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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19일 월요일 오전 05시 36분 01초
제 목(Title): 노형석/출판 김상태, 윤치호 일기 


출처: 한겨레 

[출판] 윤치호는 왜 친일을 택했나 

 한국 근대사에서 좌옹 윤치호(1865~1945)의 이름은 영예와 치욕으로 얼룩져 있다. 
개화사상가, 기독감리교계의 거두였던 그는 일제 말 전시단체 등에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노골적인 친일행각으로 오점을 찍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여느 친일파처럼 
단순히 재단할 정도로 녹록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친일·민족진영 사이를 
끊임없이 서성거린 회색인의 삶을 살았고, 사후 가계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윤일선 
전 서울대 총장을 배출하며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친 명문가로 남았기 때문이다. 
소장연구자 김상태(서울대 박사과정)씨가 옮긴 <윤치호 일기>(역사비평사)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윤치호의 복잡다단한 의식세계를 무려 60년 동안의 일기를 
통해 육성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는 유학파답게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영어일기를 
썼는데 책은 1916년부터 1943년까지의 내용을 5부분으로 요약해 담고 있다.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확실한 친일파도 아니면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고수한 
회색인으로서의 독특한 내면세계, 아니 어쩌면 일제시기 조선인들의 보편적인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옮긴이의 평은 일기를 읽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실 세간의 평가와 달리 윤치호는 일기 곳곳에서 일제의 수탈적인 
정치·경제정책과 민족차별정책에 분노를 보이고 있다. 무조건 신민이 되라고 
강요하거나 우리를 이해하면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일인 목사의 사탕발림 같은 
이야기를 그는 코웃음치며 식민정책에 냉소를 보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힘이 곧 
정의라는 약육강식론에 빠져있던 그는 섣부른 독립운동보다 실력양성이 중요하다는 
소시민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3·1운동 참가를 거부하며 시위자들을 
`바보같으니'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시위 발생 뒤 인터뷰를 하러 찾아온 
<경성일보> 기자에게는 그는 “미국이나 유럽 어떤 나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며, 약소민족이 강성한 민족과 함께 살아야만 할 때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1919년 3월6일). 

`흉년에는 기근, 풍년에는 고액세금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전형적인 교육차별 
앞에서 그는 `조선엔 천왕의 복대신 악덕이 가득하다'고 가슴아파했으나 해결책은 
철저히 총독부쪽에 대한 메아리없는 호소와 교육이었다. 이런 체제순응적인 입장은 
중일전쟁 뒤 `일본정신'을 찬양하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등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 변으로 이어진다. 옮긴이는 이와관련해 권두논문에서 사상적으로 자발적인 
친일요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끄집어낸다. 유학시절과 YMCA 총무시절 경험한 
앵글로색슨계 등 백인들의 차별주의에 대한 혐오와 힘이 곧 정의라는 국제정치관 
등이 일제의 변절압력과 겹쳐 이런 인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는 좌우명처럼 무질서하고 파당적인 민족성에 대한 한탄 등에서 비롯된 
양비론적 사고는 결국 그가 친일의 나락으로 빠지는 요인이 되었다고 옮긴이는 
준엄하게 지적한다. 대한매일신문사장 베델의 국채보상금 빼돌리기, 유길준의 
을미사변 관련설, 서북파와 기호파 지식인사이의 지역감정 등을 언급한 대목 등도 
주목할 만하다. 소심한 친일파적 상황논리가 여전한 현실에서 윤리적 품성 대신 
냉엄한 역사주의를 잣대로 삼은 이 저작은 친일파연구에 새 지평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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