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85.tnt2.se> 
날 짜 (Date): 2000년 10월  6일 금요일 오후 02시 49분 16초
제 목(Title): 박노자/ 한국의 대학과 대학교수,학생들 


한국의 대학과 대학 교수.학생들 

박노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경희대 전임) 


아마도 개인에게 사회적 신분을 부여하는 데에 있어서는, 전세계적으로 한국 
사회만큼 "대학"에 비중을 두는 곳은 없을 것이다. "박사"로 통했던 이승만 때도, 
"육사 정권"이라고 부를 만한 역대의 군사 정권 때도 그랬지만, "386"이라는 
유행어가 정치학의 주요 용어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현재에도 과연 바뀌었을까? 
"386"에 의한, 그리고 "386"을 위한 정치가 요구된다면, 80년대 학번은 
물론이거니와 아무 학번도 없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시민들이 이미 정치의 
주체에서도, 그리고 대상에서 제외되었단 말인가? 대학을 안 나온 소규모 기업의 
주인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도 "서민"이라고 불리고, 대학을 나온 말단 
공무원도 "인물"로 받들어지는 것은 한국 사회다. 

그러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권"이라는 사회 대안 세력이 유일하게 생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대학"을 왜 하필이면 제도권 세력들이 이토록 
존중하느냐는 질문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엊그제 해외 
자본과 결탁한 재벌들을 타도하자고 구호를 외쳤던 젊은이들을, 오늘은 바로 그 
재벌들이 별 의심 없이 입사시켜 주고 중책까지도 맡겨 주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는 질문이다. 엊그제 쇠파이프를 들어 민족 해방을 쟁취하겠다는 사람이 
입사한 뒤에 직장 조직의 규율을 잘 지키며 술자리에서도 미국 바이어 앞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재벌들이 어디에서 얻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 기술자들이 재벌들에게 어차피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해외 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사람들보다 그래도 "운동권"이 강한 국내 "명문" 
대학들의 졸업자들을 선호하는지,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전문대 출신도 할 수 있는 
업무를 왜 "대학" 출신들에게 꼭 맡기는지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예외도 없지 않지만, 엊그제 "사상"과 "이념"에 빠졌던 사람들이 
오늘은 별 "이념"도 없는 직장 상사를 열심히 모시며 승진만을 꿈꾸는 것은, 
외국인에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성 사회를 부인한다는 "대학"은, 무슨 
이유로 이 기성 사회로부터 우대를 받게 됐는가? 

물론, 실제 생활에서 "대학"이 갖고 있는 전문성이 산업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은 "대학"에 대한 우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재벌에게 "두뇌"가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투사"가 며칠 사이에 그 미웠던 족벌 체제의 "충복"으로 
변신되는 것도, 그리고 족벌 체제가 그 엊그제의 "투사"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기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개인적인 "변절"과 
"안주"의 차원을 넘는, 제도적 장치들이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보인다. "제도와의 투쟁"과 "제도에의 순종"이 그토록 얽히고 설킨 대학 사회의 
주요 제도적 장치들이 무엇일까? 

대부분의 캠퍼스들의 곳곳에서 붙어 있는 대자보의 내용만 보면, 학생들의 성향을 
"무한한 진보주의와 반체제성"으로만 보기가 쉽다. 그러나, 내부로부터 보는 대학 
사회는, 군대와 비교될 만큼 서열적 (序列的)이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먼저, 중세적 도제 제도의 면모를 띤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상명하달"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는 사적인 추종의 관계지, 공적이고 평등한 
"동료 지식인"의 관계는 전혀 아니다. "교수님"이 갖고 있는 "성적"이라는 공적인 
권력도 학생에게 충분히 무섭고 위협적이지만, 학생을 불러 "혼내 줄" 수 있는 그 
사적인 가부장적 권력은 학교를 중세적 "아문" (衙門)으로 만든다. 그리고, "빽"과 
"커넥션"만 통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 전지전능한 "교수님"에게 "혼나는" 것보다도 
그 "눈 밖에" 나는 것은 학생에게 더욱더 공포스럽다. 이를 흔히들 "유교적 사제 
관계"라고 보고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학생이 그 지도 교수의 "도덕"을 유교적으로 "흠모"하는 것보다 그 
실질적 "영향력"을 수지 타산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유교적 도덕주의와 상호 
존중, 군사부 일치 사상의 잔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지만, 
여기에서 서구적 "학파"를 대신하는 패거리적 "피라미드"의 형성 원칙은 보통 
도덕과 무관한 연령.권력의 서열이다. 호화로운 "사은회"와 "세배", 만날 때마다 
절하는 등의 유교적인 형식들이 풍부하게 잔존하지만, 한국적 "피라미드"의 내용을 
"교수가 퇴직하면 그 논문의 인용 건수가 갑자기 줄어든다"는 명언이 가장 잘 
표현한다. 학부생과 교수의 관계에서도 다분히 "절대적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논리가 작용되지만, "학계에서의 입지"가 문제되는 석.박사 과정생들이면 
지도 교수로부터의 대필 (代筆) 요구를 고맙게 (?) 받아들여 "써 줄수록 잘 시켜 
주겠다"고 여길 정도다. 보편적인 진리나 인권, 학리 등을 위해서 봉사하기보다는, 
체제 내의 "영향력"이 많은 한 개인에게 "매달려야" "밥그릇"이 보장된다는 것은 
한국 학계 "새싹"들의 "생활의 지혜"가 되었다.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지도 교수를 
만난 "행운아"도 없지 않지만, 보통 이론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부인하는 
석.박사 과정생들은 실제적으로는 바로 그 체제의 말단 구성원으로서 치열한 
"충성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사력을 다해야 한다. 

학생과 교수간의 관계에서 많은 경우에는 사적인 예속성이 강한 한국 대학에서, 
학생 간의 관계도 평등 이념이 아닌 전근대적인 연령.학번 서열과 "선배"에 대한 
복속을 주요 원칙으로 삼는다. 이것도 "유교적인 존장 (尊長) 사상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논객들이 많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공적인 사회적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적인 호혜 (互惠)적 상호 의존의 관계만은 
개인에게 사회 진출과 위치 안정의 보장이 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인맥"을 재학 시절에, 즉 본격적인 "생존 투쟁"을 벌이기 전에, 쌓기가 가장 
효과적이다. 그리하여 유교적 이념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선배들에게 일단 "잘 보이고", 성공한 선배와 나중에 "먹이 사슬"의 관계를 이루어 
보자는 것은 한국적 선후배 관계의 여러 논리 중의 하나다. 형식이야 유교에서 
따온 것이지만, 내용은 다분히 정실 자본주의의 산물로 보인다. "운동권"이라는 
조직체의 경우에도, "높은 학번"이 "낮은 학번"을 의식화의 대상으로만 보고, 상부 
방침이 "밑으로" "하달"되는 등 평등의 이념과 철저한 서열화의 현실이 공존한다. 
물론, 이 경우에는, 정실 자본주의적 타산보다는, 순수한 전근대적인 연령과 
권위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일단 민초적 차원의 민주성과 근대성의 부재는 
마찬가지다. 

위에서 말한 바로는, "진보성"과 "반체제"를 내세우는 대학 사회는, 실제로 사적 
예속성을 위주로 하는 한국형 정실 자본주의의 논리와 상당히 맞는, 하나의 서열과 
복속의 체제를 이룬다. 예외도 있지만, 이론적인 차원에서 "진보"를 지향하는 
교수와 학생 중에서도 일상에서 "아랫사람"들에게 복속을 강요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면, 활동적인 진보계에 많이 가려져 있지만, 실제로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적 성향의 교수와 학생들은 과연 어떻겠는가? 그들에게 "윗사람"을 
받들고 "밑엣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적인 위계 질서 위주의 한국 사회에서, 그 질서와 규율을 실제로 
가르치는 대학은 그 만큼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우대"를 받는 것은 과연 이상한 
일인가? 엊그제 "혁명적인" 선배를 받들고 믿고 따르던 "투사"들이 졸업 이후에 
생계 문제가 생기자 재벌 등의 족벌 체제의 "장"들을 받들고 따르게 되는 것은, 
과연 그토록 놀라운가? 대상이 다르지만, 추종 행위의 내용은 그렇게 다른가? 
그리고 명문 대학의 그 엊그제 "투사"들을 받아들이고 "써 주"는 한국 사회의 
각가지 "오너"들은, 국내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그 이념적인 "껍질"이 어떻든 
간에 행동 양식에 있어서 규율과 맹종에 잘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는 과연 
그렇게 했을까? "오너"들에게는 이념 서적 한 권을 간추려 쓴 대자보가 "아기 
장난"으로 보이고, "교수님"과 "선배님"들에게 무조건 절하며 인사하는 습관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 마디로, 진보적 지향을 하나의 지적인 
전통으로 갖고 있는 한국의 "대학"은, 그 동 시에 역설적으로 청년들에게 "규율"과 
"복속"을 가르쳐 주는 사회 장치이기도 한다. 그리 하여, 보수적인 사회에 
"진보적인"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가장 적합하다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왕년의 학생 지도자들이 한나라당의 공 
천을 따내려고 사력을 다하는 것은 무엇이 이상할까? 대인 관계, 행동 양식까지 
진보화. 현대화되지 않고서는 "진보적인" 이념은 추상적인 공론 (空論)으로 남을 
것이다. 교수들 과 선배들에게 이론적인 반박과 행동적인 불복종을 할 줄 알고, 
자기 존엄성과 남의 인 권을 우선시하는 학생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사회를 
손아귀에 쥔 "오너"들이 여전히 대 학을 자기들의 충견 (忠犬)의 "훈련장"으로 
생각할 것이다. 선배가 시킨 대로 "미국 침략 사"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그 
선배의 술 강권을 한 번이라도 뿌리치는 것은 훨씬 더 진보적인 행동이다. 


<출처> 

인권도서관 
http://www.humanrights.or.kr/HRLibrary/HRLibrary2.ht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