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16.tnt13.t> 
날 짜 (Date): 2000년 9월 11일 월요일 오전 08시 38분 21초
제 목(Title): 퍼온글/ 기시 도시로, 그래서 나는 한국을 


그래서 나는 한국을 선택했다 

뼈를 묻을 각오로 쓴 한 일본 중견언론인의 한국·한국인 사랑 


기시 도시로 전NHK 서울지국장 
-------------------------------------------------------------------------------
-
 

일본 NHK의 서울지국장을 지낸 한 일본인이 어느날 갑자기 안정된 회사생활을 접고 
한국에 남아 여생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짧은 글로 옮겨 
“중앙일보”(2000년 8월 5일자)에 기고해 세간의 화제를 뿌렸다. 과연 그가 
한국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한국에 대한 관심의 출발과 10년여에 걸친 
한국생활 그리고 스스로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한 이유 등을 육필로 
정리했다. 

지난 몇주일 동안 한국의 여러 지인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래 연락을 못해 
소원하게 지내던 친구들로부터 “소식이 없어 걱정했는데 신문에 칼럼이 
실렸더라구. 이런 식으로 인사하는 방법도 있구나. 감동했다니까”하는 칭찬인지 
비꼬는 것인지 헷갈리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실 지난 수개월간 주변정리와 새로운 활동 준비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 친한 친구들이나 신세진 사람들에게 인사장조차 돌리지 못했다. 
“중앙일보”에서 의뢰받은 칼럼 연재를 두말 없이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언젠가 
칼럼을 통해 신변의 변화와 그 이유를 친구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럼이 불러일으킨 반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8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개각후 처음 있었던 각의(閣議)에서 내 칼럼을 인용하며 신임 장관들에게 
질타와 격려의 말을 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칼럼을 보고 감동했다. 한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전화도 몇통이나 
걸려왔다. 

한국과의 만남 

NHK 서울지국장이 NHK를 그만두고 뼈를 묻을 각오로 한국에 남기로 했다면 
매스컴이 달려드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빠른 반응이 온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나는 NHK에 입사한 이후 15년에 걸친 기자생활 동안 10년을 한반도 전문가로 
일해왔다. 3년간 서울지국장으로 근무하기 전에도 1991년부터 2년 동안 특파원으로 
서울에 주재했다. 한국어는 이때 연세어학당에서 공부했다. 도쿄(東京)에 돌아가 
4년 동안은 주로 북한 취재에 힘을 쏟았다. 방북취재는 여덟번을 했고 1994년 
4월에는 CNN의 마이크 치노이 기자와 함께 사망 3개월 전의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1996년 9월에는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서 북한 사상 첫 
SNG 중계를 한 경험도 있다. 일본인으로서는 남북 양측에 정통한 몇 안되는 
저널리스트 중 하나라고 자부한다. 

저널리스트로서 한반도를 전문적으로 취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입사후 2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나는 아직 신참기자로서 고베(神戶)에서 ‘경찰서 
돌기’를 하고 있었다. 고베는 과거 일본 최대의 무역항으로 일본 근대화의 
창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인도인·화교·미국인·유럽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도쿄와 나란히 국제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나와 한국의 최초의 만남은 한국요리가 계기가 됐다. NHK 고베지국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백제’라는 궁중요리집이 있었다. 어느날 한국영사관 직원과 함께 
간 것이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재일교포가 경영하는 갈비집밖에 몰랐던 나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품위 있는 전통가구와 공예품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심플하고 요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도자기와 은수저, 찌개와 전·구이가 
소담스럽게 담긴 상차림의 아름다움! 세련되지 못하고 맵기만 하다는 정도의 
인상이 전부였던 한국요리의 심오함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곳의 
경영자였던 전주 출신의 여성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때까지 몰랐던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두가지 충격은 나의 발걸음을 자주 ‘백제’로 향하게 했다. 차츰 한국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깊어지고, 한국인 친구도 늘어가자 자연스레 한국을 전문 분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백제’는 몇년 전에 주인이 바뀌었다. 이제 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고베에서 ‘가야’라는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나의 체험은 한 나라의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매우 원초적인 감각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공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기회가 생기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에 대한 원초적 체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지나가는 얘기지만 당시 ‘백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베대 유학생이 지금의 
나의 처다. 대구 출신의 그녀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나는 무엇보다 한국인다운 
그녀의 천진난만함에 이끌려 결혼했다. 처는 지금도 나를 토시 짱(일본에서 
아이들에게 붙이는 애칭)이라고 부른다. 그녀 덕분에 우리집에서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번 일로 그녀는 많이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언제나 
관용의 마음으로 나의 행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다. 그녀의 마음씨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이리하여 나는 나의 두 아이의 존재가 상징하듯 한국과 피를 나눈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여생을 보낼 곳으로 한국을 선택한 더 중요한 이유는 
그후 한국과 북한에서의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동의 한국에 주재한 3년 

한 개인의 인생은 우선 가족과 사회, 국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국제사회와 시대의 
흐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한민족만큼 외적인 요인으로 
몇세대에 걸쳐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온 민족도 없을 것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유대인이나 발칸반도 사람들 정도일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바다로 진출하려는 
유라시아 대륙의 강국과 육지로 진출하려는 태평양 지역의 강국 사이에서 한반도 
사람들은 군사·정치적으로 또 경제·문화적으로 농락당해 왔다. 어떤 때는 
수용하고 어떤 때는 배척하면서, 어떤 때는 싸웠고 어떤 때는 굴복했다. 그때마다 
민족 내부가 분열해 합종연횡을 거듭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역사가 한국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정체성의 갈등을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정통한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태극기의 문양과 전통음악의 3박자에서 항상 모순에 빠지면서도 거기에서부터 
조화에 도달하고자 발버둥치는 한국인 정신의 고유한 리듬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란 이처럼 모순으로 꽉 찬 존재라는 것, 자신을 넘어 이데올로기나 시대의 
흐름에 의해 좌우되고 규정지어지는 존재라는 것, 하지만 그 모순을 뛰어넘어 
조화를 갈구하며 주체적으로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 저널리스트로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이러한 기본 시각을 나는 한반도에서의 10년간 취재를 
통해 배웠다. 

이제 와서 한국과 한반도에 대해 말한다면 ‘격동’이라는 말조차 너무 모자라는 
단어인 것 같다. 한반도의 그 어느 3년간을 생각해 봐도 격동의 순간이 아니었던 
기간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1997년 여름부터 이번 여름까지의 3년간은 광복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한국과 한반도를 규정해온 패러다임이 크게 변한 기간이었다, 
또는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다루어야 할 3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절대 불가능하리라던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인 선배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가히 혁명이라고 할 만한 한국 정치구조의 거대한 변화였다. 
보수정당·재벌·금융이라는 보수 지배의 삼위일체 정치구조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위기가 그러한 보수 지배구조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재벌·금융개혁이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 강화로 
이어질지는 좀더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고 이에 따른 비판도 없지 않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은 이러한 일도양단의 엄격한 구조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2년만에 대폭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했고 실업률도 급감했다는 것이다. 
매크로 경제의 호전은 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지난해 중반부터는 
벤처 붐이나 IT혁명 추진 등 선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의 기업인들이 왕성한 투자 마인드를 갖고 있고, 근로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인 한국 국민이 인내력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경제의 저력이다. 정체상황에서 
10년 동안이나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본인으로서 부러울 따름이다. 남북정상회담만 
해도 일본에서는 금세기중에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아니 어쩌면 북한이 
붕괴할 경우 영원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사상 첫 정상회담이 실현된 
이유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표명했고, 나 자신도 
지난 7월8일자 “중앙일보” 칼럼에 쓴 만큼 여기에서는 한가지만 더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남북은 6·25 이후 준전시상태에서 어느 쪽의 체제가 더 우수하고 정통성이 
있는지를 놓고 싸움을 계속해 왔다. 남북이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상대는 
때려눕혀야 할 존재였고, 싸움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국가보안법은 그 상징적 존재였다. 김대중 정권 초기에 내걸었던 상호주의도 
그러한 발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관계의 역사 속에서 북한에 대해 획기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남북관계를 지금까지의 대립과 갈등의 틀에서 벗어나 
동반자로서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햇볕정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남북의 인적·경제적 
교류를 원칙적으로 자유롭게 한 것, 북·미, 북·일 관계개선을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재촉한 것, 북한의 도발에 신중한 태도로 임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변함없는 태도에 북한은 김대중 
정권과는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 틀림없다. 

물론 북한이 정치·경제적으로 남측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어느 쪽에 더 유리할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은 대립과 갈등에서 화해와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변했다. 이 흐름은 간단히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어떻게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했던가를 생각할 때, 역시 첫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질곡의 
군사정권 하에서 반공은 정권의 정통성 결핍을 가리는 명분이었다. 역으로 북한과 
그 동조세력은, 남의 정권을 타도한다는 목적을 민주화라는 오브라토로 감쌌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정치의식의 성숙에 따라 그 어느 쪽도 국민과 
민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자기보전을 위한 에고이즘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옅어지고, 그와 더불어 
김대중씨에 대한 알레르기도 점점 약해져 갔다. 한편으로 한총련과 같은 급진적인 
학생운동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바탕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통일운동으로 옷을 갈아입고,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킨 그늘의 힘이었던 시민단체가 남북을 오가며 이러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북에 전했다. 북한은 이미 남한 정권의 타도가 쉽지 않으리라고 
인식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남한 정권과 친밀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 
하에서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개혁이나 남북정상회담의 공적을 대통령 혼자의 힘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권교체를 탄생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이며 유권자의 힘이었다. 
그리고 첫 정권교체를 이룰 때까지 민주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 또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다. 한국 
사회는 역사의 계속성이 뚜렷하고 투명하게 보이는 사회다. 또한 역사의 주체가 
되어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사회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이러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금할 수 없다. 

나를 매료시킨 한국 사람들 

일본 사람들의 경우 ‘얼굴 없는 일본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보통은 국제회의 등에서 아무 발언도 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만 짓는 
일본인들을 빗대는 말이지만, 국가로서의 일본이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도쿄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 시부야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리고 NHK의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만나는 
일본인들의 얼굴이 가끔 스산해 보인다. 샐러리맨은 모두 회색빛 얼굴을 하고 
있고, 여자아이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진짜 얼굴 위에 그렸다. 모두 무언가에 화난 
것 같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한국 사람들의 얼굴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물론 예외도 있다. 점심때 조선호텔이나 힐튼호텔에 검은 
차로 찾아드는, 차처럼 검게 빛나는 회장이나 의원님들의 얼굴). 매력적인 얼굴은 
무언가에 도전하는 얼굴, 사람을 사랑하는 얼굴, 자신을 받아들이는 얼굴이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이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근에 만난 잊을 수 없는 두 얼굴을 소개하고 싶다. 지난해 12월부터 
우리는 NHK스페셜 ‘검증:조선전쟁 50년’의 로케이션을 시작했다. 이 방송은 내가 
지난해 여름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6·25가 미·소의 대리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남북의 정통성을 둘러싼 전쟁이라는 시점으로 다가가 보자는 것이었다. 
더불어 일본의 실질적인 참전 실태를 해명하자는 두개의 도전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방송은 NHK 내부의 뿌리깊은 반대와 남북정상회담으로 장기간 연기됐고, 
내용적으로도 당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것이 돼 버렸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국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명은 사실은 이미 돌아가신 분으로, 내가 만난 것은 본인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만든 흉상이었다. 대구 근교에 사는 조각가 이원달씨가 보관하고 있는 이 
흉상은 이씨의 부친인 이원식씨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낸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만든 것이었다. 이씨는 형무소측에서 지급하는 거친 종이와 보리밥알로 종이점토를 
만들어 그것을 입체적으로 겹쳐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고, 그 위에 물감으로 
채색했다. 경탄스러운 것은 브론즈로 착각할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흉상을 무려 130개나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씨는 옥중에서 수학계에서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각의 기하학적 3등분의 문제를 
풀고, 작사작곡을 하고, 방대한 양의 일기와 철학적 고찰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김규식과 연결되는 독립운동가이면서 유명한 한의사였으며, 한국 최초로 
영화사를 설립한 멤버 중 한명이기도 했다. 

해방 후의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던 이씨가 체포된 것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였다. 이씨는 장면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가능해진, 전쟁 촉발 직후의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추진하던 그룹의 리더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권은 예비구금이라는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사상적으로 의심 가는 인물을 줄줄이 
체포해 형무소에 감금했지만, 북의 남침에 위협을 느낀 군부가 그들을 조직적으로 
처형했다는 의혹이 있다. 그 수는 이씨가 조직한 피해자 유족회의 회원수로 
추정하면 100만명 전후로 보인다. 이씨 자신도 부인이 죽음을 당한 유족 중 
한명이었다. 남북의 대립과 갈등은 얼마나 많은 귀중한 인재를 묻어버린 걸까. 
물론 목숨에 경중은 없지만, 이원식씨 같은 사람들이 북에도 남에도 남아 
있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흘렀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씨가 
남긴 방대한 수의 작품과 자료는 그가 헛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초인적 의지로 전하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번쯤 그것을 읽어 볼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이원식씨 같은 아버지 세대가 체험한, 그러나 그 시대의 정권에 의해 은폐된 
역사에 빛을 비추려고 고독한 투쟁을 계속하는 청년이 있다. 제주도에서 발행되는 
“제민일보”의 김정민 기자다. 김기자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핵심멤버로 
10년 전부터 5,000명 이상에 달하는 피해자와 가해자들 인터뷰와 방대한 자료 
해독을 통해 사건의 진상규명에 진력해 왔다. 4·3특별법의 시행이나 국회의 
진상규명위원회 설치도 그들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의 집념을 태우는 그이기에 그 자신도 유족의 한명이거나 극렬한 운동권 
출신이겠지 하고 상상해 왔다. 

그러나 김기자는 제주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소위 주사파 출신도 아니었다. 문도 
제대로 안 열리는 거의 폐차 직전의 차로 제주도를 동분서주하는 그는 목에 힘을 
주지 못하는 전형적인 지방신문 기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함께 이야기해 
보고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 한국에서는 기자든 학자든 남북관계나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우익이나 좌익의 입장에 편향됐거나 당위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서울의 주요 신문의 기자는 출세나 
정계진출밖에 생각하지 않고, 4·3처럼 미묘한 문제에 10년이란 세월을 소비하는 
경우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기자는 담배를 피워 물고 마치 다른 사람 
말하듯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니까”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입을 다물어 왔습니다.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지요. 이 사회의 곳곳에 물들어 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없애지 않는 한 
좌우의 화해도, 남북의 화해도 없습니다.” 4·3사태의 원인에 관한 그의 분석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와 미국의 관계를 근거로 해명하는 것으로 무척 설득력이 
있었다. 

김기자는 진정한 의미의 저널리스트였다. 저널리스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조명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역사가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이는 한국이 아니고서는 쉽게 만나보기 힘든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나 자신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매일 뜨겁지만 신선한 여름날이 계속되고 
있다. 서울 양재동의 아파트 창 밖에는 우면산의 신록이 눈부시다. 푸르름에 덮인 
집에 있으면 여기가 내 고향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문득 왜 나는 한국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도쿄로 돌아가면 
샐러리맨 기자로서 불만은 있지만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NHK의 복도를 오가는 회색빛 얼굴을 한 사람들이나 시부야 거리를 
방황하는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애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어질어질해져 
차멀미를 하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만들어낸 시스템과 
가치관에 묶여 자유를 잃은 노예 같다. 

일본인들은 역사를 새로이 창출할 의욕도 힘도 잃어버린 것일까. 그 앞에 놓인 
것은 완만한 죽음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 머리 속에는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19세기말 이후 100년간 
한국인/한민족에게는 살아간다는 평범한 명제가 목숨을 걸고 해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대답은 평범하고 안정된 생활 대신 가족이나 사회 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삶들의 희생 위에 오늘날 
한국과 한국인들의 앞날에는 번영과 자유와 민족화해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투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투쟁이 계속되는 한 한국과 한민족에게는 희망이 있다. 나는 나를 
매료시킨 한국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역사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확실히 나는 나 자신의 역사를 새로이 만들 수 있게 되리라.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