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48분 03초
제 목(Title): 조한욱/ 로마의 문화와 게르만인의 융합 


조한욱 (hocho@cc.knue.ac.kr)  조회수 : 1486 , 줄수 : 49  
EBS 교양강좌 98/4/9:로마의 문화와 게르만인의 융합  
로마의 문화와 게르만인의 융합

I

 로마인들의 업적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의 하나였습니다. 중부 
이탈리아의 조그마한 마을의 원주민들 후예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고 
곧 지중해 유역 전체를 장악합니다. 이들의 정복지는 더 나아가 서남아시아 
지역까지 이르고, 뒤이어 유럽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그 지배권 아래에 
두었습니다. 남북으로는 영국에서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북쪽 끝까지 약 
2,600km, 동서로는 스페인에서 코카사스 산맥까지 약 4,500km에 이릅니다. 
청취자들 여러분의 머리 속에 지도를 그리면서 그 방대한 영토를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인들 이전이건 이후이건, 그 방대한 지역이 통일된 적이 
없었으며, 평화 상태가 유지되었던 적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유산은 군사적 탁월성에 근거한 점령 지역의 확장이나 정치적 조직에만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지적, 문화적 업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시키면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변형시킨 문화를 그레코-로만 문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레코-로만 
문화는 문학, 철학, 예술 등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을 이루며 중세를 통하여 
학문의 핵심을 이루었고 르네상스 이래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작용했고 오늘날까지도 서양 문명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역사 초기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첫 번째로 이탈릭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던 고원족(움브리아, 사비나, 삼니테, 라티움 등등)으로서 동쪽으로부터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로 에트루리아 사람들로서 출신이 
어디인지는 아직도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도시국가의 연합체를 건설하여 로마사람들을 지배하면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그리스 사람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나폴리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정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켈트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원래 유럽 방방곡곡에 널리 퍼져 살던 원주민들입니다.  그러나 
점차 로마 사람들이 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들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로마는 라티움 지역에 있던 별로 중요하지 않던 한 촌락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왜 다른 지역을 제치고 이곳이 발전할 수 있었던가? 그 이유로는 먼저 
지형적 조건을 꼽을 수 있습니다. 로마는 티베르강의 하구에서 약 25km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 곳에 위치합니다. 해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였다는 
말입니다. 로마에는 언덕이 많이 있습니다. 그 언덕들은 티베르 강을 따라 배로 
계속 여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또한 로마 중심부의 남동쪽에 위치한 
티베르 강의 한 섬은 얕은 여울을 만들며 그곳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이탈리아 반도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동서로건 남북으로건 
로마를 거쳐가야 했고, 그 결과 로마는 통상과 교역의 자연적인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로마인들의 정부조직을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는 제국 초기부터 
왕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 그 권한은 imperium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mperialism, emperor와 같은 영어 단어, 즉 제국주의, 황제 등등 단어의 
어원. 라틴어의 원 뜻은 '힘' 또는 '권력') 왕은 imperium에 의해 로마인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벌금, 구금, 신체적 고문, 혹은 처형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선출되었습니다. 그 후보자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임페리움은 공식적으로는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정치제도의 본질적인 성격이 이미 초기부터 배태되어 
있었습니다. 행정의 책임자에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나 그것은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그 권력은 궁극적으로 인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었던 특이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 사람으로서 포로로 로마에 잡혀가 
그리스의 학문을 전달했던 역사가 중에  폴리비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왜, 어떻게 하여 로마가 짧은 시간 안에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그 원인을 로마의 정치 제도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의 헌법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셋은 각기 독자적인 권력을 지닌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의 
분산은 평등과 균형의 원리에 따라 대단히 신중하게 조정된 것이어서 로마의 
본토박이라 할지라도 그 헌법이 전체적으로 볼 때 귀족제인지, 민주제인지, 
군주제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상호 보조와 상호 견제를 위한 
권력의 분산은 어떠한 위기에도 충실히 대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것보다 더 
나은 헌법을 찾을 수 없다."
 다음으로는 로마인들의 전쟁 수행 능력과 점령 지역 지배 방식을 로마 성공의 
또 다른 원인응로 말할 수 있습니다. 에트루리아의 왕 밑에서 전쟁술을 배운 
로마 사람들은 마침내 지배자이자 스승이었던 에트루리아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베이(Veii)라는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그 이후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로마의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후 로마 사람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로마 사람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탁월한 점령 지역 지배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회유와 위협이 뒤섞인 정책으로서 어떤 부족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할 때, 그들을 군사 요원으로 이용했습니다. 반면 어떤 부족을 무력으로 
병합하였을 경우에도 그들을 군인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즉, 점령 지역을 가난한 
로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 결과 토지를 잃은 점령 지역의 주민들은 
군대에 들어가지 않는 한 실업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한편 군인이 된 사람들은 
군대의 속성상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령 지역 
주민을 로마의 신민으로 흡수했습니다. 한편 앞서 언급한 베이 시와의 오랜 
전쟁은 군인들의 생계를 위협했습니다. 그 군인들은 본디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며 농사지을 시간을 잃은 군인들은 생계가 
어려워집니다. 로마에서는 그 해결책으로서 군인들에게 보수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군대에 더 큰 활력이 생기고 이제 로마의 군대는 
전문적이고 우수한 집단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한 로마는 시야를 넓혀 지중해를 장악하려 
합니다. 그 결과 당시 거대한 해상 세력이었던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그 전쟁, 즉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로마는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그 결과 로마는 세계 제국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건설된 로마 제국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통해 실질적인 
황제로서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제정의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로 이름을 바꾼 옥타비아누스의 통치 이래 로마는 이제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는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게 됨. 국토는 5현제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당시 극대점에 달했고, 정치와 경제는 
안정되었으며, 학문과 예술은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로마 제국 내에 많은 건설 
사업을 통해 교량과 수도(aquiduct)가 건설되고 도로가 정비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후대에 길이 기억될 문화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그리스 사람들이 추구했던 본질의 천착, 인간 존재의 규명 등등 철학의 
분야에 있어서는 독창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반면 이들의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정신은 법률, 도시 설계, 건축, 도로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크나큰 진전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콜로세움과 같은 건물은 
아직도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고, 그들이 건설한 도로는 유럽의 곳곳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트리보리아누스에 의해 집대성된 로마법은 성문법의 표본으로서 영국의 
불문법과 함께 법 체계의 양대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로마의 문명이 갖는 또 
다른 중요성은 그리스와 동방의 문명을 서부와 북부 유럽으로 전파시켰고, 그 
과정에서 라틴어가 중세를 통해 만국 공용어로 정착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로마 제국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 번영 속에 불안의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음에는 로마 멸망의 원인과 게르만 민족의 
침입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II

 앞에서는 로마가 성장하고 번영을 구가하게된 원인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로마가 구가하던 번영 속에 이미 불안의 싹이, 즉 몰락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 멸망에 대한 원인을 
다소간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이 방대하게 확장되었고, 그것은 
로마에 풍요로운 보화를 안겨다 주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위태로운 문제점들 역시 함께 안겨다 주었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가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그 이전의 공화주의적 
헌법으로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고 해결할 수도 없었던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귀족층 내부의 권력과 부를 둘러싼 암투와 내란은 로마 
제국 전체를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귀족층 내부의 분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경제, 사회, 정치적 생활 방식에 있어서의 
전면적인 변화였습니다.
 포에니 전쟁 이전에 대부분의 이탈리아의 로마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 가족의 
일손만으로 충분할 정도의 농토를 스스로 경작했습니다. 그보다 넓은 농지를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곡식을 경작하면서 일용노동자나 예민, 혹은 
소작인을 사용했지 노예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14년에 걸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탈리아의 농업 형태에 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전쟁에서 복귀한 
사람들은 더 이상 농지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소작인이 
되거나 일용 노동자의 직업을 찾아 로마 시로 진출합니다. 이들이 전쟁동안 
버려 두었던 땅은 보통 부유한 사람들이 독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소유한 
땅을 대규모의 농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뒤에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농장주들은 올리브나 포도주를 위한 포도 같이 현금 
전환이 용이한 작물을 기르거나, 그 땅을 가축을 사육하는 목장으로 
바꾸었습니다.
 부유층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쟁으로 인해 토지의 가격이 
하락했고, 농장에 필요한 일손은 전쟁 포로로 이루어진 노예의 노동력으로 거의 
무제한으로 값싸게 공급되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적법한 
방법과 불법한 방법 모두를 동원하여 공공의 토지를 획득하고 소규모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소외시켰습니다. 그 결과 로마는 부자와 빈자, 토지 소유자와 
비소유자, 특권층과 박탈층이라는 두 계급으로 분리됩니다. 그리하여 이제 
공화국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헌법적인 마찰이 빚어집니다. 라티푼디움을 통한 자유농의 몰락은 심한 빈부의 
격차를 유발하여 사회적 불안의 씨앗은 이미 로마의 번영 속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경제는 본질적으로 약탈 경제로서 생산의 구조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약탈의 혜택은 로마시의 주민들과 변경의 속주 지역의 
귀족들에게만 돌아갔습니다. 로마 문화의 유산이라고 자랑하는 도로망조차 
군사, 행정적인 목적으로만 쓰였지, 상업적으로 사용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그 허가가 내려진 적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자유농이 몰락한 
반면 귀족층은 사치와 향락의 연회속에 흥청거렸습니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되듯 귀족층의 사치가 유일한 원인이 되어 로마가 멸망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476년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 사람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을 설명하려 합니다.
첫 번째로는  도덕적, 군사적 설명이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이제 로마 사람들은 
향락으로 흐르며 군대에 종사하기를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돈으로 사온 이민족 
용병들에게 국토 방위를 맡김으로써 전체적인 군률이 저하되고 국토를 
수호한다는 적극적인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게르만 사람이 장군의 
지위까지 오르는 일이 흔히 있었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켰다는 것은 그 단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군사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제국 말기에 로마의 변경에서는 동시에 두 
곳 이상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었고, 로마 제국은 그런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둘째로는 문화적 측면의 설명이 있습니다. 라틴어가 세계어로 통용되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배우기 어려운 언어입니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언어로 국한되어, 
제국 전체의 인민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언어가 없었고, 그것은 제국 인민 
전체의 공동적인 관심사나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세째로는 경제적 설명이 있습니다. 부재지주가 토지를 독점하자 농민들을 
소작인이 되었습니다. 이들 중의 다수는 도시 빈민으로 바뀝니다. 한편, 
대농장은 전쟁이 지속되는 한 전쟁 포로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었으나, 2세기 
경 국경이 고착되면서 더 이상의 전쟁 포로 수급이 불가능해집니다. 그 결과 
토지가 황폐화되고 농업 생산력이 감소됩니다. 전체적인 농촌 경제의 쇠퇴는 
도시 경제까지 마비시킵니다. 이에 따라 귀족들은 지방의 장원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것은 도시의 황폐화라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네째로 정치 제도적 측면의 설명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여러 통치 기능은 
황제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권한을 확립시킬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제국 말기에 황제는 선출도 아니고 
세습도 아닌 혼란의 연속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황제가 양자를 지명하여 그가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군부의 승인을 얻어야 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현명한 황제조차 코모두스라는 무능력한 양자를 
지명했습니다. 그 결과 3세기 중엽부터 로마 제국은 고질적인 내란과 경제 
파탄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이렇듯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리고 그외의 다양한 이유를 대며, 
로마의 멸망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러한 요인들이 로마 제국의 멸망을 완전히 
해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제도상의 결함이나 사회적인 문제에 앞서는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존재했을지 모릅니다.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사람은 <로마제국 흥망사>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기본은 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설명은 아직도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멸망은 도를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자연적이고 불가피하게 발생했다. 
번영은 쇠퇴의 원리를 무르익게 만들었다. 정복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파멸의 
원인이 증가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우발적인 사건들이 인위적인 버팀목을 
제거시키자 마자,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체는 그 자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해버렸다. 멸망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었다. 우리는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가를 찾아보느니 차라리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동안 
존속했는가 하는 사실에 놀라야 할 것이다."

 그 "인위적인 버팀목"을 제거시켰던 "우발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게르만 
사람들의 침입이었을 것입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혹은 침입이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그 이동이 있기 이전부터 게르만 사람들은 국경 지역에서 로마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4세기와 5세기에 게르만 
사람들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목적에서 로마 국경 밖의 게르만족 영토에 
"sub-Roman"이라는 즉, "준로마"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로마의 중요성과 위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위대한 문명권을 파괴시키러 들어온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출발점으로 삼기도 하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표현까지 나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반드시 문명을 파괴하러온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정의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게르만 사람들은 그렇게 원시적이지도 
야만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대부분이 정통적인 로마의 카톨릭은 
아니지만 아리우스파의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기독교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그들은 낡고 노쇠한 로마 문명에 젊은 피를 수혈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게르만족은 창조적인 결과를 초래하면서 로마 문명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침입자로 바뀌게 
된 것도 오히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스로부터 약속 받았던 물질적인 도움을 
거절당하고 로마 사람들로부터 박대를 받게되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로마 제국이 붕괴하면서 서부 유럽이 당면했던 가장 큰 과제는, 이제 
문화적으로 우월하지만 반면 퇴폐하고 노쇠에 빠진 로마 문명권과, 
문화적으로는 열등하지만 강건한 도덕적 기강을 지니고 있던 게르만 문명권의 
인적 자원을 독창적이고 창의적으로 혼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다음에는 로마의 문명과 게르만의 문명을 함께 존중하면서 마찰 없이 
절충시키려고 노력하였던 동고트족의 국왕 테오도릭과 그 밑에서 수상으로 
봉직하였던 로마의 학자들인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선의에 찬 초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대의 
철학자인 보에티우스는 마침내 테오도릭에 의해 처형됩니다. 그가 맞게 된 
불행한 운명은 이질적인 두 문명권의 접근이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I

 동고트족이나 그 국왕이었던 테오도릭은 게르만족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특히 테오도릭의 행적에 대해 말하려는 
이유는 로마의 문명을 보존하면서 게르만의 문화 역시 고수하려던 그의 시도 
속에서 로마와 게르만과 기독교의 요인들을 창조적으로 결합시켜 서부 유럽의 
출발점을 이루었던 중세의 참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비록 
나중에는 결별하게 되지만 테오도릭은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라는 로마의 
학자들을 수상으로 기용하고 그들의 능력을 아낌으로써, 중세에도 고전의 
학문이 끊어지지 않고 맥이 이어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본디 동고트족은 375년 흉노족에 의해 붕괴되었던 고트 왕국의 한 
갈래였습니다. 5세기 중엽에 이르면 동고트족은 세력을 많이 회복하여 젊은 왕 
테오도릭의 주도 아래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제논은 이이제이의 수법을 써서 
테오도릭을 용병대장에 임명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오도아케르를 무찌르면 
그곳의 지배를 맡기겠다고 회유합니다. 그리하여 테오도릭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자신의 손으로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군림합니다. 
이제 테오도릭에게는 로마의 귀족, 동고트족의 왕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붙게 되었습니다. 테오도릭은 합법적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지배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테오도릭은 능력과 야망이 
있는 지배자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볼 때, 
그는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겨냥한 음모가 
빈번히 꾸며졌습니다. 테오도릭이 다스리던 기간에 로마 사람들과 게르만 
사람들이 협력하여 공동적인 지배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두 민족 사이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로마-게르만 통합 국가가 탄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526년 
테오도릭이 사망한 뒤 10년이 지나기 전에 동로마와 동고트는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동고트 왕국이 붕괴되면서 이탈리아 대부분이 황폐화되었습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로 침입할 때 이미 기독교로 개종해 있었지만, 그들의 
기독교는 정통이 아닌 아리우스파의 기독교였습니다. 그것은 이탈리아나 동로마 
제국의 정통 기독교와 마찰을 빚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플에 포로로 있으면서 로마식의 교육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유능하고 지적이었던 테오도릭은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에서 
뚜렷한 목표를 세웁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게르만 민족 문화와 종교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로마 사람들의 이탈리아 내부에서 일종의 정치적, 
경제적 공생 관계를 확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테오도릭은 많은 로마의 
제도를 찬미하면서 그들의 통치 방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로마 사람들을 
고위 관리로 등용합니다. 그는 동고트인의 왕이었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로마 
사람들에 대한 왕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테오도릭의 로마-게르만 융합 국가에서 군사력은 게르만 전사들이 
담당했고, 그들은 로마의 원로원이나 관료들과는 구분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게르만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보호해주는 대신 로마 사람들의 땅에 
거주할 권리를 얻는다는 오래된 hospitium이라는 원리가 복구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고트인들은 법, 세금, 화폐, 행정 제도 등에 있어서 자신들의 
체제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 로마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옛 로마 
제국의 제도는 대체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즉, 관직에는 로마 
사람들만이 등용될 수 있었고, 원로원은 여전히 로마 시에 존속했으며, 로마 
사람들의 축제일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테오도릭은 자신의 포고문을 
칙령(edict)이라고 불렀습니다. 칙령이란 황제에 종속하는 로마의 관리에 의한 
행정적인 포고문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테오도릭은 동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조화로운 정치를 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국 황제의 대외정책은 어느 특정 민족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아리우스파의 동고트족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술책이 만들어집니다. 그리하여 동고트와 로마 
사람들 사이의 마찰이 일어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테오도릭의 지배는 점차 
가혹하게 바뀌어갑니다. 525년에는 자신의 수상이자 대학자이던 보에티우스를 
반역의 혐의로 처형하였고, 자신이 사망했던 526년에는 교황 요한 1세를 
박해하며 이탈리아의 모든 기독교 교회가 아리우스파의 고트 사람들 수중으로 
넘어가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테오도릭의 태도가 변화하였고 또한 로마의 세계가 게르만 침입을 맞아 
변해가던 이 시기의 학문의 상태는 두 명의 탁월한 인물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의 생애를 통해 살필 수 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로마 최고의 
원로원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로마의 귀족적 교육을 받은 그는 505년 
테오도릭을 만났고 처형되었던 525년까지 20년에 걸쳐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여러 관직을 거쳐 510년에는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고 523년에는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된 그는 항상 테오도릭을 수행했으며, 동고트왕에게 즉 
게르만인에게 충성을 바친 로마의 인재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가 성공을 거둔 것은 관료로서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대단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고, 공직에 있으면서도 학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의 최대의 야망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몇 가지 준비 작업을 
했는데, 그것이 이후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서 철학적, 논리적 사고를 위한 
입문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관한 책을 
번역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해석론>이었습니다. 그 작품의 중요성은 
대단히 큽니다. 그는 여기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언급을 
분류함으로써 고대 말기에 최대의 학문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런 유산의 
본질이 무엇인지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중요성은 그 
때까지 그리스어로만 사용되던 복잡한 정신의 작용 과정을 논의함에 있어서 
라틴어를 도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렇게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의 용어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말에서 철학의 용어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용어가 정착되어 통용될 경우 우리는 일관적으로 철학의 논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고대 말기, 중세 초기의 서부 유럽 세계에 
신학, 법률, 논리학, 형이상학 등의 설명을 위한 도구를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후의 토마스 아퀴나스나 데카르트는 이런 그의 작업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유럽의 대학에서 논리학이 
크게 부활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바로 보에티우스의 
저작이었습니다. 한편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독교 신학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최초의 시도로서 후에 
기독교 사상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다음 주 중세 
기독교에 대한 강의에서 아퀴나스에 대한 이야기에 참고하기 바립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보에티우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의 위안>이라는 작품으로서, 그것을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테오도릭 치세의 말년을 간단하게라도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말한 바 있듯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동로마제국에서는 이들의 세력을 경계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6세기 초 
동로마에서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박해가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동로마에서는 로마의 고전 시대로 복귀하자는 열풍이 일어났고, 그것은 로마 
사람들이 게르만의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로마 사람들 사이에 은밀한 
편지가 오고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와중에서 보에티우스는 동로마와 
비밀스레 서신을 교환하였다는 죄목으로 524년 투옥되고 약 1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낸 뒤 525년에 처형당합니다. 이 사실은 동로마제국의 은밀한 교란 
작전이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철학의 위안>을 저술합니다. 이것은 
대화체로 된 책으로서 보에티우스 자신과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의인화된 여자가 
산문체의 대화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서 philosophy, 즉 의인화된 
'철학'은 보에티우스를 여러 단계의 철학적 명상으로 인도하면서 진정한 행복과 
최고의 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 대답이란 진정한 
행복과 최고의 선이란 곧바로 신이라는 결론입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 
기독교적인 신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후의 학자들은 보에티우스가 표면적으로만 
기독교도였지 실지로는 고전적 전통에 의존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에티우스가 기독교도였는가 아니었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불행과 행복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인 사고의 틀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보에티우스의 결론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의 계획에 의한 정의(正義)를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보에티우스 개인에게 내려진 불행 역시 신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널리 애독되어 보에티우스는 중세에 
가장 애호 받는 로마의 작가가 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성인으로까지 추대되어 
단테의 <신곡>에서는 "천국"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보에티우스가 처형당했던 일은 동고트족의 이탈리아 왕국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테오도릭 말년과 그 이후에 동고트 왕국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그것은 보에티우스의 실질적인 후계자였던 
카시오도루스의 생애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카시오도루스는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학자였던 보에티우스와 달리 구체적인 역사적 
현상에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문제들, 즉 로마의 문화를 어떻게 
고트족에게 설명하고, 고트인의 특성을 어떻게 로마 사람들에게 알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그의 글은 고트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카시오도루스가 자신의 역사서에서 내린 결론은 고트족 역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므로, 고트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문명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서로간에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테오도릭의 사망 후 왕위를 물려받았던 
그의 유능한 딸 아말라순타가 암살당한 후, 동고트인과 로마인들 사이에는 오랜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은 카시오도루스의 고귀한 명분이 헛된 
것임을 확인시켜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카시오도루스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은퇴하여 고향인 남부 이탈리아에 은둔하면서 독서로 소일했습니다. 그가 지은 
최후작, <신적, 인간적 강의>는 백과사전식 저술로서 몇 세기에 걸쳐 유럽 
학자들의 지침서가 됩니다. 이 책은 지식을 주제별로 나누어 분류하고 
구조화시킵니다. 여기에서 카시오도루스는 마르티아누스 카펠라가 만든 일곱 
가지의 인문학을 3과(trivium)와 4과(quadrivium)로 나누었습니다. 3과는 
문학적인 것으로서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고, 4과는 수학적인 것으로서 산술, 
기하학, 천문학, 문학이 포함됩니다. 그런 학문의 구분은 17세기까지 변치 않고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의 저작은 고대 세계의 지적 
유산을 대단히 농축시켜 단순화된 형태로 후대에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그 
유산을 물려받아 이용하면서 후대인들은 그것을 확장시켜나갔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는 게르만 사람들이 주도하게 
된 유럽의 사회에 로마의 유산을 전달함으로써, 진정 새로운 유럽이 고대의 
여러 유산과 게르만의 새로운 인적 자원을 흡수하며 출발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유럽 중세의 정신적인 중추였던 기독교 문화의 성립과 
만개와 붕괴 과정에 대해 각기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오캄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