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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85.tnt2.se> 
날 짜 (Date): 2000년 10월  6일 금요일 오후 03시 03분 15초
제 목(Title): 박노자/ 국학연구 


내가살고싶은나라 여름호 

국학연구 세계의 미래를 짊어진다. 
블라디미르 티코노프[경희대학교 러시아어과 전임강사] 

블라디미르 티코노프(Vladimir Tikhonov) 님은 성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교에서 
한국고대사로 석사학위를,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글은 물론 《논어》 《맹자》 
《대학》에도 능통해 ‘박노자(朴老子)’ 선생님으로 통한다. 


처음 한국에 와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부분은 국학(國學) 연구와 그 연구자 
개개인의 독특한 체취였다. 지금도 그 당시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1991년도에 고려대학교로 소련 최초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 고려대 국사(國史), 
국문(國文) 전공의 여러 교수님들의 연구실에서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는 옛날 
한문책들을 봤다. 나는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겨우 한학(漢學)을 깨치기 시작한 
올챙이 학생인 나로서는 ‘이 벽자(僻子)와 고사성어투성이의 옛날 책들을 한국 
교수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 줄줄 쉽게 읽는가? 동양학의 꽃인 한학을 몇 살부터 
어떻게 공부하였기에 실력이 저 정도일까?’하고 속으로 감탄했었다. 동양학 
전공자인 나에게 유교 경전으로 대표되는 극동의 고대 문화는 절대적 가치, 성(聖) 
그 자체를 의미한다. 현대의 속(俗) 세계에서 ‘글공부’를 통해서 성(聖)의 맛을 
알게 된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 연령에 따라서 동지나 형, 사부(師父)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에게 현대 한국의 선비, 진정한 국학자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분은 고(故)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이다. 현대 한국 국사학의 실질적 창립자인 그분은 
러시아 동양학계와도 특별한 인연을 갖는다. 
러시아 한국학의 태두이자 나의 은사이신 박(朴) 미하일 교수(모스크바 대학)는 
1959년에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였을 때 두계 박사의 
《삼국사기》 국역본의 해석은 물론 주석 내용까지도 상당 부분을 수용하였다. 
그는 두계설(說)의 적절함과 포괄성, 객관성 등에 찬사를 보냈다. 
그때부터 두계 박사의 학술적 업적에 대한 소련 학계의 인식이 확립되었다. 한국 
고대사 전반에 대한 두계의 논문들은 한국학의 젊은 세대인 우리에게는 필독서이자 
일종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 논문들을 열정적으로 정독(精讀)하였던 나는, 
한·중·일 3국의 일체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종횡무진으로 인용하였던 
두계 박사를 마음으로 깊이 공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와서 두계 선생님의 《하멜 표류기》의 역주본을 입수하고서는 더욱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세기에 태어난 분이 사전을 뒤지면서 그 유명한 표류기의 영·불·독어본을 
다 통독하여 대조한 끝에, 요즘의 영역본에 비해 백 배로 더 꼼꼼하고 고증이 
치밀한 역주본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까지 생각된다. 더군다나 하멜에 
대한 국내·일본 사료 일체를 다 정리해서 합본한 것은 두계 선생님의 이 역주본을 
더 가치있게 만든다. 놀라움과 감명이 섞인 마음으로 두계 선생님의 역주본을 
탐독하면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두계 선생님은 고전 극동 학문의 훈련을 완벽하게 받은 학자였기에, 동서의 벽을 
넘어 서당 공부로 함양된 이해력과 인내심으로 서양 언어와 학문을 상당히 쉽게 
소화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그는 병들어 가는 조선을 바로잡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서학(西學)을 
탐구하였던 실학자들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사의 인식을 
보완하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들여 《하멜 표류기》라는 외국 자료를 조선사 
사료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케케묵은’ 한학 공부와 ‘멋진’ 영어 공부를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신세대들은, 지난 세기의 실학자나 금세기의 실학자인 두계 박사의 
‘온고지신(溫故之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본받아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나는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을 러시아어로 번역·현주(懸註)하고 
있다. 이 번역 프로젝트 책임자인 박미하일 교수의 지시에 따라, 나는 어려울 
때마다 두계 박사의 역주본을 찾아 그의 해석을 길라잡이로 삼는다. 그분이 어려운 
한문을 어떻게 풀었는가를 볼 때마다 그분과 한국의 전통 한학에 대한 존경심이 
새로워진다. 
한국은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 시절부터 ‘국위 선양’을 목표로 해외 홍보를 
펼쳐 왔다. 그러나 많은 외국 학자들을 ‘친한파’로 만든 두계 박사만큼 진정한 
의미의 ‘국위’를 선양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요즘 소장파 학자들은 두계 학문의 한계를 자주 지적한다. 사람인 이상 개인적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이는 없다고 본다. 그래도 한국 고대사의 과학적 
해석, 동서양의 사학교류에 대한 절대적 공헌으로 소련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학계에서 오래 전부터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 온 두계 박사는, 이 땅에서도 
응분의 위치를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국 국학계가 나를 감동시킨 점은, 계속 악화되어 가는 사회의 무관심을 
무한한 인내심으로 이겨내는, 젊은 국학 학자들의 생활태도다. 
‘실용성’과 ‘현실성’의 미명하에 ‘당장 써먹을 만한’ 영어와 정보·통신 
쪽의 비중을 무한대로 늘리는 반면, 국학을 비롯한 인문과학에 ‘구조조정’의 
칼을 함부로 들이대는 대학 당국의 근시안적 정책과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젊은 
국학 학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져 가고 있다. 게다가 많은 사립대학들은 
족벌체제의 만연으로 합리적인 인재 등용의 장치가 없고, ‘대학이 영어·컴퓨터 
학원으로 전락되어야 산다’는 새로운 풍토가 퍼져 있다. 과거의 위대한 실학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책 보따리’를 싸 들고 몇 푼의 월급을 받으며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며, 행정 간부들의 만성적인 거만함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상이다. 이러한 현실은 인생의 학문적 전성기를 안정의 기약도, 
권리도, 돈도, 사회적 위치도 없는 시간강사로 살아가야만 하는 국학 계통의 
소장파 학자들을 좌절감과 절망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열악한 연구 환경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전시대의 업적들을 날로 
더욱 더 심화시키고 있다.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희생해 가면서 전조들이 이룬전통 
학문을 끊임없이 가꾸어 나가는 그들의 초현실적인 태도는, 과거 선비들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고상한 이상과 부합된다고 본다. 
한국의 젊은 국학도들의 신분과 급여가 진작 보장되고 또 그들이 국제 학술회의에 
정기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면, 아직도 버젓이 남아 있는 일제시대 일인 학자들의 
선입견과 왜곡된 해석이 많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던 한국 국학의 아름다운 모습의 몇 개 편린(片鱗)을 
적어 봤다. 과거의 전통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사회의 도덕적 상식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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