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obbes (& calvin) 날 짜 (Date): 1996년03월12일(화) 19시59분00초 KST 제 목(Title): [번역] 유고사태의 역사-(2) (그럼 계속합니다.) 반면, 유고는 연합군들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격렬하고, 제지할수 없는 레지스땅스 (저항)운동의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독일군과 싸우기보다, 그들은 서로를 제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 저항군은 두개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뛰어나 지휘관인 티토에 의해 지휘된 공산 게릴라였고, 다른 하나는 왕당파인 체트닉(Chetnik)이었다. 공산 게릴라는 혁명을 수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큼 다가온 연합군과 소련군의 진주 전에 정적이 될수 있는 체트닉과 반대세력을 죽이는데 온 힘을 다했고, 마침내는 체트닉보다 더 우수한 조직력으로 연합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티토 치하의 유고슬라비아 잠재적인 정적을 모두다 제거한 티토는 2차대전이후 유고의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전후의 몇년을 그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는데 보냈다. 티토의 비밀경찰 (O.Z.N.)은 동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기관이 되었다. 많은 세월을 공산주의자로써 예전의 유고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보낸 티토는 신생 유고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즉, 중앙집권주의-지방분권주의가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여러방법으로 막았다. 첫째로 티토는 세르비아를 여러 주와 공화국으로 나누어 크로아티아보다 크지도 않고 지배적인 세력으로도 역할을 할수 없어 크로아티아인의 오랜 불안인 중앙집권제에의 불안을 잠재웠다. 인종불화는 불법화 되었다. 둘째로, 그는 서방뿐만 아니라 유고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여러 전설을 만들어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그리고 다른 발칸민족이 처음으로 애국심을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가질수 있게 하였다. 그 전설중에 : 공산 게릴라가 독일군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티토가 스탈린에게 1948년 유고에서 손을 떼라고 말했고 그로인해 철의 장막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유고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길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사실은 공산게릴라는 체트닉을 죽이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소련군이 사실상 독일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스탈린이 유고를 공산권에서 몰아냈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방은 [용감한 유고를 칭찬하고 원조를 하고 추켜세웠다. 얼마안되서 소련은 헝가리와는 달리 유고는 탱크로 깔아뭉갤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티토의 [제3세계] 경제체제는 소련의 명령경제의 비효율성과 미국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주목하고 만들어졌다. 티토는 나라나 주인이 간섭하지 않는 [자기경영]을 창안하여 노동자 스스로 경영하도록 했다. 이것은 동서양측의 주목을 받았고, 열렬한 서방의 사회주의자를 몰려들게 했고, 1980년대 경제파탄의 시초가 되었다. 1950년대 유고를 통합한 티토는 아주 위험한 게임을 하게 되었다. 다른 동유럽 국가는 비밀경찰을 이용해 그들의 인종적 정적들을 감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2~3개의 다른 민족을 상대하면 되었지만 유고는 6개 이상이었다. 그리하여 유고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국가의 국가가 된꼴이었다. 티토는 한 민족이 우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자신의 정책으로 베오그라드에서 그의 힘을 마음대로 펼수 없었다. 60년대부터 경제력이 점점 각 공화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도박이었다. 너무 많은 힘을 각 공화국에 주면 유고슬라비아는 분열될 것이고, 너무 민족주의를 강하게 누르면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단하나의 적인 티토와 그의당에 대해 함께 궐기할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인이 언제나 선봉이었다. 1971년 일련의 학생시위가(Maspok)운동으로 독립 권리에 대한 씨앗을 잉태시켰다. 그러나 시위대는 대량 구속과 투옥의 대상이 되었고 크로아티아 국기는 금지되었다.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정부와 경찰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나 이들이 티토추종자들인지 또는 인종정책이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이것은 세르비아의 광신적 애국주의로 보였다. 20년후 이러한 분노와 적대감정은 새로운 크로아티아가 전쟁에 뛰어들기 쉽게 만들었다. 1980년까지 그들은 서방의 원조로 [자기경영]의 실패를 막고 상당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그글 지도자 티토의 분산주의 정책은 8개의 경제구역을 만드는 큰 실책을 범했다. 각 공화국은 서로 교역하지 않았으며 이들사이를 조정할 어떤 기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8개의 다른 철도망과 전력원과 우편제도가 있었고 외국인들은 [유고]가 한나라인지 의심스러워 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발전했지만 다른 공화국을 [연방 세금]으로 먹여살리는데 달가와 하지 않았다. 1980년 경제 불황이 닥쳐왔을때 티토가 죽었다. 모든 공화국이 중앙 집권적인 체제만이 경제를 살릴수 있다는데 동의했지만, 어떤 중앙체제를 도입할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티토의 분산정책으로 모든 공화국을 묶는것은 불가능했다.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들은 사유화를 원했지만 세르비아인은 이 조치들을 시행하면 그들의 비효율적인 공장들이 문을 닫고 실업사태가 벌어질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1985년 중반까지 당은 경제문제로 인해 분열되었다. 100%의 인플레이션과 15%의 실업, 성장률은 1%로 둔화하고 파업이 확산되었다. 많은 당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이 도사렸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 가고,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여전히 살아가고, 우리는 산다는게 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 고대 로마 격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