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6년02월01일(목) 19시59분50초 KST 제 목(Title): 독소전의 절정, 쿠르스크 전투 (4) 1943년 2월, 당시 퇴역하여 예비역으로 돌려져 있던 하인쯔 구데리안 상급대장에게 히틀러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아버지라 불리웠으며, 실제 독일군 기갑 부대의 창시자이며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에서의 독일군 신화의 주역이었었다. 프랑스에서는 제 19 기갑군단을 이끌고 독일군 최선봉을 맡았고 러시아에서는 제 2 기갑군을 이끌고 스몰렌스크, 키에프의 대 포위전의 승리를 일궈냈다. 하지만 그는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격전에서 툴라 남방에 위치한 부대를 히틀러의 승인 없이 퇴각시켰다는 이유와 당시 제 4군 사령관(--이때는 중부집단군 사령관이던 --) 클루게 장군과의 불화로 해임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독일 기갑부대의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구데리안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그가 해임했던 구데리안에게 다시 `기갑총감'이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이 새로운 직책은 사실상 독일군 기갑병과 전체의 생산부터 배치, 작전에 이르는 모든 포괄적인 분야를 감독할 수 있는 상당한 직위였다. (--단 포병 관할이던 돌격포를 기갑병과로 돌리는데는 실패했다) 구데리안은 이 직책에 취임하자마자 히틀러의 명령을 뒤집고 판터와 티거의 대량 생산이 보장될때까지 4호전차와 3호 돌격포 등의 대량 생산을 지속할것을 명령했다. (3호전차는 43년 중반에 생산을 중지하기로 했다) 구데리안은 특히 1943년을 일종의 전 독일군 재정비의 기간으로 설정할 것을 요구했다. 단 600대밖에 없는 전차로 전 독일군이 유지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시급한 과제는 전차와 각종 전투장비를 완전편제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섣부른 공격을 먼저 감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1943년에 축적된 전력으로 1944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단 필사적으로 이 봄의 휴식 기간 동안에 가용한 전 생산력을 동원, 기갑 부대들의 전력을 보강하는데 힘을 썼다. 독일군의 전력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독일군의 노력이 경주되던 1943년의 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