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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66.tnt2.re> 
날 짜 (Date): 2000년 7월 22일 토요일 오전 08시 53분 27초
제 목(Title): 석창진/ 한국고대사에서의 말과 전쟁 


출처: 역사기행 

지금은 아니지만 국사 교과서가 개편되기 이전에, 즉 몇 년전에 국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한 고구려 벽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씩씩한 고구려의 
기마 무사가 활을 쏘고 있는 무용총의 수렵도가 그 표지 그림이었다. 국사를 
공부할 때마다 그 
그림을 보면서 활쏘는 자세의 특이함에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 글은 그 그림에서 시작한다. 활쏘는 자세는 둘째치더라도 그 그림에서 보이는 
말의 산지는 어디일까? 이 궁금증 하나로 이 글이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청동기 시대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농경민족과 유목민족간의 투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북방민족으로 대변되는 유목민족들은 
말을 사육하여 기마병을 편성한 전투를 시작하였고 말을 사육할 필요가 없었던 
농경민족들은 이 기마병에 맞서 보병으로 전투를 하다가 번번히 기동력의 우위를 
실감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유목민족들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말을 
이용한 이들의 전투력이 농경민족을 압도했던 까닭이었다. 이집트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원전 1675년경에 이집트를 정복했던 힉소스 족은 이집트인에게 
말이라는 짐승을 사용한 전투를 처음으로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경우에도 흉노의 기마병을 두려워한 한무제가 한혈마가 있다는 말에 서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완에서 말을 강탈해와 말을 양성한 적이 있다. 한나라 무제는 
이렇게 양성된 강력한 기마병을 바탕으로 흉노를 정복해 들어가 마침내 흉노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대사회에서 기마병의 존재는 무서운 
것이었고 기마 전술의 습득 역시 국가가 강성해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위만조선시대에 이미 발달한 기마 전술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이 철기를 가지고 들어와 집권한 이래로 위만 조선기의 
토광묘들에서는 막대한 양의 마구(馬具)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위만 정권의 관직 
이름들이 흉노의 것과 비슷한 면도 보이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사기> 
조선 열전에 나온다. 조선의 태자가 한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선물로 말 5000필을 
가지고 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전략 물자인 말을 5000필이나 선물할 정도이면 
위만조선이 가진 말의 숫자는 엄청났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럼 위만조선은 이 말들을 어디에서 들여와 기마병을 양성할 수 있었을까? 
유목국가였을까? 유목국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무제 시대에 유향이라는 학자는 
한무제의 원정을 평가하면서 "흉노의 어깨인 대완을 무찌르고 또 한쪽 어깨인 
조선을 정벌해 마침내 흉노를 굴복시켰다."란 말을 하였다. 대완과 조선은 흉노의 
양 극단에 자리잡은 국가로서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만 조선은 
이러한 흉노에게서 전략물자인 말들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대완에서 나는 명마는 
흉노의 영역이었던 초원의 길을 거쳐 위만 조선으로 들어왔을 것이며 이 말들이 
위만 조선의 군사력 증대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위만 조선의 말들이 막연히 대완의 말들만 있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위만 조선이 
존재했을 무렵에 국가체제를 형성했을 듯한 부여가 있던 지방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마가 산출되는 곳이었고 서요하 상류, 시라무렌 강 유역도 명마가 산출되는 
지역이었다. 이 두 지역 중 어느 한곳은 위만 조선의 군마 공급처로 사용되기도 
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삼한 지역에서는 기마병이 존재했을까? 
위만조선과는 달리 삼한지역에서는 기마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말과 소를 사용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진한이나 변한의 경우도 대동소이 했을 것으로 북방계의 유이민이 지속적으로 
남하하면서 기마병의 존재도 서서히 출현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북방 유이민이 
내려와 세운 백제는 온조왕 당시 기병을 이용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백제의 경우에는 말보다는 보병 위주의 전쟁을 수행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말갈지역에서 말을 들여오기는 했지만 근초고왕 당시 백제의 
주력군은 역시 우골찰갑(牛骨札甲:쇠뼈 미늘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들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몽촌토성에서는 쇠뼈 미늘갑옷이 무더기로 출토되기도 하였고 3세기경의 
백제 유적에서 馬具가 출토된 경우는 아직 드물다고 한다. 초기의 기마병은 말 
위에 가벼운 복장의 기사가 앉고 단검과 활로 무장한 형태였을 것이다. 
유목민족들은 장검 대신에 말 위에서 쓰기 편한 단검을 사용했는데 우리의 
청동단검들은 전부 유목민들의 영향이다. 어쨌든 경기병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기마병에게 보병이 계속 몰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의 경우에 전국시대 이후로 노(弩)가 발달하여 기마병의 돌격을 저지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다. 가벼운 무장의 기마병이 돌격하기 전에 노를 이용해서 
공격하면서 말이나 기사를 손상시켜 기마병에 의한 타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노에 대응하여 기마병들도 점점 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기사가 철갑으로 무장을 하고 말 역시 말갑옷을 입혀 노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한 중장기병이 탄생한 것이다. 

중장기병의 탄생은 중국민족과 대치하던 북방의 민족들에게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지며 우리나라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 이 중장기병을 거느린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제는 고구려의 기병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글의 처음에 소개한 
무용총의 수렵도에 나오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 고구려 
기병의 말이 보통 과하마(果下馬)가 아닐까란 추측을 하곤 한다. 하지만 과하마는 
아니다. 

과하마는 토종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근력은 좋으나 작은 체구로 인하여 
산악전에서 부분 사용되었을 가능성만 존재한다. 고구려 기병의 말들은 시라무렌 
유역에서 공급받은 것들이었다. 명마의 산출지로 유명했던 부여지방은 일찍부터 
외부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다는 강대국 부여가 버티고 있어서 생각만큼 
전략물자인 말을 빼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라무렌 지역은 일찍부터 
고구려가 진출하여 말의 공급지로 이용했던 곳이어서 거리는 비록 멀지만 유용하게 
이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가 모용씨의 연나라와 항쟁하면서부터 시라무렌 쪽의 말들을 
이용하기가 용이치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때 고구려는 부여로의 진출을 통해 
부여지방의 말들을 전투마로 충당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무용총 수렵도에 나오는 
말의 산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가 된 것 같으니 활 쏘는 자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수렵도에 나오는 기사의 활쏘기 자세, 즉 앞으로 달리면서 뒤돌아 보고 쏘는, 이 
자세는 이른바 파르티아식 활쏘기(Parthian Shoot)라고 한다. 얼마전에 국내에서 
실험을 해 본 결과 이 자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자세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파르티아식 활쏘기 자세는 이미 후한대에 중국의 
유적에서도 나오는 자세이다. 이 자세가 만들어질려면 우선 등자( 子)라는 물건이 
필요하다. 등자는 말 안장 아래에서 발을 받치는 "발받침"이다. 이 등자의 
발명으로 인해 유목민족의 기마병은 말 위에서 행동의 자유를 부여받았고 마음껏 
활을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등자가 말 위에서의 위치를 고정시켜 주지 않는다면 이 파르티안식 활쏘기 자세는 
나오지 못한다. 이 자세가 나왔다는 것은 등자가 이미 고구려에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등자의 수용으로 인한 기마전술의 발달은 고구려 기병의 전투 
역량을 극대화했을 것이며 중국민족과의 항쟁으로 만들어진 중장기병 역시 
고구려의 전투력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또 하나 고구려 기병의 플러스 요인이라면 
수렵도의 기사가 들고 있는 맥궁(貊弓)이다.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고구려의 
이 단궁은 위력이 자못 대단하여 고구려군과 싸우는 적군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기마병이 중국민족과의 항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백제와 신라의 
기마병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겨우 쇠뇌, 즉 
노를 중국에서 수입해 보급 단계였던 백제는 고구려 기병의 남진에 도끼병과 같은 
것으로 겨우 대응하다가 결국 남천을 하게 되었고 신라 역시 중앙군이 약간의 
경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전혀 기마전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가 고구려의 
기병에 속국화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기병에 자극받아 자구책 마련에 들어갔는데 
백제는 목장을 서남해 섬에 대규모로 설치하면서 기병을 양성하였다. 신라 역시 
중앙군을 중장기병으로 무장시키고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그렇지만 신라의 기병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안정된 말 공급처가 아직 부족할 뿐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의 평야 일대에서 고구려와 대적하는 백제가 많은 기병이 필요한데 
비해 신라의 경우 산악지방에서의 전투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기병의 수요가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세인 기병을 보유하고도 어떻게 신라는 백제를 한강유역에서 몰아내고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신라의 군사제도 중에 
보기당(步騎幢)이라는 존재가 보이는데 보병과 기병의 효율적인 조화로 기병의 
열세를 극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듯이 기병이나 보병 이 두가지 병과 중에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할 
경우 무리가 따른다.

알렉산더는 이 기병과 보병 두 종류를 철저하게 혼성하여 이용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라의 경우도 기병의 열세를 이런 방법으로 만회해 나갔을 
것이며 기병이 열세한 대신 기병을 막기 위한 마름쇠나 쇠뇌의 발달은 더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무열왕의 백제 침공 당시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병과 함께 북한산성을 치는데 신라 장군 동타천이 마름쇠를 던져 기병의 
돌격을 막고 노, 즉 쇠뇌를 이용한 공격으로 적을 20여일간 막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병이 열세였던 신라군은 이런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해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가 백제를 점령한 이후에는 국왕이 백제의 목장들을 신하들에게 차등있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신라는 백제의 목장에서 흡수한 말을 통일전쟁기에 
적절히 활용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말을 가지고 고대의 전쟁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았다. 기마병이 고대 전쟁에서 보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 기마병을 이용한 전쟁이 유리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핵무기와 같은 초월적인 무기가 출현하기 전의 시대에서 전쟁의 승패가 
무기의 우열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기를 운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그러므로 무기만 우수하다고 하여 그 집단이 승리를 거둔다는 공식은 이 
글을 쓰면서 배제하고 싶었다. 필자 개인의 생각은 5세기 고구려의 강성함이 
중장기병의 유무를 떠나서 그것을 운용한 고구려의 장수들에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 필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고대사회에서 말이라는 존재가 
어떤 형태로 전쟁에 이용되어 왔으며 기마병을 둘러싼 전쟁 양상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결코 기마병이라는 무기의 우월성을 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우수한 중장기병과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전략적 식견에 힘입어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열세한 기병을 가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공격해 대등하게 싸웠으며 당나라와 싸워 한반도에서 그 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 과정을 마지막으로 다루면서 다시 한번 무기의 우열로 전쟁의 승패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이글을 마칠까 한다.

참고문헌

이인철, <4-5세기 고구려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이기동, <고구려사 발전의 획기로서의 4세기-모용'연'과의 항쟁을 통해서-> 
박경철, <고구려 군사 역량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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