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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전 06시 46분 20초
제 목(Title): 조한욱/ 그리스사람들의 자신감과 자만심 


출처: 조한욱 교수 홈페이지 

조한욱 (hocho@cc.knue.ac.kr)  조회수 : 1234 , 줄수 : 48  
EBS 교양강좌 98/4/8:그리스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만심  
1998년 4월 한 달 동안 일주일에 2회씩 진행했던 EBS 교양강좌의 원고를 
올립니다. 앞서 올린 글들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서구 문명의 시작: 그리스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만심

I

 앞으로 8회에 걸쳐 서양사의 흐름에 대해 지성사의 측면을 약간 강조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조한욱입니다. 오늘은 서구 
문명의 기원을 이룬다고 일컬어지는 그리스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의 이전에도 많은 문명권이 존재했는데 
'왜 특히 그리스를 서구 문명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는 오늘날 우리가 본다고 하여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가 새로운 
세력으로 탄생하던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위대한 문명권을 제치고, 서구 문명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인가'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의 설명을 위해서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 대표되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과 그리스 문명의 특징에 대한 
비교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권에서는 나일 강과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강을 다스리면서 
함무라비 법전, 길가메쉬 서사시, 사자의 서, 피라미드 등등 불멸의 문화 
유산을 인류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리엔트 문명권의 문화 유산을 
살펴본다면, 그 기저에 깔린 한 가지 핵심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는 신에 대한 믿음이며, 인간은 그 앞에서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집트에서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곧바로 신이라고 추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은 변덕을 부리며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그 앞에 선 인간의 존재는 위태롭고 왜소한 
것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예를 찾는다면, 신들은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 아이들 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화가 나서 인류를 
몰살시키기로 작정하고 대홍수를 뿌립니다. 그러다가 그 도중 신들이 어느 정도 
뉘우쳐서 우트나피쉬팀이라고 하는 한 가족만을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가족이 선택된 것은 그들이 착한 일을 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없이 신의 변덕에 의해 우연히 결정된 것입니다. 즉, 인간은 가장 착한 
일만 하고 신을 충심으로 떠받든다고 할지라도 신은 그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굴욕적일 정도로 신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법을 따라야 하는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법이 왕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왕은 곧바로 신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 오리엔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오리엔트와 
그리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신은 
메소포타미아의 신들과 흡사한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마법과 주술 역시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리스의 법 역시 
신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 오리엔트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관념 체계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놀랄만한 일은 그런 유사성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자연주의적 탐구 정신을 발전시켰고, 그것에 
이들의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탄할만한 사실은 
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전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관념을 발전시켰고, 그런 
과정에서 인류 일부의 진행 과정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지금의 터어키)에 살고 
있던 그리스 사람들은 지적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계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등등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자연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예를 여러 가지로 제시해 보겠습니다. 먼저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탈레스에 대해 알아봅시다. 기원전 6세기에 탈레스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그는 우주가 물로 이루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우주에 대한 합리적 탐구 방식의 출발점이었고, 따라서 철학과 
과학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이라고 말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물은 
고체와 액체와 기체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물이라고 말한 더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오리엔트와 
비교해보지요. 오리엔트의 한 전설에 따르면 태초에 모든 곳은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바다 위에 멍석을 깔고 흙을 만들어 멍석 위에 쌓아놓음으로써 
바다와 육지가 나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탈레스가 했던 일은 이 오리엔트의 
전설에서 신의 힘을 제외시켰던 것이었습니다. 탈레스 역시 만물은 태초에 
물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구 위의 모든 것은 나일 강의 
삼각주가 물에서부터 걸러진 흙에 의해 만들어졌듯 자연적인 과정에 따라 
물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랄만한 과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즉, 그 요점이란, 신의 힘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수많은 
사실들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사실들을 일관적인 상으로 엮어낼 수 있는 체계를 
제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은 신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크세노파네스라는 사람은 인간중심적인 신관에 대해 표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즉, 사람들은 신이 사람처럼 태어나서 옷을 입고 말을 하며 
인간과 같은 신체를 지녔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크세노파네스에 
따르면 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이 있어서 사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들이 그리는 신은 소나 말이나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흑인은 검은 얼굴을 한 신을 그릴 것이고, 백인은 흰 얼굴의 신을 
그릴 것이라는 생각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언을 
남겼던 프로타고라스는 "신에 관한 한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다"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이런 합리주의적, 회의주의적 사고 방식은 실제적인 일들에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기원전 400년경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된 의학의 학파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존재에 상관없이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신비스러운 병이라고 알려져 있던 
문둥병에 대해 히포크라테스가 했던 말은 그리스 사람들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내 생각으로는 문둥병 
역시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원인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이 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신비로운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단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신비로운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 신비로운 
것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한편 역사학에 있어서도 
기원전 5세기에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 설명하면서,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역할을 배제시키고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과학적인 역사 서술을 
확립시켰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늘 강의의 뒷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을 것이므로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배제시키려는 시도는 법률에 대한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그리스 사람들은 
어렴풋이 나마 법이 궁극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특히 민주적인 도시 국가에 있어서 
그리스 사람들은 법률이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더구나 그것은 
시민들의 동의에 의해 비준된 것이기 때문에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의 말에 따르면 법이란 
"국가 전체의 일반적인 합의이며, 따라서 국민들은 모든 생활을 법에 맞추어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오늘날 법에 대한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철학, 과학, 의학, 역사, 법률 등등의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던 
합리적인 관념들은 이전의 오리엔트 세계의 지배적인 사고와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곧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끊임 없이 제기될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인간의 정신이 태어나서 질서를 부여하기 전까지 만물은 혼돈 
속에 있었다"라고 말하며 인간 이성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II

 앞서의 강의를 간략하게 간추리겠습니다. 오리엔트의 세계에 있어서 인간은 
신이나 자연 앞에 무기력하고 왜소한 존재였다면,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그것이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시발점으로 보도록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했다는 것, 그것에 그리스 
사람들의 특성이 존재했습니다.
 실지로 고대 지중해 동쪽 구석의 그리스 사람들은 세계의 정복자였습니다. 
한번 세계 지도를 펼쳐보시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지중해의 해안 어느 곳에도 
식민 도시를 건설했을 정도였고, 다르다넬러스 해협을 거쳐 흑해를 따라 
러시아의 남쪽까지 진출한 뒤 코카사스 산맥 너머로 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페르시아 왕국의 침입에 대항하여 
자유민으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영광스러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을 해석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의 한 측에 관련된 사람이 서술한 책이라 하여 
그의 평가에 객관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에서 적국인 페르시아 사람들의 장점에 대해서도 칭찬하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아테네의 완강한 국수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복자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자유에 대한 관념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삼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여왕은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유민으로서 싸우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또다른 삼대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에게 있어서 자유민이 아닌 "노예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권리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오리엔트, 즉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던 방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리엔트 세계에서 자연이 공포 속에서 굴종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그리스에서는 인간의 지성을 통하여 관찰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오리엔트에서 병을 고치던 사람들은 특수한 마법을 행사하며 신과 악령들의 
세계에 능통한 '마술사'(magician)였던 반면, 그리스에서는 
'의사'(physician)가 그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라는 말의 원 뜻은 
자연이 작용하는 방식에 능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 사람들에게 
'세계의 정복자'라는 명칭을 수여할 때, 거기에는 지리적으로 방대한 영토를 
점령하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는 수백 개의 정치적 자치 공동체인 폴리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그 역사의 핵심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아테네였습니다. 
그리스 국가들이 결성한 동맹의 맹주로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아테네는 기원 전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 시대에 정치와 문화의 
면에서 '절정기'에 달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으며, 소피스트들에 의해 
태동된 지적 혁명은 그 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양대 철학 체계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사치하지 않던" 아테네 사람들의 
자신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몰자를 위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에서 극명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인접 국가들 법률의 모범이 된 
독창적인 헌법의 창조자라는 자부심에서부터, 사적인 영역에서 "이웃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해서 질투 섞인 감시를 하거나 악의에 찬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서도 무법한 시민이 되지 않는" 계몽된 형태의 개인주의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한 인물이 
"그리스 사람들은 외국인으로부터 흡수한 것은 무엇이건 결국에는 그것을 한결 
훌륭한 것으로 바꾸어냈다"고 말했던 자신감을 아테네 사람들은 가장 강력하게 
공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정'이란 '하강'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 '하강'을 이끈 
것은 극도의 자신감이 도달한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건너편에 있는 
'자만심'이라는 복병이었습니다. '자신감'에서 뻗어나온 '자만심'이라는 다른 
얼굴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스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성취하려는 오만함에 
'휴브리스'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것은 피할 수 없이 '네메시스'라고 하는 신의 
보복을 받게 된다고 하여 휴브리스/네메시스라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쌍의 
관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비극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부은 발'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연유는 
그가 태어나고 사흘밖에 지나지 않아 두 발목에 구멍이 뚫려 가죽으로 묶여 
버려졌었던 사실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발의 
수수께끼를 알아낸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즉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밤에는 세 발로 다니는 존재가 무엇이냐는 스핑크스가 내놓은 
문제를 알아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닌 수수께끼를 
'안다'는 것은 오이디푸스의 인간적인 오만으로, 휴브리스로 이어졌으며,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몸을 섞게 되리라는 델피의 신탁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 예언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그 모든 노력이 오히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한다는 신탁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살한 어머니의 몸에서 뽑은 핀으로 눈을 찌르고 
자신이 다스리던 테베를 떠나 방랑의 길을 나섭니다. 그것은 신의 복수, 즉 
네메시스였던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한계를 넘어선 자신감이 지니는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해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사>를 통해 아테네 영광의 시대를 기록하였던 
역사가라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아테네 몰락의 과정을 
후세에 전한 역사가였습니다. 현대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헤로도토스에 비해 
투키디데스야말로 엄정하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서술을 실행에 옮겼던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진정 받아야 할 
사람은 투키디데스이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것은 
헤로도토스의 문학성보다는 투키디데스의 합리성이나 과학성을 더 높이 평가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외견상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의 이면에는 휴브리스/네메시스라는 한 짝의 관념에 
바탕을 둔, 즉 비과학적 . 비합리적인 역사관이 잠복해 있다는 해석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해석의 요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맹주로 등장한 아테네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제국주의적 정책을 강화시켜 동맹국들을 속국의 지위로 
전락시켰습니다. 스파르타는 이런 아테네의 강압적 조치에 반발하였으며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궁극적으로 아테네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와해의 길을 가게됩니다. 그런데 아테네 패배의 원인으로서 
투키디데스가 은밀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휴브리스/네메시스에 근거한 
신의 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인간성이 
상실된 전쟁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의 모든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 한 측의 편을 들어 참가를 종용받았던 이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전쟁 
참가를 거부하였던 멜로스에게 아테네는 강압적으로 동맹국이 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멜로스는 아테네의 위협에 대항하여 "지금 항복하는 것은 곧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싸우면 싸우는 동안만이라도 희망은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위협에 굴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로 벌어진 멜로스 
전투에서 아테네는 멜로스 섬의 성인 남자 전원을 살해하였고 여자와 어린이 
모두를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전쟁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적인 오만함 속에서 신의 섭리를 위반한 것을 
징벌하기 위하여 '티케'라는 '운명의 힘' 혹은 '신의 정의'가 작용하였던 결과 
아테네는 멸망의 길을 가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이런 해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구조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에 일말의 진리라도 담겨있다고 인정한다면, 아테네 멸망의 본질적인 
원인은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자만심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아테네를 
멸망시켰던 외부의 세력이 아테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였던 페르시아가 
아니라 그들이 야만국이라고 경멸하였던 마케도니아였다는 사실은 그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부의 강의에서는 마케도니아에 의한 
그리스 몰락의 과정에 대해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III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하여 그리스가 내분을 겪으며 약화되자 기원 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세력을 융성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됩니다. 본디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그리스 북부의 테살리아 지방 이북 지역을 지배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북쪽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은 곧바로 
그리스의 국경을 수호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리스 국경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바르바로이, 즉 미개인이나 야만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기원 전 
9세기 경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처럼 왕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왕의 권한은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은 세습적으로 그 권한을 
물려받았지만 군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그 권력이 확보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좌를 둘러싼 암투와 암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들의 평의회가 왕권을 제한했고, 힘이 미약한 왕이 권좌에 오를 경우 
그것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구조적인 약점 때문에 마케도니아는 기원 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는 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한 잠재력 역시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그리스 사람들과 
유사했으며, 최소한 그 귀족층은 자신들이 헬레네스라고, 즉 그리스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들은 스스로가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를 시조로 모시는 그리스 동남부의 도시 국가인 
아르고스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를 숭상하며 
도입했고,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 게임에 참가할 권한까지 쟁취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면,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말미암아 분란 속에 지리멸렬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뛰어난 
수사학자였던 이소크라테스는 과거에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의 결과 그리스 정치 
세계에 민족적 동질성과 역사성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그리스 사람들의 대동단결을 위한 수단으로서 페르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케도니아에 강력한 왕이 
출현한다면, 그는 마케도니아를 넘어 그리스 전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왕이 출현했으니 그가 곧 필리포스 2세였습니다. 이소크라테스는 
분열에 빠진 그리스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필리포스가 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연설을 남겼습니다. 
이소크라테스가 바라던 것은 필리포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남아있으면서 
페르시아에 대해 그리스 전체의 울타리를 막아줄 범그리스주의의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국왕으로 남아있기에는 
필리포스의 야망이 너무도 컸습니다.
 그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섭정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조카였던 어린 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전에 약 3년 동안 테베의 인질로 있으면서 
그리스의 정치 제도와 전쟁 방식을 배웠던 필리포스는 다른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리스 문화의 신봉자였습니다. 타고난 전쟁과 외교의 
재능과 함께 끝을 모르는 야망으로 말미암아 그는 곧 마케도니아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내부를 평정한 뒤 남쪽의 그리스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암피폴리스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그 지역 내 
스트리몬 계곡의 비옥한 토양과 팡가이오스 산에서 발견된 금과 은의 광산은 
막대한 재원이 되었습니다. 그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필리포스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외국의 정치가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한편 그의 군대를 그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의 전투부대로 만들었습니다. 필리포스는 당시 적대 
관계에 있던 그리스 북부의 테베, 테살리아, 포키스가 내란을 벌이던 것을 
기화로 그 지역을 점령하며 에게 바다 북부 해안으로부터 흑해까지의 해안을 
정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즉 기원 전 4세기 중엽의 그리스는 한 세기 전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는 더 이상 그리스 전역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지도 못했고, 육상 전쟁이건 해상 전쟁이건 그 부담을 덜어줄 동맹국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아테네의 인구는, 투키디데스가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던 흑사병 탓으로 한 세기 전보다도 적었습니다. 이렇게 악화된 조건 
속에서 아테네 사람들은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기도 꺼려했음은 물론, 아테네의 
장군 휘하에 용병을 써서 마케도니아에 저항하려는 시도조차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용병을 위한 자금은 아테네 시민들의 기부금이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의 위협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한 세기 전의 페리클레스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 불운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에게는 아테네 사람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에 호소하며 끈질기게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였던 훌륭한 연설가인 데모스테네스가 
있었습니다. 필리포스에게서 범그리스주의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던 
이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데모스테네스는 초지일관 마케도니아 사람인 
필리포스의 세력 확장을 아테네에 대한 위험으로 간주하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연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아테네 사람들에게 펼쳤습니다. 이제 그의 
연설의 일부를 엿들어봅시다.

 "신처럼 떠받드는 필리포스의 왕국이 영원히 안전하게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아테네 시민들이여, 그와 가장 친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은 그의 동맹자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들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에 그 동맹자들은 다른 방도를 찾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 나태함과 게으름을 곧 버려야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하여 필리포스가 건방지게 진격해와서 당신들을 
행동과 비행동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놔두지조차 아니하고, 포악한 말로 
위협하면서 정복물의 소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영역을 넓혀나가, 우리가 
우물쭈물 지체하는 사이에 우리 모두의 둘레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하는 것입니까? 아테네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에야 아테네 사람답게 행동할 
것입니까? 어떤 일이 생겨야 행동할 것입니까? 내 생각에는 필요성이 생길 때가 
행동할 때라고 보입니다. 그러면 지금 벌어지는 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내 생각에, 자유민들에게 가장 강한 행동의 필요성이 생길 때는 그들이 모욕을 
받았을 때입니다. 마케도니아의 한 사람이 아테네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그리스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 있겠습니까? 필리포스가 죽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게 당신들에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해도 당신들은 또다른 필리포스를 
만들어낼 것입니다.--당신들이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 
그렇게 높이 올라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만함 때문에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아테네 사람들이 데모스테네스의 경고를 알아듣고 받아들였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의 침입에 대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 
진출을 막기에 필요한 희생을 치르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안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데모스테네스에 자극받은 
소수의 아테네 사람들에 의한 영웅적이고 기적적인 몇몇 소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기원 전 338년 보에오티아의 케로네아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인은 아테네를 찬미하면서 필리포스가 
거둔 승리에 대해 "케로네아의 부정직한 승리는/ 자유에 치명적이었다"라고 
읊었다지만, 이미 이 시대의 아테네 사람들은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데모스테네스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테네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고귀한 덕성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스 역사의 대가인 키토라는 학자는 기원 전 4세기 그리스의 정치를, 
필리포스와 데모스테네스라는 두 위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비극적 대결의 
구도로 보고 있습니다. 키토의 대비는 어떤 점에서 공정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란 한 사람은 대제국을 호령하던 국왕이었던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투키디데스를 좋아하던 전문적인 연설문 작성자로서 아테네의 개인적인 
시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데모스테네스의 동료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연설이 경탄할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말에 불과할 뿐, 필요한 것은 
행동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필리포스에 
대비시킨 데모스테네스의 상은 과장된 것일 수 있고, 애초에 키토의 대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키토의 대비가 정당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위대성이란 
다스리는 사람이 많고 지역이 방대하다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리포스의 침공에 맞서 아테네 시민들을 독려하여 싸우려던 
데모스테네스가 패배를 예상하였는지 아닌지를 알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최소한 한낱 시민으로서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려던 
데모스테네스의 올곧은 정신은 그 위대성에 있어서 분열된 마케도니아 왕국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를 통치함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페르시아까지 
정벌하려고 계획하였던 필리포스의 위대성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키토의 대비가 올바르다고 믿는 것입니다.
 케로네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지 2년이 지나 필리포스는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후계자가 평범한 인물이었더라면 마케도니아 왕국은 곧바로 와해되었을 
것이며, 그리스는 독립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리포스의 아들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였습니다.
 내일은 로마의 역사에 대해 로마 말기에 게르만의 인적 자원을 흡수해가던 
과정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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