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17일 토요일 오후 04시 42분 35초 제 목(Title): 강우방/ 빗살무늬토기, 영원한 우리미술의 출처: 월간미술 2 빗살무늬토기, 영원한 우리 미술의 原形 강우방 | 이화여대 교수 ------------------------------------------------------------------------------- - 일반적으로 미술사학자는 삼국시대 중엽부터 관심을 갖는다. 방법론의 차이로 선사시대는 고고학자가 주로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미술의 원류를 찾기 위해서는 미술사학자도 그 이전의 시대를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신석기시대는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진 시대다. 최초로 선(線)이 등장하는 시대. 인간과 신(神)의 분리가 이루어진 시대인 것이다. 필자는 빗살무늬토기 무늬의 전개 양상을 통해 인간과 신, 직선과 곡선, 우리 나라 미술의 원형을 찾고자 한다.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촐토 높이 25.8cm 빗살무늬토기는 아래 굽으로 인해 기능적으로 불안해보이지만 비례의 극적인 대비로 인해 아름다운 형태를 지녔다. 이 글에서 나는 우리 민족이란 말 대신 때때로 인류란 말을 쓰고 있다. 이제는 그렇게 써도 좋다. 모든 우리 것이 문명 발상지에서보다 시대가 뒤져 있지만 그것은 모방이 아니며, 연장선이 아니며, 우리 나름의 창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품인 석굴암 본존상’이라든가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인 한글’ 등이란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10여 년 전에 강의를 할 때 박물관의 첫 전시실부터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거기에는 주로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많았다. 그 토기의 형태와 무늬들을 살피면서 크게 느낀 바 있어 언젠가 조사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삼국시대 중엽 4, 5세기경(시기가 공교롭게도 불교 공인 시기와 비슷하다)부터 미술사가(美術史家)는 관심을 갖게 되서, 대체로 그때까지의 고고학의 연구대상을 미술사 방법에 의해 심층적으로 연구된 것은 아직 없는 셈이다. 나는 이런 저런 문제를 제쳐 두고 한국미술의 기원(起源)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이유로 우선 고고학의 연구성과를 기다려 언젠가 본격적으로 다룰 셈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모두 섭렵한다는 것은 내게는 무의미하다. 더구나 미술사가의 방법론과 고고학의 방법론은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내 버릇대로 고고학 논문들을 읽기보다 진열실에서 직접 신석기시대 토기들을 읽어 보기로 했다. 2001년 1월 8일. 마침내 텅 빈 마음, 한가한 마음으로 토기들을 사진 찍고 닷새 지난 후 다시 가서 이틀 동안 스케치하고 기록했다. 이 과정에 신석기토기는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약 1만 년이란 단절 없는 길고 넓은 시공(時空)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피가 내 몸에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약간 흥분 상태가 돼 버렸다. 그릇 만드는 솜씨와 무늬를 베푸는 버릇이 지금까지도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내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우리 조상은 분명히 신석기시대 사람이다! 토기의 비중이 커서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토기시대라고도 한다. 신석기(新石器)시대는 구석기(舊石器)시대에 대(對)한 말이다. 그러한 시대로부터 현대로 올수록 변화의 템포가 빨라져서 산업혁명 이래 걷잡을 수 없는 생활과 사고방식의 변화가 일어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일반인들은 신석기시대라고 하면 현대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아득히 먼 시대로 알고 있다. 허긴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드물게 외부의 힘에 의하여 전통과 단절을 강요당하여 일본강점기 이전의 문화는 버림받아 왔으니 신석기시대는 남의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신석기시대란 인류사의 어느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창조적 변혁을 일으킨 시대였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처음으로 철따라 이동했던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바닷가나 강가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농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도끼·화살촉 등 석기를 가공(加工)하여 표면을 반들반들하게 갈았으며 기능에 따른 형태가 완성되어 세련미를 보이게 되었다. 기능에 따라 형태를 확립한 것은 인류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 실로 혁신적인 창조의 시대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조금씩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이 시대에 정착생활의 결과 처음 만들어진 토기의 형태와 무늬였다. 토기는 실로 가장 혁신적인 신석기시대의 창조물이다. 인류 최초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형태에 볼륨(量感)이 있으며 비례가 아름답다. 모래사장 위에 두고 썼기 때문에 길고 바닥이 뾰족하다. 아랫부분으로 가면서 체감되며 마무리짓는 곡선이 매우 완만하고 아름답다. 달걀을 세워 놓은 채 절반을 자른 모양이며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달걀 모양이 빚어 내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은 윗부분이 갑자기 넓어진 대담한 형태도 있다. 인류가 최초로 만든 그릇들의 윤곽선은 아름다운 여러 곡선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가장 만들기 쉽고 기능적으로 가장 편리한 것을 만들려고 했다면 원통형이라든가 육면체에서 위가 터진 되 같은 형태의 그릇이 많이 만들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릇을 처음으로 만든 신석기인들은 이미 입이 크고 배가 불룩하고 굽의 지름이 작은, 그릇 가운데 가장 선호되어 온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를 창조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입은 옆에서 보면 수평으로 만들어서 직선적이지만, 위에서 보면 곡선(圓)이다. 직선의 수평으로 된 굽이 있는 그릇은 전체 볼륨에 비해 그 지름이 너무 좁아 기능적으로 불안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비례의 극적인 대비로 인해 형태가 아름답다.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출토 높이 25.8cm 빗살무늬의 처음은 바로 사선을 토기에 시문하면서부터다. 말하자면 비록 모래사장에 놓았기 때문에 바닥이 뾰족하거나 좁다고 흔히 설명하지만 신석기인들은 기능보다 아름다운 형태에 관심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형태에서 직선과 곡선이 함께 쓰이고 조화를 이룬 것도 불가사의하다. 다시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릇의 크기에 비해서 두께가 매우 얇다는 것이다. 모래가 섞인 진흙을 고르고 얇게 성형하기에 어려웠을 테고 또 700∼800℃의 낮은 온도로 구웠기 때문에 더욱 깨지기 쉬었을 것이다. 사진을 찍으며 높이 50cm 가량의 토기를 들었을 때 매우 가벼웠고 또 깨질까 봐 손에 압력을 넣을 수 없었다. 그러면 두께가 얇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그들 특유의 미감(美感)에서 비롯된 것인가. 나는 고려자기를 만져 볼 때마다 가능한 한 극도로 얇게 만들려 했던 고려사람들의 독특한 미의식(美意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의 청자들은 얇은 것도 있지만 대체로 두터웠다. 우리에겐 그렇게 두터운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미감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한편 신석기 토기는 좌우대칭의 정교한 그릇도 있지만 대부분 비대칭으로 일그러진 형태다. 어떤 것은 일그러짐이 심하며 매우 익살스러워 웃음을 자아낸다. 한계를 벗어난 변형에서 우리는 때때로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혹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게 된다. 한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경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담한 변형과 비대칭이 빚어 내는 익살을 보여 주는 그릇의 형태와 무늬들은 우리 문화의 원형, 바로 그것이 아닌가. 옹기와 민화(民畵), 그 세계의 원형질이 이미 신석기시대의 토기에 알뜰하게 응어리져 있는 것이다. 우리 미술 양식의 불변의 요소 가운데 치졸함과 자유분방함이 있다. 그런 것은 결코 모방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유전인자(불교의 용어를 빌리면 근기(根機))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창조적 변혁의 시대인 신석기시대 저 프랑스의 구석기시대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은 완벽한 사실성을 자랑하지 않는가. 사진기의 뷰파인더를 통해 무늬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나는 흥분돼 있었다. 인류 최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덤덤하고 수더분한, 넉넉하고 일그러져서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우람하기도 한 그릇 표면에 그들은 무늬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생명력있고 아름답게 꾸미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인류 최초이자 우리 민족 최초의 무늬는 어떤 모양들이었을까. 인류의 역사란 신(神)의 세계에서 인간 세계로 이행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새로운 명제는 자아발견의 위대한 선언이었다. 니체는 어쨌든 극단으로 ‘신(神)은 죽었다’고 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나도 생각하게끔 되었으니까. 인간은 신에게 영생(永生)을 애원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방만하게도 자기의지대로 유전인자(DNA)를 조작하기에 이르렀고 인간과 동물을 복제하게 되었으며 수명도 점차 연장시켜 말 그대로 영생을 누리려 하고 있다. 신(神)의 세계는 본질의 세계이고 상상(像想)의 세계다. 인간의 운명적인 한계를 초월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生命)이다. 신(神)과 인간(人間)의 역학적인 생생한 상호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흘러 왔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투쟁과 재산의 쟁탈과 운명적인 고통 속에서 이상(理想)과 행복(幸福)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마음’에서 구했다. 마음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모든 예술품은 신(神)과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의 불가사의하고 경건한 관계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이제 인간은 신(神)의 권좌(權座)에 앉아 있다. 그것도 악신(惡神)의 권좌에. 가공할 만한 대량학살의 무기, 유전인자의 조작,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도덕성의 상실, 인터넷의 가상(假想)공간…,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人本主義)는 결국 이러한 절망과 공포와 천박함의 극치를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가. 〈빗살무늬토기〉 청도 오진리 암음(巖蔭) 주거지 출토 높이 29cm 마름모꼴 시문은 다른 여러 문양을 표현하는 시원이 됐다. 이러한 암담한 종말적인 현실에서 인류 최초의, 우리 민족 최초의 ‘미(美)의 추구’를 대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신(神)의 세계는 본질의 세계여서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인간의 세계는 현상의 세계이며 모든 것이 항상 변하며 순간적이다. 자연이란 늘 변하지만 일정한 공간과 일정한 시간에서 늘 반복하여 변하므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비교해 보면 변화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말해도 좋다. 우리에게 빛을 보내 주는 태양, 그 태양이 서산(西山)에 지면 어두움이 스며든다. 그러나 달이 뜨고 별들이 나타나고 태양은 다시 뜬다. 달은 모양이 늘 변한다. 눈썹같이 가냘픈 모습이 허공에 겨우 걸려 있다가 반달이 되었다가 다시 둥근 달로 되돌아온다. 그런 가운데 북두칠성(北斗七星)은 변함없는 형태로 하늘을 일정한 궤도로 돈다. 늘 제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서 영원회귀(永遠回歸)의 사상이 탄생된다. 비록 업(業)에 의해서 인간의 윤회설(輪回說)이 성립되었다 하나 근본적으로 자연의 영원회귀에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변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이것이 신의 영원한 세계다. 변해서 사라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세계다. 두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이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두 세계의 긴장된 관계와 조화로운 관계가 유지돼야 한다. 신(神)의 세계는 추상(抽象)의 세계다. 변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불변의 상징만 남긴 것이 추상의 형태다. 변하는 것을 불변의 형태로 환원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예술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이것을 예술에서의 영원회귀라 부르고 싶다. 원초적이면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신석기 토기 신(神)은 기호(記號)다. 신(神)이 해독(解讀)되기 어려운 것처럼 기호도 해독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우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神)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개념과 형태는 전혀 다른 듯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신(神)이란 ‘창조(創造)’와 관련돼 있고 결국 ‘생명(生命)’을 만드는 것,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것, 어떤 소재를 가지고 형태를 만들며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무가 자라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계속 성장하는 것. 이것은 신에 의하건 인간에 의하건 창조의 의미다. 우주에 충만한 대생명력(大生命力), 혹은 진리(眞理, 바이로차나), 혹은 성령(聖靈), 혹은 마음, 혹은 신(神)이라고들 부르는 그 어떤 것이 형상화되고 개별화된 것이 모든 사물(事物), 자연과 예술품과 인간들이다. 우주에 충만한 생명력, 질서, 움직임(永遠回歸)과 교감하며 그것이 형상화되고 개별화되면서 탄생하고 존재하는 자연과 예술품과 인간들은 결국 한마디로 ‘기(氣)’의 문제로 집약된다. 기(氣)를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모두 ‘호흡(呼吸)’으로 인식했다. ‘호흡’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이니 ‘토함(吐含)’과 맥을 같이한다. 중국은 《설문(說文)》에서 ‘기(氣)는 운기(雲氣)다. 혹은 호흡을 말한다’고 했고 인도에서는 프라나(prana)라 하여, 인체를 표현할 때 호흡을 들이 마시면 몸이 팽창하는 것처럼 표현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산하(山河)의 구름이나 운무(雲霧)는 천지(天地)의 호흡이라 여겼다. 사람이 우주의 생명력과 교감할 때, 기(氣)와 하나가 될 때, 어떤 사상을 이야기하고, 혹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事物)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 사상이 움트고 생명이 예술품으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믿는다. 바로 신석기의 토기나 마제석기는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다.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면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1975년 일본 연수를 떠나기 전날, 무엇인가에 강하게 이끌려 서울 암사동 신석기유적 발굴현장에 가 본 적이 있다. 둥그런 집자리 한가운데에 화덕자리가 있고 그 모래 위에 놓인 빗살무늬토기― 그 경이로운 풍경은 나를 숙연히 침묵케 했다. 다만 “신비(神秘)롭다”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로부터 20여 년 만에 이 글을 쓰는 나는 감회가 깊다. 실로 영원회귀의 한없는 공간적·시간적 움직임의 궤도에 들어간 느낌이다. 〈빗살무늬토기〉 단편들의 각종 무늬 그 진흙그릇을 만든 사람은 그릇표면을 반들반들하게 ‘갈았다’. 그들은 석기뿐만 아니라 토기의 표면도 갈았다. 그것은 자연적 마티에르를 인위적으로 없앴다. 그 당시 어떠한 자연의 돌 표면도 인위적으로 간 것은 없다. 물살에 자연적으로 마멸된 돌은 있다. 바다와 강 속의 자갈이다. 인간은 바로 그 자갈로 돌도끼나 토기의 표면을 반질반질하게 갈았다. ‘탁마(琢磨)’의 행위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옥석(玉石)을 탁마하여 정교한 장식물(장엄구)로 만들고 불상 등 예배대상을 만들고 학문과 도덕을 탁마한다. 신석기시대인들은 처음으로 표면을 갈아서 형태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석기인들은 무늬를 넣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그림이다. 사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느낌을 형상화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무엇인가 표현했다.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한 의지(意志)가 엿보인다.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토기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다. 짧은 빗금(斜線)들로 둥근 토기 윗부분을 장식하고 다시 횡(橫)으로 무늬를 넣었다. 종(從)과 횡(橫)의 대비적(對比的) 개념을 읽을 수 있다. 마름모꼴, 둥근꼴, 삼각꼴도 그렸다. 이들은 단지 막연한 모양, 순수한 모양뿐. 아니라 무엇인가 우주의 생명력에 대한 경외(敬畏)의 마음, 그 교감(交感)한 것을 형상화한 것일까.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해서 경외스러운 것, 아름다워서 기쁜 것을 표현한 기호(記號)일까. 누가 알 것인가. 어떻게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누가 기뻐할 것인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무늬가 그 후 청동기시대의 청동기나 철기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어떤 미술의 장르에서든 널리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무늬들이 내포한 상징의 비밀은 그 후의 청동기시대나 삼한시대, 삼국시대의 것들을 살피면서 풀릴지도 모른다. 누가 토기를 만들고 무늬를 어떻게 넣었을까. 그 당시는 사냥, 물고기잡이, 농사 등을 겸했을 터인데 사냥과 고기잡이는 주로 남성의 몫이었을 것이다. 또 공동체 사이의 싸움이 없을 수 없으니 남성들은 좀처럼 여가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술이란 여가(餘暇)의 산물이다. 아마도 여성이나 아이들이 그릇을 만드는 데 주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손길이 섬세하다. 때때로 사려도 깊다. 남성들이 사냥이나 싸움에서 돌아오면 여성과 잔심부름하는 아이들은 마을에 머물며 그릇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했을 것이다. 사선의 결합인 마름모꼴에서 퍼져나온 우리 미술의 문양 무늬를 만드는 도구는 뼈나 나무였을 것이다. 아마도 뼈를 날카롭게 갈아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무늬는 대체로 극히 단순하고 제법 여백(餘白)을 살리지만 때때로 여백 없이 전면을 채우는 경우도 있다. 또 짧은 수직평행선을 긋고 옆으로 간단한 무늬를 넣어 구획짓고 다시 수직평행선을 넣어 구성(構成)을 꾀했다. 가장 많은 것이 사격자(斜格字)무늬다. 빗금(斜線)을 평행으로 긋고 끝나는 것도 많지만, 다시 역(逆)방향으로 그으면 전혀 다른 구성이 이루어지고 어떤 형태를 가진 무늬가 형성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만나는 데 힘이 생긴다. 그러한 서로 다른 방향이 만나 생긴 형태가 마름모꼴이나 다이아몬드꼴이다. 우리는 흔히 선(線)들만 보기 쉽지만 그들이 만든 마름모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圓)보다 먼저 생긴 최초의 완벽한 형태가 빗금의 결합으로 생긴 마름모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마름모꼴은 절반으로 자르면 삼각형이 된다. 선(線)으로 완벽히 둘러진 삼각형이 아니라 마름모꼴이 절반으로 잘려서 한쪽이 터진 삼각꼴이 그렇게 해서 생겨나고 또 서너 줄이 평행하며 생겨나는 동심(同心)마름모꼴에서 동심(同心)삼각꼴이 생겨난다. 다른 방향의 빗금들이 만나지 않고 이루어지는 무늬가 있다. 말하자면 교차하기 직전 갑자기 머문다. 의지가 생겨서 갑자기 머문 것은 그 끝이 급정거하면서 생기는 깊은 골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선(線)에 시작과 끝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 무늬가 그 이후 전개되는 마름모꼴이나 삼각꼴이 여러 개로 조합되고 그 단위별로 방향이 다른 평행선들이 그어지는, 돗자리 무늬의 다양한 형태가 생기는 시원(始原)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방향으로 만나서 교차하거나 교차하기 직전 머물거나 해서 만나는 무늬들의 전개는 그 이후 복합적으로 전개된다. 이들 선(線)은 하나같이 뚜렷하고 힘차다. 음각선으로 그은 것도 있지만 찍은 것(押印)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빗살무늬토기〉 함경도지방 출토 높이 13.8cm 한편 선(線)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연결된) 선(線)이 있고, 끊임없이 단절된 점선(點線)이 있다. 마름모꼴이나 반동심원은 단순한 선이나 점선으로 형성되어 더욱 장식성을 띤다. 점선으로 한 것은 단순한 선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찍어 나가는 깊이로 인해 깊은 인상을 주며 힘이 생긴다. 말하자면 ‘장식성’과 ‘힘’이 부여되는 것이다. 단순한 선과 점선이 함께 무늬를 이루어 대조 효과를 보이는 반면, 점선으로만 무늬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한 줄의 점선(點線)이 아니라 심(心)을 두고 여러 선이 평행하는 평행점선(平行點線)으로 무늬를 이루되, 여러 형태로 구성되어 그릇 전면(全面)을 채우는 경우도 있다. 직선 무늬는 대체로 곡선과 병행하는 듯하다. 그런데 직선으로 무늬를 넣지만 밑이 둥글고 뾰족하기 때문에 그 정점(頂点, 실은 맨 밑바닥)을 향하여 회전(回轉)하는 모양을 구성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형태가 만들어 낸 무늬의 구성이다. 이제 직선으로 만들어진 고정된 형태가 회전(回轉)하기 시작한다. 마름모꼴이 회전하기 시작하여 끊임없이 연결되어 더욱 장식적이 된다. 그것을 계속 연결하려면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소위 번개무늬(雷文)다. 동심원(同心圓)이 소용돌이꼴로 변하고, 또 이것이 끊임없이 연결되려면 엇갈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소용돌이꼴이 다른 방향으로 엇갈려 연이어 가면 덩굴무늬(唐草文)가 된다. 이 덩굴무늬의 창안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추상적이며 기하학적 무늬가 탄생되었고, 그 후 다시 장식성을 띠며 꽃줄기나 구름 모양, 보상화(寶相華) 등 여러 무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보상화 무늬가 가장 화려하고 복잡한 상상의 무늬다. 물론 자연에 해와 달 등 원(圓)과 연속하여 뻗어나가는 덩굴무늬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직선에서 원으로 이행(移行)하는 과정이 그러한 자연물의 관찰에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빗금(斜線)으로 그은 짧은 직선(直線)들이 인류 최초의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직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神)은 직선(直線)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自然)에는 직선이 없다. 어떤 경우든 곡선(曲線)이고 원(圓)의 요소가 있다. 태양도 달도 둥글지만 무량한 별들도 모두 둥글다. 식물도 둥글고 돌도, 빗방울도. 그리고 그 둥근 별들은 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그렇게 도는 지구 주위를 달이 함께 돌고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들 전체는, 우리는 볼 수 없지만, 또 다른 그것보다 더 크고 더 밝은 어떤 것을 중심으로 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은 한계가 있다. 태양을 도는 지구는 굉장한 굉음(轟音)을 내고 있다지만 그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공간 인식에도 한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모든 것은 곡선이고, 모든 움직임도 곡선적이다. 그런데 인간이 최초로 만든 그릇의 입은 수평적 직선이고 그릇 표면에 처음으로 장식한 모양이 직선이다. 인간은 직선을 창조(創造)한 것이다! 빗금(斜線)이든, 수직(垂直)이든, 수평(水平)이든. 그 직선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마름모꼴이고 사각꼴이고 삼각꼴 등이다. 그러한 형태들은 자연에는 없다. 인간이 만든 가장 추상(抽象)적인 절대(絶對)의 형태다. 인간이 그것을 자연에서 발견해 냈는지 혹은 인간 사고(思考)의 산물인지 확실히 모른다. 만일 사고의 산물이라면 인간이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지 그 상징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면, 단지 순수히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 이러한 양자(兩者)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예술논쟁의 핵심이 아닌가. 만일 직선이 인간의 순수한 사고의 창조라면 그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술은 수천 년 전에 신(神)에 항거하여 자연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 자신의 표현방법을 만들어 냈다. 한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근대(近代)의 세계를 열어 보였다. 그러한 사고의 변화 이후 과학·문학·예술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한다. ‘인간은 직선을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우리가 자연 속에서 직선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흔적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움막집 한가운데 솟은 기둥, 마제석검이나 석촉의 직선, 그릇의 입, 그리고 직선의 무늬들, 그러한 것은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에는 전혀 없던 것이다. 그러나 곡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직선이 더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곡선으로 변했는지 혹은 인간이 자연에서 곡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인식하여 재현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자연과 다른 점은 그 곡선이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런 형태가 자연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선(線)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선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선은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그 선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자연의 어떠한 것도, 그리고 자연에 없는 어떠한 것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선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회화(繪畵)란 장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회화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기 때문에 미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회화가 가장 중요하고 앞서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영원에 대한 갈망을 담은 곡선의 연속 원(圓), 반원(半圓), 파상(波狀)무늬, 소용돌이꼴, 이러한 곡선적인 것들이 직선에 잇대 등장하고, 직선과 곡선이 함께 어울려서 공간을 구성하고 조화를 이룬다. ‘조화(調和)’의 개념이 처음 직선과 곡선의 관계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인간(人間)과 신(神)의 관계요, 인공(人工)과 자연(自然)의 관계다. 나는 빗살무늬토기 표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직선과 곡선의 불가사의한 결합에서 비로소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처음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하나의 짧은 빗금이 하나로 끝나지 않고 반복하고 있다. 실제로 연결은 되어 있지 않으나 반복함으로써 연속성을 띤다. 수직선도, 사선도, 마름모꼴도, 삼각꼴도 반복하여 연속적으로 전개된다. 〈빗살무늬토기〉 강원도 양양 지경리 주거지 출토 높이 21.5cm 곡선도 물론 무한히 연속된다. 훗날 나타나는 파상무늬는 영원히 연속된다. 아니 직선도 무한히 연속되지 않는가. 덩굴무늬도 그렇다. 인간은 들판에서 무한히 전개되는 덩굴무늬에서 그 전개의 원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속의 원리를 곡선에 응용했을 것이다. 덩굴 식물 외에 많은 식물, 연꽃·포도·인동·국화 등을 덩굴화하는 것을 보면 연속 곡선에의 강한 의지를 읽어볼 수 있다. ‘연속’의 개념은 중요하다. 그것은 무한히 계속되므로, 인간의 ‘영원(永遠)’에 대한 갈망을 이러한 연속의 무늬에 실었는지 모른다. 그 연속선에는 끊임없는 반복이 있으며 율동감(律動感)이 있다. 이러한 리듬이야말로 생명(生命)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마침내 곡선적인 것을 추구하여 나간다. 토기의 곡선은 아름답다. 마제석검의 전체 윤곽선은 아름답다. 청동기시대의 의기(儀器)들의 곡선은 완벽하다. 하늘을 관찰하는 첨성대의 곡선, 신월성(新月城)의 곡선, 포석정(鮑石亭)의 곡선, 월지(月池)의 곡선 등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극히 아름답다. 단원 김홍도의 필선(筆線)은 춤춘다. 춤사위의 신체 움직임과 넉넉한 장삼의 유장한 율동에서 생명이 탄생된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지금 학계에서는 토기 전면(全面)에 시문(施文)된 것에 이르고, 점차 무늬의 배치범위가 줄어 구연부에 한정되다가 소멸하여 무문토기시대로 넘어가고 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일반적인 무늬의 전개는 그 반대다. 즉 부분적인 것에서 전체적으로 장식되는 것이 미술사에서 일반적인 경향이다. 왜냐하면 부분 시문은 단순하지만 전체 시문은 매우 복합적이고 구성적(構成的)이어서 발달된 양상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신라 토기나 고려-조선에 걸친 고려청자-분청사기의 무늬에서 그 현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 다음의 청동기 시대에 무문토기가 출현하고 신라 토기에 잇댄 고려시대 토기에 무늬가 없어지며 청자 다음의 백자에 역시 무늬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 그러한 전면적 장식화에서 무문(無文)으로 이행하는 것도 그릇 무늬 변화의 역사적 원리라 할 만하다. 직선과 곡선, 그리고 그것들의 다양한 결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문명은 직선을 강조하며 자연과 예술에 군림하려 한다. 신라의 방(坊)을 둘러싼 도로망은 직선이다. 지붕의 처마나 용마루는 곡선이지만 그 나머지는 대체로 직선이다. 따라서 탑도 직선과 (지붕)곡선의 결합으로 추상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철도·다리·고층건물 등의 직선은 무자비하다. 미국 같은 허허벌판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변화무쌍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산하(山河)가 80%인 우리 나라는 무자비하게 산을 끊고 산을 뚫어 철도를 놓으며 질주하고, 산곡(山谷)에 독버섯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른 20층짜리 고층아파트는 소름이 끼친다. 직선이 아니면 문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위대한 직선을 창조했고 동시에 곡선을 추구했지만 자가당착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촬영 때, 그리고 신석기시대 연구의 현황에 대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의 임학동 학예관의 도움이 컸다. 감사드린다. ■ ------------------------------------------------------------------------------- - contents 20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