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73.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11월 2일 목요일 오전 06시 33분 49초 제 목(Title): 권혁철/ 박정희 시대 두 기자 이야기 박정희시대 두 기자 이야기-권혁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10월26일이 되면 `박정희 논란'이 벌어지곤 합니다. 독재자와 조국근대화의 기수란 주장이 맞서곤 하는데요. 오늘은 박정희 시대를 서로 다르게 산 기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보다 30년 가량 앞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선배 2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전 휴일입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언론계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한 선배 기자의 부인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전화를 건 용건은 `사정이 되면 자동차 보험을 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배의 수입이 충분치 않기때문에 부인이 보험설계사로 일해 생계를 꾸린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얼마전 자동차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들어드리겠다"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참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 선배 기자는 <동아투위> 출신입니다. 먼저 동아투위가 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장기집권에 들어갑니다. 정권은 비판세력에 재갈을물리려고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기자와 논설위원을 중앙정보부로 끌고가 두들겨패고 신문사에 기관원을 상주시키는 등 노골적인 언론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정보기관은 1974년 10월23일 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학생 데모 기사를 보도했다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 지방부장을 연행해갔습니다. 이런 불법 연행사태에 대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 200여명은 편집국에서 농성을 벌이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선언의 내용은 `기관원의 출입 거부한다' `신문방송에 대한 외부 간섭 중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 등 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26년전의 한국사회는 이런 주장을 위해 기자들이 극한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놀란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광고주들에 압력을 넣어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는 이른바 `광고탄압'에 들어갑니다. 광고가 신문사 경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광고탄압은 신문사의 숨통을 조이는 짓입니다. 정부의 압력으로 기업들이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않자 동아일보 광고면은 허연 백지로 나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좀 나이 드신 분들은 이 광고탄압 때문에 동아일보가 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맞서 언론자유와 민주화투쟁을 벌인 `야당지'라고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억은 극히 일면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투쟁을 했지만, 동아일보 사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아일보 경영진은 자유언론투쟁을 주도한 기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경영진은 75년 3월 17일 새벽 정체불명의 괴한 2백여명을 동원해 부당해고에 맞서 동아일보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기자 등 160여명을 폭력으로 신문사 밖으로 축출했습니다. 이게 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을 사시로 내걸고 `민족' 신문을 자처하는 동아일보 사주의 모습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 경영진이 합작해 자유언론수호 투쟁을 벌이던 언론인들을 내친거죠. 요즘도 가끔 동아일보는 군사독재와 싸웠다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언론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제 식구를 깡패를 동원해 두둘겨패고 사옥 밖으로 밀어낸 동아일보 사주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작 싸운 사람은 동아일보 안에 있는게 아니고 밖에 따로 있으니까요. 쫒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은 즉시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언론자유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는 결의를 굳힙니다. 이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를 줄여 `동아투위'라고 하죠. 이쯤이면 동아투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보험을 들어달라고 했던 동아투위 출신 선배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선배는 해직된 뒤 계속된 정보당국의 감시와 연행으로 고생을 하다 3년 가량 감옥생활도 합니다. 석방된 이후 그 선배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맞서 자유언론과 언론개혁을 위한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이 말은 안정적 수입이 보장되는 변변한 직장을 거의 갖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선배는 민주주의를 위해 일했지만 그로 인해 선배의 집안 식구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저같이 까마득한 언론계 후배에게 선배 부인께서 자존심과 체면을 접고 `보험들어 달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심정이 어땠을까요.. 지금부터는 위에서 말한 그 선배와 비슷한 연배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한 기자 출신 정치인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실명을 밝힐까도 싶었지만 예의상 ㅎ아무개 선배라고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ㅎ 의원이라고 해야 되지만, 언론계 선배니 그냥 ㅎ선배라고 하죠. 제가 개인적 친분이 없는 ㅎ선배를 기억하는 것은 텔레비전 방송 기자 출신이었던 탓입니다. 지금도 저는 79년 새해 아침 첫날 ㅎ 선배가 보도한 방송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ㅎ 선배는 청와대 출입기자 쯤 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화면에는 하얗게 서설이 내린 청와대 뜰을 박정희 대통령이 거닐며 새해 정국 구상을 하는 장면을 몇분간 나왔습니다. 그 장면 뒤 ㅎ 선배는 박 대통령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 ㅎ 선배는 박 대통령에게 `6년째 부인을 잃고 혼자 지내는데 어려움이 없는지' `대망의 80년대를 앞두고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등등의 질문을 했지요. ㅎ 선배 자신은 그때 일을 잊었을 지도 모르지만 저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암살자의 흉탄에 부인을 잃고도 조국근대화를 위해 밤낮으로 신명으로 바치는 민족의 지도자'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당시 그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쨋든 ㅎ 선배같은 기자들의 보도하는 기사를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군이래 최대 성군인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는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 박 대통령의 영도력밑에 일사불란하게 단결해 하루빨리 선진국으로 진입해야 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79년 10월27일 아침 전날 저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슬퍼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제가 나이 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다른 면을 알게 되면서 제일 어이없었던게 ㅎ 선배같은 기자들이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고 세상물정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국민들을 속였는지 화가 났던 거죠. 그때는 말그대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철권통치시절이라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간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상황이 풀리고 난뒤라도 `미안하다'라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최소한 자성의 모습은 보이는게 논리와 글로 먹고 사는 기자의 기본예의죠. 그러나 ㅎ 선배는 그런 사과의 말은커녕 1981년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금뱃지를 답니다. 권력이 있는 곳을 정확히 파악한 동물적인 정치감각입니다. 시류의 변화에 재빨리 편승한 셈이죠. 광주 시민들을 총칼로 짓밟고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 정권에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분노했지요. 하지만 ㅎ 선배는 계속 그 피묻은 정권 밑에서 갖가지 요직을 차지하며 잘나갔습니다. 반면 앞서 말한 동아투위 출신의 선배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을 만들어 전두환 정권에 맞섭니다. 해직기자들이 참여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등 계속 언론자유 투쟁을 벌였습니다. 권력의 양지를 선택한 ㅎ 선배는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을 거치며 몇차례 국회의원과 정부투자기관 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또 지난 4월 총선에서도 금뱃지를 다시 다는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요즘 ㅎ 선배가 기자로 등장하던 텔레비전 화면에서 정치인으로 나오는 ㅎ 선배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두 선배 기자는 같은 대학을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동아투위 출신의 선배는 찬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언론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가장으로서 가족 생계조차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또 언론계에 있는 사람들을 빼면 이 선배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을 지켜세우던 ㅎ 선배는 전두환 대통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정권 밑에서도 국회의원을 지낸 ㅎ 선배는 웬만큼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먹고 살만큼 돈도 꽤 모았을 겁니다. 저는 이 두 선배의 경우를 보며 정치권력과 기자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해봅니다. 과연 어떤 선배가 저같은 후배가 본받아야 할 `진짜' 기자일까요. .마지막으로 정치권력과 신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언론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프랑스 신문 중에 <모니퇴르>란게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과정에선 시민을 편드는 보도를 해 최대 일간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문은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나폴레옹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된 뒤 이 신문은 나폴레옹을 비판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권력의 풍향계에 따라 춤추는 신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1815년 3월1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20일만에 파리로 돌아온 기간 동안 이 프랑스 신문의 제목변화는 두고 두고 화제가 됩니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지앙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입성은 절대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어제 황제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튀틀리 궁전에 듭시었다' 저는 우리나라 신문들과 기자들이 200년전 이 프랑스 신문과 기자들보다 더 나은지 확신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권력의 양지만을 찾아 다니는 기자들이 洋의 동서나 時代의 고금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