모임으로 18명 가량이 
소속되어 있는데, 일오회 회원 중 상당수는 총선 후 권노갑의 추천으로 
정부산하단체 임원으로 임명되었다.

사정이 그런데도 권노갑과 그 측근들의 ‘자기합리화’ 혹은 ‘터널시야’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삭탈관직 당하고 홀로 서 있는 분(권노갑)을 괴롭히지 
말라”며 울분을 토하거나 “1주일에 두어 번 당에 나오는 것밖에 없는데 
정국타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항변한다. 또 지난해 말 권노갑이 
최고위원직을 사퇴하자 청와대 고위인사는 “형님이 또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6월 민주당 소장파들이 정풍운동·쇄신의 대상으로 권노갑과 그 측근들을 
정조준하자 권노갑은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소장파에게 비난을 받을 이유가 무엇인가. 인사에 개입한다, 당무에 
관여한다고 말하는데, 추상적으로 얘기할 게 아니라 잘못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해야 할 게 아닌가. 정말 잘못되었다면 내가 
고치고….”

제3자의 처지에서는 파워가 막강해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여당내의 파워게임이라는 시각을 잠시 거두고 동교동계에 속하는 민주당 한화갑 
최고위원의 두 가지 발언을 들어보자.

지난해 8·30 최고위원 경선때 한최고위원은 권노갑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공개거론하며 막후에서 여타 후보들을 집중지원한 데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으며, 권노갑의 최고위원 사퇴가 불거진 지난 연말에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데 대해 “천부당 만부당하다. 권 전최고위원은 누가 뭐래도 
제2인자”라고 권노갑의 ‘힘’을 확인해 주었다.


   
   


   
  
   
 同苦는 했으되 同樂은 없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권노갑 본인이 자신의 힘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2001년 3월 그가 마포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을 때 현역장관과 
국회의원을 포함해 300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다. 기자들이 당고문 추대설의 
진위를 확인하면서 호칭에 관한 질문을 하자 ‘돌아온 권노갑’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권노갑이라면 대한민국이 다 아는데 직함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그냥 
권노갑으로 불러달라.”

그렇다면 억울해할 것도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민주당 평당원에 불과한 
‘권노갑’에게 딴죽을 거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지난번 당쇄신 운동 중에 
권노갑의 한 측근은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을 향해 “우리가 감옥에 가고 민주화 
투쟁을 할 때 당신들은 도대체 뭘 했길래 이제 와서 우리를 개혁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절대로 남의 집안 싸움에 어느 한쪽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에 대한 추미애 의원의 대답은 의미있게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국민에게까지 헌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 정권은 서민들의 눈물과 쌈짓돈으로 만들어진 정권이다.”

권노갑은 과거에 “김대중이라는 지도자를 도와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의 말을 믿는다. 또한 권노갑은 
지금도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권노갑이 편안함과 
익숙함을 빌미로 행동은 바꾸지 않으면서 논리만 키워나가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동교동의 선생님이 아니라 
전국민의 대통령이 되도록 편안하게 해 드리고자’하는 권노갑의 꿈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김대중정권에 대해서 비교적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정권교체가 DJ의 대통령직 취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하며,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국민의 정부가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한다. DJ가 대통령이 된 직후에 
‘동고(同苦)는 했으되 동락(同樂)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는 권노갑의 말이 
새삼스럽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합리화’의 덫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92년 대선에서 DJ가 패하자 권노갑은 투표 직전까지도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주관적인 환상에 들떠 있었던 게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들이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갖게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그가 속한 조직의 객관적 확신이란 것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사고’에 의한 자기합리화적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당시 경호책임자가 했던 
‘시선경호’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때 대부분의 경호원들은 차를 타려는 
레이건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서 저격범을 보지 못했는데, 진짜로 완벽한 
경호는 경호대상자가 아니라 그 주변을 철저하게 살피는 ‘시선경호’가 되어야 
한단다.

평생을 DJ의 분신으로 살아온 권노갑에게도 ‘시선경호’의 교훈은 유효하다. 
DJ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돕고 싶다면 DJ에게만 향한 ‘터널시야’를 
국민의 마음쪽으로 돌려야 한다는, 상투적이지만 더없이 절실한 고언(苦言)을 
던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노갑의 학창시절 얘기를 들으면서 얘기를 끝맺자. 당시 
권노갑은 만능 운동선수였는데 특히 유도와 복싱은 학교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강했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는 권노갑의 말이다.

“나는 권투선수로서 내 주먹의 강도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는 절대로 주먹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주먹이 세면서도 내가 이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하급생들이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권노갑에게 권하노니 부디 그런 
정신을 잊지 말기 바란다. 권투선수의 강펀치는 사각의 링 안에서 쓰여질 때만 
빛을 발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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