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6년02월01일(목) 20시17분33초 KST 제 목(Title): 독소전의 절정, 쿠르스크 전투 (5) 3. 1943년 하계공세의 결정 한편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이제 봄 뒤끝의 작전을 구상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2가지의 복안이 있었다. 첫째는, 기동방어 작전이었다. 쿠르스크 돌출부의 잔뜩 구부러진 전선 -- 무려 400km 이상이나 늘어나있는 -- 을 방어하려면 독일군의 현 전력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단 독일군 남익은 과감히 벨고로드와 하르코프 를 버리고 전선을 직선화시키기 위해 후퇴한다. 그렇다면 소련군은 이곳을 회복하기 위해 또다시 무질서하고 맹렬하게 전진을 계속할 것이며 이때 유리한 위치를 미리 장악해놓고 적을 충분히 끌어들인 후에 격멸하여 심대한 전력차를 극복하며 독일군 전력의 전반적 회복을 기다린다. 둘째는, 선제공세 작전이었다. 쿠르스크 돌출부를 없애야 중부집단군 - 남부집단군 간의 효율적 협동이 가능해지므로 아예 이 돌출부를 벨고로드 방면에서 파고들어 남부로부터 절단해 버리고 이 돌출부 내에 갇힌 소련군을 격파해버린다. 그렇다면 소련 중부전선의 전력을 상당히 줄일 수도 있으며 전선은 직선화된다. 더욱 상황이 좋아진다면 모스크바 방면으로의 전진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공격하는 측으로의 손실과 부담이 커질 위험도 있었다 -- 43년 동계공세처럼. 만슈타인으로서는 첫째 안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43년 동계공세에서 보여줬듯이 방어하는 측은 훨씬 손실이 적었으며 독일군의 능력은 기동방어에 대단히 적합했다. 부족한 기갑부대를 집결하여 소련군의 핵심을 치고 빠지는 작전을 쓰면 소련군의 전력을 서서히 고갈시킬 수 있었으며 이는 반격으로 전환되기도 용이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히틀러로서는 어떻게든 43년 늦봄 ~ 초여름 무렵에 공세가 재개되기를 바랬는데 그것은 독일과 연합하고 있던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동맹국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미 스탈린그라드 방면에서 동맹국 부대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동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핀란드 와는 레닌그라드 때문에 접촉도 제대로 안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동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터키를 동맹국으로 끌어들일 필요도 있었다 --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선 독일군이 아직 건재하다는 상징적 효과를 보여줘야만 했고 그후 중부전선을 안정시킨 후에 레닌그라드에 전력을 집중하여 핀란드와의 협동을 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만슈타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두번째 안을 채택하고 땅이 다시 굳어질 5월경에 공격을 재개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기갑사단은 전차를 계속 수령하고 있었으며 각 사단은 훈련, 보급에 여념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