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52분 24초 제 목(Title): 조한욱/ 종교개혁, 보수와 개혁의 교차 EBS 교양강좌 98/4/22:종교개혁: 보수와 개혁의 교차 종교개혁 : 보수와 개혁의 교차 I 안녕하십니까.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조한욱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르네상스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마지막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북부, 서부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본디 학문적, 예술적 성격을 띠었던 그 운동에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고 종교개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종교개혁이 발생한 배경과 루터의 개혁에 대해, 다음으로 그밖의 여러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이 갖는 보수성과 혁신성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전체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종교개혁이 출발하였다고 하는 상징의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1517년 10월 31일로서, 그날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문 앞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 기원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세에도 클뤼니, 시토, 프란시스코 교단 등 중세 카톨릭 교회 내에서의 개혁운동은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루터보다 1세기 전에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 지방의 후스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연상시키는 개혁 운동을 벌인 바 있었습니다. 한편 지난 주에 말했던 것처럼 북방의 르네상스 역시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종교적, 교육적 개혁의 풍토를 만들어 냈습니다. 북방의 르네상스는 본디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운동이 학자, 상인,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라는 비성직자로 구성된 단체. 근검, 복종, 자선 등의 행동을 통해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던 자들. 네덜란드에서 시작) 등에 의해 유럽의 북부로 퍼져 일어난 것입니다. 북방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합니다. 북방 르네상스 대표자들은 숫자적으로 제한된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대중을 위한 글을 썼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로서, 그는 대화체 형식의 짧은 글을 많이 썼고, 또한 금언집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목적은 고전적인 인문주의, 공화주의의 이상을 기독교적인 사랑과 경건심의 이상과 결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전과 성경에 대한 절도 있고 체계적인 연구가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를 개혁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중세 말기의 독단적, 의전 중심적인 종교의 요식 행위와 대비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샘물을 마심으로써만 진정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어의 신약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을 엮은 책을 편집(1516)하였고, 한결 더 정확한 라틴어판 성경을 번역했습니다(1519). 그런데 카톨릭 교회측에서는 이러한 그의 노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중세 초 교부였던 성 제롬의 불가타판 성경(The Vulgate)을 정통으로 고수하면서 에라스무스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리하여 16세기 중엽 한 때에는 에라스무스의 모든 작품이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던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에라스무스가 당시 교황들을 비판적으로 풍자했던 사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에라스무스가 썼던 짧은 글 속에서는, 면벌부 판매 당시의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한 뒤 천국에 올라가 그 입구에서 베드로에게 문을 열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가 피비린내 나는 갑옷 위에 성직자의 옷을 입은 괴물이라며, 그를 천국에서 추방시킵니다. 이런 이유에서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에라스무스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터 조차도 에라스무스가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카톨릭 교회와 결별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개혁을 위한 토양을 마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보통 루터에 의해 출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당시 여러 종교개혁의 교파들이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즉 영국의 국교회, 스위스의 칼빈주의, 재세례파 등 수많은 교회, 종파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던 바로 그 세대에 조직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요? 그것은 오점 투성이의 현실을 배격하고 천상, 그리고 지상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약속을 찾으려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착한 일을 하고 계율을 쌓으며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행동들이 신의 은총을 확신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수도승에게서 성경을 공부하라는 권고를 받고 이에 몰두한 끝에 그 고민을 해결했습니다. 그 해답이란 사람은 신에 대한 믿음, 구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어떤 종교가 믿지 말라고 가르치겠습니까? 사실상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교황청과 결별케 되었을까요? 루터는 선행을 쌓을 것을 강조하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단지 신앙만 강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는 선행은 필요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선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루터의 주장은 사실상 카톨릭 교회의 부패상 및 제도화된 의식과 관행에 화살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95개조는 특히 테첼이라는 인물에 의한 면벌부 판매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런데 면벌부를 사는 것은 선행의 하나라고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테첼은 유능한 교회기금모집인으로서 교황청의 허가 아래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의 재건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서 면벌부 판매에 의존했습니다. 면벌부란 본디 중세 신학에 의하면 판매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가볍게 하거나 면제시켜주는 것과 관련된 문서입니다. 죄를 사면해줄 수 있는 자는 단지 신뿐입니다. 죄인은 고해의 형태로 용서를 받습니다. 고해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는 연옥(purgatory)에서 일시적이지만 고통스러운 벌을 받음으로써 속죄를 하고 천당에 가는 준비를 합니다. 면벌부는 죄의 용서를 확인시켜 주지 못합니다. 단지 고해를 통해서 받을 벌이나 연옥에서의 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면제해 주는 것뿐입니다. 즉 벌만 피할 수 있게 할 뿐 죄 자체가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면죄부는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에 의해 신도에게 수여되는 것이며 이를 받은 자가 자유의사에 의해 헌금하던 것이었습니다. 반면 테첼은 이 면벌부의 위력을 과장함으로써 벌의 면제 뿐만 아니라 죄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신도들의 감정에 호소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들을 낳아주고 길러 준 부모, 친지들이 연옥의 불구덩이에서 울부짖는데, 당신들의 돈 약간으로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왜 그것을 하지 않는가? 그들은 당신의 도움을 기다린다"라는 식이었습니다. 루터가 선행이 필요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런 관행에 대해 반발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교황청이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악폐의 규탄은 선업을 도외시하고 신앙만으로 구제된다는 주장으로 이르게 되어 오히려 교황청에서 그 주장을 문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518년 교황청에서는 95개조를 철회하라고 명령하지만 루터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성직자들만이 일반 신자들의 죄에 대한 벌을 면제해 줄 수 있다는 카톨릭의 중심적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직자의 역할 강조하며 단지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면 성직자 역할이 감소하게 되고, 따라서 그런 면에서도 교황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루터 성공의 이유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무리 교황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할지라도 일개 대학교수의 반발만으로 기독교의 교회가 양분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첫 번째의 이유는 대중들이 전반적으로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 냉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르네상스의 이교도적(pagan)영향을 받아 장식적으로 흐르고, 교회 내부의 권력다툼 등이 진정한 신자들의 눈에 나쁘게 비쳤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이유로서는 루터가 독일인의 민족적 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즉, 테첼이 독일에서 거두어들이는 돈이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왜 독일인들이 이탈리아의 부를 위해 돈을 거두어 내야 하는가?"하는 방식으로 독일 사람들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독일 국민 기독교 귀족에 대한 호소>라는 팜플렛을 썼으며, 그것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저술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독일의 지방 귀족들이 루터를 지원했습니다. 귀족들은 독일의 교회가 카톨릭과 결별하게 될 경우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한다면 그것의 소유주는 자신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루터에 지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애국주의와 결합되어 루터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공과 같은 후원자를 얻어 위급한 시기에 도피하면서 세태를 관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조건이 있었다 할지라도 루터가 성공을 거두기에는 미흡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루터의 성공을 도왔던 요인으로서는 그의 반대 세력이 약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자체의 내분이 있었고 또한 그 내분을 막기 위해 타협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더구나 카톨릭 교회의 정치적 지지 세력의 핵심인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루터의 문제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즉,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는 당면 과제가 생겼고, 투르크 사람들이 새롭게 침입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와 전쟁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이런 정세의 변화 속에서 루터가 여유를 갖고 사태를 관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루터의 개혁에 자극받은 독일 지역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요구조항을 적은 문서에는 성서적인 표현이 들어있고, 따라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와 공납의 감면, 성직자 선택권 정도로 온건한 주장을 폈던 이들은 루터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당연히 도움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루터는 오히려 카톨릭 교회에 대한 것보다 더 격렬한 어조로 비난합니다. 자신의 주인을 모르는 이들은 악마와 손을 잡은 사람들이니, 때려죽이고 찔러죽이고 목졸라 죽이라고 규탄합니다. 그 결과로 7-10만의 농민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미 그가 창설한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니라 기성교회가 되었던 사실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어쨌든 루터의 교회는 그 이후 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 만연하게 됩니다. II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성립됩니다. 그것은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스스로가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칭함으로써 시작합니다. 잘 알다시피 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일은 앤 볼레인과의 결혼 문제였습니다. 아라공 출신 왕비 카테리나의 시녀였던 앤 볼레인과 사랑에 빠진 헨리 8세는 왕비와 이혼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혼을 위해서는 교황청에서 특별 허락이 내려야 했는데, 교황청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비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왕비 카테리나는 스페인의 국왕 페르디난도와 여왕 이사벨라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의 숙모였는데, 헨리 8세의 형 아더와 결혼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법에 따르면 형수와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교황청의 특별 허락이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1527년 앤 볼레인과 사랑에 빠진 헨리 8세는 결혼을 하기 위해 카테리나와 이혼을 해야 했습니다. 즉,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교황청의 허락이 내려야 했습니다. 특별 허락을 얻어 결혼했는데 이제 특별 허락을 얻어 이혼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카테리나의 조카인 카를로스 5세의 포로였습니다. 더구나 스페인은 가장 강력한 교황청 후원 세력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건대 이혼의 허락이 내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 토마스 크롬웰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 수장령 선포했던 것입니다. 헨리 8세는 1533년 1월 이미 임신중인 볼레인과 결혼했고, 1534년 수장령 발표으며 1536년에는 수도원 해체시켰습니다. 수도원의 재산은 왕과 신흥귀족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영국의 귀족들 역시 수도원 해체로 받게 될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여 수장령에 찬성하였다는 것입니다. 헨리 8세의 결혼과 관련된 이후의 이야기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헨리의 가정 생활은 그의 정치 생활만큼 일관성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536년 즉, 힘들게 결혼한지 3년만에 간통을 범했다는 이유로 앤 볼레인은 처형당하고, 그 딸인 엘리자베스는 적자의 권리를 잃습니다. 그 후 헨리는 네 번 더 결혼합니다. 그의 세 번째 처인 제인 세이모어는 1537년 미래의 에드워드 6세를 낳은 직후 사망했습니다. 다음으로 헨리는 독일 지역 제후의 딸 안나와 결혼했습니다. 토마스 크롬웰의 충고를 받아들여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는데, 그 목적은 결혼을 통해 신교도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으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맹도 안나도 모두 그 후에 생겨난 불행한 사태를 메울 수 없었습니다. 헨리는 안나가 말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회는 이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고 크롬웰은 파면된 후 마침내 처형되었습니다. 헨리의 다섯 번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는 1542년 간통을 이유로 목이 잘렸습니다. 마지막 부인 캐더린 파는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후견인이었는데, 이 결혼은 그녀로서도 세 번째였습니다. 캐서린은 헨리의 사망 후에 네 번째의 결혼을 합니다. 아마도 그녀가 이 영국왕 헨리 8세에 가장 걸맞는 상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스위스 지방의 두 개혁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취리히 지방에서 세력을 펼쳤던 쯔빙글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쯔빙글리는 인문학적 소양이 높던 인물로서 종교에 있어서의 미신적 요소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그는 카톨릭 교회에 존재하는 우상숭배의 요인을 부정했습니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화체설과 관련된 기적적인 요소였습니다. 즉 성찬식 중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교리를 부정하고, 성찬식이라는 상징적 의식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체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스위스의 내란 중 살해됩니다. 그의 유골은 사망 후에도 네 개의 바람에 흩뿌려집니다. 그의 유골조차도 온전하게 남아있다면, 잔존 세력이 그것을 보고 힘을 얻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쯔빙글리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1519년 취리히에서 최고직의 성직자를 뽑는 선거에서, 이미 얻은 높은 명성 때문에 당선이 확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치열한 경합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 이유란 그가 한 이발사의 딸과 사실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상대측에서 폭로하면서 불리한 상황으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자리에 결국 올라선 쯔빙글리가 그 자리에서 했던 최초의 일은 성직자 독신주의에 반대하여 결혼할 권리를 청원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활약했던 칼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에 대한 문제를 먼저 말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기 때문에 칼뱅이라고 발음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정설로 인정되어 세계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칼빈이라고 발음하여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원래 프랑스 이름은 장 코뱅이었는데 그것이 라틴어화된 이름이 요하네스 칼비누스이고 존 칼빈은 그 라틴어의 이름을 영어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그의 영향력 아래 프로테스탄티즘은 전유럽적인 토대를 갖는 신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스코틀란드, 네덜란드, 프랑스 일부, 스위스, 미국 등지에 그의 가르침이 펴져나갔습니다. 그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예정설과 원죄설이 있습니다. 예정설에 따르면 창조의 첫 순간부터 신은 인간 개개인의 영생을 결정해놓았습니다. 즉,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미 예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사람들을 게으름과 방종으로 빠뜨릴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의 운명은 그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믿음으로부터 엄격한 생활 신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이유란 신과 그의 말씀인 성경은 개인은 물론 집단 전체가 착한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신의 법률을 어길 경우 내세에서는 물론 현세에서도 폭풍우나 전염병과 같은 방식으로 벌을 내린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칼빈의 교리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칼빈주의에 따른다면 그 대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정권은 완전히 신의 수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해답을 넘보려고 하는 시도조차 신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죄라는 굴레를 쓰고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선행을 행하는 사람은 물론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사람들의 '조짐'이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유하건 가난하건 인간은 모두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도둑질, 폭행, 살인, 간음 등등은 물론 주정과 게으름까지 죄악을 목록에 포함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분이 목사이건 농부이건 노예이건, 그것은 신이 명한 것이며, 그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자들의 표증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밖의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교파로서는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성인이 되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다시 세례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재세례파"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였던 "유니테리언 교파" 등이 있습니다. 재세례파는 오늘날 침례 교회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들 교파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다음으로는 신교 교단의 여러 개혁 운동에 맞서 일어난 카톨릭 교회의 종교개혁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교단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키자 그 도전에 대해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정화운동을 벌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그 개혁운동이 성공을 거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1530년대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조직되어 1540년에 승인을 받았던 예수회였습니다. 예수회 성직자들의 눈으로 볼 때 신교 개혁의 특징은 교회의 권위에 불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선량한 카톨릭 교도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의심을 갖지 말고 더 높은 교회의 권위와 영적인 방향에 복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군대적인 위계질서를 따라 설립되었고 복종을 가르쳤던 예수회가 주도한 카톨릭 교회의 개혁은 1545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그 중요성은 신교의 세력권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종교개혁과 그 이후 약 1세기에 걸친 종교전쟁의 결과로서 오늘날 유럽의 국경을 이루는 경계선과 대략 일치하는 유럽 세계의 종교적 구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음은 오늘 강의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보수성과 혁신성에 대해 말하면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III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진보를 향한 역사상의 한 걸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단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생각해봐야 할 유보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진보적인 성격은 그런 유보조건과 견주어 비교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16세기의 신교는 카톨릭과 다름없이 "미신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고 따라서 진보적인 근대성의 한 특징인 합리주의적인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서 마르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제기된 지동설을 믿지 않았으며, 코페르니쿠스를 "똑똑한 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어떤 점성술가"라는 방식으로 비하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카톨릭 측에서는 티코 브라헤의 예가 말해주듯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합니다. 두 번째로 신교도들은 관용주의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제정분리의 원칙을 믿지도 않았고, 다른 교파의 신교도들에 대해서도 카톨릭교도들보다 더 큰 박해를 가했습니다. 예컨대 칼빈이 스페인의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마카엘 세르베투스를 처형했던 일은 편협한 종교관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그것은 종교가 이유가 되었다 할지라도 "살인은 살인인 것"이라는 조롱을 받게되는 원인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 미대륙에 정착하였다는 미국의 청교도들은 결코 이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교도들은 민주주의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에 대한 루터의 거센 어조가 그 단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라는 칼빈의 가르침도 바꾸어 생각한다면 사회적 유동성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종교개혁은 다른 여러 사실들과 함께 근대로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즉, 유일한 교회를 통한 중세적 종합과 통일을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그 사회적 의의를 말씀드린다면, 먼저 종교 생활의 형태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역시 곧 제도화되긴 하지만, 초기에 그것은 단순한 신앙으로의 회귀를 명함으로써, 카톨릭 교회의 여러 제례 행위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단식, 철야기도, 성물 숭배, 성인 숭배, 성소 숭배, 라틴어 예배 등등이 포기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교육면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루터나 멜랑히톤과 같은 초기 신교 지도자의 대부분이 인문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교의 교회에서는 신앙만으로 구제될 수 있으므로, 신자들이 성서를 직접 읽는 것을 권장합니다. 읽기 위해서는 읽는 능력이 전제됩니다. 사제들이 성서의 해석을 독점했던 카톨릭 교회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신교의 교회에서는 이후 학교나 대학을 설립함으로써 성직자를 양성하면서 교육에도 중요한 전기를 부여합니다. 단적인 예로서 하바드나 예일과 같은 미국 유수의 대학교가 원래 성직자 양성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연세대학교, 이화여대, 배재학당 등등이 신교의 재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강조하고 수도 생활을 중시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는 이브의 예를 따라 악으로의 파탄을 유도하는 유혹자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상으로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신교측에서는 성직자의 결혼을 권장합니다. 1525년 42세의 나이로 결혼한 루터는 "남자가 애를 낳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경우라도 여자 없이는 지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칼빈은 부인의 임종시에 "나는 내 생애 최고의 반려자를 잃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가족과 결혼 생활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신교측에서는 성경에 입각하여 어머니와 주부로서 여성의 긍정적인 역할을 중요시했으며, 여성에게도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런 문제는 산아제한에 대한 태도의 차이까지 연결됩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인공적인 피임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당시 피임은 부부행위 도중에 체외사정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었지만,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여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그 이유로 깔려 있습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모든 "합법적 행동은 창조적 과정의 자연적 결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즉 부부 사이의 관계라는 합법적 행동은 창조적 과정으로서 그것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결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교를 믿는 나라에서는 출산율이 높아 대체로 6-8명 정도의 아이를 낳아 그 중 반 정도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반면 신교의 국가에서는 피임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즉, 제대로 부양할 수 없는 숫자의 아이를 낳아 양육을 못하느니 잘 기를 수 있는 숫자의 아이만을 낳아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더 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같이 영구불변의 보편적인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도 사실상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종교적 신조의 차이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즉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내일은 과학혁명이 바꾸어놓은 우주관과 세계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