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ictor (홍헌수) 날 짜 (Date): 2000년 4월 22일 토요일 오후 09시 49분 10초 제 목(Title): [외언내언] 의자왕부자 假墓 [외언내언] 의자왕부자 假墓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가 그곳에 묻힌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隆)의 넋이 1,300년 만에 고토(故土)로 돌아온다. 충남 부여군은 9월 말까지 부여읍 능산리 고분군안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와 제단을 설치하고 10월 백제문화제때 이곳에서 초혼제를 지낸다. 새로 조성될 가묘에는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북망산에 있는 융의 묘 주변에서 가져올 흙도 뿌려진다. 그동안 왕자 부여융의 묘는 확인이 됐지만 의자왕의 묘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부여융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석(墓誌石) 복제품도 제단에 안치한다니 비록 ‘가묘’일망정 혼령은 깃들 것 같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의자왕은 서기 660년 7월18일 사비성을 나와 왕자·대신들과 함께 마침내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열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올리게 하니 백 제의 군신이 목메어 울었다고 한다.항복한 의자왕은 왕세자를 비롯, 대신·장 수 88명, 백성 1만 2,870명과 함께 포로로 당나라에 잡혀갔다. 우리 역사상 국왕이 외적에게 잡혀간 일은 의자왕이 초유의 일이다.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이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고 병자호란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역시 청국에 끌려가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왕세자가 일본에 볼모가 된 적은 있었지만 국왕이 외적에 붙잡혀 간 일은 의자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의자왕은 당나라 뤄양에서 3년 동안 지내다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당나라는 백제 유민 회유책으로 꽤 호화로운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 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의 유민을 회유하고 신라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도록 했으나 10여년 만에 백제 유민의 저항이 심하고 신라의 직할통치가 강화돼 융이 당나라로 들어감으로써 백제 왕씨 부여(扶餘)씨는 이땅에서 멸족하고 ‘부여’라는 지명만 남게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삼한지중 백제최강 최문( 三韓之中 百濟最强 最文)”이라 하여 백제의 강성과 문명의 찬란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이렇듯 강성하고 문명이 찬란했던 왕조가 어이없이 무너지고 '잃어버린 왕조’가 됐다. 백제왕조는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나·당연합군의 잔혹한 주민학살로 부흥운동이 쉽게 세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삼아 부흥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지도부의 내분과 강력한 연합군의 공격으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역만리 적지에 묻혀 있던 의자왕과 부여융의 넋이 고토를 찾게 된다니 1,300년 역사의 흐름이 한갓 유수(流水)와 같구나. 金三雄주필 kimsu@k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