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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66.tnt2.re> 
날 짜 (Date): 2000년 7월 22일 토요일 오전 08시 56분 29초
제 목(Title): 석창진/ 백제의 해상경영 


머리글.

백제는 정치적 세력권이 황해안을 따라 성장한 탓에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른바 백제의 해상 경영이니 세계 경영이니 
하는 말도 우리는 빈번하게 듣게 된다. 일찍부터 선학들은 백제의 해상 영역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기울여 왔고 지금도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백제의 해상 경영은 미스테리한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글은 
백제가 어떻게 해상을 경영했으며 그 영역은 어디까지였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진 백제의 해외 진출의 허와 실은 어떠한지를 찬찬히 풀어 가는 글이 될 
것이다. 

백제 해상 활동의 원동력 

백제는 부여계의 유이민이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세운 국가이다. 백제는 초기에 
미추홀의 세력 집단을 흡수하면서 그 세력을 강화해 갔다. 북으로는 한군현과 
대치하고 동으로는 말갈 세력의 서진을 막으면서 백제는 마한 지역내에서 가장 
유력한 소국으로 성장했다. 백제의 건국 설화와 맞물려 돌아가는 비류와 온조의 
설화는 온조 집단이 미추홀의 비류 집단을 가장 먼저 흡수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미추홀 세력의 흡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고대사회에서 중요한 
물품은 철과 소금이었다. 서한의 무제는 철과 소금을 전매하면서 세금 수익을 대폭 
올리기도 했었는데 철과 소금은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물품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부족한 소금의 공급원을 서해안 
일대에서 찾았다. 몽촌토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가까운 곳이 지금의 인천 
지역이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경기만을 거슬러 올라와 한강 수계를 
이용하여 소금을 공급하는 루트와 김포를 거쳐 오는 루트를 통해 백제는 
미추홀로부터 소금을 공급 받았던 것이다. 

백제의 소금 산지 확보는 비단 미추홀에만 그치지 않고 서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인데 이러한 활동을 통해 확보된 소금을 내륙 지방으로 운송하면서 
백제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더불어 영향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다. 백제의 소금 
공급은 한강 수계를 이용하여 이루어졌는데 북한강의 춘천과 남한강의 영월까지 그 
소금 공급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소금을 육로로 공급할 경우 침탈의 여지가 
수로보다 더 많았다고 하므로 백제는 한강수계를 이용한 소금 공급로를 확보하면서 
소금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백제에 의한 한강수계 확보는 단순히 교통로 개척의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 교역로를 지키기 위한 나루터와 성채가 세워져서 군사적인 영향력도 가중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적인 영향도 점점 증가하였다. 일본의 대화정권이 소금을 
공급하면서 각 지방의 지역적 문화가 쇠퇴했다는 사실은 백제 문화권의 광역화에 
소금이 기여한 바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실감하게 한다. 그렇지만 한강수계의 
확보는 백제사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바로 해운의 발달이다. 비록 바다는 
아니지만 강을 이용한 수송은 그만큼 선박 제조 기술과 물에 대한 적응력, 
항해술이 필요한 것일 것이다.

백제는 한강수계를 통해 그들만의 노하우를 축적했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마한 
지역을 병합하면서 지금의 강진으로 비정되는 침미다례 같은 해상세력들을 거점 
지배하는데, 서해안의 항구들에 대한 거점 지배는 서해안 항구들이 가지는 바다에 
대한 노하우를 백제가 그대로 흡수할 수 있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해안선의 굴곡이 심한 서해안에는 육상 교통 대신에 해양 교통이 
발달하였으며 일찍부터 신미국과 같은 삼한의 유력 소국들은 서해를 통해 중국의 
왕조와 직접 교통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해양 기술은 백제가 바다로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성시대 백제의 해상 경영.

서해안으로의 진출을 통한 해상 인력 확보와 한강 수계의 운용을 통한 노하우 
축적으로 백제는 일찍이 바다로 진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한성 시대의 백제는 
육지의 영토 확보에 그친 것이 아니라 바다로의 진출에도 국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일찍부터 한반도와 중국의 해상 교통로는 산동반도를 
출발하는 연안 항로였다.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 지리지에는 요동반도에서 신라 
왕성, 발해 왕성으로 가는 해상교통로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이 교통로는 
고조선의 성립 이전부터 이용되었으리라 추정되는 길이다. 

산동반도를 출발한 배는 연안 항로를 따라 섬들을 기착해 가면서 압록강 하구에 
도달하게 되고 압록강 하구에서 다시 신라 시대 당항성이 있었던 아산만 일대까지 
해로가 이어진다. 한반도 서북지방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었다. 마한의 
소국들 역시 이 항로를 따라 중국과 교통했으리라 생각된다. 마한과 중국의 직접 
교통이라기 보다는 마한이 낙랑군이나 대방군을 중계지로 하여 중국과 
교통했으리라 추정되며 백제 역시 근초고왕때 중국과 직접 교통을 하면서 이 연안 
항로를 통해 중국과의 교류를 시작했을 것이다. 

근초고왕의 시기에는 중국의 군현 세력들이 한반도에서 축출된 이후라서 백제는 
중국의 군현을 중계지로 하여 중국 본토와 교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의 영토 확장 사업과 더불어 강대해진 백제의 수군이 한반도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백제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한성 
백제는 중국과의 교통은 물론 일본과의 교통, 신라와의 동맹으로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신흥 강대국 백제를 널리 알리게 되었을 것이다. 

한성시대 백제의 요서 영유. 

한성 백제의 세력권을 추정하게 해 주는 하나의 단서는 요서 영유 관련 
자료들이다. 중국의 남조계 사서에서 주로 발견되는 이 백제의 요서 영유 문제는 
백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하나의 이슈로 자리매김 해 왔다. 이른바 고구려의 
요동 진출에 자극받은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였다는 것인데 대체적인 시기는 백제가 
가장 강성했던 근초고왕 시기로 파악되고 있다. 요서 영유는 백제의 발달된 
수군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 변화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턱대고 백제의 요서 영유, 혹은 요서 진출을 신빙할 수 없는 
것은 그 기록들이 남조계의 사서에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당시 백제의 
수군력이 황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만큼 요서 진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만을 견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기록상의 면면을 살펴보면 
백제의 요서 진출은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근초고왕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최강국이라 할수 있는 나라는 모용씨의 연나라일 것이다. 

물론 고구려, 백제, 그리고 중국의 북조 왕조도 강대국이라고 할수 있지만 당시 
가장 큰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국가는 모용씨의 연나라가 틀림없다. 연은 고구려를 
압박해서 고국원왕을 패배시키고 중원으로 진출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요서와 요동 
등지를 영유하면서 최강국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에게 축출된 낙랑과 
대방을 요서로 이동시켜 이름뿐이지만 명목상으로 낙랑, 대방 태수를 자기 휘하에 
두면서 연은 한반도 일대에 대한 소유권 명분도 가지게 되었고 중원을 통일할 
명분까지 얻게 되었다. 

연의 가장 중심부라면 역시 발상지인 요서지방을 들 수 있겠는데 만약 근초고왕이 
연의 중심지이자 발상지인 요서로 진출하여 경략했다면 당시 가장 큰 국제적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조의 사서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모용씨의 
연나라는 중국의 왕조사로 편찬되지 않은 관계로 백제가 요서를 진출했다는 것이 
중화 왕조의 치욕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를 쓴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랑캐들끼리의 요서 다툼이었을 것인데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북조계 
사서를 쓴 사람들은 백제의 요서 진출 자체를 몰랐다는 가정이 나온다. 그럼 
남조계 사서를 쓴 사람들, 즉 백제의 요서 영유를 주장한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런 
기록을 남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백제의 중국에 대한 관작 청구와 연관이 있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로 고구려와 공방을 벌이면서 낙랑, 대방 지역을 영유하기를 원했고, 이 
지역의 영유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중국에 조공하면서 낙랑태수, 
대방태수를 받고자 하였고 실제로 그 직함을 가진 인물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아직 백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였고 그 지역 자체가 
예전의 낙랑, 대방의 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백제의 요구를 수용하여 그런 
관작을 수여하였던 것이다. 그런 인식을 가진 남조계 사관들에게 낙랑과 대방의 
요서 이동은 어떻게 받아들여 졌을까? 그들의 인식 하에서는 백제도 따라 같이 
요서로 이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많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남조계 사서들에만 출현하는 초 
시제적인 백제의 요서 영유 문제는 이러한 인식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웅진, 사비시대 백제의 해상경영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남천한 백제는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과의 교통을 통해 백제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광개토왕의 영락 6년 원정으로 인해 
괴멸된 수군력을 다시 회복하기에는 많은 시일이 걸렸고 고구려 수군이 장악한 
황해를 이용한 중국과의 교통도 종종 차단되곤 하였다.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백제는 이전의 연안 항로 대신 전남 해안에서 출발하여 중국 남조의 
도읍인 건강 지방으로 직항하는 항로를 찾아냈다. 

이 항로를 동중국해 사단항로라고 부르는데 쿠로시오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한 
항로라고 할 수 있다.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항해라서 위험 부담은 크지만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할 줄 아는 항해술과 튼튼한 선박만 구비된다면 충분히 이용 가능한 
항로였다. 웅진, 사비시대 백제의 해상 경영은 이 항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또 다른 항로로 아산만에서 출발해 산동반도로 직행하는 항로가 
있지만 아산만이 고구려의 영역 내 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항로 역시 위험했을 
것이다. 

어쨌든 백제는 이 동중국해 사단 항로를 통해 남조의 문물을 수용하고 국제적으로 
백제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양서>에 나오는데로 
고구려군을 여러차례 격파하여 마침내 다시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는데 성공하였다. 
백제가 다시 재기하는데 기여한 것은 중국, 왜와의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과 
드넓은 전남의 곡창 지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면서 국고의 안정화를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백제에는 중국인, 왜인, 백제인 등이 혼재해서 살고 있었다는 중국 사서의 
기록은 백제가 해상경영을 통해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백제의 해상교역권을 추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나 
제주도를 중간 기착지로 삼고, 왜국과의 교역에도 주력했을 것이다. 가야 세력의 
집요한 방해를 물리치고 왜국과의 교역로를 지킨 사례나 왜국과 교역을 시도하던 
동남아시아 상인들을 물리친 사례는 백제가 왜국과의 교역을 독점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강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 해상 경영의 유산 

백제의 해상경영은 한국사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우선 백제선이라고 불릴 정도의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이라고 할수 있다. 일본측 기록에 보면 백제의 장인들이 와서 
백제선을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의 고대 선박은 중국과는 달리 
기록으로 상세히 남아 있지 않아서 그 형태를 추적하기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선박을 제조했을 것이되 백제의 
항해술이 점차 발전하고 난 후에는 백제선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선박 
제조술을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항해술은 일찍이 서남 해안 지방의 마한 세력을 기원으로 발전된 것으로 
백제시기에 이르면 백제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는 일은 간단한 항해로 치부되었을 
것이며 황해를 가로질러 중국으로 항해하는 것도 일반적인 항해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나침반이 없었던 시기의 항해는 항해사의 육안으로 보이는 섬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다를 가로지른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특히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항로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 것인데 
상인들이 이 항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항해술이 발달했다는 말이 된다. 
이미 백제 시기에 이만큼 성장한 항해술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문무왕은 船府를 병부에서 따로 떼어내어 신설하였는데 이는 
발달된 항해술을 가진 백제를 흡수함에 따라 신라도 해외로의 진출을 시도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선부의 역할은 경덕왕때 利濟府로 개칭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수 있는데 이제부라는 
말은 부의 축적이나 상업과 관련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이러한 신라정부의 
지원으로 인해 한반도 서남 해안의 세력들은 지속적으로 중국과의 교역에 
종사하였고 동아시아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이슬람 상인들이 신라의 울산항까지 
오는 일도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 이후 중국으로 간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들은 중국에서 신라방이라는 거점을 통해 해양업에 종사하였고 
청해진의 설치 이후 장보고의 해상활동으로 대규모 해상 제국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사중에 서남의 섬에 있던 큰 무덤에서 금은보화를 
얻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 서남해안지방의 세력들이 가진 
경제적 부가 어느정도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또 이 서남의 해상 세력의 
유산은 조선조까지 이어져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의 작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바닷사람으로 등장해 고향의 물목도 지키고 국가도 지켜냈다. 

백제의 해상경영과 관련한 미스테리 

백제의 해상경영과 관련해 그 해양 영역을 추적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국내외 학자들간에는 이 해역을 추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로 광활한 동남아시아의 해로까지 백제가 개척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백제가 왜국에 전해준 탑등이라는 물건이 페르시아산 양모라는 점과 
중국에의 조공에서 백제와 동남아시아 국가가 같이 이름을 올리며 조공했다는 
사실, 백제 장군 흑치상지의 묘지명에 나오는 흑치국이 지금의 필리핀이라는 사실 
그리고 백제 성왕대의 승려 겸익이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사실과 같은 것들에 
착안하여 나온 결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에는 아직 반박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단순히 하나의 물품만으로 그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중국에서 교역을 많이 할 경우 서역산 물품들이나 이슬람 산 물품들이 교역 
중심지에서 발견되곤 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백제 지역에서 중국산 도자기나 
물품들이 출토되어 중국과의 교류를 상정하는 근거가 되는데 아직까지는 백제 
지역에서 중국산 도자기가 발견되는 것만큼의 동남아시아산 물품이나 이슬람산 
물품이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흑치국의 경우에도 필리핀을 옛 이름이 
흑치국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을 굳이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언가는 있는 것 같지만 확언할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앞으로 백제사 관련 글을 계속 쓸 예정인 
필자는 백제의 해상 교역권을 황해와 중국 남부 일대, 왜국으로 규정하고 글을 
전개해 가도록 하겠다. 확언할 수 없는 사실을 가지고 무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아직까지는 무리일 것이다. 마치며 백제사 연재글의 시작으로 
백제의 해상 경영에 대한 글을 택해 보았다. 백제의 해상 경영은 한국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장보고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여기까지 역추적을 해서 이 해상 
경영을 쓰게 되었는데 앞으로의 백제사 글은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백제사를 보는 식의 글로 채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만한 글을 써주시고 연구해 주신 학자분들께 감사드린다. 

참고문헌

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6 삼국의 정치와 사회Ⅱ-백제》, 1995 
이도학, 《새로쓰는 백제사》, 1997 
이도학, <고대국가의 성장과 교통로>,《국사관 논총》74, 1997
김재근, <한국,중국,일본 고대의 선박과 항해술>, 《진단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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