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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49분 44초
제 목(Title): 조한욱/ 중세기독교신학의 종합과 해체 


조한욱 (hocho@cc.knue.ac.kr)  조회수 : 1730 , 줄수 : 45  
EBS 교양강좌 98/4/15:중세 기독교 신학의 종합과 해체  
중세 기독교 신학의 종합과 해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오캄

I

 안녕하십니까.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조한욱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4월 9일)에는 로마 시대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날 강의에서 
말하지 않고 넘어갔던 로마 시대의 업적 중 하나는 제국 말기에 기독교를 
승인하고 국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사의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듯, 
기독교는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 당시 밀라노 칙령을 통해 승인을 받고,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 당시 국교로 성립되어 기독교 이외의 모든 이교 
의식이 금지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간략한 설명에 의존한다면, 
기독교는 로마에 전파된 이래 계속 세력을 확장해왔고, 특히 황제들의 비호 
아래 그 세력권을 크게 넓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최악의 상태에 있어서조차 삶에 위안을 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신의 의지가 섭리적으로 전개된다는 교리를 펼치면서 개인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소외되고 박탈된 계층에 호소함으로써 그 사람들에게서 
세력 기반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에 황제가 특권을 부여하고 토지를 
하사하자, 원래 하층민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이제는 귀족과 황제의 교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과 도시의 빈민들이 기독교에서 등을 
돌림으로써 실지로 기독교는 그 가장 밑바닥의 지지 기반을 잃음으로써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구원해 준 요인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수도승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리의 초석을 깔았던 
교부철학자들입니다.
 먼저 수도승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수도승들은 본디 은자였습니다. 
즉, 더 완전한 생활 방식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를 떠났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사막 속으로 들어가 예수의 삶을 본 따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완전히 자아를 버리는 기독교적 이상에 고취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사막은 악마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겨졌고, 문명과 절연된 
장소였습니다. 이들은 그런 장소에서 예수의 삶을 모방하고 스스로의 신앙을 
입증하는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서 수도 생활을 택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시대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던 당시, 사자의 먹이가 되며 순교하던 사람들의 
생활을 대신하여 가장 고귀한 형태의 종교적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수도승의 생활은 순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실지로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과 다름없이 수도승들은 물질적인 쾌락의 세계에서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정절, 청빈, 복종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평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기독교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계속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승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인 
수도원에 대한 평신도들의 숭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기독교가 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이교도의 학문 
체계를 받아들여 기독교의 교리 체계를 확립한 초기 교부들의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은 교회의 독립을 위해 큰 활동을 
하였던 암브로시우스, 기독교도들의 피신처였던 카타콤바를 성지로 만들었고 
로마 교구의 위상을 높였던 다마수스,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 
(제롬) 등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기독교의 교리 확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에 기독교 세계에는 대단히 수준 높은 
신학자들이 출현하여 기독교가 이교도의 문화를 흡수하여 변형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로서 그는 북 
아프리카 히포라는 지역의 주교였음.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자유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기독교도로 세례를 받았지만, 청년 시절에는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받은 이외에는 어떤 영적인 지도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는 집에서는 최소한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부유한 
이웃 시민들의 도움을 얻어 카르타고에서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수사학의 선생으로 성공을 거둔 뒤 로마로 진출하였고 384년에는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였던 밀라노에서 수사학의 교수직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로마가 어느 정도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였음을 입증하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귀족 가문과 결혼을 함으로써 세속적인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정신의 소유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가지 풍요로운 영적 경험을 합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신플라톤주의와 마니교를 받아들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로부터의 영향이 그를 계속 따라다녔고, 후일 <고백록>에서 말하였듯 그 
풍요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생겨난 공허감은 오히려 그때까지의 
그의 정신 세계를 침침하고 그릇된 그림자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났고 그 늙은 현자의 영향 아래 오랫동안 버려 
두었던 기독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기나긴 개인적 여정 끝에 
밀라노의 교수직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돌아가 히포의 주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397년에 저술된 <고백록>은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로 
꼽히며 역사상 최초의 지적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에 있어서 외적인 사건들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이야기"를, 중년에 이른 주교의 관점에서 본 자신의 종교적 경험의 역사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개종에 관련된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이 책이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개종의 이야기를 인간의 영혼 속에서 "신의 흔적"과 
교류하려는 개인적 투쟁의 이야기라는 구조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신의 의지를 발견한다는 것, 즉 개종이라는 것은 
인간 생활의 정점에 해당합니다. <고백록>은 "거대한 정신적 질병을 앓고, 
그것으로부터 회복되어 가는" 과정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경에 주석을 달고 
기독교 신앙 생활의 모든 측면에 걸친 교리, 설교, 편지 등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서방 
기독교의 지적인 발전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런 업적은 
현재까지도 성직자, 신도, 철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성서에 붙인 그의 
주석은 중세는 물론 종교개혁 시기에도 성경 해석의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복잡미묘한 <신국>입니다. 이 책은 410년 
서고트족이 국왕 알라릭의 주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영원한 도시"라고 
일컬어지던 로마를 약탈하게 되자 그 사건에 자극 받아 씌어졌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비기독교들은 로마가 옛부터 숭상하던 신을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자, 그것에 대한 벌로서 로마가 게르만 사람들에게 약탈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도들 역시 이 약탈 사건을 보며 낙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세계를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재편성하는 데 있어서는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실지로 로마 제국이 붕괴될 위기를 맞게되자 그들은 
기독교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참상을 맞아 신의 의지는 역사를 통해 쉽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기독교의 관점은 다른 종류의 설명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413년부터 426년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비난을 논박하기 위해, 그리고 
세속계의 국가와 기독교 신도들의 정신적인 국가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합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신국>입니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일은 기독교의 운명과 로마 제국의 운명을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그의 논리란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의 국가와 인간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인간의 나라는 
이기적이고 악하며 타락하는 반면, 신의 나라는 선하고 이타적이고 영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인간으로서 당분간이나마 세속의 세계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필연적인 한 기독교도들은 그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세속의 
제도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내세와 구제를, 
즉 신의 나라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들의 로마 제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세속의 국가이며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나라라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역사는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정신적"인 면에서 진전해 나갑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세속의 세계에서 그 증거를 찾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따라서 놀랄 것도,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들의 로마 제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세속계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부패하고 영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국만이 영원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도들의 임무입니다. 세속 사회의 지배자들의 임무란, 특히 기독교도 
지배자들의 임무란 타락한 인간 본성의 저열한 본능을 억압하고 기독교적 
생활에 필요한 세속 세계에서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나아가 옛 로마의 신들이 로마를 도와준 일이 없다고 
논박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결론은 사람들은 신의 나라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로마 제국이 어떻게 되든 기독교는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정확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죽기 이전에 자신이 살던 북아프리카에서 로마 
문명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고, 그가 사망한 430년에는 자신의 도시 히포가 
게르만의 반달족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신국>은 대단히 감명적으로 기독교 역사철학을 표현한 최초의 저작이자 
동시에 아직도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고대 말기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힐 뿐 아니라 완전히 세속적인 역사관이나 정치 철학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중세의 전성기에 기독교 신학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집대성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II

 보통 중세를 "암흑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정당화된 표현은 
아니지만 최소한 중세의 초기에 대해 말할 때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 초기에는 고전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의 
학문과 과학이 게르만 사람들과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교회가 유럽의 중세에 갖는 또 다른 중요성은 로마 제국이 
붕괴되어 행정 조직이 마비되었을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방대한 성직자의 
그물망만이 유일하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서양의 제도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북으로부터는 바이킹, 동으로는 게르만과 마쟈르, 남으로는 이슬람의 침입을 
받으며 중세 초기의 암흑 시대에 어느 정도 고립되어있는 상태에서 서유럽은 그 
자체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헀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봉건제도와 장원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중세 
유럽은 점차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켜 나갔고, 그것은 11세기 이후 중세 문화가 
개화되는 데 밑거름의 역할을 합니다. 농업 생산력이 늘어난 것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인구 증가를 초래합니다. 늘어난 인구는 상업과 교역의 부활을 
예고한 것이었고, 그것에 따라 이 시기에는 도시와 도시 문화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도시는 점차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바뀝니다. 도시의 
문화와 교육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술이 재발견됨으로써 발전하였는데, 
그것은 동방 교역의 부흥, 십자군 원정, 그리고 스페인에 거주하던 이슬람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8세기 말 이른바 카롤링 왕조의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전 문화가 단지 겉핥기 식으로만 부활되는데 그쳤지만 
이제 12세기에 이르면 고전 학문이 진정하게 부활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중세 초기에 파괴되었던 그리스의 학문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슬람 지식인들에 의해 보존되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그리스 원전의 
대다수는 원래의 저작이 아랍이나 시리아어로 번역이 되었던 것을 다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슬람교도 지식인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그리스의 의술, 아랍의 수학, 로마법 등이 12세기초 서유럽의 학자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저술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방대하고 심오한 주석을 달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된 고대의 
지식은 중세의 대학에서 활발히 연구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고대 학문이 부활되자 그것은 정통 기독교의 교리와 마찰을 빚게 
됩니다. 중세의 대학에서 발전시켰던 최대의 업적은 스콜라 철학입니다. 그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큰 관심을 두던 문제 중의 하나는 철학과 신학과의 
관련성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철학은 특히 새롭게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기독교도의 눈으로 볼 때 이단적으로 비치는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시간적인 영원성을 
말합니다. 즉 시간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우주의 창조에 대한 가르침과 모순됩니다. 즉 성서에 
따르면 시간에는 시작도 있고 끝도 있어 천지 창조로부터 출발하여 최후의 
심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카톨릭 교회 최대의 종교 의식인 성체성사에 
있어서 기독교도들은 성찬식의 과정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지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받아들인다면, 그 신자들이 환각의 상태에 빠지지 않은 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카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로 인정받은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 즉 성부가 성자를 낳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신이 비롯되었되 그 셋은 하나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주도하였던 성 베르나르와 같은 
교회 내의 보수 세력은 중세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입각한 교육과정이 신학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까지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 중세의 수도원이나 교회의 
성직자들은 지식을 독점하였던 계층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계층에는 중세 
최고 지성의 소유자들이 속해 있던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과 그것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을 
보면 많은 성직자들이 살해됩니다. 그들 죽음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물론 그 
성직자들을 중독시켰던 독약이 원인이겠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은 
지식에 대한 탐욕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철학적 지식의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대종합을 이루는 일이었으며, 
그 과업을 성취하였던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통상 중세 최대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아퀴나스는 남부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 아래 연구했습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에 통달하였던 서방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스승 밑에서 아퀴나스가 수학하였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퀴나스는 1268년 학문적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유명한 
<신학대전>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백과사전식의 방대한 저술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12세기에 피에르 아벨라르가 개척한 논쟁적인 
변증법의 방식을 사용하여 상반되는 여러 전거를 나열하고 논의를 
전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논의로 시작하여 그것을 
구체적인 논점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퀴나스는 600여개의 
쟁점을 제시하면서 일만여개의 명제들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쟁점과 명제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한 가지 대 주제가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철학이 말하는 진리와 신앙이 말하는 진리는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려는 시도였습니다. 아퀴나스는 이성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그 둘이 결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은 감각 경험을 반영하여 
자연계에 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 이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덧붙여 신이 계시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진리도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신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이라는 사실은 계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것도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로써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이런 초자연적인 진리는 자연적 진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보완해 주는 것입니다. 그의 말 
인용한다면,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초자연적인 진리와 자연적 진리는 함께 기독교 
철학자가 탐구할 수 있는 포괄적 전체를 이룬다고 아퀴나스는 주장합니다.
 아퀴나스는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기독교 교리와 명백하게 모순을 이루는 경우, 단지 
계시적 진리라는 권위에 의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철학적 논리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박했습니다. 예컨대 앞서 이야기했던 시간의 영원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아퀴나스는 시간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 이성적으로 알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끝이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박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아퀴나스가 했던 일은 "초자연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이성 즉, 철학의 진리와 초자연, 즉 신앙의 진리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합리주의와 기독교적 신앙을 
접합시켰던 것입니다. 지식의 논리에 관한 이런 시도를 정치 철학의 영역으로 
확대시킨다면, 그것은 인간적 이성의 영역인 국가의 존재가 필요한 것은 
인정하나,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단지 초자연의 영역 즉 교회의 역할을 
통하여 다른 세계로 인도되어질 때 완전해진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아퀴나스의 논지는 사실상 인간의 나라와 신의 나라를 구분하여 인간의 
나라는 불완전하며 단지 신의 나라를 추구함으로써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를 바꾸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실지로 
아퀴나스는 합리주의적 전통과 기독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종합시켰다는 
철학사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진리의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의 계시에 달려있었습니다. 중세에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였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세가 지난 오랜 뒤에도 아퀴나스의 사상은 오랫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인 철학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의 방대한 학술적 업적과 종합적 시도를 
보면서 그가 공인된 철학으로 인정받은 사실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음.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퀴나스는 자신의 시대에 이미 많은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그가 이성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소박한 신앙을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보수적 
인물들은 그가 너무 과격하게 나갔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시 <장미의 
이름>에서 그 증거를 찾는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는 그 
가상의 희극론을 불태우는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에게 말하면서 아퀴나스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진실한 기독교 신앙에는 해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종합된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한 위기는 그런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왔던 것이 아니라 철학적 유명론을 내세웠던 오캄에게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III

 14세기와 15세기에 이르면 중세 문명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위기를 
만들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1337년과 1453년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백년전쟁과 유럽 도처에서 1348년과 1350년 사이에 발생했던 
선페스트, 혹은 흑사병이었습니다. 백년전쟁은 불필요하게 오래 지속된 
소모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 국민 감정이라는 것이 발생하여 
기독교 왕국을 통한 중세의 통일성이 붕괴되었고, 농민들의 생활이 파탄에 빠져 
폭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 전쟁의 와중에 대포와 보병대의 중요성이 
대두됨으로써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지휘하던 기병대의 역할이 줄어든 결과 귀족 
세력의 약화가 초래되었습니다.
 이 전쟁보다 더 심각하게 중세 사회의 기반을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은 
흑사병의 발생입니다. 중세 말기 인구의 약 90%는 농민이었습니다. 유럽에서 
농업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자 이제 오히려 농산물이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하여 약 1300년 경, 약 35세에 
불과했던 당시 평균 수명 기간에 유럽인들은 생애 중 적어도 한번은 극심한 
기아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14세기초에는 대흉작이 있었습니다. 1315년과 1317년 사이에 있었던 곡물 
농사의 흉작은 대기근을 발생시켰습니다. 이것은 대도시의 인구 과밀 지역에서 
더 큰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유럽 사람들은 인구 과잉, 경제 
공황, 기근에 따른 영양 실조, 열악한 환경 조건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약화되어 
있었고, 따라서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약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1347년 말 시칠리아에서 발생하여 1348년에 절정에 달했던 흑사병이 그 위세를 
특히 크게 떨쳤던 이유입니다. 흑사병은 교역로를 따라 북부와 서부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따라서 교역 도시의 경우 피해가 컸고, 보헤미아 즉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교역로에서 벗어난 지점에서는 피해가 전혀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14세기말에 이르면 흑사병에 의한 희생자는 유럽 인구 전체의 약 
2/5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흑사병이 가져왔던 사회적, 경제적 결과는 대단히 컸습니다. 흑사병은 
노동력을 현저하게 수축시켜 귀족들의 장원의 가치를 하락시켰습니다. 흑사병의 
뒤끝에 어떤 마을은 사라지기까지 했습니다. 농업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이제 
이들의 몸값은 상승했고, 숙련공들의 임금은 앙등했습니다. 농노들은 노역의 
대가를 현금으로 받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도시에서의 좋은 고용의 기회를 
찾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변동에 의해 크게 타격을 받았던 계층은 토지 
귀족이었습니다. 토지의 가격은 하락한 반면 노역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불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지주들은 경작지를 양을 
기르는 목초지로 바꾸기도 했고, 때로는 토지 경작을 포기하고 그것을 경매에 
내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사회 제도적인 면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를 말하는 것. 귀족이 토지를 
포기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부와 특권의 원천을 포기한 것입니다. 한편 
농민들이 노역의 대가를 현금으로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중세적인 봉건적 
관계에서 어느 정도 근대적인 계약의 관계로 그들의 신분이 상승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전통적인 중세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에 어떤 변화가 도래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흑사병은 성직자 계급을 약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남긴 유산을 물려받기도 했고, 죽은 자와 죽어 가는 자를 위한 기도와 
예배의 주문이 증가함으로써 교회의 수입이 늘어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직자들 역시 흑사병에 의해 많이 죽었습니다. 그 이유란 성직자들은 
대체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던 교역로 근처의 도시에 몰려 살았으며, 그들의 
직분상 죽은 자와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종부성사나 장례미사와 같은 종교 
의식을 베풀면서 환자들과 직접 접촉을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흑사병은 왕권의 양대 견제 세력인 귀족과 교회를 약화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세력이 붕괴된 것은 단지 백년전쟁이나 흑사병과 같은 외적인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못지 않게 지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변화의 요인들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앞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강의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지적인 분야에서 위기가 
도래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세 신학의 종합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의 동의를 얻는 완전한 종합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미약하게나마 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다가, 14세기에 이르러 최대의 논쟁가인 오캄의 윌리엄에 의해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캄과 함께 교회 내부에서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기존의 교회가 세속적으로 타락한 것에 반발하며, 교황의 권한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는 이론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 중 중요한 사람이 파리의 
쟝과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였습니다. 파리의 쟝은 국왕은 교황보다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세속계의 정부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려는 인간들의 자연적인 
성향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왕권이 교황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파리 대학의 강사였던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수호자>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폅니다. "적법한 정부의 기초에는 
신민들의 동의라는 원리가 존재한다." 바꾸어 말하면 국민들의 동의가 정부를 
이루는 기본적인 원리이므로 교회가 아닌 국가만이 정당한 정부라는 
주장입니다. 더구나 성직자는 이 정부 안에서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므로 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할 수는 없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신자 전체가 교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오캄 역시 교황의 권위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인식론적인 기반은 철학적 
유명론입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조차 진리의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철학의 범위가 상당히 축소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능력, 즉 논리학과 변증법에 의해 유지되는 인간 이성의 범위를 
축소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기본적 원리는 단지 직관적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신의 정신에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이성적 노력도 포기하고 단지 성서의 
가르침에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그의 입장이 nominalism, 즉 
유명론입니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은 시사적입니다. 장미는 왜 장미인가? 
장미라는 속성이 실지로 존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장미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장미인가? 오캄의 입장은 단지 우리가 장미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에 장미라는 것입니다. 이것릉 유명한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방법과 통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 설명할 때, 개념 도구를 적게 
사용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더 뛰어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단순한 
설명일수록 좋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점에서 이성의 힘이 약화된 것을 
보여주며, 중세 말기의 정신적 혼란기를 예고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철학적 유명론 위에서 오캄은 교황권을 공격했습니다. 교황의 
무오류성, 즉 교황의 말에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교황 뿐만 아니라 평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전체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 전체 속에는 어디에선가 어떤 개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신앙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의 
개인주의를 옹호하였던 것이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합적인 체계에 대한 
반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합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오캄의 입장이 미시적인 안목으로는 이성의 힘이 
약화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제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 
사회를 지적인 면에서 예고하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흑사병과 
백년전쟁이 귀족과 성직자의 계층을 약화시키고 도시민들의 세력과 국왕의 
세력을 강화시켜 중세의 통일성이라는 상에 균열을 만들었던 것처럼, 이제 오캄 
등의 지식인에 의한 중세 카톨릭의 정통 교리에 대한 비판은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그것에 이은 대분열의 시기와 거의 맞물려 일어나면서 카톨릭 교회를 
통한 중세의 통일이라는 상 역시 허상에 불과하였음을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중세 말기의 혼란을 예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반면, 새롭게 
출현하려는 근대 세계의 여명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이렇게 
출현하려던 세계가 진정 새로운 세계였는지 아니면 중세라는 천년 왕국의 
결실을 거두어간 것인지 르네상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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