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50분 56초 제 목(Title): 조한욱/ 르네상스 조한욱 (hocho@cc.knue.ac.kr) 조회수 : 2607 , 줄수 : 42 EBS 교양강좌 98/4/16:르네상스 르네상스: 중세의 결실인가, 새로운 출발인가 I 안녕하십니까.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조한욱입니다. 어제는 중세 기독교 신학의 성립과 발전과 해체 과정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캄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어제 강의의 결론 부분에 오캄의 인식론적 유명론은 중세 말기에 이성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적인 혼란을 예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반면, 그것은 새롭게 출발하려는 근대 세계의 여명인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오캄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 전체에 대한 해석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중세의 후기와 르네상스의 시대는 어디에서 구분되는가', '중세와 르네상스와는 어떤 계속성이 있으며,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라는 역사 해석이나 시대 구분의 문제에 있어서 날카로운 논쟁을 야기시키는 쟁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의 강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중세 후기 혹은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의 전반적인 성격에 대한 개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대략 1300년부터 1500년까지의 기간을 포괄합니다. 다음으로는 특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특징에 대해 말씀드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추진한 중추적인 인물이었던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 즉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개략적으로 설명한 뒤 르네상스에 대한 전반적인 결론으로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상 1300년경부터 150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는 몰락의 시대이자 동시에 재생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의 시대는 유례없는 재앙의 시기이자 과감하고 새로운 출발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질병과 전쟁에 의해 대규모로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이자 동시에 괄목할만한 문화적, 정치적 건설의 시기였습니다. 먼저 몰락의 조짐에 대해 알아봅시다. 어제 말한 바 있듯 1337년과 1453년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자기 파멸의 길을 걸어간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전쟁의 상처는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는데 그 이유는 화약과 중장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이 당시에는 흑사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선페스트, 즉 임파선을 따라 발병하는 흑사병이 도처에서 발생했습니다. 1348년과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은 많은 지역에서 인구의 1/3 정도를 빼앗아갔고, 그 결과 이제 많은 경건한 기독교도들은 신이나 영생의 전능함이 아니라 '죽음의 전능함'에 대해 믿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에는 1378년부터 1415년까지 약 37년에 걸쳐 카톨릭 교회의 대분열이 있었으며, 예컨대 1409년에는 세 명의 교황이 세 개의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투르크 족의 침입이 새로운 위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서쪽으로 승승장구하며 침입해왔습니다. 이 상황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서부 유럽의 사람들의 정치와 종교 제도는 혼미를 거듭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질병, 폭도, 그리고 때로는 늑대들까지 그들의 도시를 침입하며, 이슬람교도들이 국경에서 밀려들어옵니다. 이렇게 되자 이 당시의 서부 유럽의 사람들은 서양 문명이 전체적으로 붕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 후기가 비길 바 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할지라도 동시에 이 시기는 17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재탄생, 즉 르네상스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두 명의 저명한 네덜란드 출신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똑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달하려던 의미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헤르프스타이(herfsttij)라는 말로 이 시기를 표현하였는데 네덜란드 말에서 그 단어는 "쇠퇴" 또는 "몰락"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한편 "수확"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가인 하이징하가 그 말을 사용했을 때 강조하려던 것은 "쇠퇴"나 "몰락"이라는 측면이었습니다. (보통 후이징하나 호이징하라고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의 발음에 따르면 하이징하라고 발음해야 맞을 듯합니다.) 반면 하이코 오버만이라는 중세 정치사상사의 대가가 그 말을 표현했을 때 강조하던 의미는 "수확"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에는 어떤 무엇인가가 쇠락해 가고 있었다 할지라도, 동시에 이 시기는 중세 문명의 잘 익은 열매를 수확해가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중세 후기는 '창조적인 붕괴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어제의 강의에서 말씀드렸던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나 오캄은 물론 로렌조 발라 같은 학자들은 신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중세의 근본적인 전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근대로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왕은 의회를 통해 권한을 발함으로써 대의제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고, 교회에서도 세속계에 대한 교황의 권능에 제약을 가하려는 공의회제가 마련되었습니다. 즉, 교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선출해준 집단의 동의를 얻어야지만 권한을 발할 수 있다는 제도가 마련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의회란 국가로 보면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이들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보다도 공의회가 행정, 사법상에 있어서 우월권을 지닌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입니다. 교황이라 할지라도 공의회의 비준을 얻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들의 관념은 세속계의 왕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말하자면 세속계 국가의 대의제도 확립에는 교회에서의 공의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이 근래 학자들이 밝히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 국왕이라 할지라도 단지 권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 정치 체제의 틀 속에서 어떤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 후기는 전에 없던 학문의 부흥 시기였습니다. 14세기에는 르네상스라고 알려져 있는 유럽의 위대한 문화의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옛 문헌이 새롭게 발견되었던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교육과 문화의 재탄생입니다. 이것은 서부 유럽 전역에 중세의 대학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에 의해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 즉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의 지식과 언어를 되살려 놓았고, 그것에 의존하여 교육을 개혁시키고 문화를 변혁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에서 출발하였던 문예부흥의 운동은 곧 유럽 대륙의 전역으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비판적 역사학의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유동 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각 지방의 토속어 즉 vernacular language가 국제어였던 라틴어와 어깨를 겨루며 문학의 언어로, 또한 정치의 언어로 등장했습니다. 토속어라 함은 오늘날의 영어, 이탈리아어, 불어, 독어 등과 같은 한 국가의 언어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백년전쟁에 의해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흑사병에 의해 성직자와 귀족의 세력이 붕괴됨과 동시에 교회의 대분열 등을 통해 교황청의 세력이 크게 몰락했습니다. 이것은 강력하고 냉혹한 군주가 등장할 조건을 마련해 준 것으로서, 이 새로운 군주들은 점차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자신들의 수중에 장악해 나갑니다. 이리하여 14세기에 이르면 유럽에서는 국민국가들(nation state)이 서로간에 전쟁을 벌이는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제 독립적인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점차 교회를 대신하여 국민들이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애국주의와 초기의 민족주의가 역사의 동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는 고전 문화의 재발견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의 재발견입니다. 그러나 14세기 이래로 유럽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신 세계를 확장시켰던 것은 과거로의 방향만은 아니었습니다. 15세기 말엽부터 미대륙으로의, 그리고 아시아로의 항해 탐사가 시작되어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탐사 여행은 유럽 사람들에게 이국적인 문화와 비유럽적인 가치관도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런 경쟁적인 탐사 여행이 새롭게 탄생한 국민국가들의 경쟁심과 맞물려 유럽인들은 지리적인 확충을 더해 나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하이징하와 하이코 오버만이라는 네덜란드의 두 역사가들이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표현한 바와 같이 '쇠퇴'와 '수확'의 시기였던 것과 동시에 수축과 확장의 시대였습니다. 즉 중세의 기독교 교회를 통한 세계주의에서 이제 각 민족 단위의 국가로 역사의 구심점이 바뀌었다는 의미에서 이 시기는 수축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세계사가 확장되어 나가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중세 말기의 전개 상황은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시대로의 문을 열어놓게 됩니다. 다음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II "르네상스"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그 말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14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이 중세 동안 사멸되었던 고전 그리스와 로마의 업적을 새로이 깨달아 그것을 재생시키는 일을 출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14세기 중엽 이후에야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세에도 12세기에는 이미 고전 문화가 진정하게 부활되었습니다. 어제의 강의에서 논했듯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숭배했으며, 단테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존경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시대에 세속적인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해서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거리를 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대부분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경건한 신앙심을 유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자연의 경치를 즐기기 위해 방투 산에 올랐던 대표적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는 자연의 광경을 즐기다가는 갑자기 중세적인 경건심에 사로잡혀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꺼내들고 읽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먼저 꺼내는 이유는 르네상스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에 단 한가지의 관점만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유보 조건을 미리 전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위스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19세기말 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이라는 책에서 르네상스는 현대 세계의 원형이었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세속적, 과학적 가치관이 전통적인 종교적 신조를 대체한 것은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 고대 학문의 재발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인간들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확률적으로 실재를 파악하려는 방법을 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개인과 그의 예술적 창의력의 중요성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따르면 그 결과는 "완전하고 전체적인 인간의 본성"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이것이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만을 강조했지 중세와 르네상스가 갖는 연결성은 간과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비판자들은 초기의 인문주의자들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또한 중세 문화의 전성기였던 12, 13세기에 이미 고전은 부활되었고 인간의 개인성과 창의력이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 과장이나 편견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측면은 최소한 르네상스가 중세로부터 근대 세계로의 이행기 혹은 전환기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세의 유럽, 특히 12세기 이전의 중세 유럽은 농업에 기초를 둔 지방분권적 농경 사회로서 그 사상과 문화는 교회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할 때 특히 14세기 이후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국민의식이 성장했고,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으며, 구조화된 상업 경제가 탄생하여 자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도시 경제가 확산되었고, 문화와 사상은 성직자가 아닌 세속인들이 주도했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제 르네상스가 갖는 새로운 측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사상·문학·예술의 영역에서는, "르네상스"라는 말을 말 그대로 재탄생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주는 현저한 특징들을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고전 지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중세의 학문과 르네상스의 학문 사이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커다란 양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중세의 학자들은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 혹은 키케로 같은 로마 저술가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는 그들 외에 리비우스, 타키투스, 루크레티우스 등의 작품들이 새롭게 발견되었습니다. 더구나 고전 그리스 문헌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된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중세말기인 12세기와 13세기에 서유럽인들은 그리스인의 과학 및 철학 논고들을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 번역으로 접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의 위대한 문학 걸작품들을 알지 못했으며, 플라톤의 주요 저작들을 한 편도 읽지 못했습니다. 또한 중세에는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르네상스 시대에는 수많은 서유럽 학자들이 그리스어를 배웠고, 오늘날 알려져 있는 그리스의 문학적 유산을 거의 전부 독파했습니다. 둘째로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중세 사상가들보다 고전 문헌들을 더 많이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중세의 저술가들은 자신들이 이미 받아들인 기독교적 관념을 보완하고 논증하려는 목적으로 고전 문헌을 이용했습니다. 반면, 르네상스 시대의 저술가들은 그들의 선입관을 고치고 표현 방식을 바꾸려는 목적에서 고전에 의존했습니다. 더욱이 고전 고대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건축과 예술 분야에서 한층 두드러졌던 것으로서, 이들 분야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적인 양식이 "르네상스적인" 예술 양식을 만들어내는 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르네상스 문화는 결코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방향 설정에 있어서는 중세 문화보다 훨씬 더 세속적이었습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국가들이 발전했고, 그런 발전은 도시에서의 정치적 성공과 현세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그와 같은 세속적인 이상은 점차 교회와는 거리를 둔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교회는 여전히 재산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교회 자체가 스스로 세속화됨으로써 당시 확산되어 가고 있던 세속화의 흐름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르네상스가 왜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는가 하는 문제는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서,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는 전유럽에서 도시가 가장 발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알프스 이북의 귀족들은 대체로 지방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대체로 시골의 성보다는 도시 중심지에 거주했으며, 따라서 도시의 공공 문제들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더욱이 이탈리아의 귀족 계급은 도시에 성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알프스 이북과는 달리 귀족 계급과 부유한 상인 계급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 귀족들은 지방의 영지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으로 생활했고, 부유한 도시민들(부르주아)은 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반면에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도시 거주 귀족들이 금융이나 상업에 종사했고, 수많은 부유한 상인 가문들은 앞다투어 귀족 계급의 예법을 모방했으므로, 14세기와 15세기에 이르면 귀족 계급과 상류 부르주아 계급을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해집니다. 이제 이들은 상업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읽고 셈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또한 상업상의 분쟁이 생길 경우 논쟁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은 그런 능력을 가르칠 교사의 필요성을 발생시켰고, 그 결과로 이탈리아는 전 유럽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상류 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둘째로 이탈리아는 고전 시대와 친밀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또한 고대 라틴 문헌에 나오는 도시와 지역의 이름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 유산에 대한 애착심을 다른 지역보다 더 갖게 되었다는 것도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또 다른 한편 교황이 아비뇽으로 이주한 뒤, 프랑스는 스콜라 철학의 본산이 됩니다. 교회의 대분열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반목을 낳았고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지적 반동으로서 이탈리아에서는 고전 고대에서 그 반대급부를 찾으려 했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로 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된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동방과 서부 유럽 사이의 교차로였다는 지리적 조건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중세를 통해 중동지역과의 교역을 계속하면서 활력적인 도시문화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 14세기에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등등의 상업 도시는 강력한 도시 국가로 발전하면서 주변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5세기에 이르면 거대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유럽 대부분 지역의 은행 역할까지 담당할 정도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도시의 귀족이나 상인들은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생활 태도는 현세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습니다. 도시의 삶은 분주하며 향락의 기회가 많습니다. 즉, 세속적인 태도가 배양되었다는 것이며, 이런 배경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예술이 발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르네상스는 도시와 상업의 부활이 가장 빨랐던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인간의 자아의식이 움트고 권위에 대한 비판이 싹트면서 지적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자아의 각성은 고대문명의 부활을 배경으로 한 인문주의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당시 인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중세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는 중세를 뛰어넘어 고전고대에 직접 도달했던 것이 아니라 중세의 사상과 문화의 전통을 더욱 창조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낡은 것과 새 것이 뒤섞인 과도기였습니다. 다음으로는 휴머니즘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고 전체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III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그 많은 해석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이 옳고 다른 것들은 틀린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모두에 옳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디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단순한 설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대한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세속적 가치의 총화라고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 자체가 이런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 그는 휴머니즘에서 중세를 넘어서는 근대적 세계관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교회사가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문주의자들을 부패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합니다. 그것은 이들이 성서가 아닌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 문화에서 진리의 근거를 찾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물론 그밖에도 고전 고대에는 훌륭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루키아노스나, 오비디우스, 페트로니우스 등등의 호색적인 글을 쓴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들의 글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P. O. 크리스텔러로 대표되는 학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휴머니즘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문예면에 있어서의 운동으로 국한시킵니다. 즉 이 학파에서는 휴머니즘이란 글을 다룰 줄 아는 전문가들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던 운동이었던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텔러가 밝히고 있는 바 그 이유란 르네상스 시대에 '후마니타스'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인문학을 뜻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휴머니즘이라는 말에서 파생되는 '인도주의', '인간주의' 등등의 의미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가 이후에 그 단어에 부착된 것이므로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을 말할 때는 순수히 학문적인 운동이었던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텔러의 학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 다른 학파는 한스 바론의 학파입니다. 이들은 "시민적 휴머니즘"(civic humainsm)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면서, 인문주의란 단순히 학술적인 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화주의적인 정부제도의 확립을 의식적으로 꾀하려던 사람들의 총체적인 운동이라고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자유로운 도시 국가에서 창조적인 문예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약간 특이하기 때문에 소개할 학설이 있는데, 그것은 찰스 트링커스라는 학자의 주장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지적 기원이 로마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교부철학자들까지 소급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페트라르카가 방투 산정에서 읽었던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였다는 사실은 물론, 대표적 인문주의자의 한 사람인 피치노는 플라톤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에 대한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을 그의 주장의 방증 자료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석이야 어떻든 최초의 인문주의자들은 연설가, 시인들로서 이들은 라틴어나 토속어로 독창적인 글을 지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새로이 발굴된 고전 작품의 예를 규범으로 삼아 글을 짓거나 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이들은 귀족이나 교황의 비서, 연설문 작성자, 외교관, 공증인의 일도 맡았습니다. 이들은 고대의 수사학자들과 같은 관점에서 인식론적인 소박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입장은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며, 그에 따라 더욱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닌 설득력이다"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상대주의자가 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당시 수많은 학문이 유럽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세에는 카톨릭 교회의 유일한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진리의 원천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믿게됩니다. 여러 학문이 각기 진리임을 주장할 수 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논리에 의거한 진리가 아니라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 수사적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 인문주의자들의 목적은 '현명해지는 것'입니다. 현명해진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또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에 의하면 학문은 추상적이고 실천되지 않는 것이라면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린다면 "선(善)을 의도하는 것이 진(眞)을 아는 것보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진리를 찾는 것보다 실생활에서의 현명함을 찾는 이들의 모습에서도 인문주의자들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이후 북부, 서부 유럽으로 전파됩니다. 학문적, 예술적 성격의 르네상스는 그곳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띄게되며 종교개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게됩니다. 다음 주에는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