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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72.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9월  7일 목요일 오전 06시 34분 38초
제 목(Title): 권혁범/ 눈물의 블랙홀 


[논단] 눈물의 블랙홀


 

그런 ‘난리’도 없었다. 온 국민이 울었다고 한다. 세계가 ‘감동’했다고도 한다. 
지난 8월의 이산가족 상봉은 일종의 블랙홀이었다. 뼈아픈 사연과 반세기 만의 
만남에 한반도가 완전히 빨려들어갔다. 나 역시 눈물을 글썽거렸고 가슴아파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보였지만 잔칫날에는 말을 아끼는 법이다. 또한 그 날의 조그만 
만남이 수많은 이산가족의 만남을 위한 미래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니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성숙한 태도는 아니라는 의견에 공감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온 국민이 울었을까? 세계가 
감동했을까? 눈물과 환호에 가려진 중요한 문제는 없었을까? 


그토록 잔인했던 단절에 대한 반성 


이산가족 상봉은 외국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강제로 
분단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편지 한장 주고받지 
못했을까? 독일도 예멘도, 중국과 대만의 경우에도 이렇게까지 잔인한 단절은 
없었다. “세계가 감동” 운운하기 전에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았을까? 주류 언론은 반성적 성찰보다는 무슨 ‘자랑스러운’ 뉴스거리나 된다는 
듯 외신의 반응에 열을 올렸다. 나는 상봉 장면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만남을 
차단한 그동안의 남북한 권력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방치한 한반도의 
‘우리’ 코리안의 책임에 대한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잔인한 이별을 강제한 비인간적 세력과 구조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는 약했다. 대신 
며칠 내내 한반도를 뒤덮었던 것은 그들의 가슴아픈 사연에 무조건 울어야 하고 
그래서 무조건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강박이었다. 어떤 
지인은 이런 분위기를 ‘이래도 울지 않을래?’라는 촌철살인의 단문으로 
비꼬았다. 상봉장 주변의 아이들이 우는 모습도 적지 않게 보여주었다. 어떤 
세상이건 아이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울기도 하고 목을 놓고 울다가도 금방 
헤헤거리며 논다. 그런 아이들에게 “왜 울지?” 하며 뻔한 질문을 던지고 
“그래서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가슴 뿌듯한’ 답을 받아내는 
언론은 과거 ‘국민윤리’식 발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앞으로 본격화될 
‘통일교육’의 내용은 이것과 얼마나 다를까? 

어떤 여성학자는 정상회담에서도, 언론사 대표단 방북에서도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여성은 이번 상봉에서 다수가 참여했지만 
‘가족’으로만 존재 의미가 부여되었을 뿐이다. ‘공적인 남성, 사적인 여성’의 
이분법은 여전했다. 유독 어머니-아들 관계가 언론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오, 어머니!’의 외침 속에서 강화된 것은 전통적인 모성주의이며 
‘수절한 아내’에 대한 경의 속에서 드러난 것은 가부장적 윤리였다. 두명의 
아내를 둔 남편은 많았지만 두명의 남편을 둔 아내가 없었던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후자의 사연이 있었지만 그것은 남편 중 한명이 이미 사망한 
경우였다.) ‘수절’이 미덕이 아니고 비인간적 고통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지적한 기사는 거의 없었다. 

북에서 온 한 국어학자가 외래어가 판치는 남한 모습을 비판한 것에는 모두가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특히 젊은 여성들이 민족적 색채가 없는 옷”을 입고 
다닌다는 지적에는 남성 중심적 세계관이 스며 있다. 본인이나 남한 남성들이 입고 
다니는 ‘서양옷’에 비추어 설득력이 없는 얘기다. 북한에서 공식적인 행사나 
잔칫날에 남성은 양복을, 여성은 한복을 입는 관례에 녹아 있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논리가 드러난 것일까? 우리 다수는 이번 상봉을 보며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고마움’을 통해서 
한층 강화된 것은 가부장적 혈통주의다. ‘아들’과 ‘손자’에 대한 집착은 
남북한의 할아버지에게 공통적이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과 편견의 문화 


박사증을 자랑하는 딸의 모습에서는 남북한에 공통된 코리안 특유의 ‘교육열’이 
보였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 재학중…’ ‘김일성대 졸업…’ 등을 애써 
드러내는 보도에서 이념을 초월하는 학연주의와 명문대 우월의식을 읽은 것은 
나만의 예민함 탓이었을까? 언론이 주목한 것은 남이건 북이건 나름대로 ‘한자리 
한’ 사람들이었다. 북한에서 고급당원이었던 사람이 남한에 와서도 출세한다는 
어떤 ‘벌목공’ 출신 탈북자의 한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념보다 진한 
것이 피라면 피보다 진한 것은 남북한의 ‘연고주의’와 힘없는 자에 대한 차별이 
아닐까? 

이웃의 아픈 사연에 공감하고 같이 우는 것은 인간의 성숙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눈물은 진정한 것이다. 하지만 눈물은 사람들과 사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 편견을 
뛰어넘지 못한다. 눈물의 블랙홀에 마냥 빠져들어가기만 할 때 통일의 과정은 
남북한 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차별과 편견의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kwonhb@dragon.taej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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