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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6년02월09일(금) 16시48분28초 KST
제 목(Title): 독소전의 절정, 쿠르스크 전투 (12)


 6. 독일군의 집결 전력

 작전은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이미 만슈타인이 주장한 5월 중순은 지난지 한참 
되었건만 도대체 작전 명령이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쿠르스크 돌출부
남북에는 사상 유례없는 독일군의 전력이 집결 중이었다. 

 돌출부 북쪽의 중부집단군 지구에서는 발터 모델의 제 9 군이 버티고 있었고 이
제 9 군에는 3개 기갑군단과 2개 보병군단이 배속되어 있었고, 돌출부 남쪽의
남부집단군 지구 제 4 기갑군에는 2개 기갑군단과 1개 보병군단, 켐프 분견군에는
1개 기갑군단과 2개 보병군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결국 제 9 군 휘하에는 총 12개 
보병사단과 7개의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이, 제 4 기갑군 휘하에는 4개 보병사단,
6개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이, 켐프 분견군 휘하에는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이 배치, 총 전력은 40개 사단에 육박하였다. 게다가 기갑 및 기갑
척탄병 사단이 무려 16개 사단, 독립 전차여단이 3개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기갑부대의 집결인 셈이었다. 

 여기에 배속된 전차의 수량도 가히 대단한 것으로 총 2700대의 전차가 집결되었다.
불과 2년전, 1941년 바바롯사 작전 개시 무렵에 대소전선 1500km 전면에 총 3332대의
전차가 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 100km 남짓한 전선에 2700대의 전차 배치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전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가용했던 전차전력의 총 63%에
이르렀다. 이 전차들 중 1850여대의 전차와 533대의 돌격포가 각 기갑사단들에 
배속되었고 따로 200여대의 전차들이 독립 대대 및 독립 여단으로 편성되어 각
사단들과 함께 작전을 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독일군 편제는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었는데 가장 큰 요인은
보병사단의 인원부족이었다. 앞서 기술한대로 1개 보병사단에 배속된 보병대대가
9개에서 6개로 줄었기 때문에 1943년의 1개 보병사단 구성원은 총 12772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39년 편제에서는 1개 보병사단이 17734명이었다) 결국 따라서 
기갑사단의 작전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본디 보병부대와 전차부대의 긴밀한 협동이
대단히 중요했으나 보병부대의 부족 때문에 보병의 지속적 투입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기갑부대의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갑사단 편제도 1943년의 편제로는 2~3개 전차대대 -- 전차 약 150~200대를 
장비하고 있었다 -- 로 구성된 1개 전차연대와 2개 정도의 기갑척탄병 연대, 1개
기갑포병 연대 및 부속 부대들을 포함해 15600명 정도의 병력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실제 이 쿠르스크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통상의 1개 기갑사단이 장비한 전차전력은
불과 평균 73대에 불과했다. 
 단 소수의 막강한 기갑전력이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제 2 SS 기갑군단 소속의 3개
기갑척탄병 사단 -- 라이프스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
다스 라이히(Das Reich), 토텐코프(Totenkopf) -- 과 '그로스 도이칠란트(Gross
Deutschland)' 기갑척탄병 사단이었다. 쿠르스크 전투 개시 직전에 제 2 SS 기갑군단
휘하 3개 사단은 평균 131대의 전차와 35대의 돌격포를 보유했고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은 160대의 전차와 35대의 돌격포를 장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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