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73.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11월 2일 목요일 오전 06시 29분 23초 제 목(Title): 한21/ 학살은 학살, 진실은 진실 [움직이는세계] 학살은 학살, 진실은 진실! 터키 정부 압력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 인정 철회한 미의회… “우리의 상처를 어쩔 것이냐” (사진/도시 중심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개사형하는 장면. 백오십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1914-1923년 사이에 학살당했다) 지난 10월 초 미국의회 국제관계위원회는 ‘아르메니아대학살’을 인정하는 안을 24 대 11이라는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지난 19일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 13명의 전임각료, 군사지휘관들의 거부로 안건은 도중에 철회되고 말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하원의장에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이 안건을 통과시키면 미국에 엄청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염려된다. 세계의 분쟁지역인 이곳은 동·중앙아시아에서 제기된 위협, 발칸국가들의 안정, 새로운 에너지 원천의 개발 등 중요한 이해가 걸려 있다”라며 아르메니아대학살건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하원의장인 데니스 하스터트는 “대통령의 의견과 중동 지역 미국민들의 생명의 안전”을 이유로 하원에 이 안건을 상정하는 것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아르메니아대학살건이 미의회 국제관계위원회를 통과한 직후 미국은 터키로부터 협박을 받아왔다. 터키 정부는 만약 이 안건이 의회를 통과할 경우 현재 북부 이라크의 무비행대(no fly zone)를 지키기 위해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터키 남부의 인질리크 공군기지를 되돌려 받을 것이라고 발표해 워싱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터키 동력원장관 에르주메르는 터키주재 미국대사를 불러 경우에 따라서는 110억달러에 이르는 미국회사들과의 37건의 에너지계약들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의 터키방문을 막기 위해 비자발급을 취소하는 한편, 아르메니아로 드나드는 모든 선박들의 터키영해통과를 금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월24일, 그들이 모이는 이유 이에 대해 미하원 프랑크 팔론 의원(미국 아르메니아회의 공동의장)은 공식적으로 미하원의장에게 전달한 편지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미국이 터키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하며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간섭받는다는 것이 수치스럽다. 이는 터키가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를 협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노를 표시했다. 매년 4월24일 전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과 아르메니아 국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이날을 추모한다. 85년 전 이날 오토만제국에 거주하던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은 235명의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시작됐다. 당시 오토만제국이 ‘젊은터키단’의 쿠데타로 붕괴하면서 민족주의가 전면에 등장했다. 타민족에 대한 추방정책이 시작되면서 구조적인 학살이 구오토만제국 전역에서 자행된다. 당시 500만명의 기독교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학살되든지 추방돼 현재는 15만명의 기독교인들만 터키에 남아 있는 상태다. 이 중 200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구조적인 민족말살정책으로 수십만이 학살되고 수십만이 시리아 사막으로 추방되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다. 1차대전이 끝난 뒤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침략했을 때도 그곳에 피난해 있던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다시 학살했다. 당시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구조적인 학살을 비난했지만 이를 막기 위한 아무런 수단도 동원하지 않았다. 아테네에 살고 있는 아고프 쿠연장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한스러운 기억을 아픔으로 간직하고 있는 많은 아르메니아인들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삼촌은 당시 동부 터키 카르페르트의 부유한 상인이었다. 터키 군인들의 무차별학살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곳까지 오리란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미처 피난도 떠나기 전에 이들이 들이닥쳤다는 소문이 들렸다. 삼촌은 자신의 온 가족을 예복차림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삼촌은 12명이나 되는 아내와 자식들과 식사를 마치고 곧이어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미리 준비한 독을 푼 차를 마시게 한 다음 자신도 마지막으로 찻잔을 들었다. 터키 병사들이 오기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이미 3세대가 지났지만 조부모대나 부모대의 친지들 중 희생자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대학살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diaspora Armenian)들을 통해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1965년 우루과이 정부가 최초로 아르메니아대학살 50주년을 계기로 이를 공식인정하면서 많은 나라에서 계속 아르메니아대학살을 공식인정해왔다. 올해 3월에는 스웨덴의회도 공식인정하는 안을 통과시켰으며 600만 유대인대학살의 피해자인 이스라엘의 교육부 장관은 아르메니아대학살을 교과과목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역사의 진실 밝혀야 상호신뢰 싹튼다” (사진/터키반미시위대. 미국하원의 아르메니아대학살 인정안을 성토하고 있다) 그러나 터키는 이웃나라인 아르메니아와 국교수립을 거부한 채 지금까지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 자체를 금지해오고 있다. 또한 몇몇 미국 역사학자들을 매수하여 아르메니아대학살의 역사적 사실 자체를 아예 부정하고 대신에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해 터키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정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이 상호신뢰와 이해의 분위기를 창조하는 지름길”이란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 문제가 터키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세기 최초의 대학살을 격어야 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지금도 600만명이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고 단지 300만명의 인구만이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다. 1991년 당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수백년 만에 다시 독립국가를 건설한 아르메니아는 지금까지 끈질긴 민족성을 이어오면서 민족의 상처를 세계와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young@otenet.gr 인터뷰/ 아테네주재 아르메니아 대사 아르멘 페트리샨 이것은 인류의 ‘정의’에 대한 문제다 -지난 10월 초 미국국제관계위원회를 통과한 아르메니아대학살건이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13명의 전임각료, 군사지휘관들의 압력으로 의회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보다도 깊이 실망했다. 먼저 민족이해의 슬로건인 ‘정의’가 압박 받았다. 민주주의국가인 미국이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을 온 세계와 미국국민들에게 공포하기를 원한다. 사실 다른 방법으로 미국은 이 사실을 인정해왔다. 매년 4월24일 아르메니아대학살 추모일 때는 언제나 미국 대통령이 추모연설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대학살’(genocide)이란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국이 “어떤 경우에도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공포하여 세계의 지도국가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터키와 아르메니아 두 나라가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데. =아르메니아가 독립한 이후 지난 10년간 전·현직 대통령들이 이 문제를 대화로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왔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르메니아 정부는 대학살 인정문제를 터키와의 관계를 맺는 전제조건으로 설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외면해왔다.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 아르메니아대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대학살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르메니아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85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전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해서 계속 제기돼온 문제이며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대학살의 인정문제는 계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대학살 인정문제는 단지 아르메니아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 중요한 문제이다. 오래 전에 일어난 ‘대학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터키나 인류에 대한 도덕적인 귀감 때문이다. 아니면 반인간적인 대학살이 자행되고서도 아무런 응징 없이 넘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차대전중에 일어난 이 사건은 역사학자들의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독일의 책임을 주장한 학자도 있는데. =당시에 영국이나 독일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터키의 학살을 중지시키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가 대학살을 일으켰을 수도 있으며 이들의 침묵이 대학살을 조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터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있나. =지난 85년 동안 없었다. 적반하장격으로 터키는 대학살을 부인해온 정도가 아니라 학자들을 동원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학살을 인정받음으로써 터키와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우리 자신을 치유하려고 한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일제에 40년 동안 식민지지배를 받으면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최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앞으로 대학살인정이 이루어진다면 배상청구의 계획은 있는지. =현재까지 아르메니아 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거나 논의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은 지난 70년 동안 배상을 요구해왔다. 당시 재산과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에게 도덕적인 만족감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수긍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