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artistry �) <1Cust187.tnt6.ta> 날 짜 (Date): 200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09시 38분 05초 제 목(Title): 박정순/사리와 공익의 자유주의적 관련방식 私利와 公益의 자유주의적 관련 방식 박정순 / 연세대 철학과 교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작인 출신의 어느 얼치기 빨치산은, 좌익이 되어 입산까지 하게 된 동기를 밝히는 중에, 신분을 묻지 않고 내남없이 ‘동무’라고 통칭하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이 ‘좋음’은 우리의 생활정서에서 배어나온 것이 아니라, 혁명의 미래를 예감하고 미리 마신 김칫국물의 맛이었다. (무릇 맛이란 맛은 오래 묵힐 때 제 맛을 얻는 법.) 일찌기 에밀 뒤르껭은 공산주의적 생활 연대가 견실하지 못했던 원인을 도덕적 인간주의의 부재에서 찾음으로써, 이 ‘맛’의 피상성을 지적한 바 있다. 어느 글에서 본 최원식도 같은 논지를 한국사회에 고스란히 적용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문제 이전에 유교적 도덕/예법주의가 재생산한 생활정서에 의해서 심대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분과 관계의 규정에 따라 언사와 행태를 달리하는 유교식 전통주의는 근대화와 좌파의 도전, 그리고 전통청산의 20세기를 뚫고 아직도 한국사회의 기층에서 연면히 맥동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를 중심에 놓은 우리의 전통문화는 식민지의 타율과 폭압, 이념적 양극화, 그리고 개발연대의 농축성장주의 속에서 法古創新법고창신의 끈을 놓쳐버린 채 급변하는 時勢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문화통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달리 세대차가 격심한 터에 이른바 타자화된 “욕망의 간절함”1)으로 새것 콤플렉스까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특히 유교는 고물상의 지위로 내몰리며 격세지감의 감상에 쓸쓸해하고 있다. 이 와중에 지식계의 일각에서는 구한말의 개화와 척사위정 사이의 긴장이 새로운 고깔을 쓰고 재연되는 모습까지 보인다. 분야와 관심에 따른 분석과 진단이 각양각색이겠지만, 근자 우리 사회의 정신문화적 지형을 그리면서 대체로 일치하는 대목은 어떤 ‘혼란’에 대한 감각이다. 이것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사회학적 명제로 풀어낼 수도 있고, 정체성/주체성의 상실과 재구성이라는 주제 속에서 철학적으로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며, 문화비평적 시각으로 ‘잡탕주의’의 현상론을 패턴화할 수도 있고, 혹은 역사가의 통시적 조감력을 빌어 전근대 및 탈근대와 동시에 엇섞여든 우리 근대의 특이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이 ‘혼란’은 경제적 확장주의와 정치적/이념적 폭압주의의 설계 아래 중앙통제적 민족주의의 아교로 땜질한 미봉적/타율적 통합의 허울이 시대의 성숙과 더불어 벗겨지면서 가시화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로 상징되는 문화다양성과 상업주의, 그리고 세계화의 세례는 이 혼란의 덩어리에 색색의 거품을 입혀 부풀려 놓았다. 잘라 말해서 이 혼란의 뜻은, 전통적 가치체제가 급속히 몰락하고 경제주의적 근대화의 실적과 의미가 평가절하되는 마당에,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상징도 나타나고 있지 않”2)고 있다는 것이다. 에두를 것도 없이, 이 혼란의 실체는 ‘가정’에서부터 체감된다. 최근 국정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 요인은 가족해체현상 등 가족문제, 즉 가족 불안정이다.”3) 이 보고서는 주로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를 겨냥해서 분석된 것이므로, 이 글이 다루고 있는 ‘혼란’의 전모를 밝혀 들어가는 실마리로서는 썩 적절하지 못하긴 하다. 그러나 이 가정위기 현상은 통시적 내력이 복잡하게 伏流복류하고 있어, 단순히 경제위기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필경 이 문제의 생리와 규모가 ‘전통과 현대’라는 보다 포괄적인 범주 속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적 자율성과 공공성,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국민과 시민, 혹은 정리와 합리 등의 논쟁적 대립항을 통해 그 정형이 예시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두루 관련되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로 사적 자율성과 공공성을 병치/대비시키면서 가정, 혹은 우리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소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이 테마에도 여러 쟁점이 있겠지만, 특히 아이들의 과보호와 그 행태와 관련해서 논의를 이어보자. 우리의 생활이 각종 정서적 공동체주의의 틀에 묶여, 공적 합리성을 훼손하는 모습이야 따로 책을 엮어야 할 정도로 무수하지만, 일상의 비근한 사례로서는 가정교육과 관련된 자잘한 행태들일 것이다. 한수산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글에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좀 내버려두고 기를 수는 없을까. 아이 기를 살려서 무엇이 되는가. 그것은 自意자의가 아니라 恣意的자의적 인간이 될 뿐이다.”4) 분석의 틀이야 다양하지만, 自意와 恣意 사이의 길항관계도 매우 유용해 보인다. 이를테면 自意가 恣意로 미끌어지는 원인과 그 과정을 살핌으로써, 한편으로 전통을 창의적으로 습합하는 데 실패한 채 고속 근대화의 물결 속으로 내밀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합리성이라는 근대성의 내실을 채우지 못하고 정서적 가족주의의 틀 속으로 퇴행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조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주체적으로 형성된 自意가 개성의 빛깔을 띠고, 이 빛깔이 어울려 和而不同화이부동하되, 공적 합리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절제와 조율의 미학. 이러한 공동체의 이상은 어디에서부터 균열되었을까? 집안에서 체질화한 恣意와 타율이 집 밖의 이기와 비합리로 곧장 이어지면서, 기성세대의 부박한 상업주의와 획일주의를 답습하게되는 행태의 원천은 어디일까? 과보호의 자폐 구조 속에서 오히려 비합리가 양산되고, 過敎育과교육의 강박 속에서 타율성만 깊어지는 꼴은 어디에 화근을 두고 있을까? 우선 획일성의 통합구조에 따른 교육도 한 몫을 할 것이다. 물론 이 直切직절한 획일주의는 교육문제의 범위를 훨씬 넘어 우리 근현대 사회의 총체적 생리 및 구조와 맞물려 있으며, 이것은 결국 20세기의 우리가 전통문화와 유연하게 대화하면서 이를 창의적으로 계승하는 創新창신의 기획에 실패한 탓이기도 하다. 주체성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啓線계선에는 통합적 획일성이 들어설 틈이 없는 것. 그러나 우리 아이들을 양육/교육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물질의 근대와 문화의 탈근대를 떠드는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의 전근대’와 그 획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화이부동의 성숙한 사회구성을 위한 인문주의적 제안에 쉽게 등을 돌린다. 혹자는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선생이 21세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획일주의, 즉 식민지와 이념분쟁, 통합적 민족주의와 독재의 상흔은, ‘이제는 잊어야 한다’는 포즈 속에서 가볍게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획일주의는 몰개성한 ‘새것 컴플렉스’나 ‘원세트one-set주의’와도 관련되며, 아이들로 하여금 심층근대화의 혈류인 정신문화적 자율성을 고취할 수 있는 환경과 훈련을 빼앗아 버린다. 따라서 아이들은 속악한 물질적 근대화의 획일주의에 조숙하게 현혹/순치되든지, 아니면 이 획일주의로부터 반동적/파괴적으로 일탈하는 구도로 양분된다. 주체성에 근거한 自意는 결코 恣意로 흐르지 않는 법이며, 개인이든 집단이든 주체성의 형성에서 전통에 대한 내재적/동정적 비판을 솎아내고 걸러내는 일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절맥되다시피 전통과 등을 돌린 채, 식민지의 산업전사형 교육체제 이후 문화적 타율성에 찌든 아이들은 사적 개성과 공적 합리성의 경계를 조율하는 自意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쉽게 恣意에 빠져버린다. 따라서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개인보다는 恣遊자유롭고 무책임한 군중의 일원으로 둔갑한다.5) 합리적 개인들에 기반한 自由와 공공성의 조화라는 이념은 이기적 가족주의와 타율적 교육의 튀기들을 끌어 모아놓고서는 구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사적 자율성과 공적 합리성의 어느 한 쪽만이 비대해져서, 아나키즘이나 또 다른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개인의 성숙, 法治, 그리고 약자를 위한 사회적 연대가 상호 소통하듯 습합된 공동체의 구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롭고 성숙한 미래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서는 우리의 가족이기주의와 사사화한 情理를 공적 합리성의 잣대로 제어하고, 교육 및 사회문화의 타율성과 획일성을 개성과 사적 창의성의 실험으로써 부단히 중화시켜 나가야 한다. 가령 사적으로는 과소비로 늘 몸살을 앓을 정도이면서도, 신문사회면을 감상적으로 장식하는 할머니들의 한풀이식 행위를 빼면 기부문화가 전무하다시피한 것은 주제와 관련된 우리 현실의 아픈 정곡을 찌른다. 현대한국이 전통문화와 가치를 법고창신하지 못한 채 물질적 근대화와 천민자본주의의 토대 위에 급속히 재구성 되다시피한 것은 두고두고 그 아픔을 느껴야할 화근이자 ‘혼란’의 실체로 남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스쳐가는 지적이 되겠지만, 가정과 가족이 공적 합리성과 자연스레 접합되는 자율공간이 되지 못하고 봉건적 공동체주의의 굴레로 남은 부분에서는 특히 여성문제가 도드라진다.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마저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은 자주 지적되거니와, 자타가 인정하는 유교문화의 嫡子답게 강고한 가부장체제를 온존시키고 있는 가정의 생리와 틀이 바뀌지 않는 한, 21세기에도 예의 ‘혼란’은 계속될 것이다.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92주년을 맞아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청년진보당이 주최한, ‘가부장제에 불을 질러라―호주제 화형식’이 열렸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행사는 무산되었고, 탑골공원 할아버지들의 욕지거리만 난비했다: “너네는 에미 아비도 없냐? 사회를 ‘혼란’시키는 못된 년들 같으니라구!” 1) 개인이익과 공익의 정의 문제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이다. 개인이익도 사적이익(private interest, personal interest), 자기이익(self-interest), 이기적 이익(selfish interest)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고 있고, 공익도 국가이익, 공동체 이익, 사회전체 이익, 공동이익 혹은 공통이익(common interest), 공동선(common good) 혹은 공공재(public good)로 다양하게 언명된다. 또한 개인이익과 공익 사이에 집단적 선(collective good) 혹은 집단이익(group interest)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공익을 정당한 개인이익으로서의 사회구성원의 이익”으로 정의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따른다. 2) 자유주의에서는 각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이익을 추구한다고 간주된다. 즉 이익은 인간의 욕구(desires)와 소망(wants)이 추구될 수 있는 방식과 관련하여 인간 행동의 동기유발 촉진제로서 작용하며 반성과 계산의 측면을 포함한다. 이익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효용·만족·편익·쾌락·명예 등, 유형적인 것이나 무형적인 것, 또는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모든 것들이 망라된다. 로크가 말한 것처럼 “생명·건강·신체의 안녕, 그리고 돈·토지·집·가구 등등 물질적인 것의 소유를 시민적 이익”으로 생각할 수 있다. 로크의 정의에 따른다면, 이익은 인간이 가진 어떤 가치와 선에 대한 일반화된 수단의 목록으로서 개인적 조건과 물질적 소유를 지칭한다. 3) 자유주의적 공익 개념의 빈약성을 비판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는 한 사회의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지는 공유된 삶의 양식과 가치라는 관점에서 공동선(common good)을 주창한다. 참여민주주의자들과 인본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은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참여가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고차적인 이익 혹은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양식이 병존하는 현대 다원주의적 사회에서 그러한 공동체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의 공익 개념은 지나친 것이라고 응수한다. 4) 고전적 자유주의와 현대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신보수주의에서 공적 영역은 재산권의 상호 보호와 그 엄격한 시행이 주요한 안건이 되는 야경국가적인 것이고, 그 이외 모든 것은 사적 영역, 즉 개인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계약과 합의의 영역이다. 여기서 공적 영역은 어떠한 합당한 이해 관계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반면에 개혁적 자유주의와 복지 자유주의에서 공적 영역은 보다 광범위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즉 공적 영역의 역할은 자연적 사회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실질적인 기회균등의 보장으로 확대된다. 자유주의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로크(Locke), 스펜서(Spencer), 하이에크(Hayek), 프리드먼(Fridman), 노직(Nozick) 등은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루소(Rousseau), 그린(Green), 롤즈(Rawls), 드워큰(Dworkin) 등은 후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5) 물론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공공적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이 제약되고 있다. 즉 국가안보와 범죄예방을 위해서 검문, 수색, 압류, 일시적 구금, 강제적인 혈액검사와 마약검사 등이 실시되고 있다. 자유주의 공익 개념 중 중요한 것의 하나는 이와 같이 상충하는 양립불가능한 가치와 자유들 사이의 상호 인정 범위와 그 한계와 강도에 대한 조정이다. 즉 예를 들면, 경찰 검문으로부터의 자유에 상충하는 개인적 안전의 확보, 공인의 프라이버시와 초상권에 상충하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가 그러한 것이다. 물론 보다 실물적인 재산권에 제약은 보다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에 규정된 것처럼,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23조 3항). 6) 이러한 관점에서 상충하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익의 상호 조정이 자유주의적 공익 개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유파는 소위 “잠정협정적 자유주의(modus vivendi liberalism)”이다. 이것은 복지자유주의의 보다 이상적인 사회적 덕목인 평등과 광범위한 분배적 정의의 실현을 거부하고, 협상적 분배정의론을 기조로 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잠정협정적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필요 이상의 변호사들과 로비스트들이 전횡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7) 공공재는 사적 재화와 달리 소비의 불가분성, 타인의 비배제성, 공급의 공동성과 외부성을 그 기본적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공중의 규모가 커서 많은 개인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회피하고자 하는 무임승차자의 유혹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두 사람의 죄수가 동시에 침묵을 하면 더 적은 형을 살 수 있지만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백을 함으로써 모두 더 많은 형을 사는 “수인의 딜레마” 상황과 유사하다. 환경문제에서의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는 사회적 복지함수가 개인적 선호의 서열들로부터―예를 들어 정책대안 a, b, c에 관한 세 사람의 순환적인 선호 서열은 투표의 역리에 빠지게 되므로 {(a>b>c), (b>c>a), (c>a>b)}의 집합으로부터―다수결의 원리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정당한 개인이익의 총합으로서의 자유주의적 공익 개념에 심각한 난제를 제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