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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88.tnt4.re> 
날 짜 (Date): 2000년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02시 12분 12초
제 목(Title): 유영준/ 백범 민족주의에 대한 소고 


백범 민족주의에 관한 소고
 
유 영준
 『백범연구』1집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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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민족주의에 관한 일반론
 
1. 개념화 및 정의
 
2. 민족주의의 제 차원
 
Ⅲ 백범 민족주의의 전개
 
1. 주된 정치활동
 
2. 삼균주의에 나타난 백범의 민족주의
 
3. 몇 가지 문건에 나타난 백범의 민족주의
 
Ⅳ 결론
 
 

 
 I. 序 論 

1980년대, 특히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그의 
대소강경로선(對蘇强硬路線)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세계는 또다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반목이 강화되는 추세를 띠어 논자에 따라서는 
신냉전(新冷戰 : Neo-Cold War)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래로 제 3세계 국가들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거의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국익추구를 위해서라면 이데올로기 따위는 선반 위에 올려놓긴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거래하고 있는 것 또한 오늘날의 냉엄한 국제관계 
조류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1960년대 중반에 야기된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 정치시대, 즉 
동서해빙(ditente)기류에서 연유되어 각국의 이익 있는 곳에 이념과 체제의 장벽 
없음을 실증해 주는 국제관계의 관례로 화하고만 느낌마저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니엘 벨(Daniel Bell)같은 이는 이데올로기의 종언(終焉 : 
The End of Ideology)을 선언하고 있다.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이 자국의 이익, 특히 경제적 이권 앞에서는 맥추지 
못하는 세태인 듯하나,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쇠퇴라는 장막 뒤에서 더욱 
견고해져 가는 또 하나의 정치적 이념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국이익추구에의 이론적 근거이자 강력한 무기이기도 한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때문에 거의 모든 논자들이 이데올로기의 쇠퇴를 
말하지만 각종의 민족주의는 예외이며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가 자국의 생존과 통합, 그리고 세계 속의 자국의 위치를 확립하여 주는 
각국의 정신적 기반이 되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더구나 
교통·통신수단의 급속하고 눈부신 발달에도 불구하고 지구촌(地球村) 국가나 
세계정부의 실현은 아직도 인류사회의 꿈에 불과한 엄연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아마도 각 나라의 민족주의 실존(實存)의 당위성과 현실성은 더욱 부인키 
어려워진다.

특히 오늘날의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irony)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1945년 민족해방을 외세에 
힘입어 얻게 된 죄 값으로 국토(國土)는 양분되고 남북은 제각기 들씌워진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실험장이 되고 말았다. 북(北)에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질곡 아래 
민족 고유의 정치이념은 애초부터 타파되어야 할 봉건·반동적 잔재로 간주되어 근 
40여성상 말살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한 남(南)에서도 그 이념의 초보적 단계라고나 할 평화적 정권 교체마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제는 대미·대일 일변도, 오늘은 대중 ·소 
관계개선 모색 등으로 이념의 혼란 우려마저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른바 
주체성을 말마다 부르짖는 북에서도 어제는 조 ·중혈맹(朝中血盟)이오, 오늘은 조 
·소혈맹(朝蘇血盟), 내일은 대미 ·대일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확실히 이질적 정치(異質的政治) 이데올로기는 통일문제 해결에의 
궁극적 해답이 아닌 것이 명백해진다고 할 것이다. 남북이 서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념과 체제를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은 분석 여하에 따라서는 우리네 생존과 자손만대의 번영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그 전제가 되는 남북통일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극단적인 외래사조가 
아닌 우리 민족 자신의 주체적 사상에 의하여 이룩될 수도 있다는 논리적 
귀결(歸結)을 낳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 자신의 주체적 사상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일찌기 白凡 
김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 어느 민족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위에 나는 것이다."

즉, 그는 벌써 반세기도 훨씬 전에 민족주의가 그 해답인 것을 확연히 내다보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덧없음을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선견지명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러한 점이 본 소고로 하여금 백범 민족주의를 정치학적으로 재조명코자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다. 본고는 따라서 우선 정치학상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개념화 내지 정의를 소개하고, 민족주의에 내포될 
수 있는 제 차원 또는 요소를 언급하고 난 다음, 白凡 민족주의의 골간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白凡 민족주의의 여러 차원(요소) 이 과연 정치학적 시각에서는 어떻게 
풀이되며, 이러한 해석들이 그 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여하히 재조명케 하느냐를 
분석함으로써 앞서 제기된 우리의 민족문제, 통일문제 등에 대한 대안을 
간접적으로나마 시사케 시도함에 그 목적이 있다.

다만 여기서 부언해 둘 것은 이러한 시도는 과거에 그 본보기가 그리 흔하지 않은 
점과 필자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 및 분석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독자 
여러분과 고인 (故人)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는 점이다. 실은 이러한 학문적 걱정 
때문에 이전에 이 졸고를 내어 놓음을 끝까지 사양하고 망설인 것도 아울러 고백해 
두고자 한다.

Ⅱ. 民族主義에 관한 一般論

1. 개념화 및 정의

정치학에 있어서 보통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내셔날리즘(Nationalism)이란 개념은 
단순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러한 용어 자체가 개념규정상 단답형(單答型)의 것이 
못되며 상당히 복잡하고 논자간에 합의성을 지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미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지금쯤 상당한 정치학적 시각상의 
정리를 보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 대표적인 시각 하나를 소개하면 아마도 hans kohn의 그것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 민족주의란 근대 역사를 결정해 준 제역량의 하나"로 되어 왔으며, 
그것은 18세기 서구에서 나타나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전세계적 운동으로 되었으며, 특히 아시아·아프리카에 있어서의 그것의 
중요성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민족주의 란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그것이 
뿌리를 두는 여러 나라의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아이디어(ideas)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근대 및 우리 시대에 대한 이 
민족주의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13세기의 
기독교에 중요한 것과 같은 뜻을 지닌다』고 하며, 『종교나 매한가지로 
민족주의도 여러 형태를 시현할 수 있으며, 기실 가장 복잡한 형태를 띠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민족주의의 역사적 성장에 대한 연구와 그것의 상이한 
형태에 대한 비교·고찰만이 오늘날 민족주의의 영향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게 
하며,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평화보존에 끼친 장단점을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Hans Kohn 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생제국뿐만 아니라 서구,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들의 현대역사 결정요인으로서의 민족주의의 범세계적 성격은 지난 10 수년에 
걸쳐서는 더욱 분명하다』는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에 관한 개념 규정은 각국 인민들의 역사적 삶의 경험에서부터 
연유되는 그들 인민에 특유한 생활지감(生活知感)에서부터 나오는 일종의 정신적 
연대 내지 일체감으로 보아진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그 
국가가 국내외에서 기타 국가와 다른 독자적 일체감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일체감을 주체성(identity)이라 하며 한 민족이 기타 다른 민족과 다른 이념과 
정치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민족주의(nationalism)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ans Kohn이 말한 바와 같이 『개인과 집단이 민족국가에 대하여 갖는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를 의미한다 할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한 민족이 
자기가 살고 있는 국가의 독립과 자결을 달성하기 위하여 갖는 이념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뜻과 민족주의는 요약해 말하건대 한 민족이 타민족과 
다른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며, 그것은 그 민족 자신의 단결과 협력을 달성키 
위하여 역사적으로 보면, 왕왕 정치적으로 동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2. 민족주의의 제 차원

위에서 본 바와 같은 개념과 정의를 갖고 있는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발양되는 형태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바로 이러한 점이 벽두에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의 의미 내용상의 다양성을 뜻하는 것으로 
민족주의를 시(時) ·공(空)을 초월하는 고정된 정치현상으로 획일화하거나 
정형화하여 논의하기 어려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족주의를 그 함축하고 있는 특정 의미 내용이나 
발양형태의 속성으로 보아 몇 가지의 차원이나 구성요소상의 강조점으로 분류하여 
정형화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결코 아닌 것 같다. 또한 이러한 학문적 
작업은 다양성의 민족주의의 본질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정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논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나름대로 고심하고 연구해 왔으며 그런대로 학문적 
성과를 거두어 왔다. 그 중에서 안병준(安秉俊)교수의 최근의 그것이 필자의 
견해로는 가장 포괄적이며 과학성과 정밀도가 높으며 본 연구목적을 위하여 
유용성과 적실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어 여기에 빌어 쓰고자 한다.

즉, 안 교수는 민족주의에 관한 문헌 연구에서 네 가지의 차원을 발견한다고 하며, 
종종 민족주의·문화 민족주의·저항 민족주의·통합 민족주의·창조적 민족주의가 
그것들이며, 이 들은 제각기 상이한 뉘앙스를 갖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들 민족주의의 차원들이 본 연구의 주제인 백범 
민족주의(白凡民族主義)를 학문적으로 밀도있게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창조적 민족주의의 차원을 첨가하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를 첨가키로 한다.

1) 종족민족주의(Ethnonationalism)

하나의 종족이 그 인종의 동질성을 중심으로 갖는 감정상태를 종족 민족주의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근대화 이전에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강렬하게 나타났던 
공동사회적 유대에서  존재한다고 한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인종의 순수성과 
동질성에 근거한 일체감인데, 정치 지도층이 그것을 동원할 때 강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종족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요소로서는 혈통·지리·언어 등을 들 수 있으며, 
혈통에서 생기는 일체감은 거의 생물학적 본능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종족이 서식하는 지역은 그들의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한 국가의 
근거지도 결국 지리적 영토이다. 따라서 영토를 신성시하는 태도는 거기서 
주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일관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언어 또한 하나의 종족을 다른 종족과 분별하는 가장 기본 상징이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생기는 일체감은 매우 중요한 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혈통·지리·언어로 결속되는 종족 민족주의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감정을 
통하여 형성된다. 정치 지도자나 국가가 의도적으로 이것을 고무할 때 그것은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2) 문화민족주의(Cultural Nationalism)

보다 추상적 차원에서 집단 또는 민족이 동일한 역사·전통·문화 및 이데올로기를 
고수할 때 그것은 문화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문화 민족주의는 
언어도 중요하지만 문자와  역사에 의하여 대대로 계승되어 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즉, 시간이 오래 될수록 역사가 깊어지고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종교 및 가치체계를 소중히 여긴다. 이에 
대하여 지배자나 피지배자들이 함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신성시하는 
경향마저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외래문화를 배격하고 자기 문화를 
우월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와 전통이 
빈약하여 자기 문화를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국가에서는 새로운 역사와 전통을 
창조하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 민족주의는 국가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정치 질서와 제도도 역사와 전통과 
연계시킬 때 어느 정도 강력한 정통성을 띄우게 되기 때문이다.

3) 저항 민족주의(Resistance Nationalism)

한 민족 또는 국가가 타민족 및 국가의 침범을 배격하고 자기 민족의 동질성과 
국가주권·독립·자결권을 갖고자 노력하는 것을 저항 민족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논의된 민족주의의 다른 차원보다 여기에서 정치가 가장 뚜렷이 
작용한다고 할 순 있다. 만일 하나의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이와 같은 태도를 
고수할 때 그것은 국가 민족주의로서 자국의 이익 즉 안보, 경제적 이익 및 
국가위신을 지키려는 외교 및 군사활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국제분쟁과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서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독립·주권·자결권을 수호코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한 주권국가는 이러한 민족주의를 
외교정책에 반영하여 안보와 번영 및 위신 등 핵심적 국가이익을 추구하게 되며, 
각 국가는 정치적으로 그러한 민족주의를 고취하여 국민의 지지와 참여를 동원코자 
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범을 자주 받았던 국가나 민족은 더욱 이러한 
저항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 국가와 민족이 타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고 그 영토 안에서 자결권을 
행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러한 
노력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치적 민족주의라고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내용을 가지며 주권·독립·자결이라는 호소력이 
강한 구호를 통하여 민족단결과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때 발현되는 민족주의 
감정은 매우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얻은 
많은 신생국가들이 식민통치에 반대하며, 서방열강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하여 중립 
또는 「비동맹」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그러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인 독립과 자결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항 민족주의는 특히 신생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주권·독립·.자결을 
지키려는 데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그 국가가 외부세력에 대하여 저항하면 배타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때 안보위협이나 간섭기도가 얼마나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저항의 정도도 달라진다. 외세의 침범과 그 가능성에 대비하여 자극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데서 생기는 저항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동원(Social Mobilization)의 
결과 나타나는 현장이기 일수이며,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주의도 이리한 차원의 
것을 의미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성격의 저항 민족주의는 또한 그 사회의 지배층 
및 지식층에 의하여 표출되는 경우가 상례이며, 정치 지도자들이 그러한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4) 통합 민족주의(Integral Nationalism)

비록 혈통·언어 및 문화가 다소 이질적으로 공존하며 외세의 압력이 극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곳에서 여러 종족, 언어 및 문화가 오랫동안 공존하는 동안 
사회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사회의 구성원들이 일치감을 가지게 될 때 이것을 통합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즉, 오랫동안 사람들이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상호 보완적 
의존성을 키워나가고 책임감을 가질 때  생기는 감정이 그것이다. Karl 
Deutsch같은 학자는 의사소통이 잘 진행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상호보완적인 습관과 
태도를 갖게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서로 단결하게 되며 민족국가라고 아는 
것도 그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 즉 민족이 한 국가를 형성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어느 한가지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성을 창출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이 잘 진행되면 결국 국민적 합의(National Consensus)가 
이루어지며, 이 합의는 의사소통이 계층과 권위조직의 상하로 이루어지는 수직적인 
것과, 그들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것이 함께 잘 진행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이 결과 국가와 사회간에 주기적 연관성이 성립되며 그 나라 사람들로서 순전히 
감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면에서도 단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통합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대화를 성공시킨 사회, 그리고 비교적 
개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국가에서 이 같은 통합 민족주의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국가는 안으로 합의와 상호 보완성을 조장하지만, 밖으로도 의사소통은 가치와 
이익에 있어서 공통점을 찾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안정준 교수에 의하여 정리된 민족주의의 제 차원(요소)을 흝어 
보았거니와, 역시 앞서 말한 대로 白凡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는 여기에 덧붙여 
「창조적 민족주의」의 차원을 제시코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정치학상의 민족주의 개념의 확대이기도 하다.

5) 창조적 민족주의(Creative Nationalism)

『창조적 민족주의는 성숙된 민족주의의 본질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성격은 
내적으로 진정한 민족형성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의 전근대성을 탈피하고 
저항적·배타적 성격을 창조적·건설적인 협동적 방향으로 전환시키며, 주체적 
개인의 민족의식을 기반을 둔 대중적 민족주의로 전환되고자 하는 것으로, 한 
마디로 식민지 민족주의 제 성격을 보다 창조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켜 민족의 
자기발전과 세계무대에서 주체성을 갖고 민족간의 경쟁적 공존이라는 긍정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좀더 다른 말로 부연하면, 어떤 사회의 국민들인 
현존사회에서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세계관 내지 새로운 
방향지시를 통하여 민족 주체성을 재발견케 해주는 정치 지도자의 역량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적 민족주의는 독특한 신념체계 내지 논리체계를 갖추고 있으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민족의 독창성 및 주체성에  바탕을 두는 것이며, 그러한 
민족주의가 사회 구성원에게 자신들의 국가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일체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창조적 민족주의는 그 민족이 
자기네의 역사·전통·문화에서 새로운 주체성을 재발견하고 거기서부터 나라 
발전을 위한 새로운 미래상(Vision)을 확립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민족이나 나라에서 과거 어느 시기에 그 민족의 역사·전통·문화에서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미래상을 간파한 지도자가 있어 그 민족이나 나라의 역사적 미래가 
그러한 현실로 나타났다면 그러한 지도자를 창조적 민족주의자라 일컬어 마땅하다 
할 것이다.

Ⅲ. 白凡 民族主義의 展開

우리 나라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열혈의 애국자이자 
민족주의의 화신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기실 
그는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었고, 그렇게 살다 비명에 간 것이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X)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민족주의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는 많은 논자들이 저항 민족주의 
일변도로 규정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폭력항쟁(Terrorism)으로까지 기술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저항 민족주의 일변도의 시각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식민시절 
민족광복운동이나 독립운동을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그렇게 규정해버리는 학문적 
타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후자의 시각은 일제 식민 통치배의 악의에 찬 
고의적 왜곡과, 그러한 식민사관에 부지불식간 물들어버린 사람들의 기계적 
사실오진 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역자파악에 있어서 지나친 단순화 논리이며, 후자의 경우는 
굳이 역사해석이라고 할 수도 없음이 분명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백범 민족주의에 대하여 하나의 
객관적 분석을 시도코자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여러 가지 시각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첫째, 백범의 정치활동 가운데 그의 민족주의의 성격(次元)을 
비교적 명확히 나타내어 준다고 믿어지는 활동을 가급적 연대순으로 분석해 보고 
둘째로 그의 사상적 골간으로 보아지는 삼균주의에 투영된 그의 민족주의, 
셋째로는 그가 남긴 불후의 명성명(名聲明)임이 확실한 몇 가지 문건(文件) 『나의 
소원』에 반영된 민족주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정치학 연구에 있어서는 정치 지도자의 행위와 주의·주장, 그리고 그가 천명한 
성명 등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 사상을 도출해낼 수 있는 제 1차적 자료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분석자의 선입견이나 분석기술의 미숙 등으로 
지도자의 본의를 오진할 위험성을 전혀 배제치는 못하나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논자 자신이 져야 할 것임도 또한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1. 주된 정치활동

백범 김구 선생의 완전 자주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불가능하다.(그는 70여 년을 이와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의 정치활동 중에서도 민족주의의 제 차원의 시각으로 보아 가장 의미 있다고 
진단되는 몇 가지 사례만 골라 분석하기로 한다.

우선, 동학운동 및 의병운동참여(1894∼1896), 1908년부터의 신민회를 통한 
구국운동 및 l909년 이후의 교육문화운동 등에서 그러한 백범 민족주의의 차원을 
엿볼 수 있다.

즉, 동학운동참여, 의병운동참여(土田 살해 포함) 등은 말하자면 청년으로서의 
백범이 처음으로 민족의식을 표출시킨 활동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성격은 다분히 
종족 민족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건에 대한 백범 자신의 묘사를 
보더라도 이(異)민족은 타국인이기 때문에 강한 종족적 적개심과 분노를 갖고 
있음을 실토하고 있다.

한편 그 후의 신민회 사건이나 교육문화운동에서는 맹아기의 종족 민족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철저한 항일정신에 바탕을 둔 저항 민족주의로 옮겨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백범 민족주의는 이미 그 목표가 일제의 
침략을 배격하고 한국의 동질성과 주권·독립 및 자결권 회복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항의 수단도 신민회(新民會)·학교 등의 조직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광복투쟁기(民族光復鬪爭期) 동안 백범 민족주의의 제 차원을 드러내주는 
정치활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할 것이다. 그 중에서 아주 특기할 사항만 
들어본다면 1919년의 상해 임시정부 참여, 1928년을 기점으로 하는 정당활동, 
1931년의 한인애국단 활동, 그리고 1939년부터 환국 시기까지의 군사외교활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백범이 3 ·1 독립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그 후 연이은 정당 활동을 
할 즈음에서는 그의 민족주의는 이미 확고부동한 신념체계일 뿐 아니라 깊은 
생활철학으로 발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해외 독립운동지를 중국으로 
정한 경위가 단순히 당시 국내의 일제의 탄압을 모면하는 편의적  도피과정의 
결과라기보단 만주와 중국 본토가 우리 애국동포의 집결지이며, 이를 격려하고 
구심점을 조직해 줄 각오를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때의 그의 민족주의의 성격을 본고의 차원에서 보면 아직도 
일제에 대한 저항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국권과 독립·자결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이국으로 옳기는 사람에게는 
원상회복인 제 1차적 투쟁목표가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소강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으로서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그 활용에 의한 독립운동의 활성화는 또다시 백범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한 
종족주의 내지 폭력적 저항 민족주의로 급선회시킨 감도 없지 않은 것 같으나 
당시의 국제 정세하에서는 그 길밖에 달리는 난국(難局)의 발전적 타개책이 
없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인 것이 확실하다. 오히려 백범 민족주의는 이와 같이 
정치적 상황이 따라서는 신축성을 시현해 주는 창조적 성질마저 띠었다고 평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932년, 그러니까 이봉창(李奉昌) , 운봉길(尹奉吉) 두 의사의 의거(義擧) 이후, 
장개석(蔣介石)중국총통과 교환이래 19945년 환국까지의 백범 민족주의는 외교활동 
면에서도 활기를 띠어 국제적으로 한국 민족주의가 인정을 받은 시기이자, 내용 
면에서도 1941년에 공포된 건국강령에 「삼균주의」를 채택하여 독립 후의 나라 
정치에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 이것은 백범 민족주의가 범국제적 인정을 받음은 
물론, 그 차원 면에서 단순한 저항 민족주의를 넘어서 이제는 문화 민족주의, 
심지어 창조적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승화됨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해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만큼 백범 민족주의는 이 기간 성숙해 온 것이다.

끝으로, 백범 환국 이후부터 그가 1919년 6월 26일 비명에 갈 때까지의 정치활동은 
그야말로 민족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위한 민족통일 투쟁기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그의 가장 두드러진 정치업적으로는 아무래도 반탁 국민 운동과 비상정치회의, 
자주 통일정부 수립투쟁 및 남북협상 투쟁을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정치활동을 지배하는 백범 민족주의의 중요한 차원들은 일체의 외세의 
재침에 단호히 맞서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코자 하는 저항 민족주의와 
한국의 역사·전통·문화의 주체성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문화 민족주의가 그 
골간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통일정부 수립이 아닌 
경우의 미래상을 훤히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고 재삼 완전한 자주 독립을 강조하고 
나서니 이는 이 시기의 백범 민족주의가 창조적 그것임을 증명해 준다.

2. 「삼균주의」에 나타난 백범 민족주의

삼균주의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인 1931년의 건국원칙에 입각한 행동방략을 
구체화하여 1941년에 공포된 건국강령에 잘 표시되어 있다. 건국총강 6항에 
『임시정부는 30년 4월에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히 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히 하고 공비교육으로써 학교를 균히 하며 국 ·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 민족과 국가와의 불평등을 고칠 것이니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없어지고 소수민족의 침몰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귄리를 균히 하여 고저를 없이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렇게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 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등장·확대할 것임』이라 규정하고 
있다.

또한 7항에서는 『임시정부는 이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최고 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의 삼종 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이라 하였다. 요컨대 이 정신은 국가 및 국제생활에 있어서 「사회 각층의 
지력(智力)과 귄력과 부력(富力)의 가짐을 고르게」하자는 주장이라 볼 수 있다.

1) 정치적 균등주의

건국강령 제1장 총강 5항에서는 임시 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 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異族專制)를 전복하고 5000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1보의 착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는 호혜평등주의를, 국내적으로는 온갖 계급과 개인간의 일체의 
불합리한 불평등을 제거하고 균등한 정치적 권리와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백범는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잘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삼균주의상의 정치적 균등이 평화주의와 문화주의임을  설파하고 있다. 
한편 그는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의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라고 말함으로써 국내정치가 보통·균등의 참정권을 가진 민중의 자유로운 
의사로 표명된 다수의사에 의하여 행해지는 한 그 것은 민주주의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바로 정치적 균등주의가 내포하는 원리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요컨대 
정치적 균등주의란 백범 민족주의상에 있어서 국제적 평화주의, 국내 정치상의 
민주정치를 동시에 뜻하는 것으로, 이들 양면은 모두 문화 민족주의의 공존의 
바탕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고 볼 것이며, 따라서 백범의 정치적 
균등주의란 결국 그의 문화 민족주의를 투영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할 것이다.

2) 경제적 균등주의

건국강령 제 3장 건국 6항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제 체계 및 정책을 밝히고 있다.

건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과 국가건립을 보위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속환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의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경제정책을 추진 실행함이라고 전제하고 ① 대산업의 
국유화와 중소기업의 사영(私營) ② 적산(敵産)의 국유화 ③ 무산자를 위한 
공영(公營) 혹은 국영(國營) ④ 토지소유권 이전금지 ⑤ 국제무역·전기·수도 
등의 국유, 국영화 ⑥ 노인종업원, 어린이 종업원, 여자 종업원의  근로기준 ⑦ 
농공인의 면비의료(免費醫療) ⑧토지분배시 저급에 우선권을 줌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토지 및 기업의 국유화 정책과 사회보장 정책으로 경제적 균등주의의 
표현인 것이다. 오늘날 각국의 경제운영실태가 자본주의 체제이든 사회주의 
체제이든간에 일종의 혼합경제 체제로 화해 가는 경향을 띠며 각국은 실제경제의 
운영의 묘를 살림으로써 애초의 경제체제가 갖고 있는 단점을 보완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할 때 백범 민족주의에서 내놓은 경제적 균등주의는 이미 미래의 
경제상을 어느 정도 내다보고 있었다고 보아 과언은 아닐 성싶다. 더우기 우리 
나라 남북한의 경제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체제나 운영상의 문제점들을 솔직히 
감안한다면 백범의 경제적 균등주의는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보아 자못 창조적인 
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3) 교육적 균등주의

건국원칙에서 보면, "공지교육으로 학권(學權)을 균히 하고" 라고 나타나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 2장 10조에서는 "보통교육을 수(受)하는 의무" 로 규정되어 
있다. 건국강령 제3장 건국항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건국시기의 헌법상 교육의 기본원칙은 국민 각개인의 과학적 지식을 보편적으로 
균등화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거하여 교육정책을 추진 실행함" 이라 
하여 교육의 기본 목적을 명시하고 있다.

① 교육종지(교육종지)는 삼균제도로 원칙을 삼아 혁명공리의 민족정기를 발양하며 
국민도덕과 생활기능과 자치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국민을 조성함에 둔다고 
규정하여 전인격적 교육을 이념으로 하고, ② 의무교육의 범위 ③ 교육에 대한 
사회보장 ④ 교육기회균등 ⑤ 교육자료의 무상공급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삼균주의상에 있어서의 교육균등의 강조는 역시 백범 민족주의의 기조와 
근간이 문화 민족주의에 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삼균주의의 기본정신은 바로 한국 민족주의 그 자체로서, 좀더 
구체적으로는 백범 민족주의의 기본적 차원의 하나라 할 것이다. 삼균주의에는 
기왕에 언급된 민족주의의 제 차원 가운데 특히 문화 민족주의와 창조적 
민족주의의 이 상당히 밀도 있게 혼합되어 있다고 보아진다. 백범 민족주의가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벌써 이 단계에서 독립 후의 나라살림의 청사진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3. 몇 가지 문건에 나타난 백범 민족주의

백범 민족주의의 정수를 나타내주는 그의 불후의 노작(勞作)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들 성명이나 문건 중에서도 1947년에 쓰여진 『나의 소원-① 민족국가 ② 
정치이념 ③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은 그의 민족주의를 가장 밀도 짙고 선명하게 
비춰 주는 주옥같은 거울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면 민족국가·정치이념·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를 차례로 간략해 그 요지만을 중점적으로 훑어보기로 한다.

1) 민족국가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백범 민족주의를 우리가 제시한 이론적인 틀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풀이될 것 같다. 첫째는 저항 민족주의의 
차원이다. 백범은 『나의 소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세 번을 고쳐 물으셔도 
그 대답을 한결같이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독립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답의 이유인즉, "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을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은 일이다." 라고 하여, 우리 민족의 
주권·독립·자결권 회복에 강인한 열망을 가기고 있었으며 타의 침범에 크게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로 그는 여기에서 강한 종족 민족주의의 성향도 나타내고 있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이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그 이유로는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라고 설파하고, 그만큼 혈통과 민족역사의 고유성을 항구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소이이다. 그리고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려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 이라 하고, 모든 대립되는 사상도 일시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로 그의 민족주의는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안으로의 합의와 상호 보완성을 
조장하지만, 밖으로도 의사소통을 통하려 가치와 이익상의 공통점을 찾고자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통합 민족주의에의 믿음인 것이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니…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라고 하고 있다.

네째로 백범 민족주의는 여기서 고차원의 문화 민족주의를 시현하고 있다고 
풀이된다. 즉, "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라고 강조함으로써 문화 민족주의의 우수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 정치이념

여기서 엿볼 수 있는 백범 민족주의의 특징은, 첫째 그는 자유주의의 신봉자로서 
일체의 독재정치를 배격하되, 확고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이다. 즉, " 나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나는 우리 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라고 일체의 독재정치를 반박하고 있다.

둘째로 이곳에서는 백범 민족주의가 사상적 다원주의와 개인의 창의성을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보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백범은 말하기를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실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음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  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헌헌효효하여 귀일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마는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한 
결론에 달하여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즉 
언론의 자유 등을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확신하고 있다.

셋째로 백범 민족주의는 제도수용에 있어서 상대성을 들고 있다.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민족주의가 
창조적 민족주의임을 증명하고 있다.

3)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여기서는 백범 민족주의가 문화주의와 창조적 민족주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인의와 홍익인간을 내세우고 전인적 교육을 이러한 창조적 민족주의 실현의 
수단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인류사회의 미래에 있어서의 평화와 발전은 오직 높은 수준의 
문화창달과 인의·자비 및 사랑의 힘에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창의성을 굳게 믿고 있다. 즉,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성하기에 넉넉하고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라고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미래에 있어서의 창발성(創發性)과. 세계 속의 한국의 주역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세련된 창조적 민족주의라 아니할 수 없겠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폐지하면, 
모든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가는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이러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와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창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당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써 우리 민족 미래상에 대한 요지부동의 신념과 낙관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이 백범 민족주의가 창조적 민족주의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Ⅳ. 結 論 

이상에서 본고는 백범 민족주의를 정치학상의 민족주의 일반론의 시각에서 지극히 
피상적이나마 훑어본 셈이 된다. 본고가 발견한 바로는 백범 민족주의가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다원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백범 
민족주의는 김구의 독립투쟁과 정치적 연륜이 쌓여짐에 따라 점점 발전되고 
세련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정치학적 시각에서 민족주의 일반의 제 차원(요소)을 ① 종족 민족주의 ② 문화 
민족주의 ③ 저항 민족주의 ④ 통합 민족주의 ⑤ 창조적 민족주의로 
분류·정리하고 제각기의 특성을 기본적인 것만 예시하였다. 그리고 백범 
민족주의를 이들 개념적 틀(Frame of Reference)에 투영시켜 본 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첫째, 백범 민족주의는 다섯 가지 차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백범 민족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는 포괄성이 높다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다만 이 경우 시간과 장소에 따라 차원별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다섯 가지 차원 중에서도 백범 민족주의에서는 특히 종족 민족주의와 문화 
민족주의 성향이 짙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구의 한국 민족과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체계가 대단히 높은 것을 뜻한다.

셋째, 백범 민족주의에는 강한 저항 민족주의적 성향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적 민족주의로 일관성 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주권 
·독립 ·자결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하여 상실되었을 때는 강한 저항 
민족주의를 나타냈지만, 일단 외침이 물러나면 한민족의 미래상에 집착하고 그에 
대한 대안제시로 가득 찬 창조적 민족주의가 백범 민족주의의 전편에 넘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종래의 백범 민족주의를 저항 민족주의 일변도로 보는 
경향과는 아주 대조적인 새로운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우리 나라 재래의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이 지나치게 폐쇄적인 종족 중심주의와 
복고주의, 저항주의 일변도와 특히 지성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만 역사적 불행을 
감안할 때 백범 민족주의의 위와 같은 특성(장점)의 발견은 본고 서론에서 지적한 
오늘날 세계의 이른바「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의 극복을 위하여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범 민족주의는 통일 한국에의 대안이 되고도 남을 게 
자명해진다. 백범 민족주의의 연구는 이런 뜻에서 아무리 해도 과함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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