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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85.tnt2.se> 
날 짜 (Date): 2000년 10월  6일 금요일 오후 03시 01분 35초
제 목(Title): 박노자/ 내가 본 한국, 한국인 


뜻모아 소리모아 8월 

’내가본 한국 한국인 
미국 대학 로고가 찍힌 티셔츠를 입는 한국 젊은이들 

박 노 자 

러시아聖페테르부르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Vladimir Tikhonov. 
한국고대사 연구로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경희대 
러시아어과 강사로 있으면서 한국문학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소개하는데도 
함쓰고 있다. 
한글은 물론 <논어>, <맹자>, <대학>에도 능통해 '박노자(朴老子)'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버릇이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는 
탓인지, 어떤 글에 우연히 부딪치면 그 글을 꼭 읽게 된다. 비록 나와 전혀 
관계없는 지하철의 광고라 하더라도 지하철을 탄 이상, 이들 광고를 한 번이라도 
반드시 훑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건너편에 앉아 있거나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옷에 쓰여진 글을 슬그머니 훑어본다.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라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만, 오랫동안 독서로 살아온 사람은 그러한 병에 
걸릴 수 있지도 않을까 싶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을 열심히 쳐다보던 나는 한 가지 
놀라운 변화를 감지하였다. 말하자면, 온 국민이 하나의 커다란 유학생 집단으로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왜 이러한 생각이 들었느냐면,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미국 
명문대학들의 영문 명칭들이 찍힌 티셔츠들이 워낙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어디를 보나 꼭 UCLA니 하버드니 하와이대학이니 하는 이역만리 대학들의 
‘멋진’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 나는 “아, 이 사람들이 거기에서 
공부하여 이 옷을 기념으로 가져왔구나.”싶어 저 정도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다녀온다면 이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버티는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멋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해 본 결과, 
대부분은 자기의 그럴싸한 ‘간판’이지, 선택한 대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관련도 없는데 왜 하필이면 이러한 옷을 입고 다니냐는 질문에, 
‘유행’이라는 답변을 가장 자주 들었다. 학력과 재력이 있으면 꼭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도 유행이자 출세를 위한 필수적인 행위고, 돈이 없고 교육을 못 
받으면 ‘그들의 멋진 옷’이라도 입어서 일종의 위안으로 삼는 것도 유행이다. 
IMF 위기의 초기에는 어느 대학교 학생들이 이러한 영문풍의 옷들을 국내 마크가 
찍힌 옷으로 공짜로 바꾸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가슴에 머나먼 
캠퍼스의 광고물을 달고 다니는 젊은이들은 적지 않다. 
이러한 일들은 얼핏 봐서 별 뜻 없는 젊은이들의 호기심과 허영심의 소치로 
보이지만, 옷 마크의 선택은 사소한 일이면서도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자신을 꼭 미국 명문대학교와 마크를 통해서 연결시키고 싶은 마음은, 
미국의 지적인·문화적인 권위와 이 권위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 ‘앎’, ‘지식인으로서의 권위’와 ‘미국’, 
‘미국 유학’은 어느 사이에 완전한 동의어가 되어 버린 셈이다. 건국 이후에 
지속되어온 안보·금융·수출 등의 분야에서의 대미 의존성에다가 이제 문화·지식 
분야에서의 주종관계는 겹쳐지는 것이다. ‘미제 박사’들이 토종파나 유럽파의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들을 완전히 석권해 버려 일종의 
기득권 세력을 형성한 것은 이러한 보편적 의식과도 관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젊은이들의 지식·문화에 대한 권위의식은 과연 그들이 스스로 조성한 
것인가? 현대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학교와 대중매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왕국’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는 법이다. 외국어(즉 영어) 조기교육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학교에서 그들은 거의 유치원부터 박사과정까지 영어를 중심으로 
지식을 습득한다. 제2외국어 교육이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현실이다. 다른 과목 중에서 유일하게 영어와 비슷한 비중을 갖는 것은 
컴퓨터인데, 여기에서도 결국 영어 습득이 전제된다. 
괜찮은(?) 대학교에 들어간 암기력의 수재들은 그 전공에 따라서 언어이론이나 
핵물리, 유기화학 같은 고등학문을 배우겠지만, 이것도 많은 경우에는 원서(즉, 
영어 교과서)를 통해서 접근해야만 한다. 직장에서도 계산서를 쓰는 ‘미스 
김’이나 국내 판매를 관리하는 ‘미스터 박’ 모두가 토익 점수에 의해서 각자의 
몸값이 매겨진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아니, 필자도 ‘영어 공화국’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일종의 부적으로 미국 명문대학교 
간판을 달고 다녔을 것이다. 학교나 직장에서 영어라는 난공불락의 성곽에 부단히 
도전해야만 하는 한국의 소시민은, 집에 와서 드디어 소파와 텔레비전의 안락을 
되찾고 나면, 미국의 ‘명화’를 보고 대중음악을 들을 차례가 온다. 말하자면, 
자나깨나 영어 그 하나로 생활하는 격이다. 
여기에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안보·금융·기술 등의 핵심 분야에서의 대미협조와 
이에 따른 영어 습득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나도 충분히 인식한다. 그리고 영어를 
제대로 습득하려면 가능한 한 어린 나이에 시작해야 되고, 가급적이면 많은 
분야(독서, 영화, 가요 등)에서 영어를 다양하게 접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내 
자신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거의 보편적이다 싶은 언어 
연수와 원어민 수업이 한국 고등교육 제도에 도입·수용된 것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요즘 대부분 10∼40대들의 언어·문화 생활이 
불가피하게 영어권쪽으로 경도되는 것을 정책적으로 보충·조정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숭미풍(崇美風)을 견제·보충할 
수 있는 국가의 문화정책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해외문물을 이용하면서도 민족문화의 계승성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와 
지식층, 교육자들의 고유 임무다. 즉, 한국을 포함한 온 세계가 결국 미구(未久)에 
영어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경제·문화권에 완전히 편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문화의 급진적인 파괴와 아직 소화되지 못하는 
새로운 가치의 무절제한 도입은 재래의 가치관·생활양식·제반제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지금도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학교 폭력, 가정 파괴, 교육자 
권위의 실추, 공중도덕의 실종 등은전통가치의 때이른 파괴와 새로운 세계관 
수용의 미완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시폐(時弊)를 고치기 위해서 국가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특히, 새로운 시대정신과 잘 어울리는 전통적 가치들을 정책적으로 
장려·유포시켜야 되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서, 토인비를 비롯한 많은 서양 
석학들이 ‘세계 문명 발전에의 한국의 주요 기여’로 본 효도를 장려하기 위해, 
삼국시대부터 역대 왕들이 꾸준히 해왔던 효자·효녀 발굴, 지원, 선양, 표창 
사업을 활성화해야 되지 않을까? 진정한 의미에서 제자에 대한 무한한 보살핌과 
스승에 대한 존경·보답 의식을 의미하는 군사부일치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유가의 전통교육론과 전통교육 명서(이이의 <격몽요결> 등) 를 별개의 필수 교직 
과목으로 지정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충(忠) 즉, 국가의식의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해석차원에서 이스라엘이나 독일처럼 해외동포에 대한 보호, 교육, 
전통문화 전파 등의 정책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을까? 만약 
국가와 지식인 사회가 세계의 대세를 받아들이면서도 전통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보여주었다면, 꿈에서도 영어수업을 볼 정도로 새로운 현실에 매몰된 
신세대들이 그래도 미국 대학의 산 광고판으로까지 되었을까? 
둘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의 지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영미권이지만, 
최근에 중국권(중국, 대만, 화교 거주의 동남아 국가들)의 비약적인 발전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접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다. 
중국은 단·중기적으로 극동의 패자(覇者)라는 전통적인 위치를 되찾을 수야 
없겠지만, 일단 한국의 파트너가 될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전망을 고려하면, 
전통적인 한자 문화권으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는 것보다는, 조상의 최고 
자랑이었던 유가 경전 이해, 한문 실력 등을 정책적으로 배양해 나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미국의 삼류 대중음악을 즐겨 듣는 것보다 붓글씨를 연습하는 것이 창조성 
도야에 더 좋지 않을까 한다. 
한마디로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사회의 멸망이나 ‘유일사상 체제’의 북한사회의 
위기가 보여주듯, 다양성·다원성·문화의식의 다변화만이 국가와 민족이 살 
길이다. 하나의 특정 언어와 국가를 숭상하여 무조건 매달리는 것보다는, 자기 
민족 고유의 훌륭한 전통과 다양한 세계 문화의 접목을 시도해 보는 것이 보다 더 
생산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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