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arkeb (parkeb)
날 짜 (Date): 2001년 4월 10일 화요일 오후 08시 49분 48초
제 목(Title): Re: 상고사..


하이텔에서 무단으로 일단 퍼옵니다. 늘 하던 대로죠. :)
----
 고구려가 부여의 일파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알
 고 있지만 정작 부여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부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존재했으며 그 구성은 어떻게
 되었던 나라일까? 남방의 가야만이 신비의 나라가 아니고 북방의
 부여 역시 신비의 나라 아니겠는가.
 
 부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史記 貨殖列傳에 나온다.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인접해 있다.
 燕北隣烏桓, 夫餘.
 이 이전의 기록인 史記 匈奴傳에는
 
 흉노의 좌측의 왕과 장수는 동방쪽에 있으며, 상곡으로부터 그 동
 쪽에 있는 자는 예맥, 조선과 접해 있다.
 匈奴左方王將居東方, 自上谷以往者接穢貊, 朝鮮.
 
 라고 되어 있어 夫餘의 기록이 없다. 이때문에 夫餘의 건국을 BC
 119년 한나라가 흉노의 좌지를 평정한 후로부터 BC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함락시킨 때 사이의 일로 여기기도 한다.
 晋書 四夷傳 夫餘國에는
 
 한나라 무제 때에 자주 조공을 했다.
 武帝時頻來朝貢
 
 라는 기록이 있다. 이 이전에 史記 朝鮮傳을 보면 右渠가 주변 나
 라를 방해하여 천자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眞番旁衆
 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 주변 나라 중에 夫餘가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을 이때로 잡는 것은 문제가 있는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가를 밝히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될지
 도 모른다.
 論衡 吉驗篇, 魏略, 後漢書 등에는 夫餘의 기원에 대해서 실려 있
 다.
 
 北夷 탁리국의 侍婢가 임신을 했다. 왕이 이를 죽이려 했더니, 그
 시비가 “어떤 기가 있어 크기가 계란만한데 하늘에서 내려와 내게
 태기가 있었다”라고 했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돼지우리
 속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이를 살려주었다. 다시 말우리에
 버려 말이 깔아 죽이도록 했으나, 말 역시 입김을 불어 살려주었
 다. 왕이 이를 보고 하늘의 아들이 아닌가 하여 드디어 그 어머니
 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했다. 이름을 東明이라 했으며, 소와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다. 동명이 활을 잘쏘자 왕이 그 나라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동명이 도망하여 남쪽으로 淹호水에
 이르러 물을 활로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
 었다. 동명이 이를 밟고 건너자, 그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물속으
 로 흩어져 따라오던 추격 군사들이 쫓아오지 못했다. 이에 동명이
 夫餘에 도읍을 정하니, 그로 인해 北夷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
 (원문 생략)
 
----
여기까지 보면 비슷해서 저거 고구려를 부여로 쓴 것 아닌가 하시겠지만..

다음의 글이 또 있습니다. :)
----
   동명과 주몽이 다른 인물임은 동명신화와 주몽신화 자체의 분석에서 자명
 합니다. 동명과 주몽이 서로 다른  인물인 점은 신화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들이 남긴 금석문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1922년 중국 낙양
 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산의 묘지명이  출토되었습니다. 그 묘지명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호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어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
    昔者 東明感氣 踰遞川而開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여기 보이는 '동명감기'와 '주몽잉일'은  두 신화의 한 조각 여운을 전하
 고 있습니다. 이 묘지명은  동명과 주몽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동명의 사적
 을 먼저 말하고 주몽을 사적을 뒤에  적고 있다. 이는 두 신화가 형성된 시
 기의 선후 관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
나머지는 일단 생략을 하구요.

위의 글은 연개소문의 아들의 묘지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인식이

들어간 글이며 여기에 보면 동명과 주몽을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타 중국 역사서의 글들을 모두 정리하기 보다는 위의 동명신화와

그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을 확실히 아는 글 두개를 정리해드립니다.

또한 시간이 되시면 이덕일 교수님이 지으신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동명과 주몽의 구분에 대해 언급을 해놓으셨습니다.

그럼 20,000


@실은 이 동명과 주몽을 왜 구분하냐하면 백제의 왕가와도 관련이 있어서 
입니다. 백제는 동명왕묘를 세웠다고 나오는데요. 이 동명왕이 고구려의
주몽이냐 아니면 부여의 동명이냐가 또 논란이거든요.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