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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artistry �) <PPPa20-ResaleTac> 
날 짜 (Date): 2000년 6월  8일 목요일 오전 06시 07분 04초
제 목(Title): 이상수/서평 전상운, 한국과학사


첨성대는 정말 뛰어난 성과일까 
전통 과학사 연구 외길 전상운 교수의 <한국과학사> 

 

‘한국과학사’는 국내에서 가장 연구자가 드문 분야에 속한다. 이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는 4명에 지나지 않는다.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뒤 은퇴한 전상운(72) 전 
서울대 교수는 38년 이상 한국과학사 연구의 외길을 걸어왔다. 그가 최근 그 동안 
자신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한국과학사>를 펴냈다. 일반독자에게 
‘과학사’라면 우선 딱딱하고 어려울 것이란 선입견을 준다. 그러나 전 교수의 
책은 좀 독특하다. 우선 화집을 연상시키는 변형 크라운판의 넓직한 판형에 
컬러·흑백의 도판자료를 270점 이상 실어 시각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또 고대의 
유물에서 조선조의 발명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 유산들의 
작동원리나 구조를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어, 옛 사람들이 기구를 만들 때 
착안한 아이디어까지 엿볼 수 있다. 


열흘 걸려 청동거울의 선을 세다 


“1930년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입에 붙이고 다니던 조선의 5대 발명품이 
있었죠. 첨성대, 고려청자, 금속활자, 측우기, 거북선. 그렇게 뛰어난 성과라고들 
하는데, 세계 과학사를 보면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불 속에서 활개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죠.” 


 (사진/잔줄무늬 청동거울. 모두 1만3300개의 가는 선을 세기 위해 열흘이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객관적인 근거 없이 말로만 “우리 전통과학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대신, 전 
교수는 과학적 검증이 뒷받침된 주장을 펴기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막상 뛰어들어보니, 20∼30명의 연구자들이 평생 매달려도 못 다 할 양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평생 연구했다고는 하지만 부족한 게 많지요. 저는 제 연구 범위를 
과학기술사로 한정지었어요. 가령 그 안에 담긴 사상이나 사회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접어둔 겁니다. 더러 제 연구에 사회사적 의미 부여가 없다는 비판을 
하는데, 그러면 전 ‘내가 무슨 맥가이버냐?’라고 되묻습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죠.” 

그는 자신의 연구가 ‘과학기술사’에 한정되어 있다고 못박는다. 그러나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유물을 바라보는 일은 그 유물에서 인문사회적 의미를 캐내는 
데 기초를 제공한다. 잔줄무늬 청동거울(다뉴세문경)에 대한 조사가 그런 예이다. 
1960년대 충남에서 발견된 이 청동거울은 서기 전 4세기 경의 유물이다. 지름 
21.2cm의 이 거울 안에는 모두 1만3300개의 가는 선과 100여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0.3∼0.5mm이다. “매우 숙련된 현대의 제도사가 
최상급 제도기를 이용해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리더라도 20일 이상은 작업해야 
완성할 수 있는” 도안이다. 이 청동거울에 선이 모두 몇 개인지 처음 조사한 
연구자가 바로 전 교수이다. 80년대 초반 대덕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청동기 특별전’을 열 때의 일이다. 전시품 가운데 몇 가지는 복제품을 만들기로 
했는데, 전 교수는 그 목록에 이 청동거울도 집어넣었다. 똑같은 크기와 무늬의 
복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청동거울의 무늬를 도안으로 재현하는 일이 
필요했다. 전 교수는 청동거울의 사진을 확대해 대형 스크린에 영사하고 화면을 
4등분한 뒤 네 사람이 직선과 원을 세도록 했다. 이 작업은 꼬박 열흘이 걸려서야 
끝났다. 

“잔줄무늬 청동거울을 보면서 과학자로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당시 기술자가 일종의 컴파스를 사용했을 텐데, 어떤 컴파스를 사용한 걸까? 
청동을 거푸집에 부어 만들었을 텐데, 거푸집은 뭘로 만들었을까?” 

이렇게 정교한 물건의 거푸집을 예사로운 모래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전 교수는 
의사이면서 <실험 고고학>이란 책을 펴낸 나카구치 히로시의 설을 따라, 갯벌에서 
채취한 해감모래로 거푸집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갯벌에서 채취할 수 
있는 해감모래는 밀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뛰어난 재료로서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거푸집을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잔줄무늬 청동거울에 대해 이같은 자연과학적 기초조사가 진행되면 그로부터 
인문사회적 관심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전 교수는 “당시 이런 잔줄무늬 
청동거울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가 몇 명씩 있었을 것이며, 그는 평생 이런 정교한 
청동거울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을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정교한 청동거울이 
서민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정교한 청동거울이 필요했고 
어떤 집단이 향유했으며, 거울 제조 기술자의 지위는 어떠했는지 따위에 대한 
의문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과학사 연구자는 ‘이중의 반역아’ 

 



경주박물관 소장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의 무게가 20톤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지난 98년에야 처음으로 이 종의 무게를 쟀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지난 70년대에 포항제철 팀의 도움을 받아 이 종의 무게를 
측정하려 했으나 문화재위원들의 완강한 거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문화재위원들의 조심스런 태도도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중요한 
유산의 무게를 최근에야 실측했다는 건, 한국에서 전통시대의 유물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의 수준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가혹한 표현”이란 전제를 달면서, 전 교수는 “과학기술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야만국 수준을 아직 벗어나지 못 했다”고 평한다. 

전 교수가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를 전공으로 삼은 건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1952년 
그가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을 때, 실험실은 물론 실험도구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 

“세계적인 화학자가 되긴 글렀다고 생각했죠. 화학 전공자가 실험을 할 수 
없대서야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과학사로 관심을 돌렸어요.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던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1940년대 일본에서 과학사 전공자는 이중의 의미에서 ‘반역아’라 불렸다.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끌려가는 걸 거부하고 달아난 과학자들 가운데 과학사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다. 징병을 거부하고 숨어지내면서 실험을 못하는 대신 
과학사 관련서적을 탐독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학자이면서 
실험실을 뛰쳐나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군국주의를 거부하고 징병을 피해 
달아났다는 의미에서 ‘이중의 반역아’라 불렸다. 

한국전쟁의 폐허는 전 교수로 하여금 화학자 대신 과학사 연구자의 길을 걷도록 
했다. 화학자의 꿈은 좌절당했지만, 한국과학사 연구자가 크게 부족한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다행스런 일이다. 

“과학사 연구자는 양서류와 같습니다. 자연과학 전공자이면서 인문과학적 
내용까지 연구해야 하죠. 자연과학도는 과학으로 훈련된 눈으로 사물을 봅니다. 
낭만적으로 보지 못하죠. 과학사 연구자는 양쪽을 다 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렇게 양쪽을 다 보려하다보니 머리가 혼란스러워 머리칼이 빨리 센 것 
같아요.” 

과학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 가운데 한 분야에 대해 석사 이상의 
연구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국 고대 과학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고고학·미술사를 공부해야 하며 영어·일어는 물론 한문 독해능력도 갖춰야 한다. 
자연과학·한문·고고학처럼 ‘탄착군’ 형성이 어려운 분야에 고루 관심을 지닌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한국 과학사를 연구한다 해도 근현대 쪽을 선호한다. 한국 
고대 과학사 연구자가 소수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한국과학사> 원고는 이미 지난 1997년 11월 완성됐다. 그러나 IMF로 컬러 
인쇄비가 천정부지로 올라 어쩔 수 없이 출판을 3년간 미뤄왔다. 도판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컬러 인쇄를 해야 한다고 그가 고집했기 때문이다. 


“새로움과 어우름의 한국과학사” 


“우리 전통과학의 유산들은 한결같이 디자인과 색채가 매우 뛰어납니다. 이런 
면모를 컬러 도판으로 보여주고 싶었죠. 전통과학이라 하면 흔히 고리타분한 
옛것으로 치부하는데 전 그런 게 싫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미래지향적이고 최신의 
성과까지 업데이트된 그런 책을 내고 싶었죠.” 

그는 3년만에 책을 펴내면서, 고구려 평양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담고 있는 일본 
나라현 아스카촌 기토라 고분의 천장 별그림(98년 발견) 등 97년 이후 새로 나온 
유물과 연구성과도 반영했다. 

그는 한국 과학사의 특징을 “새로움과 어우름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한국 
과학사는 끊임없이 주변국으로부터 선진적인 내용을 도입하면서도, 모방에만 
그치지 않고 늘 새롭게 변형하고 뭔가를 창조해내었습니다. 또한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전통적인 것과 융합시키고 조화를 꾀했지요. 이를 한자어로 ‘변형’과 
‘융합’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뭔가 의미가 풍부하게 담기지 
않는 것 같아 저는 이를 ‘새로움’과 ‘어우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지금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다. 지난 1975년 펴낸 
<한국과학기술사>의 증보판을 내는 일과,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사를 종합해 정리한 
연구서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연구>(가제)를 펴내는 일이 그것이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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