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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guest (artistry �) <PPPa4-ResaleTaco> 
날 짜 (Date): 2000년 6월  7일 수요일 오전 04시 41분 44초
제 목(Title): 오세철/ 21세기, 혁명을 향한 대장정의 시�


오세철/ 21세기- 혁명을 향한 대장정의 시작  
[진보평론] 4호(2000년 여름호) '시평'글 







21세기-혁명을 향한 대장정의 시작 







오세철 (노동자의 힘 공동대표, 연세대 교수/경영학) 






Ⅰ 


체 게바라와 노암 촘스키는 1928년에 태어났다. 게바라는 아메리카 혁명을 통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촘스키는 세계적인 구조주의 언어학자로서 미국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토로하는 
지성인으로 진필을 과시하고 있다. 마침 최근에 [체게바라 평전]과 촘스키의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가 출간되어 혁명을 꿈꾸거나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두 사람보다 15년 늦게 태어나 환갑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깊은 감회에 젖게 한다. 

나이와 혁명성과의 함수관계는 있는가? 혁명적 사상에 심취해 있는 많은 
젊은이들은 맑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와 혁명가들의 글과 실천이 모두 20대와 
30대초에 이루어진 것을 보고 주눅이 들곤 한다. 물론 혁명적 사상의 학습과 그 
실천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 두 가지가 변증적 통일을 하는 보기는 
비일비재하다. 사회사상가의 사상을 훑어보면 나이와 사상의 일반적 관계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체로 20-30대에 인본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관점을 
가지다가 40대에 들어서서 결정론적 이론을 확립하고 60을 전후하여 우주론적이고 
비결정론적 사고로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학문과 사상의 세계에서 깊이와 
폭은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로 통일된다는 진리를 터득하기는 쉽지 않다. 깊은 
구조를 발견하기 위한 꿰뚫음의 통찰력은 넓은 진리의 바다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섯부른 깊이에의 천착은 진리는 커녕 좁은 아집과 편견에 갇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이론과 실천의 맥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어느 
한쪽으로의 집중과 편향이 완성된 실천이나 이론으로 나아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젊은 세대의 이론적 미성숙을 
탓하기 이전에 나이든 세대의 혁명성이 쇠퇴한다는 점이다. 혁명의 대상이 되는 
깊은 구조와 본질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것을 총체적으로 이루어내는 
과정은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곧바로 혁명성의 거세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 글의 앞머리에 게바라와 촘스키를 비교적으로 거론한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역사, 민족 등의 그 어떤 것도 뛰어넘는 보편적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반성 때문이다. 세계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와 볼리비아 전선으로 달려가 산화한 게바라와 언어의 깊은 구조를 발견한 
언어학자로서의 일상을 보내면서 사회비평가로 살아가는 촘스키의 엄청난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어디에 서 있고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글을 
끝내면서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오겠다. 그 중간에 몇 가지 이야기를 소재로 
21세기의 혁명을 점검해보자 


Ⅱ 


1999년 12월 10부터 12일까지 프랑스 르망에서는 [동요하는 아시아-일본, 중국, 
한국]이라는 주제로 제 10차 사상의 교차로 국제회의가 열렸다. 사상의 교차로, 
르몽드 디플로 마티크, 프랑스 국제 라디오, TV 5 등이 공동주최한 이 국제회의는 
전 세계적인 도미노 현상으로 진행되는 외환위기를 겪은 후의 세계체제 재편의 
방향을 모색하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르몽드 디플로 마티크 편집장 알랭 그래쉬는 
이 회의의 토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 동안 
유럽에 위기가 정착화될 때, 아시아 특히 <호랑이>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지구에서 가장 동적인 지역'이라고 소개되었고 제 3세계 뿐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본받아야 할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1997년 7월에 
대만달러화가치의 하락이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다.··· 실업과 재난이 확산되어 
여성을 비롯한 수 백만명에게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하락은 반미주의를 
고조시켰다. 동경에서는 미국의 압력에 대한 강한 적대적 흐름이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한 편으로는 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한 유럽의 우려의 시선과 결합하면서 
재정체계와 국제통화의 개혁에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사회적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긴장이 팽배해졌고 이것이 
국가통일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도 해안에 위치한 풍족한 마을과 극도로 가난한 
마을사이의 격차 때문에 격화되는 긴장의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일본과 
남한과 손을 잡고 있는 대만과 가까운 미국은 상업적인 주요 파트너 중 하나인 
중국을 조정하면서 이를 국가들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시아 역시 적어도 마르코 폴로에서부터 환상적인 꿈, 때로는 '황색 위험'으로 
시달렸던 과거를 환기시키는 근심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수 많은 교환이 
일어남으로써 이 대륙과의 관계에 있어서 밀집한 그물체계를 엮어내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간의 과거의 사회주의적 체제의 혼란과 함께 새로운 수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보기를 들면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투자-특히 닛산에 대한 르노의 
계획된 투자-가 있다. 이제 유럽-아시아간의 연계는 시대적 동향에 속하는 
것인가?" 토론의 주제는 '아시아의 가치, 위기 이후의 경제모델, 지리적 혼동과 
민족적 긴장, 경쟁 또는 협력, 미국, 유럽, 아시아의 삼극 세계를 향하여'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위기 이후의 경제 모델이라는 주제의 발제자로 참여했는데 
바로 그 주제에 브루스 커밍스의 부인인 메레디스 커밍스도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한국 여자라는 것을 회의장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신자유주의와 21세기 
한국자본주의]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했는데 그 국제회의의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후문으로는 왠 한국의 극좌파가 와서 물을 흐려놨다라고 전해졌다.) 그 
주제의 사회자는 내 발제문에 있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말을 빼줄 수 
없느냐고까지 주문한 것을 보아도 르몽드 디플로 마티크의 노선을 알 수 있었다. 

메레디스 커밍스는 IMF관리체제에서의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나와 정면 대립하였다. 브루스 커밍스도 함께 참여했지만 
토론과정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르망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200여 킬로 
떨어져 있는 농촌마을이다. 이 곳에서 열번 째 국제회의가 열리는 것을 보면 
프랑스 농촌의 사상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주제발표가 끝나고 나오는데 마을 
주민 몇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내 발제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한국에서의 
노동자계급과 민중투쟁의 힘이 혁명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의견들이었다. 세 쌍의 부부와 나 그리고 파리 8대학 이환식 교수는 
점심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다른 식탁에 앉아 있는 메레디스 
커밍스를 보고 그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아마 그녀가 미국시민이기 때문에 
그런 발제를 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들과 농업국가인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겪는 
고통, 미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 세계적인 부의 불평등, 한국의 노동운동의 
계급성과 전투성의 역사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칠레의 
아옌데와 함께 싸우다가 망명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의 짧은 만남속에서 
조그만 농촌마을에 사는 농민들의 정치·사상의식의 수준이 이른바 프랑스 
중도좌파 지식인이나 언론인 그리고 명망있는 교수들 못지 않다는 것에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농민으로서의 삶을 통하여 느끼는 
세계자본주의의 모순, 초국적자본의 착취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현란한 
미사여구나 지적 거드름, 거세된 혁명성의 주관주의적 합리화보다 훨씬 위대하고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코뮌, 혁명적 사상의 전통, 반미의 문화적 전통 등으로 알려진 프랑스가 
아시아에 대해 지니는 정서는 어떤 것인가? 앙드레 말로를 포함한 예전의 
좌파지식인은 모택동, 주은래의 중국을 동경했었다. 미국의 헤게모니(경제적이던 
문화적이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프랑스 민족주의의 흐름은 유럽 내부에서도 그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21세기에도 그 동반자를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일본에 대한 관심 역시 지속되겠지만 
말이다. 미국에 유럽연합으로 맞서려는 노력은 세계자본주의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불과하며 오히려 합병을 통한 거대 세계 자본의 집중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유럽좌파의 이러한 섯부른 지정학적 관점은 노동자 계급의 세계적 
연대를 저지시키는 민족주의적, 지역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실업과 부의 불평등, 구조조정, 민영화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유럽 
자본주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나마 투쟁으로 획득한 복지나 윤택한 삶의 
질이 파괴될때까지 견딜 것인가? 아니면 미국을 적으로 몰고 제3세계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착취한 잉여로 버텨낼 것인가? 프랑스 좌파와 노동자계급은 패배주의에 
머무르고 말 것인가? 물론 우리는 실업자 투쟁, SUD같은 혁명적 노총, 노동자 
투쟁당 같은 좌파정치세력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밑으로부터의 투쟁과 함께 했을 때만이, 그리고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서만이 솟구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틀안에 갇힌 좌파의 몸짓으로는 보편적 세계혁명으로 한치도 
다가설 수 없음 또한 명백하다. 


Ⅲ 


유럽에서의 발본적 사회변동은 불가능한 것인가? 자본주의의 틀안에 안주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체제내적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의 복원은 불가능한 것인가? 복지파괴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와 실업의 증가, 빈부의 격차는 이제 
유럽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의 제3의 길과는 다르다는 프랑스의 
사회당정권이나 독일의 사민당정권 역시 신자유주의의 유럽판 변형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투쟁의 대상을 자본 아닌 다른 
민족에게 투사시킴으로써 계급투쟁을 왜곡시키고 있다. 

99년 11월에 독일 함브르크에서는 유럽의 조선노동자 10여만이 대규모집회를 
가졌는데 한국 정부의 지원금 지급중지와 가격덤핑규제를 요구했다고 한다. 독일의 
좌파진영에서는 이 사건이 노동자 국제연대를 저해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지적되었고 한국의 조선노동자와 만나 노동자국제연대에 대하여 심도있는 토론을 
할 것을 제의하였다. 더구나 이 집회의 배경에는 독일의 금속연맹과 한국의 
금속연맹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분석도 함께 제기되었다. 2000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독일 쾰른에서는 TIE(Trasnationals Information Exchange)가 주관하는 
제4차 국제노동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그리고 발본적인 사회변혁의 지향을 목적으로 한 세계 좌파 현장활동가 
및 노조지도자의 모임이다. 한국 대표단으로는 [노동자의 힘 준비모임]이 
초청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다루어진 주제중에서 조선노동자 국제연대문제는 
더욱 심도있는 토론과 연대방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킬(Kiel)에서 별도 회의가 
마련되었다. 28개국의 17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가했는데 유럽보다는 제3세계의 
참가자가 많았다. 각국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공세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사례가 토론되었고 구체적 연대행동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보교환등의 느슨한 국제연대활동을 넘어서는 적극적 국제연대조직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의 형성, 체제내화되어있는 노동조합이 아닌 현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노동운동조직의 국제화, 혁명적 사상의 재무장을 통한 
반자본주의 전선의 구축 등이 논의되었다. 나라별로 참가자들의 집단적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노동자의 힘 대표단 5명은 머리띠를 두르고 단결투쟁가를 힘차게 불렀고 
국경을 뛰어넘는 노동자의 동지애와 단결투쟁의 의지를 빛냈다는 평을 들었다. 
쾰른회의에 이은 킬에서의 조선노동자 국제연대회의에서는 민족주의적 
노동자집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독일조선노동자들의 적은 경쟁국인 한국의 
조선노동자가 아니라 독일과 한국의 자본가이며 결국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좌파는 소수였다.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가열찬 투쟁에 대한 유럽좌파의 태도는 어떠한가? 
하나는 부러움과 경외심 같은 것이다. 특히 한라중공업 투쟁처럼 공장점거투쟁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반응을 보였으며 관성화되어 있는 유럽에서의 노동자의 
집단행동에 익숙해 있는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도 유럽의 전철을 밟아 개량화되고 관료화될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전망이다. 
유럽에서의 경험이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이 거세되고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향과 교섭위주의 노동조합운동의 안착화는 밑으로부터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희석시키고 잠재우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현상적으로 한국도 
그런 흐름을 모방하거나 추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합법적 진보정당을 
만들어 의회에 진출하려는 안감힘이나 투쟁보다는 교섭위주로의 노동조합의 
지도부의 개량화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유럽처럼 오랜 
역사속에서 길들여져 있는 경직된 구조가 아니라 언제나 밑으로부터의 투쟁에 의해 
분쇄될 수 있는 유리그릇이라는 점이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유럽의 좌파는 어떠한 시점에 와 있는가? 파시즘에 경도되었던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독일이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민족주의에 호소하면서 
변질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시혜에 의해 생존을 보존하려는 
노동자의식은 결국 노사협조주의에 의한 국가주의에 함몰되고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이 
사회주의혁명투쟁으로 나아가는 세계혁명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민족적 이해로 
분열시키는 민족국가 전쟁으로 변질시킬 수 있듯이 유럽중심주의적인 사상문화적 
제국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질곡일 수 있다. 최강의 
헤게모니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대항을 한 축으로 하고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대상국에 대한 분노를 또 한축으로 하는 유럽의 자본가계급과 정치권력은 
세계혁명을 무력화시키는 장애물이다. 유럽의 좌파는 이에 편승하는가, 아니면 
패배주의와 무기력 속에 빠져있을 것인가, 아니면 투쟁하는 전 세계노동자계급과 
민중과 함께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함께 달려나갈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역사적 시점인 것만은 사실이다. 


Ⅳ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 사이에는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세 번째 
이야기와 연관된 뒷 이야기가 있다. 1999년 12월 프랑스 국제회의와 독일 
브레멘대학교 초청강연에 참석할 때 나는 백기완 선생이 초안을 잡은[한반도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진보적 양심들의 선언]이라는 문건을 가지고 갔다. 
분단 55년 한국전쟁 50주년 그리고 21세기 세계적 화두로서의 한반도 통일이 
지니는 비중 등이 고려되었고 세계적 진보진영의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선언운동이 성사될 수 있다면 국내에서도 선언운동을 이어받아 2000년 봄에 그 
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하는 행사를 갖는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선언 초안에서는 
한반도 분단이 "첫째, 일제와 싸워 이긴 해방의 실질을 강탈·파괴, 역사를 거꾸로 
돌린 제국주의적 범죄이고, 둘째, 한반도의 강제분단은 한민족이 수 만년동안 
피땀으로 일구어 놓은 한민족의 삶의 공동체, 그 자주성을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파괴한 침략이며, 셋째, 그것은 냉전구도가 저지른 매우 간교한 신식민지, 죽음의 
늪"이라고 말하고 "한반도의 통일이란 한 민족의 단순한 재결합이거나 갈라진 
국토의 하나됨이 아니라 20세기 총체적 모순이라고 할 냉전구도를 깨뜨려 
쟁취하려는 해방이요, 국제독점자본의 예속을 타파해 쟁취하는 자주성이요, 
착취·부패로부터의 자유로 되는 세계사 진보의 실체가 통일이라는 점, 그 통일이 
곧 세계평화 세계통일의 실질이라는 것을 제시해온 역사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선언은 "첫째,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이 미국의 금융패권주의에 의해 온 한반도 
지배로 되는 것을 반대한다. 둘째, 한반도에 드리운 일체의 외세는 한반도 통일에 
간섭하지 말고 전쟁도발적 음모를 자행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한반도의 통일은 
분단전 상태로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분단 억압으로부터 집중적 피해를 받아오고 
있는 노동자·민중으로 하여금 분단을 강요해온 제국주의적 냉전구조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타파하여 침략도 없고 착취·억압도 없고 부패·공해도 없는 아름다운 
세상, 평등·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세계변혁 창조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넷째, 
한반도의 통일은 한민족 스스로의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이룩되어 
세계평화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 선언에서는 주한미군 즉각 
철수, 한반도의 비군사·비핵지대화, 군사동맹폐기와 군축,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수 전원석방을 제기하면서 남북한 노동자·민중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초안은 
불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선언에 참여를 부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0년 3월 
중순에 다시 독일에 갈 때까지 예상했던 것같이 선언운동의 큰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3월 10일 바로 김대중의 베를린 선언이 발표되었다. 물론 김대중의 
유럽순방은 언론에 발표되기 전 알려져 있었고 그것이 총선용을 넘어선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을 겨낭한 행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백선생과 내가 
준비한 세계 진보적 양심들의 선언은 정치적 효과와 파장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코소보의 침략을 
지지하고 제3세계 등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탄압을 방관하고 있으며 
세계평화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달성된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동의하지 않는 기회주의적 태도 등의 유럽 좌(?)파정권의 세계평화와 혁명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이 선언의 조직과정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문제인식의 한계로 
드러났다 

김대중의 베를린 선언은 미국을 포함한 유럽, 그리고 중국, 러시아, 바티칸의 
교황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앞장서 
해결함으로써 세계평화의 전도사가 되려는 김대중의 희망과 한반도 평화를 분단 
고착으로 유지하려는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고 그것이 주요 핵심국의 
헤게모니를 만족시키면서 결국 세계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은폐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예상보다 빨리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가 
4·13총선 사흘 전에 발표되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함의의 배경을 설명하는 미국 
통일학 연구소장 한호석은 그의 글(4월 22일자)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특사회담이 아니라 극비회담에서 합의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올해 들어서 2월초까지 북은 남에게 경제협력을 제의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진행되었듯이 조선아세아태평양 평화위원회가 남의 민간기업을 통하여 
한국정부당국에게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북의 
경제협력제의를 남에 전달한 사람은 금강산국제그룹의 박보희회장과 
박상권사장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2월 3일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열린 평화자동차 
종합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바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이 3월 9일 '베를린선언'에서 
북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하기 위한 남북당국자 회담을 개최하고자 한 발언은 
바로 이러한 대남 경제협력제의에 대한 반응이었다. … 그런데 2월 중순에서 
3월초에 이르는 기간에 남북경제협력문제가 뒤로 물러서고 남북관계에서 가장 
예민하고 중대한 정치문제인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가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을 추진한 쪽은 국가정보원이었다. … 베이징에서 은밀하게 
대북접촉을 시작했던 국정원은 장소를 싱가포르로 옮겨 본격적인 극비회담을 
진행하였다. … 여기서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남북정상회담은 나중에 추진할 
일로 제쳐두고 우선 남북경제협력에 집중되어 있었던 김대중정권의 관심을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로 급히 돌려놓은 것은 미국이었다는 사실이다. …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조건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조·미 평화공존정책을 반대하는 워싱턴 
정치권의 난기류를 사전에 가라앉힐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책략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 즉 남북정상회담이다. … 4·13총선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평화공존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 까닭은 
4·13총선에서 대북 평화공존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김대중정권이 안정된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김대중정권의 대북협상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4·13총선이라는 현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결과에 따라서 2002년 
12월에 있을 대선에서 대북협상력을 갖추지 못한 세력이 집권할 수도 있는 매우 
복잡한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합의의도에 대한 그릇된 분석으로 첫째, 북한이 남한의 경제지원을 다급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 둘째, 북한이 햇볕정책의 참뜻을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견해, 셋째, 북한의 대외정책, 특히 대남정책의 궤도수정이라는 견해를 
지적하고 오히려 대미관계개선을 위한 보조축으로서의 대남관계 개선과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대남관계 개선을 위한 정상회담 
개최합의로 해석하고 있다. 비교적 북한의 입장에 서서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분석하는 이 글은 수령(김일성)의 조국통일 유훈에 입각해 있으며 평화의 이름으로 
민족을 분열시키는 모든 의도를 능동적이고 공세적으로 극복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어느 정권이나 주관주의적 희망과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국제관계 속에서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힘의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적대관계이며 가시적인 
군사력의 충돌 뿐만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 대결로도 나타나고 내부적 계급투쟁의 
정도(같은 계급 사이의 통합정도)로도 표현된다. 북한의 모델은 중국식 
개혁개방모형과 유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생산력 증진을 명분으로 한 
자본주의화(사유제의 확대와 시장경제의 도입)로 경제적 토대의 변화를 가져가면서 
사상·이념과 정치권력의 상부구조는 사회주의의 강령을 유지하려는 
형태(자본주의로의 역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국가형태)일 가능성이 많다. 
어떤 이념보다도 국익의 증진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와 민족통일은 격화되는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세계시장에서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사용되는 국민 
통합이념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국가주의를 동원한 사회주의를 위한 억압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로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도 정치·군사적 
자주성을 보존하는 대가로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침탈을 생산력 증진의 
명분을 내세워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과 같이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면서 사회주의 정치권력의 힘으로 생산관계의 모순을 관리하려 할 것이다. 
문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헤게모니 국가들(그것이 자본주의국가이건 
사회주의국가이건 간에)은 부국강병의 이념아래 대국을 만들기 위해 
세계시장에서의 패권을 장악하려할 것이고 한반도의 사회주의적 통일(심지어 
자본주의적 통일이라고 할지라도)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체제내부를 통합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다른 국가나 민족과의 갈등, 긴장관계를 
조성시키는 무기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지배 속에서 
격화되어가는 계급투쟁을 잠재우는 국민통합기제로도 작동하기 때문에 남북한 
정상회담을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좌파진영에게는 비상한 관심과 대책이 요망되고 
있다. 

계급과 민족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데서 오는 운동의 오류를 우리는 
경험하였다. 낭만적 통일운동이 노동계급의 투쟁을 희석시키고 탄압의 빌미가 
되었던 역사, 계급문제보다는 민족문제가 더 최상의 범주라는 관념론적 인식틀에 
갇힌 전략·전술의 역사 등은 우리의 투쟁을 교란시키는 내부적 요인이었다.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며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사상의 자유를 
쟁취하는 일, 그리고 한반도의 민족적 통일을 이루는 일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물론 반민족적, 반통일적 세력이 존재하지만 어떤 통일인가에 대하여는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통일논리가 결국 
세계자본주의의 한반도의 완전지배를 용인하고 남북한 노동자·민중연대를 
파괴하며, 남·북한에서의 계급투쟁을 희석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데 있다. 미국이나 김대중정권은 충분히 이를 
활용할 것이며 북한의 김정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보편적 범주로 묶이지 않는 
특수범주를 중심으로 한 대동단결론이 지니는 허구와 해악은 계속 지적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혁명적 민족주의 진영이 김대중정권 출범 이후 
신자유주의의 정권을 비판하고 반김대중 전선에서 함께 투쟁해온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이후 보여준 논평 등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나 주한미군철수 등의 전제를 닫아 김대중정권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태도를 우려하고 있다. 민족대단결의 원칙아래 지역, 계층 등의 부분적 이해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북한은 2000년 2월 29일 평양방송을 통해 '우리는 남조선의 집권 상층, 여당과 
여당인사들, 대자본가와 군장성들이 민족 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그들과도 민족대단결의 기치 밑에 단합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내용은 3월 1일과 4월 17일에도 재방송되었다"는 것이다.(한호석, 앞글 인용) 
북한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비판, 정권과 노동자계급을 분리하여 판단하는 분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앞으로의 남북한 노동자·민중의 연대투쟁을 위해서도 우리 
운동진영이 지녀야할 과학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혁명적 민족주의진영이 아닌 개량주의 정치운동·노동운동세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자유주의의 하위파트너가 된 시민운동세력은 이제 본격적으로 
김대중정권의 일중대가 될 것이다.(총선시민연대의 수훈갑에 대한 보상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겉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노·자의 
타협이나 교섭으로 부분적 성과를 얻었다고 선전하며 결국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세력에게 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로 합법주의 정치운동을 
포장하고 중앙집권적 산별노조건설로 관료주의와 교섭주의로 매몰되는 상층운동은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체제내화될 것이다. '노동자후보를 국회로'라는 구호 
밑에서 한을 못 풀고 좌절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의 
현주소라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일상적 계급투쟁의 힘으로 사회변혁을 
일구어나가는 현장기반의 투쟁축적이 요구된다. 이들 세력은 합법화라는 틀 속에서 
정치 권력의 지분을 차지하고 각종 국가기구에 참여하며 정부의 정당한(?) 
자금지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동단결이 요구되는가. 역사적으로 가장 보편적 범주로서의 
"계급"을 통한 대동단결이다. 선진적 좌파는 소수일 수 있으나 노동자계급은 
다수다. 생산의 주체요, 정치의 주체요, 역사의 주체다. 이러한 주체의식을 객관적 
계급관계 속에서 투쟁하며 키워가는 노동자계급으로 단결하는 것이다. 국내외 
초국적 독점자본과 그 대리권력으로서의 자본주의 정치권력에 포섭되었거나 포섭될 
세력과 맞서 보편적 세계혁명을 일구어낼 수 있는 모든 세력의 대동단결과 투쟁이 
요구되는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Ⅴ 


다시 게바라와 촘스키로 돌아오자. 67년 볼리비아 산중에서 아메리카혁명, 
세계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무장투쟁으로 산화한 게바라의 사상의식과 혁명적 
실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해에 태어나 정복국 미국에서 비판적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미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활동중인 촘스키는 
어떻게 게바라와 맞닿아 있는가?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 소련의 후루시쵸프의 
수정주의보다 모택동의 혁명적 사상투쟁에 더 깊은 관심을 지녔던 게바라는 
민족해방투쟁의 동력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진전시키는 혁명전략을, 아메리카혁명 
뿐만 아니라 식민지체제의 피압박민족의 혁명과제를 해결하는 경로로 파악했던 것 
같다. 미국을 필두로 한 식민지 전제체제에 대한 피압박민중의 분노와 저항이 
거세게 솟구치는 객관적 조건과 소련,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의 지지와 
엄호를 기반으로 과감한 무장투쟁을 통한 사회주의혁명을 실천했다. 그가 죽은지 
30여년이 지난 2000년,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저지, 분쇄할 수 있는 희망으로서의 사회주의 진영은 몰락하고 과잉생산, 
과잉축적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이 공황이라는 극심한 순환적 위기로 
폭발하려는 자본의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게바라가 보았던 혁명의 
주객관적 조건은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근본모순의 증폭, 무한시장을 통한 
무한경쟁과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억압, 착취를 통한 자본의 위기극복이라는 
세계 자본주의체제로 진전되었으며 혁명의 전선은 자본과 노동이 대립하는 모든 
전선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 게바라의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인식, 사회주의적 
인간에 대한 사상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혁명의 전사들은 
학자로서의 맑스가 예견했던 법칙들을 존중하며 낡은 권력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봉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우리는 이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민중에 기대면서 
민중의 행복을 우리의 투쟁의 바탕으로 삼으면서 과학자 맑스의 예지를 실현시키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전기, 455-562쪽) "양키들은 60년동안 쿠바를 지배하면서 
수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었다. 그들이 1845년 스페인으로부터 우리를 사들일 때 
지불했던 금액과 거의 같은 액수이다. 그 동안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할 때 
그들로서도 크게 불평할 것은 없을 것이다."(전기, 439쪽) 라반데이라의 설명에 
의하면 끝없이 낙관적인 카스트로에 비해 게바라는 비관적이었다고 한다. "체는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야욕을 피압박자들이 저지하지 못할 때에 발생할 사태를 
심히 어둡게 내다보고 있었다. 체는 사회주의진영의 열세를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미약한 경제력뿐만은 아니었다. 소련과 동유럽 정권들의 부패를 그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라도 체는 고사상태에 있는 혁명사상에 또 다른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봉기는 한시가 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전기,496쪽) 호세 메데로 메스트레에게 보낸 글에서는 그의 인간관이 잘 
드러나 있다. "구체제가 붕괴되고 난 후 우리는 절충적인 인간을 통해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길 원했습니다. 자본가들의 시대를 대표하는 구시대인을 다른 유형의 
인간, 즉 자신의 동료들을 착취하려는 욕구를 갖지 않는 인간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늘 이윤을 행복의 잣대로 삼으려는 이들에게는 사악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전기,481-482쪽) 

자본주의 바다에 사회주의 섬이 있을 수 없다.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자본의 
힘은 힘이 약한 자본을 흡수하거나 죽게 함으로써 거식증을 드러내고 있다. 
헤게모니 국가들 사이에 빈번해지는 대규모 기업합병은 자본의 생존법칙의 
하나이다. 그것은 게바라가 지적한 대로 이윤을 행복의 잣대로 삼는 사악함에 
근거함으로써 초국적 금융투지자본운동의 기본이 된다. 자본은 세계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교묘하게 문화와 종교, 그리고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특정 
자본에 대해 반대하는 정서에 영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축적을 유지해 
나간다. 혁명의 진지는 파괴되었으며 패배주의와 무기력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진지는 자본주의의 삶 그 자체이다. 생산, 유통, 소비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구조화되는 억압과 착취의 현장이며 그 현장에서 혁명적 기운이, 좌절을 넘는 
분노가, 안일을 깨뜨리는 긴장이 용솟음치고 있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구체적 모습이다. 그 속에 수백, 수천의 게바라가 성장하고 있다. 

촘스키가 정복자 미국을 비판하는 안목은 탁월하다. 어떻게 보면 게바라의 
문제인식과 비슷하기도 하다. "급진적이며 민족적인 정권들은 국제적 압력으로부터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다.··· 미국 등 서구 열강은 이런 정권을 일종의 
'바이러스'로 생각했다.··· 바이러스가 인간 몸안에 침투한다면 당연히 
박멸시켜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잠재적인 희생자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성을 
가져야 한다. 미국에서 쿠바라는 바이러스는 침략, 공포, 경제전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국가보안국은 이 바이러스가 환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런 정책은 동남아시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촘스키, 70-71쪽)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기존인식에 따르면, 지난 날 이 지역에서 발생한 경제적 
파탄현상은 국가주의, 민중주의, 맑스주의 등과 같은 악마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발견한 통화주의 및 자유시장의 미덕으로 경제문제가 점차 해결되고 
있다는 것이다."(촘스키,295쪽) 미국에서의 빈곤, 노동탄압 등에 대한 그의 분석 
역시 역사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모호한 추상수준에 그치고 만다. 
"1960년대 민중운동은 이후 보다 넓은 영향을 미쳤다. 인종차별 및 성적 억압에 
대한 새로운 자각, 환경에 대한 관심, 타문화와 인권에 대한 존중들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희생자의 삶의 운명에 동참하는 1980년대 
제3세계의 연대운동이다. ··· 강자들은 이런 발전들을 위험천만하고 
체제전복적인 것으로 바라보면서 비판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다."(촘스키,431-432쪽) 
신사회운동과 민중주의 운동을 유일한 희망으로 제시하는 촘스키의 글이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실천은 그야말로 이론적 실천인가? 
글과 펜으로 싸우는 실천인가? 세계적 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를 아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그것이 사람들을 움직여 신자유주의와 미제국주의를 
분쇄하는 혁명적 실천에 가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론 없는 실천은 
실사구시로 교정되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론은 백해무익하다. 

게바라는 죽었고 촘스키는 살아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혁명을 향한 
희망과 실천은 끝이 없다. 분명히 21세기는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희망으로 만들 
수 있는 세기이며 이제 시작이다. 각 세대마다 자기들의 몫이 있다. 70대는 
70대대로, 50,60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세대는 20,30,40대이다. 
게바라는 31세에 쿠바혁명의 주역이었으며 39세에 불굴의 혁명전사로 죽었지만 
길이길이 그 혁명적 실천이 모범이 될 것이다. 장기를 바꿔끼워 120세를 
산다면(이는 분명히 지배계급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20대는 100년을 혁명적 
실천에 복무할 수 있다. 주관주의적 희망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적 투쟁속에서 
사상적으로 단련하고 조직적으로 단결하면서 우리를 세워나가야 한다. 끝으로 
게바라가 바요장군을 주인공으로 쓴 서사시 [카리브해의 폭풍]의 몇 구절을 
인용한다. 


가자 

새벽을 여는 뜨거운 가슴의 선지자들이여 

감춰지고 버려진 오솔길을 따라 

그대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인민을 해방시키러 

-중략- 


토지개혁, 정의 빵, 자유를 외치는 

그대의 목소리, 사방에 울려퍼질 때 

그대 곁에서 하나된 목소리로 

우리 그곳에 있으리 

-중략- 


아무리 험한 불길이 우리의 여정을 가로 막아도 

단지 우리에겐 

아메리카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진 게릴라들의 뼈를 감싸줄 

쿠바인의 눈물로 지은 수의 한 한 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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