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15일 목요일 오후 04시 59분 23초 제 목(Title): 한겨레/ 김용옥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외 김용옥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한국 사회에서 김용옥이라는 이름이 화두가 된지는 꽤 오래다. 고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80년대에 출판한 「여자란 무엇인가」가 대학가를 한동안 떠들썩하게 하더니 요즘은 텔레비전이라는 위력적인 매체의 힘을 빌려 '김용옥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EBS를 통한 '노자' 강의 바람을 등에 업고 최근에는 KBS로 무대를 옮겨 '논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관련기사 관련 라이브폴 “김용옥씨, 대중적 권력 얻으려 노자, 공자 이용“ 김용옥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도포 자락에 박박 깎은 머리, 온몸을 비틀어 대면서 신문지를 찢는 듯 질러대는 목소리, 가끔 튀기는 침, 강의 내내 양쪽 입가에 고여 있는 거품 등등. 개그맨 기질까지 가미된 이런 독특한 언동이 '김용옥 신드롬'에 한 몫을 한다. 이런 그를 두고 재미있다고도 하고, 고사 위기에 처한 동양철학의 구세주라고도 하며, 다른 쪽에서는 '동양철학 날품팔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일반인들은 대체로 재미있게 김용옥 강의를 보고 듣는 반면 활자매체를 통한 김용옥에 대한 평가는 비판일색이라는 점이다. 실제 김용옥에 대한옹호를 글로 만나기란 아직까지는 대단히 힘들다. 신문지상의 힘을 빌려 '김용옥 때리기'에 나선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서지문. 그는 잇단 신문기고에서 김용옥을 '소인배'라고 공격하며 어떻게 소인이 군자를 강의할 수 있느냐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른바 정통 동양철학계에서도 '김용옥 때리기'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싫든 좋은 '신드롬'이라고 일컬을 만한 '김용옥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동양철학 전공 교수인 한영조의 최근 저서「왜 동양철학인가」(문학동네)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이 책에서 "철학의 시금석은 체계성과 일관성이 아닌, 오히려 적실성과 유효성에 있다"고 선언한다. 요컨대 철학은 써먹을 만해야 한다는 뜻이다. 쓰이기 위해서 동양철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형조는 길거리로 나가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강단의 철학보다 길거리의 사주관상이 더 철학적이다"라는 파격 선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이런 한형조가 김용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가 현재 외국에 나가 있어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김용옥이 강단을 뛰쳐나와 텔레비전이라는 길거리에 나섰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50 평생을 동양철학과 함께 살아오다시피 하면서 동양학 전문출판사인 자유문고를 설립, 운영중인 이준영. 그는 김용옥을 두 측면에서 바라본다. 첫째, 김용옥만큼 시들어가는 동양학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인물이 누가 있느냐는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둘째, 그렇지만 그 강의 내용을 볼 때 학문의 정도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준영이 생각하는 김용옥 강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학문이란 일관성이 있어야 함에도 김용옥에게는 그것이 없다. 즉 노자 얘기할 때는 노자가, 공자 얘기할 때는 공자가, 불교 얘기할 때는 불교가 최고다. 이는 결국은 김용옥이 공자, 노자, 불교 어느 것도 모른다는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이준영의 견해다. 그러면서 그는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해 김용옥을 평가한다. 즉 공자가 "향원은 덕의 적(賊)이다"(鄕愿德之賊也)"라고 했는데 여기서 향원이란 모든 것을 좋게만 보면서 나쁜 말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좋게만 보고자 하는 김용옥이 바로 향원이며 학문의 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준영은 김용옥에 대한 비판에도 아주 비판적이다. 예컨대 김용옥은 소인배이니 공자와 군자를 강의할 수 없다는 서지문에 대해 "그러면 서지문은 성인군자이기 때문에 고려대 교수를 하고 있느냐"고 반박한다. 현재의 동양철학이 사주관상보다 못하다는 한형조의 진단이나 '향원'을 인용한 이준영 모두 '김용옥 신드롬'을 어떻게 보아야 할 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철학자여..도올은 도올이다!' 최근 고려대 서지문 교수(영문학)가 중앙일보(9일자)와 문화일보(12일자)에 기고한 칼럼이 화제가 되고 있다. ▶중앙일보 칼럼 '소인이 군자를 講하는 시대' ▶문화일보 칼럼'공자의 말씀과 후학의 혀'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글이 모두 한 사람을 겨냥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14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이 현상을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연속으로 게재된 칼럼이 한 사람을 겨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서교수가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KBS에서 '도올논어'를 강의하고 있는 김용옥 선생. 서교수는 중앙일보 칼럼 '소인이 군자를 강하는 시대'에서 도올에 대한 비난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두가 이렇다. '유교적 군자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김용옥 교수가 논어를 강의한다고 했을 때 근심스러웠지만 설마 공자의 가르침마저 훼손하기야 하겠는가 했다.' 문맥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이어지는 글에서 서교수는 도올이 공자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다며 거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몇 대목을 인용해 보면. → 몇 달이 지난 지금, 김교수의 변모를 기대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 것은 물론 공자님의 가르침이 진흙탕에 내던져졌다는 위기감이 든다. →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기를 알아본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비판을 받으면 분해서 펄펄 뛰는 김교수는.... → 김교수의 KBS 강의준비 부실이나 강의태도를 보면....... → 이런 사람이 소인이 아니라면 누구를 소인이라 하겠는가. 도올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읽기에도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강의를 해서는 안될 위인이 강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니 강의를 그만 두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서교수의 도올 비판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는가? 중앙일간지에 기고해 한 사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이 글은 의심에 여지없는 객관적 증거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그러나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는 학문적으로 도올을 비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서교수는 무엇을 근거로 도올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쌍소리를 잘한다, 겸손하지 못하다, 자화자찬이 심하다, 핏대를 올린다, 쇳소리를 남발한다, 거침없이 말한다, 천박함이 느껴진다... 등이 서교수가 내세운 근거다. 문화일보에 기고한 칼럼 '공자의 말씀과 후학의 혀'에서 서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교수의 논어강의는 이제 겨우 2편에 진입했는데, 나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명백히 틀린 해석이 둘이나 있었다.' 9일자 중앙일보 칼럼이 지나치게 개인적 감상에 기초한 비판이라는 생각에서였는지 12일자 칼럼에서는 도올의 주장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그 두 가지는 다름 아닌,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穩 不亦君子乎)'와 '사무사(思無邪)'에 대한 것이다. 먼저 앞에 부분에 대해 도올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내가 군자다'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서교수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공자가 그처럼 말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사람의 해석이다.' 그리고 나서는 '공자가 <내가 군자다>라고 자화자찬할 사람인가'라고 반문한다. 이에 더해 공자를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자에 대한 모독이고 공자를 숭앙하는 모든 선비들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모든 선비들의 심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 정말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문맥으로 볼 때는 추측을 기반으로 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또 자신을 (동양철학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소개해놓고는 '공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사무사(思無邪)에 대해 도올은 '공자가 남녀간 사랑을 예찬한 표현'으로 해석했고 이에 대해 서교수는 '이는 공자를 모르는 사람의 해석이다'라며 공자가 사랑을 예찬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무사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 즉 '생각에는 간사함이 없다'가 올바른 해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 서교수에 대한 네티즌의 평가는 도올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양분되고 있다. 전적으로 도올에 대한 감정에 편승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도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서교수의 글에 대해 지지의 입장을 명확히 한다. 도올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은 서교수의 비판이 말이 안 된다며 역으로 서교수를 비판한다. 한 시청자는 서교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서교수는 그렇다면, 예컨대 세익스피어의 주옥같은 모든 작품을 완벽히 해석하고 있는가. 교육은 지식의 전달뿐만 아니라,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흥미 유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교수가 요구하는 태도로 강의를 했다간 시청률 때문에 강의가 지속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한 네티즌은 이렇게 도올을 옹호하고 있다. "일반인이 접하기 어렵고, 딱딱한 학문을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린 도올의 강의는 재미있습니다. 그 내용이 정말 정확한지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어려운 학문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요. 제가 한마디 드린다면 아무리 좋고, 유익한 학문이라도 그들만 알고 이해하는 그들만의 학문이라면 개똥철학이 아닐까요?" 서교수를 옹호하며 도올을 비판하는 네티즌도 상당수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도올을 비판한다. "무릇 동양학에서는 지식의 많고 적음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그 지식이 자신의 내적으로 얼마나 체화되었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다. 그런데 도올은 어떠한가?"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은 도올의 강의실력을 인정한다. 우선 그가 강의하면 재미있다는 것이다. 100회를 기획 중인 '도올의 논어이야기'는 이제 36강을 끝냈을 뿐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비판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적극 수렴해서 그를 성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도올에게 기대해 본다. 서교수는 도올을 비판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숭고한 학문이나 사상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인문학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겸손은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지 숭고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하니리포터 지용민 기자 hanfan@hanimail.com 편집시각 2001년02월14일13시30분 KST 기사링크용1(소인이 군자를 講하는 시대) 소인이 군자를 講하는 시대 자기에게 삶의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준 지고(至高) 한 성인이 '한 해설자에 의해 '비하되고 훼손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고통이다. *** 공자의 가르침 훼손 우려 유교적 군자상(君子像) 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김용옥(金容沃) 교수가 논어를 강의한다고 했을 때 근심스러웠지만 설마 공자의 가르침을 훼손하기야 하겠는가 했다. 논어의 핵심적인 구절들은 대체로 뜻이 명백하기 때문에 金교수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도 왜곡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김용옥 교수도 논어를 강의하면서는 조금씩이라도 군자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몇달이 지난 지금, 金교수의 변모를 기대할 수 없음이 분명해 진 것은 물론 공자님의 가르침이 진흙탕에 내던져졌다는 위기감이 든다. 학자는 위대한 사상가도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고 학자에게는 객관적인 냉정함도 필요하다. 그러나 숭고한 학문이나 사상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인문학자가 될 수 없다. 공자의 사상을 접하고서 공자를 무한히 경모하고, 단 하루만이라도 진정한 군자가 될 수 있다면 그날 밤에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공자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볼 수가 없다. 어떤 사상가를 경모한다고 해서 그의 사상의 시대적 한계나 악용될 소지를 감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김용옥 교수는 이미 도올서원에서 공자를 몇번씩이나 강의했다고 하는데 그의 태도와 분위기를 보면 공자가 제시했던 군자상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 같다.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기를 알아본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비판을 받으면 분해서 펄펄 뛰는 金교수는 '人不知而不온' 대목에서는 공자가 등용되지 못해 도를 펴지 못하고 고생한 이야기만 하고 빠져나갔고, 2천년 동안 선비의 수신계가 되었고 金교수가 정말 깊이 새겼으면 싶은 '吾日三省吾身' 은 '한참 아래' 인 증자의 말이라면서 무시해버렸다. 金교수의 KBS 강의준비 부실이나 강의 태도를 보면 '爲人謀而不忠乎'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는데 성실치 못하지 아니한가) 와 '傳不習乎' (전수 받은 것을, 또는 자신이 남에게 전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지 않지는 않았는가) 를 그에게 묻고싶다. 쌍소리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이자 공격과 방어의 청룡도인 金교수는 '君子 出辭氣 斯遠鄙倍矣' (군자는 소리내어 말할 때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멀리 해야 한다) 같은 대목도 역시 증자의 '개똥같은 소리' 라고 일축해버리고, 군자란 모름지기 욕설도 거침없이 퍼붓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것인지? 金교수는 증자와 유자를 자기 종이라도 꾸짖듯이 마구 폄훼(貶毁) 하더니, 드디어는 공자마저 마치 자기의 문하생이나 되는 듯, '사무사(思無邪) 라는 말로 공자가 나한테 점수땄어'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사람이 소인이 아니라면 누구를 소인이라 하겠는가. 1980년대에 金교수가 쌍소리를 종횡무진으로 해서 충격파를 일으켰을 때는 비속어 구사가 일종의 권위거부적 선언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권위의 부재가 위기상황에 이르렀고 젊은이들은 쌍소리하는 어른을 귀엽게 보아준다. 그러니까 중년을 넘긴 어른이 비속어를 남발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재롱떠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도올의 비속어 사용은 천박할 뿐 아니라 지극히 부적절해서 역효과를 낸다. *** 군자의 뜻을 잘 새겨야 가령 사마천이 궁형(宮刑) 을 받았는데 그것은 '××을 발기는' 벌이라고 설명을 하면 그 형벌의 잔혹성과 부당성의 느낌은 사라지고 사마천의 품위만 찢겨진다. 또 공자의 부모가 야합을 해서 공자를 잉태했다는 옛 문헌을 인용하는 것은 가하지만 즉 ×을 해서 낳은 것이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런 표현을 쓴다고 공자가 인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고 말한 사람의 천박함만 느껴진다. 계속 핏대를 올리며 쇳소리로 욕을 남발하는 사나이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남의 가치를 모를까봐 걱정하고, 사욕이 없기 때문에 근심도 두려움도 없고 세속적 이익에 초연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고 안색은 부드럽고 품격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군자의 도를 강의하는 부조화가 재미있지 않아서 슬프다. 徐之文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기사링크용2 = 공자의 말씀과 後學의 혀 문화일보 <포럼> 공자의 말씀과 後學의 혀 KBS에서 ‘도올의 논어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김용옥교수는 지난 주, 최근 자신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로, “9단이 9급하고 바둑을 둘 수 있느냐”라는 비유를 썼다. 김교수가 정말 동양학의 9단이라면 그런 표현은 결코 쓰지 않았을 것이다. 동양의 대 사상가들은 하나같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 높이는 인간을 가장 ‘배우지 못한’ 인간으로 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해설하는 성인들은 하버드대학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도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한문만 해독할 줄 알면 청소년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도를 가르쳤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스콜라 철학에 통달한 학자나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유대민족과 사마리아인의 역사적 관계를 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더 인상적일 수 있겠지만, 그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사람도 그 교훈을 깊이 새길 수 있다.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식한 사도 바울이나 그보다 더 유식했던 후대 신학자들의 이론 때문이 아니고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말씀때문이다. 공자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라는 말씀을, 자아의 철학적 개념이 무엇이고 타자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야 해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주공(周公)의 아름다운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더 볼 것도 없다” 등등, 이제까지 수천만 선비의 좌우명이 되고 민초들까지도 공자의 도를 숭상하게 만든 명언들은 모두 지극히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드대 대만대 도쿄(東京)대를 다녔으니까 자기의 해석이 우월하다는 김용옥교수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 게다가 김교수의 논어강의는 이제 겨우 2편에 진입했는데, 나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명백히 틀린 해석이 둘이나 있었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퇼囚퉎 不亦君子乎)’를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내가 군자다”라고 공자가 말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사람의 해석이다. 공자가 “내가 군자다”라고 자화자찬하는, 그런 사람인가. 도올의 해석은 공자에 대한 모독이고 공자를 숭앙하는 모든 선비들에 대한 모독이다. 공자가 자신에 대해서 한 최대한의 자랑은 “나는 (배움에)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배우는) 즐거움에 걱정도 잊어버리고 늙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였다. ‘사무사(思無邪)’를 공자가 남녀간의 사랑을 예찬한 말인 것으로 해석한 것도 공자를 모르는 사람의 해석이다. 논어 전편을 통해 공자가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 곳은 팔일(八佾)편의 ‘관저 낙이불음 애이불상(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한군데인데, 그것은 남녀가 사랑을 이루어 화락하더라도 도를 넘쳐 음욕에 이르면 안되고, 배우자를 잃어서 슬퍼하더라도 정신을 상할 정도가 되면 안된다는, 애정에 있어 절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거듭거듭 색(色)의 유혹을 경계했다. 애석하게도 공자는 여성에게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고, 구도(求道)의 동반자로서 여성을 갈망했던 것 같지도 않다. 여성이 집안에 갇히고 ‘배움’에서 제외된 사회의 비극이다. 그러니까 공자가 사랑을 예찬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정통 해석이 맞는다고 본다. ‘삼십이립(三十而立)’도 30세에 경제적 자립을 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가 인생에서 추구할 바를 확실히 정하고 그 길에 들어섰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이외에도 도올이 ‘논어이야기’에 나와서 한 말 중에는 30년 이상을 학문을 닦아 온 사람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많았다. 김정일이 사인(sign)도 잘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멋있는 사람이라든지, 김일성 유훈통치가 공자의 가르침에 맞는 것이라든지 하는 말들은 듣는 사람을 난감하게 한다. 북한동포의 비참상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생각해 본 일이 없는가. 그래도 김교수의 사회비판 중에는 새겨들을 만한 쓴소리도 많고 원용하는 일화들도 흥미롭고 여러모로 재미있는 프로인데, ‘논어’는 빼고 ‘이야기’만 해 줬으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서지문·고려대교수·영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