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artistry �) <1Cust91.tnt7.tac> 날 짜 (Date): 2000년 7월 1일 토요일 오후 06시 49분 02초 제 목(Title): 월간중앙/ 위당 정인보 민족史學의 泰斗 .................. 爲堂 鄭寅普 “朝鮮의 수백년 역사는 텅비고 거짓된 虛와 假의 歷史” ------------------------------------------------------------------------------- - 1913년. 나라를 잃은 지 이미 3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나라를 되찾는 일은 더욱 요원해 보였다. 받아들이기는 싫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국과의 두차례 전쟁 끝에 조선을 빼앗은 일본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였고 서로 으르렁대던 서구 열강들은 동아시아의 강국 일본을 자기편에 끼워넣으려고 안달했다. 누가 봐도 조선은 일본 것이었고 조선인은 나라 없는 민족이었다. 당시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나라 잃은 민족인데 어디서 산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더욱이 꼴보기 싫은 왜인(倭人)들을 보지 않으려면 아예 조선땅을 떠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간도(間島)는 이처럼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조선인들에게는 신천지였다. 백두산 이북의 옛 만주지역인 이 땅은 청(淸) 왕조가 황실의 발상지로 여겨 수백년간 거주를 금지시켰던, 이른바 봉금지(封禁地)였다. 조선인들은 나라가 쇠잔해지던 19세기 말부터 하나 둘 간도를 찾기 시작했고,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령으로 땅을 빼앗긴 농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됐다. 북으로 북으로.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연상시킬 만한 대이동이었고 여기에는 나라 잃은 분노를 지울 수 없었던 혈기왕성한 젊은 지식인들도 끼어 있었다. 1913년 11월 안동현(安東縣). 현재의 중국식 지명은 단둥(丹東)으로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만나게 되는 중국의 관문이다. 남쪽에서는 아직 단풍이 지지 않았을 계절이지만 국경을 넘은 이곳의 삭풍(朔風)은 이미 살을 다. 마침 눈까지 내려 거리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이미 겨울임을 알렸다. 이곳은 그때도 간도를 찾아나선 조선인들이 처음 밟는 중국땅이었다. 더러는 배로, 더러는 얼음길을 걸어 압록강을 건너며 그리운 고향산천을 생각하던 곳, 그리고 새 땅에 첫 안장을 풀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던 바로 그곳이었다. 爲堂에 대한 春園의 추억 안동역 인근의 한 여관은 간도를 찾은 많은 조선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했다. 조선 교포가 운영하던 곳이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을 찾았고, 여기서 새로운 개척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비단 농지를 찾아 간도로 가려는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나라를 떠난 젊은 지식인들도 압록강을 건넜다는 회한을 이곳에서 풀고는 했다. 밤이면 이들은 서너명씩 짝을 이뤄 향수를 달랬고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을 뿌리기도 했다.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인들의 향수가 어린 곳이다. 11월의 어느 날인지는 분명치 않다. 살을 에는 추위를 온몸으로 맞으며 한 조선인 청년이 여관 앞에 서 있었다. 파리한 얼굴에 가녀린 체구. 한눈에도 식민지 조선의 젊은 지식인임을 알게 해 줬다. 생활고로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오산학교 교원으로 일하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였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삶의 지표를 잃고 우국지사들이 모여 활동한다는 상하이(上海)로 갈 심산으로 길을 떠난 그였다.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은 후 꼭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수심 가득한 그의 눈은 멀리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라 잃은 지식인이니 당연했겠지만 그의 근심은 그와는 또 다른 것으로 보였다. 휴-. 그의 입에서는 하늘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였다. 이제 남은 돈은 겨우 70전여. 상하이까지 여정은 멀었지만 하루 세끼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끼니야 거르면 어때. 어쨌거나 상하이쪽으로 갈 수 있는 만큼 차표를 끊자.” 참담한 심경으로 막 여관 문을 나서려 하는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아니, 이게 누구요? 춘원 아니오?” 놀란 춘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분명히 봤는데…. 춘원은 억지로 기억을 더듬었다. “나요, 왜 예전에 홍명희 집에서 한번 보지 않았소?” 그 말을 듣고서야 춘원은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일찌감치 한학으로 이름을 떨치던 명문가의 후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였다. “아,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상하이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외다. 그런데 춘원은 어쩐 일이오? 안색도 몹시 안좋은데, 어디 아프십니까?” “그게… 상하이로 가는 길입니다만, 그만 노자가 다 떨어졌지 뭡니까?” 고개를 떨군 춘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사정을 털어놓고 말았다. 신세한탄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위당은 선뜻 20원(圓)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춘원은 놀란 눈으로 위당을 바라봤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위당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따뜻한 웃음을 내비쳤다. “저는 서울로 가 돈을 마련해 다시 상하이로 갈 생각입니다. 서울 갈 여비는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저 저의 성의로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객지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위당과 춘원은 이렇게 서로의 갈 길을 찾아갔다. 위당은 서울로, 춘원은 상하이로…. 당시 춘원은 스물둘, 위당은 스물하나였으니 그야말로 막 뜻을 세우려는 식민지 청년들이었다. 춘원은 이때 위당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훗날 ‘명주 고름같이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이었다고 썼다. 그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이 향후 민족의 얼을 일으켜 세우겠다며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글을 써낼 것으로 춘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춘원이 ‘애국’의 지조를 버렸을 때조차 위당은 민족의 ‘얼’을 놓치 않았다. 어쨌거나 춘원은 훗날 그가 준 20원을 어떻게 썼는지 기록해 놓았다. 안동에서 바닷가까지 가는 여비 3∼4원, 청복(淸服) 구입에 3∼4원, 상하이까지의 뱃삯이 14원. 위당의 도움으로 간신히 상하이까지 갈 여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하이까지 가는 중간에 배가 정박할까 두려웠다. 이제 그에게는 1박의 여비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춘원은 ‘그때 나는 참으로 죽고 싶었다’고 쓰고 있다. 1913년 광복의 큰뜻 품고 중국 망명길 위당의 일대기를 그릴 때 춘원의 글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가 남긴 몇편의 글, 이를테면 1930년 “삼천리”(三千里) 10호에 나오는 ‘상하이 이일 저일’이나 1948년 ‘나의 고백, 나라를 잃은 사람들’에서 나오는 위당과의 경험담은 위당의 성품이나 발자취를 찾는 데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다. 위당은 자신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압록강을 넘나들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반 없다. 위당이 왜 상하이에 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혼선이 있었다. 주변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필요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시기 위당은 박은식·신채호·문일평·홍명희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동제회(同濟會)를 조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항일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안위를 염려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행적을 입밖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들과 주변인들의 경험을 뒷받침해 쓴 글들이 몇 편 있기는 해도 그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그의 귀국을 191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였다. 한국학의 뿌리를 그에게서 찾을 만큼 학계에 끼친 그의 공적에 비춰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렇게 저렇게 따져 보면 위당은 춘원에게 20원이라는 거금을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비단 재정적인 면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처한 상황 역시 춘원에 비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위당의 처지를 알았다면 춘원도 그가 주는 구원의 손길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1913년 11월 안동현에서의 위당 역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중국 망명이라는 결단을 내리고 서울을 떠난 것이 그해 3월이었다. 당시 중국은 대격변을 겪고 있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봉건왕조인 청이 멸망했는가 하면 최초의 공화정이 실시되는 등 극도의 혼란이 대륙을 엄습했던 때다. 위당의 상하이행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중국혁명이 조선 독립에 어떤 식으로든 전환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그야말로 ‘큰뜻’을 품고 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큰뜻은 겨우 8개월도 지나지 않아 무너져 버렸으니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을 것이다. 정말 독한 마음을 품고 고향을 떠났던 그였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 동갑내기 부인은 임신 초기였다. 결혼한 지 8년이 됐다지만 혼인 당시 나이는 겨우 열세살. 첫 아이를 가졌던 아내였다. 7개월 후면 위당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집을 떠났다. 게다가 아내의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첫 아이를 가진 아내,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낳아야 할 아내의 생일도 치러주지 못한 채 망명길을 나서야 했던 위당의 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홀로 된 외숙모가 서간도에서 유복자를 낳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꼭 산후를 돌봐주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함께 떠나는 망명길이었다. 보통 독한 마음이 없었다면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떠난 망명이 8개월만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에게는 꼭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아내의 생일보다, 조상의 기일(忌日)보다, 첫 아이의 탄생보다 더 큰 일이 터졌다. 외지에서의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 바로 아내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첫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낳았다는 것도 가슴이 터질 일이었는데 아이를 낳은 지 6일만에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상하이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고향을 찾은 것이다. 春園에게 준 노잣돈 20원에 담긴 사연 1913년 11월 간도의 추위를 맞으며 안동현의 한 여관을 찾아든 위당의 심경을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다. 노모를 모시고 죽은 아내, 혼자 남은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춘원에게 그는 따뜻한 손길과 함께 수중에 있던 돈 20원을 그에게 전한 것이었다. 고향에 간다 해도 그에게 남은 유산은 별반 없었다. 아이까지 태어났으니 한 가족이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에게도 20원은 큰 돈이었다. 춘원이 이같은 내막을 알았어도 그가 준 돈을 선뜻 받을 수 있었을까? 춘원은 상하이까지 가지도 못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낯선 중국땅을 헤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위당이 20원을 아까워했다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명문대가의 재산을 이어받은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경산공(經山公) 정원용(鄭元容)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경산공은 무려 35년 동안이나 조선 왕실의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로, 이 분야 최고기록 보유자다. 1783년 생으로 1802년 문과에 급제한 후 1837년 예조판서, 1848년 영의정, 1862년 삼정의 책임자인 삼정이정청 총재관을 거쳐 철종 임종 직후 원상(院相) 자격으로 고종 즉위 전까지 국정의 책임자 역할을 한 분이다. 다섯 임금을 모시며 30여년을 재상부(宰相府)에 있으며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음직하지만 실은 청렴결백하고 반골정신이 강한 것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 부귀와 영화는 4대손인 위당의 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른바 ‘몰락한 명문가’였던 것이다. 위당의 어린 시절은 어두웠다. 그의 집안은 경산공의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초라하게 몰락한 끝에 간신히 끼니를 때우는 신세였다. 더 큰일은 직계손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자칫 가계마저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경산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기세(基世)와 기년(基年)이 그들로, 이들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위직을 얻은 형 기세가 매관매직(賣官賣職)하며 치부했던 반면 동생 기년은 형의 태도를 한탄하며 술에 찌들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산과 제사는 큰아들 기세에게 상속됐지만 반골정신은 둘째 기년에게 상속됐다고도 말한다. 기년이 바로 위당의 할아버지다. 그에게는 모두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묵조(默朝)·신조(信朝) 그리고 위당의 부친인 은조(誾朝)였다. 기년은 불우했다. 술로 평생을 살았으니 재산도 변변치 못했겠지만, 50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해야 했다.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니 그래도 남긴 것이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866년 묵조와 신조 두 아들이 동시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돌림병 혹은 식중독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어쨌거나 열한살의 나이에 막내에서 졸지에 장자가 되어버린 은조에게는 청상과부가 된 두 형수를 책임지고 가계를 계승해야 한다는 책무가 주어졌다. 그는 두 형수를 모시고 한평생을 함께 살았다. 두 형수와 두 어머니 모셔야 했던 운명 아내와 두 형수를 모시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만 은조에게는 늘 더 큰 고통이 따라다녔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손을 빨리 봐야겠다며 일찌감치 혼례를 치렀지만 정작 십수년간 자식이 없었으니 주변 어른들 뵐 낯이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위당이 아들로 대를 잇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은조의 나이 서른여덟, 어머니 서씨의 나이 마흔 때였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대가 끊겼다고 생각할 만한 무렵이었다. 그러니 위당은 개인적으로도 버거운 짐을 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아버지 은조는 비록 종손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 경산과 아버지 기년의 정신을 받들어 살았다. 호조참판까지 지낸 그였지만 청백리여서 어머니는 자수와 삯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이를테면 훌륭한 가문, 빈한한 집안에서 가계 승계의 커다란 짐을 지고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던 셈이다. 그의 이같은 운명은 태어나자마자 곧 현실로 드러났다. 생모 서씨가 아이를 출산하자 바로 큰어머니 이씨의 방으로 넘긴 것이다. 가계의 계승을 우선시한 문중에서는 위당을 곧장 큰아버지 묵조의 호적에 넣고 묵조의 아내 이씨의 양아들로 삼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두 어머니를 섬겨야 할 운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위당은 양모(養母) 슬하에서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한 집안에서 한 남자가 두 형수를 모시고 사는 모습도 그랬지만 한 아이가 한 집안에서 두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모습도 진귀했다. 그래도 위당은 그렇게 살았고 또 한평생 두 어머니를 모셨다. 훗날 그는 ‘생모는 높고 양모는 컸다’고 회상했다. 위당은 개인적으로만 큰 짐을 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도 그에게는 큰 짐이었다. 그가 태어난 해는 1893년. 동학혁명과 그 뒤를 이은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한해 전이었다. 만 두살 때인 1895년 황비 민씨 시해사건이 벌어졌으며 러일전쟁과 함께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이 1905년이니 그의 나이 열두살 때의 일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했을 때 태어나 결국 사춘기를 막 벗어나던 17세 때 나라를 잃는 비운을 겪고 만다. 나라 없는 백성으로, 나라 없는 젊은 지식인으로서 그에게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후 중국을 오가며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젊은 지식인들과 함께했다. 그가 1913년 20세의 나이에 작심하고 상하이를 찾은 것도 그같은 큰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아내의 죽음으로 비록 8개월도 못돼 귀국해야 하기는 했지만…. 서울로 돌아온 위당은 연속적으로 큰일을 치른다. 아내의 죽음은 겨우 시작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직후 또 한차례 혼례를 치른다. 아내가 죽은 지 겨우 두달 남짓. 가계를 승계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어길 처지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후사가 끊긴 큰집의 양아들로 입양되기까지 했던 몸이다. 가계를 잇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집안의 대사였다. 6개월후 그의 가족은 선향(先鄕)인 충청도 진천(鎭川)으로 낙향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는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보내게 된다.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1923년.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발령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의 나이 서른살. 이미 생모 서씨와 양모 이씨의 상을 치른 뒤였다. 이후 10여년간이 그의 전성기였다. 그의 학자적 자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기였다. 일부 후세학자들은 위당이 연전(延專)으로 갔다는 점에 의구심을 나타낸다. 연전의 분위기와 위당의 학풍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설립한 학교, 또 외국인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와 한학자로서 위당의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평생을 한복만 입고 살았던 위당이었기에 연전에 부임한 경위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 역시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위당은 연전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연전은 위당 덕에 서양학뿐 아니라 국학 분야에서도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위당은 일찌감치 한학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1913년 춘원조차 ‘한학에 조예가 깊은 위당을 흠모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위당의 그때 나이 21세였으니 그는 이미 10대 후반부터 한학자로 대우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연전에서 가르쳤던 것도 역시 이 분야였다. “사기”(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한문과 한민족의 역사를 강의하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으로 사라져가는 유학의 학풍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일제시대 국학의 뿌리인 조선학의 메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외국인이 설립한 연전이었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위당의 힘이 컸다. 5,000년 민족사를 조선의 ‘얼’로 설명 그러나 이때부터 위당의 관심은 한학보다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역사였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실학과 양명학. 이를테면 조선의 사상사 분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그의 열정은 특히 뜨거웠다. 교열에서 해제까지 붙여 원전들을 출간했고 이들의 사상을 조선학의 기점으로 삼기도 했다. 양명학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33년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하며 한국이 식민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틀은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세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위당이 역사적 인식을 분명히 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실학과 양명학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며 뭔가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기반을 마련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실제로 1930년대 초반 양명학과 실학에 대한 연구실적을 쏟아놓던 위당은 마침내 1935년 조선의 5,000년 역사를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그해 1월1일부터 다음해 8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그것이었다. 단군으로부터 시작해 동시대까지를 ‘얼’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해석하려는 엄청난 시도였다. 1936년 8월25일, 동아일보가 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지만 않았어도 위당의 글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이날은 동아일보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 있던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게재한 날이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려 10개월 가까이 신문을 내지 못했으며 힘이 빠져버린 위당의 글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물론 위당이 지속적으로 학문활동을 하지 못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동아일보가 속간될 무렵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제는 일본은 물론 조선까지 전시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항일 지사에 대한 탄압은 더욱 커졌고, 많은 투사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變節)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국내 항일 비밀결사 요원이기도 했던 위당이 무사할 리 없었다. 1937년 6월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연희전문의 많은 교수들이 체포됐고, 이 일을 계기로 조선학 강좌는 폐쇄됐으며, 모든 강의는 일본어로만 진행됐다. 위당은 학교도 강의도 때려치우고 일제의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채 비타협으로 일관했다. 그는 30년대 후반 들어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사회활동을 제한했다. 남조선 민주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부위원장, 조선문필가협회장 등 굵직굵직한 자리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저 이름뿐이었다. 국학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에 취임한 후에는 그나마 타이틀마저 버린 채 오직 국학운동에만 전념했다. 그가 꼭 한번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려 한 적이 있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감찰위원장직을 맡았던 때다. 당시 부통령을 지냈던 이시영의 청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위당의 외숙모가 이시영 부통령의 딸이었다는 인척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감찰한다는 것은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그는 상공·농림부를 감찰하는 과정에서 장관들과 큰 싸움을 벌이고는 곧 사직서를 던지고 말았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의 연구는 많은 단절을 겪었다. 동아일보 정간으로 끝을 내지 못한 역사연구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해방 후에도 그의 연구의 결실을 맺어주지 못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하지 못했던 위당은 반동그룹으로 몰려 북송길을 떠나야 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환갑을 눈앞에 둔 사람이 기나긴 행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관계자들은 위당이 개성으로 가던 중 낙오했고 아사 직전 구출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구출된 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병사했다고 말한다. 당시 나이 58세. 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후손들은 대략 10월24일을 기일로 잡고 제를 올린다. 1973년 IPU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이 “위당이 납북된 그해 10월23일에서 25일 사이 작고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기일은 그 중간일을 잡은 것이다. 위당은 분명 한학자요, 양명학자다. 이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수백수(首)에 이르는 시조를 지어 문인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부분은 역사학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일제시대 얼을 중시했던 민족사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해방후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그의 글은 “조선사연구”라는 제목으로 간행됐고 이 책은 지금까지 위당의 역사관을 알려주는 백미로 꼽힌다. 이 책은 위당의 이름을 일반인에게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저서로 남아 있다. 역으로 “조선사연구”는 위당의 사상을 알게 해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는 책을 저술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본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너, 우리나라 역사책을 잘 봐두어라. 남의 것은 공부하면서 내것은 잘 모르더라’고 했건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많은 세월을 써버렸다. 그러다 어느 해인가 일인들이 만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라는 책을 보게 됐다. 그 책 2∼3쪽을 넘기니 벌써 분한 마음과 함께 ‘이것 그냥 내버려둘 수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일본학자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총독부 정책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가를 더욱 깊이 알게 됐다. 나는 그때 이렇게 다짐했다. 언제든지 깡그리 부숴버리리라.” 연구 동기에서도 느껴지겠지만 그는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주체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국가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주체적 자아를 확립해야 한 민족도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이 ‘주체적 자아’가 위당의 표현에 따르면 바로 ‘얼’이 된다. ‘남이 내가 아니고 내가 남이 아니게 해 주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신체의 그 무엇이 아니라고 얘기했으니 곧 얼은 ‘정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얼이란 ‘나를 남과 다르게 만들어 주는 정신’인 셈이다. 그리고 이 얼은 개인에서 민족으로, 나아가 전 인류로 확장될 수 있다. 나를 남과 다르게 만들어 주는 것도 얼이요, 내 민족을 다른 민족과 다르게 만들어 주는 것도 얼이며, 또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도 이 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단군으로부터 시작해 5,000년 한민족의 역사를 쓰려 했던 이유도 우리 민족의 얼을 되찾겠다는 취지였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가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시도는 비록 고대사에서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조선사에 대한 인식이나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서도 매우 정확한 식견을 보여줬다. 그는 일단 조선의 유학을 한마디로 평가절하해 버렸다. ‘수백년 조선의 역사는 텅 비고 거짓된 허(虛)와 가(假)의 역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이유를 유학에서 찾고 있다. 그는 조선의 유학을 크게 둘로 나눈다.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사영파(私營派)와 사대주의에 빠져 있는 존화파(尊華派)가 그것이다. 사영파가 이기적 자아를 표상한다면 존화파는 몰주체적 자아를 표상한다. 이들이 수백년간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 왔으니 조선의 역사는 텅 비고 거짓된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 치하에서 살던 위당은 당대(當代)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그는 일제의 조선 지배를 세계사적 시각에서 해석했다. 일제의 지배는 고려에 대한 몽고의 지배나 조선과 중국의 관계와는 달랐다. 일제는 단지 서구 문물의 대리자에 불과했으므로 일제 치하를 벗어난다는 것은 곧 서구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봤다. 물론 서양문화를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위당은 서구문명이 자신의 것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주체적 자아를 갖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서구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하나 있었다. 조선 왕조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문은 몰주체적 자아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 대한 주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과 서구에 대한 예속이 새롭게 시작됐으니 2중의 정신적 속박감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은 영국의 이론이요, 어떤 것은 프랑스의 이론이요, 어떤 것은 독일, 어떤 것은 러시아의 이론이다. 이들 이론들이 분연히 맞서 병존(竝存)하고 있다. 정교한 이론을 펼친다는 학자들의 표준이 여기에 맞춰져 있다고는 하지만 대개 그 ‘언설’(言舌)을 그대로 옮겨가는 것일 뿐이며 실심(實心)에 비춰 맞고 틀림을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를 과거와 비교하면 과연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학자들이 들어도 소스라칠 노릇이다. 위당의 말은 지금도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많은 학자들이 제기하는 내용과 같기 때문이다. 국내 학계의 이론이라는 것이 외국의 이론을 소개하고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너무 뻔하다. 이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조차 맥이 빠질 일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개 해방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지식 수입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위당의 말을 빌리면 그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초 주자학의 도입에서부터 그 단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과거와 비교해 과연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위당의 의문은 7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 현대의 학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질타의 소리로 느껴진다. 운명이 맺어준 師弟관계 조선 양명학의 代를 이은 爲堂과 蘭谷 나라가 망한 해 많은 우국지사들은 고국을 떠나 간도로 가려 했다. 일제도, 중국도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을 도모하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중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4명의 양명학자들도 있었다. 이건방·이건승·홍승헌·안효제 등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간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각자 고향을 떠나 개성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건승은 일찌감치 개성에 도착했다. 다른 일행을 기다리며 읽은 책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이(明夷)란 주역 64괘 중 제36괘인데 광명이 어둠에 가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난세에 지식인이 해야 할 도리를 적은 책이다. 이건승은 이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었다고 해서 나라를 떠나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줬기 때문이다. 이건승은 뒤늦게 도착한 사촌동생 이건방을 설득해 서울로 돌려보냈고 나머지 세 명은 살아서 조선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난곡(蘭谷) 이건방이 어린 위당을 만난 것은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다. 이건승은 사촌동생인 이건방에게 자신과 각별한 사이였던 서병수의 외조카 위당을 맡아줄 것을 당부했다. 난곡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위당을 불렀고 사촌형님의 뜻에 따라 그를 제자로 삼았다. 위당의 나이 18세, 난곡의 나이 40세 때 일이다. 이후 난곡이 별세하던 1939년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이들은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사제관계를 맺었다. 장대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길을 걷던 위당이 난곡을 보자 길거리에 엎드려 절을 하더라는 미담도 있다. 주역이 맺어준 운명적 사제관계였다. 결과적으로 위당은 자칫 끊어질지도 모를 조선 양명학의 대를 잇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니 목숨을 건 망명길에서 되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난곡 역시 양명학의 대를 잇게 한다는, 망명객들 못지않은 일을 한 셈이다. 하지만 난곡이 해야 했던 일은 한가지 더 있었다. 간도로 망명한 선배·동료들의 유해를 모시는 일이었다.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양명학의 세 동료는 모두 죽어 조국을 찾았고, 고국에 남아 있던 난곡이 이들을 모셔야 했다. 홍승헌은 1914년, 안효제는 1916년, 이건승은 1924년, 정원하는 1925년 모두 시신이 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난곡은 이들을 손수 안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