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66.tnt2.re> 날 짜 (Date): 2000년 7월 22일 토요일 오전 08시 39분 34초 제 목(Title): 박현배/ 역사와 민족, 국가 출처: 역사기행 민족이란? 민족이라는 기원을 찾는다면,서구의 19세기 민족주의에서 그 여원을 찾는다. 하지만 동양에서의 민족의 개념은 서양과 달리 고대부터 그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예나 지금이나 민족과 국가에서 분열과 통합의 관계는 끊임없이 상호간 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유럽의 EU가 통합에 대한 유럽인의 강렬한 바램이라면 소련이나 유고의 분열은 또 다른 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韓)민족&국가의 관계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학교 국사 시간에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을 세뇌에 가깝게 우리 머리 속에 주입 받았지만 우리 민족이 5천년 동안 변함없이 韓이라는 종족으로만 고조선부터 지금까지 형성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과연 우리는 기원전 수천년부터 고유의 종족.문화를 가지고 여타 다른 국가에게 韓민족의 위대함을 알리며 인적.문화적 교류 없이 자생적인 모습으로 단일 민족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바로 우리의 역사,자랑스런 고구려사에서 찾으 면 쉽게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고구려의 기원과 6.7세기 수.당 전쟁 고구려를 한번 살펴 보자. 고구려는 주몽이 이끄는 유목민 집단에 송화강 유역에 살던 예족과 압록강 유역에 살던 맥족이 결합되어 고구려 민족을 형성하였다. 이 예족은 후에 중국 사서에 의해 숙신.물길.말갈족으로 종족명이 변천 되어 바뀌어 왔다.이러나 저러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즉,세 민족이 융합되어 고구려라는 국가와 고구려인이 탄생한 것이다.이 세 민족이 아니더라도 후에 더 많은 민족이 고구려에 융화 되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고구려인의 대(對) 중국 항쟁을 살펴보 도록 하자.60년 가까이 통일 중국과 전쟁을 벌리며,韓민족의 생존권을 보존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역사교과서에서 우리는 배웠다.하지만 역사서에서는 고구려를 강조하지,당시 요동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느 출신이었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항상 민족 계통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5세기 이후 요동 지역 사람들은 한인(漢人) 출신? 고조선이 멸망한 후,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공략할 때까지 수 백년 동안 이 지 역은 중국 점령지로 남아 있었다.광개토대왕이 대규모 이주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누가 이 지역을 개간하고 군사 요새화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는 안정된 정치와 경제 발전을 이루지만 중국 지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고구려가 강력한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요동 지역의 경제와 노동력 때문이었다.물론 중국의 역할이 컸는데,당시 남북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수나라 초기까지 중국 지역은 사람이 거주하기에 불안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이런 정치.경제.사회의 혼란 속에 중국인들은 대규모로 고구려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북사] 권5,위본기5 효정제 무정 2년 10월조 기록을 참조하면 동위 말기인 541년에 고구려 지역으로 이주하려다 붙잡힌 사람만 무려 300여만명(60만호)나 되었다고 전한다.1) 이러한 중국인의 고구려 이주는 고구려 멸망시까지 소환 문제로 인하여 중국과 외교 분쟁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6.7세기 고구려인의 대(對) 중국 항쟁 주체는? 고구려의 초기 민족 구성이 동북부의 예.맥족이라면 서부 지역이던 요동 지역은 이주한 한(漢)족들이 주체가 되었다.물론 7세기 당의 요동성 공략 시기에,성 안에 주몽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은 이 지역이 이미 고구려화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인(漢人)계 고구려인이었다.이미 고구려인이 되었지만, 선조들의 출신은 중국에서 이주한 외래인이기 때문이다.이들은 전쟁에서 선봉을 맡았다.수.당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치열하게 전투를 벌리며 싸워 나갔다. 요동 주민들이 싸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를 위해서? 국왕을 위해서 싸웠던 것일까? 이들은 자신의 집과 가족,농토를 지키기 위한 생존권 보존 차원의 항쟁 이었던 것이다.일반 백성에게 가장 소중한 삶과 터를 잃는 상황에서 누가 나서서 싸우지 않겠는가? 결국,역사에서 이들의 종족 출신보다는 '고구려'와 '고구려인' 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선지 장군을 고구려계라서 한국 역사의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 분은 당나라 사람이며 당나라 장군으로 중국사에서 평가 받아 야지,한국사의 인물로서 평가 받을 수 없다.고선지 집안과 귀화한 고구려 귀족들 이 당에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또 다른 고구려인은 고구려 재건을 위해 당과 전 쟁을 벌리며 고구려의 역사를 이었던 사실을 본다면,같은 고구려계이지만 한 쪽 은 당나라 사람이 되어 중국의 역사로서,다른 한 쪽은 발해인이 되어 한국사의 주체가 되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가르쳐야 할 역사. 얼마전 신문에 아시아에서 외국인에 대한 가장 배타성을 가진 국민 1등이 한국인 이라고 나온 글을 얼핏 본 기억이 난다.물론 나 역시도 선뜻 외국인이 한국인이 라고 한다면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우린 자랑스런(?) 단일 혈족으로 똘똘 뭉친 한국인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크게 융성 하고 발전한 국가들은 다양성과 국제화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들이다.외래인을 수용하면서 동화시키는 역량 및 문화적으로 모방 차원을 넘어 자주적인 문화로 소화해 내는 성숙함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역사 교육에서 좀 더 열린 모습으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 1)서병국,<고구려제국사>,혜안,1997,p.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