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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pictor (홍헌수)
날 짜 (Date): 2000년 4월 22일 토요일 오후 09시 39분 22초
제 목(Title): 百濟의 强盛과 大陸支配


百濟의 强盛과 大陸支配

     최   원   용

Ⅰ. 문제의 제기 : 백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Ⅱ. 백제의 기원 : 출자와 통치구조
Ⅲ. 백제의 강성 : 담로(왕후)제의 확립
Ⅳ. 백제의 대륙지배 : 군의 설치와 소멸
Ⅴ. 맺음말 : 백제에 대한 재평가


Ⅰ. 문제의 제기 : 백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한국, 중국과 일본의 상반된 이해관계로 말미암아[각주1 : 최원용,「백제의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 (익산, 원광대학교 대학원, 1995), pp.1∼3], 그 실체가 
크게 왜곡되고, 축소되어 버린 백제를 흔히「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우리들에게 백제는 고작 경기도 일부, 충청도, 전라도와 제주도에만 
영토를 갖고 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 패망한 매우 작고 
힘없는 나라라고 만 각인 되어져 버렸다.

그러나 최근 백제는「대왕」과 「후왕」이 중심되는 지방통치 체제인 왕후(담로) 
제를 실시하였고,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주역으로서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던 대왕국(제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각주 2 : 최원용,「앞의 
논문」, 참고.  서재석 연출, [續무령왕릉 -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서울, 
KBS(1TV), 1996. 9. 15.소진철,「양직공도로 본 백제 무령왕의 강토」,
韓國學報』第九十輯, 1998, pp.93∼110. 참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백제의 대륙지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각주 3 
: 尹乃鉉, [중국 동부해안지역과 한반도 - 만주지역의 상호관계], {張保皐} 
해양경영사 연구, (서을, 李鎭, 1995), pp.76∼81,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대중국 
활동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보면, 왜 隋와 唐이 그토록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노력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중국에 진출했던 고구려와 백제를 그대로 두고는 
자신들의 황조가 안전하게 지속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제인들은 4세기를 전후, 원거주지(발해연안)에서 남하를 시작하여 중국의 동해안 
지방,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방까지 진출하여 무수히 많은 
후국(담로)을 두웠던 대왕국 이었다[각주 4 : 백제는 그들의 생활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발해만지역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기마민족 국가이다.  대체로 그 시기는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북방 유목민족의 이동과도 그 시기를 
같이하며, 애쉬(James K. Ash)는 부여(扶餘)인이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백제는 요서 지역을 교두보로 하고 중국 동해안지역과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였고, 한반도를 거점으로 하여 일본열도 에 진출하여 광대한 영역을 갖은 
강국이었다라는 사실들이, 「칠지도」, 「인물화상경」, 「양직공도」, 
「흑치상지묘지석」과 1971년「무령왕릉� 邃幄梔�(武零王陵出土誌石)」발굴, 
1993년「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와 1995년 백제 창왕(昌王)때 
만들어진「석재사리감(石材舍利龕)」이 출토로 입증되고 있다.

최원용,「앞의 논문」, pp.67∼68, 참고.].


Ⅱ. 백제의 기원 : 출자와 통치구조

1. 백제의 출자와 건국이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와「부여」를 성을 삼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각주 5 : 『三國史記』(百濟本紀 溫祚王)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故以扶餘爲氏].  게다가 472년 백제 개로왕도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천명한 것으로 보아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각주 6 : 
『魏書』(권100 列傳百濟), p.1076, 與高句麗源出夫餘], 백제는 분명한 부여의 
후예이다.

또한 『이십오사』[각주 7 : 오늘날 중국으로 정사로 알려진 『사기』(史記)부터 
『청사』(淸史)까지, 즉 주(周)왕조부터 청(淸)왕조까지의 역사책를 통칭하는 
용어이다]에는 백제의 위치에 대하여, “그 나라(백제국)는 고구려(고려·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각주 8 : {宋書}(권97 
列傳百濟), p.1154, 百濟國. 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梁書}(권54 列傳百濟), p.391,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南史}(권79 列傳百濟), p.906,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따라서 백제의 건국지는 기존의 황해도나 서울 부근의 한반도보다는 중국의 
하북성과 요령성일대인 발해연안 지역이며[각주 9 : 文定昌, 『百濟史』, (人間社, 
서울, 1988), p.27.

林承國([漢四郡과 百濟疆域考], 『自由』, 서울, 1981년 10월호, p.37)은 
帶方이라는 지명은 『漢書』(권28 지리지 8하)의 樂浪郡條二十五縣중 하나인 
帶方縣이다.  『魏書]』(권108상 지리지5 지형1)에서는 營丘郡의 三縣중 帶方縣이 
있으며, 『晋書』(권14 지리지상)에서는 [帶方郡公孫度置---中略---]라 적고 
있다.  또한 『遼東志略』에는 
“古帶方國漢末曹操置郡在遼東之東屬平州括地志云帶方故城在樂浪界”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백제의 일식 관측지점이 동아시아 대륙 북경과 
조양일대이였다는 사실(박창범, 삼국시대 천문기록의 독자관측사실증명과 
삼국위치의 재조명 『한국천문학회보』, 1994.)은 백제의 건국지를 추정하는 
자연과학적 자료로서 사실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 곳은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문화의 요람지이자, 황하문명의 모태지역이기도 하다[각주 10 : 李亨求, 
『韓國古代文化起源』, (도서출판 까치, 서울, 1991), pp.83∼89.]. 

한편 고조선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광명이세(光明理世)", 고구려의 
"제세이화(在世理化)"와 "이도여치(理道與治)"를 건국이념으로 계승한 백제의 
정치사상은 고조선의 건국이념과 북방문화(北方文化)의 정치사상을 독특하게 
발전시켜「대왕국」의 세계에 의거, 왕후제를 실시하여 창의적인 민족 전통의 
정치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각주 11 : 윤내현, {고조선연구}, (서울, 一志社, 
1994), pp.441∼474,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을 토대로 하여 고조선에는 
扶餘·孤竹·高句麗·濊·貊·追·眞番·樂浪·臨屯·玄 ·肅愼·靑丘·良夷·楊州�
ㅫ ㅺ沈ㅸゎ점ㅡ뱁�朝鮮·辰·沸流·荇人·海頭·蓋馬·句茶·藻那·朱那·韓 
등의 渠師國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여기서 
渠師國은 諸侯國임).

徐熙乾 編著,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권2 揆園史話), (서울, 고려원, 1986), 
pp.53∼54,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天下諸州. 今不可詳矣(古朝鮮에 대한 설명임)].

2. 백제의 통치구조

15년 온조왕(溫祚王)은 동·서·남·북과 중앙 5부를 두어 5부제를 실시하였다.  
260년 고이왕(古爾王)은 6좌평제(佐平制)와 16관등제(官等制)를 실행하였으며,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는 전문관료직인 박사(博士)가 출현하였다[각주 12 : 
{三國史記}(百濟本紀 近肖古王), p.183, 古記云 ---中略--- 
至是得博士高興始有書記.].

백제의 통치 기구도




6세기 무령왕 때에는「제국(대왕국)」의 통치기구에 걸맞는 내관(內官) 12부(部) 
및 외관(外官) 10부 등 중앙통치기구인 22부제[각주 13 : 내관 12부는 당(唐)의 
통치 기구인 전중성(殿中省)내의 
상식국(尙食局)·상약국(尙藥局)·상의국(尙衣局)·상사국(尙舍局)·상승국(尙乘局)�
ㅋ璨П�(尙輦局) 직능보다 궁정과 내치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잘 정비되고 훨씬 
더 발달한 전문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궁중 내각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전제왕권(專制王權)을 뒷받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외관 10부중 
사군부(司軍部)·사구부(司寇部)·조부(調部) 등 3부는 군사 및 안보 관계 
부서이며, 교역과 외국인을 관리 감독하는 부서로는 
객부(客部)·외사부(外舍部)·도시부(都市部) 등이 있어 외관도 백제의 해외 
통치에 적합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창안된 통치 부서였다.]와 지방통치기구인 
담로( 魯)제를 완성하였다[각주 14 : 
魯制는『宋書』·『南齊書』·『魏書』·『日本書紀』 그리고「七支刀」銘文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宋書』·『南齊書』에 등장하는 百濟의 王侯와 
諸將들의 작호(將軍職)는 고대 동아시아의 관행상 그의 부임지와 직책에 걸맞는 
실질적인 것이다(金英心, 「5∼6세기 百濟의 地方 統治體制」,『韓國史論』 22, 
1990, pp.79∼90.)].       


Ⅲ. 백제의 강성 : 담로(왕후)제의 확립 

각종 사료로 보이는 백제의 「후왕」을 이해하는 것이, 백제의 대륙지배의 실상을 
통찰(洞察)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는 백제의 
후왕들이「외교활동」과 「지방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송서』·『남제서』·『위서』의 백제 후왕과 장군


위 도표에 근거하여, 당시 백제의 정치제도에 관한 몇 가지 특색을 고찰할 수가 
있다.

첫째, 동일 관명의 반복으로 보아, 왕족(귀족)의 관직 임용이 임기제로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당시 백제왕이 관군장군(冠軍將軍) 여기(餘紀)를 또 관군장군으로 삼은 
것은 국내의 방백과 수령들은 물론 본국외의 진장(鎭將)들에게도 3년 임기제를 
실시 적용했기 때문이며[각주 15 : {北史}(권94 列傳百濟), p.1371. 및 
{隋書}(권81 列傳百濟) p.907, 長吏三年一交代.], 위의 여러 장군들은 요서지역 
장군들에 대한 재임명이다.

둘째, 이들 장군(관명)직에는 분명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예를 들자면 관군장군의 관군은 으뜸이라는 의미이며[각주 16 : 周何 總主篇, 
{國語活用辭典}, (臺北, 五南圖書出版公司, 1992), p.195, 冠軍 : 
軍功卓越爲諸軍中第一, 考試或比寬得第一名, 古代將軍的名號或官銜], 곧 11인 
장군의 총수(總帥)라는 뜻이다.  그리고 정로장군(征虜將軍)의 정로는 로(虜)라 
불리는 적에 대한 공격(토멸)을 전담하던 장군이었다[각주 17 :  이 당시 虜는 
南朝가 北魏를 朔虜·北虜라 했음과 같이 北魏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해 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장군의 호칭 서열에 있어 
{宋書}(권39∼40 百官志)나 坂元義種의 분석에 의하면, 征虜將軍이 冠軍將軍보다 
상위에 있다.  그러나 유독 蓋鹵王이 宋王 駿에게 인사를 통보한 국서를 담은 
{宋書}·{南史}(列傳百濟)에는, 冠軍將軍 右賢王 餘紀를 征虜   將軍 左賢王 餘昆 
보다 상위에 놓고 있어, 단순한 착오에 의한 오기보다는 그 당시 실상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암시해 주는 것 같다].

셋째, 우현왕(右賢王)과 좌현왕(左賢王)이라는 왕후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한(前漢) 초부터 흉노 모돈(冒頓)이 사용했던 우현왕과 좌현왕에 비롯된 것이며, 
요서내 평성 지역을 좌현(左賢)이라 하고, 우북평(右北平) 지역을 우현(右賢)이라 
하였다[각주 18 : 李道學, [4세기 정복국가론에 대한 검토], {韓國古代史論叢} 6, 
1994, p.267, "이職制야 말로 백제의 原住地를 滿洲地域으로 설정할 수 있게 
하거니와, 그러한 환경에 맞게끔 유목 기마 민족의 제도를 수용한 일면의 표출내지 
그 殘影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백제의 국가적 성격과 계통을 이보다 더 
잘 반영해 주는 자료는 없으리라고 본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 지역 수장에 
대하여 존귀하게 대접하였던 직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각주 19 :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 (東京, 吉川弘文館, 1978), pp.68∼71, 이에 대하여, 
坂元義種은 右賢王·左賢王은 원래 太子나 單于의 후계자에게 준 尊貴의 稱號로 
간주하고, 당시 가장 중요한 병마권을 합법으로 장악하게 한 제도라 하였다.

林承國 번역·주해, {한단고기}(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마한세기상), (서울, 
정신세계사, 1987), p.209,高登叛據開城抗命. 天王馬韓方擧兵討之到紅石領界聞. 
天王許高登爲右賢王乃止. 右賢王制가 馬韓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점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넷째, 보임된 여러 장군들의 성씨로 보아, 백제는 왕후제를 실시하였다[각주 20 : 
이에 대한 근거로, 征虜將軍 左賢王 餘昆은 蓋鹵王의 아우 昆支君이며, 477년 
內臣佐平을 역임한 것으로, {三國史記}는 기록하고 있으며, 그도 倭에 있을 때 
倭王으로 재임하였다].

왜냐하면 11명의 진장(鎭將)중 왕족인 「여(餘)/부여(扶餘)」씨가 8명이나 보임된 
것을 보아, 백제에는 22담로( 魯)가 있으며[각주 21 : {梁書}(권54 列傳百濟) 
p.391, 其國有二十二 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각 담로에는 자제종친들이 
거하면서 통치하였다는 내용과 부합한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백제가 강역을 
확대해 가면서, 이 곳에 편입된 지역의 수장(왕 또는 연맹장)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담로(왕후)제는 봉건제도이며[각주 22 : {滿洲源流考}(권3 部族百濟), 
(서울, 弘益齊, 1993), p.108, 
其國內衆建侯王以酬勳懿自宋齊時巳然則又地廣民稠之驗也.], 「대왕」을 중심으로 
한 대왕국(제국)의 형태와 특징을 지녔던 것이다[각주 23 : {滿洲原流考}(권18 
國俗百濟), p.614, 百濟盡有三韓之地. 所封王之號如. 面中邁盧當卽三韓屬國. 
彌凍莫盧之屬. 其與滿洲語相近者如. 都漢當卽爲多罕橋也.  中當爲博勤卓約會也. 
弗斯當爲富森滋生也. 弗中當爲法珠樹 也. 其音尙有可推者耳].


백제 담로의 왕후      

따라서 이들 후왕들은 임지에서는 전권을 행사하는 막부(幕府)의 수장(首長)으로서 
역할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였지만, 종국(宗國) 백제와는 늘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던, 백제왕의 자제종친이거나[각주 24 : 특히 우현왕과 좌현왕 그리고 왜왕에 
봉임된 인물들(紀·昆·旨·讚·鎭·濟·興·武)은 왕명이 단자인 점으로 보아, 
모두 다 백제 왕족의 일원인 것이다.  그 당시 요서와 왜는 백제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봉지(封地)」였다고 할 수가 있다]. 유력한 씨족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백제의 후왕으로 임명된 자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들이 제수 받은 
작호(爵號)를 면밀히 비교하고, 검토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각주 25 : 
먼저 백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왜왕들은 
안동장군(安東將軍)·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사지절 도독 안동대장군(使持節都督 
安東大將軍)·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정동장군(征東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그 
밖의 여러 왕후의 위상은,『남제서』(권50 열전가라국)을 보면, 그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479년 당시 
가라(가야)국왕은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이라는 작호를 갖고 
있어(『南齊書』(권58 列傳加羅國), p.462,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可授輔國將軍本國王)., 458년 여도(餘都)와 여애(餘艾)가 제수받은 
보국장군과 같은 작호이며, 495년 찬수류(贊首流)가 제수 받은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 中王)과 동급의 작호이다.  그런데 이 무렵 가야 제국(諸國)은 상당한 
부와 군사력을 갖고 있던 강국이었음을 경남 함안 가야읍 도항리 고분군에서 
봉분의 크기가 아래 직경 38m, 높이가 15m인 5세기 후반 가야시대 수장(왕)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발견하였다. 이 고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수혈식 
석실분]으로 순장 인골 5구 유물 180여점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중 피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순금제 [환두대도]가 발굴되었다].




백제와 대륙 왕조의 호구     

王恢, {中國歷史地理}, 台北, 學生書國, 1984, pp.879∼911, 참고.

그러므로 5세기말∼6세기초(개로왕부터 무령왕 때)까지 백제, 남조 그리고 
북위와의 호구(戶口) 비교는 시사하는 바가 크며[각주 26 : 趙岡·陳鍾毅 
著(尹貞粉譯), {中國土地制度史}, (서울, 대광문화사, 1985), p.130, "안정기 
동아시아(대륙왕조)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0.6∼1%정도였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출생률은 급격히 낮아졌으며, 대규모의 전란은 매번 고대 
중국(동아시아 대륙)의 인구를 절반 정도로 감소시켰다".

백제(왜)의 호구수 263년 29∼30만 호를 호구(인구)증가율 평균 0.8%로 산출함], 
백제와 후국 신라, 가야 그리고 왜와의 관계를 기초하여 볼 때{각주 27 : 金鉉球, 
[4세기 가야와 백제·야마도 왜의 관계], {韓國古代史論叢} 6, 서울, 財團法人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4, pp.129∼141, 참고바람 백제가 가야 7국을 평정한 
다음에 백제와 가야 제국은 '子弟' 또는 '父子'관계를 맺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국가간의 관계를 친족 관계로 나타낸 것으로, 당시 가야 제국이 백제와 
상하 관계를 맺었음을 의미하며,  이후 가야 제국은 고령 가야가 대외 관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382년 외부의 침입을 받은 고령 가야가 백제에 구원을 청하게 
되고, 4세기말에는 백제의 의지가 반영된 종속적인 관계로 전환되었다], 백제와 
남북조의 관계는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Ⅳ. 백제의 대륙지배 : 군의 설치와 소멸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는 후한 붕괴 후[각주 28 : 백제의 역할 수행의 배경에는, 
후한 붕괴후 지속된 동아시아 대륙 왕조의 이합 집산과 흥망 성쇠로 이어지는 
대혼란(金翰圭,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고대한국의 국가와 사회}, (서울, 一潮閣, 1986), p.130, "막부에 의한 장군 
권력의 독립화, 즉 막부 체제의 원심력적 작용은 마침내 제국을 해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분산 상황을 고착화하여, 중국 역사상 前無後無한 
大分裂時代를 장기간 지속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지리, 자연과 인구 등 국력의 평가 요소를 고려해 볼 때,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위의 낙랑를 공격한 고이왕 때부터 
시작되었다[각주 29 : 『三國史記』(百濟本紀 古爾王), p.180, 十三年 秋八月 
魏幽州刺史母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後漢書集解』에는 고구려 太祖大王때 馬韓·穢·貊과 연합하여 後漢 군현을 
공격하였으나, 갑작스런 夫餘軍의 습격을 받고 패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馬韓을 百濟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 백제는 서진의 멸망과 동진의 
건국 그리고 5호 16국이라는 혼란기를 틈타, 그 세력을 크게 성장시켜 왔으며, 그 
결과 372년 6월 동진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왕을 배알하였고 왕 여구가 진동장군 
낙랑태수가 되었다고 한다[각주 30 : {晉書 注}(권9帝紀 簡文帝), p.140, 
咸安二年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이러한 사실은 백제와 
동진(東晉) 사이에는 정치관계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晉書 注』(권9 帝記 
簡文帝)와 『宋書』(권79 列傳百濟)에 기록된 백제왕의 책봉(冊封)은 단순한 교역 
관계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정치적으로 반영한 것이며, 백제의 
대륙지배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420년 강좌(江左) 출신이며 도이인(島夷人)인 유유(劉裕)가 송을 세움으로서, 
동진은 멸망하였다[각주 31 : 보다 상세한 것은 『魏書』(권97 列傳島夷劉裕), 
pp.1033∼1046, 참조 바람].  이해 송은 백제왕 여영(餘映)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진호시켰고, 430년 여비(餘毘)를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457년에는 여경(餘慶)으로 하여금 진동대장군 직을 계승하고, 458년 개로왕이 
요청한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인의 관작을 승인하였다.

이 무렵 백제의 후국 왜도 왜수(倭隋) 등 13명의 장군에 대하여, 
평서(平西)·정로(征虜)·관군(冠軍) 장군 등의 관작 승인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당시 百濟(倭)가 宋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8년(451∼458)간 宋으로부터 제수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백제(왜)의 
장군호가 34명에 이르며, 당시『이십오사』에 등장하는 장군호(將軍號)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정벌 지역을 설정하거나, 관할권을 부여하는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백제·왜의 제장(諸將)들이 남조로 부터 제수 받은 장군호 중, 
평서(平西)·정로(征虜) 장군은 당시 이들이 원정군(遠征軍)으로 출전했던 
백제(왜)의 장군이었을 것이다[각주 32 : {宋書}(권95 列傳索虜), pp.1131∼1132, 
元嘉二十七年 燾自率步騎十萬寇汝南. 初. 燾欲爲寇. ---中略--- 虜掠抄淮西六郡. 
殺戮甚多.

{中國歷史}, p.359, 450년 北魏 太武帝는 황하 이북지역을 통일한 후 宋의 
河南지역을 탈취하고자 전국에서 6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南征을 
단행하였다.  宋文帝는 東路軍[王玄謀가 통솔]·西路軍[柳元景이 통솔]을 두 
방향으로 출군시켜 北魏軍을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잇따라 北魏軍에게 
패퇴하여, 결국 建康의 안전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다시 宋은 거국적으로 인원을 
동원하여, 항전태세를 갖추었으므로, 결국 北魏軍은 퇴각하였다.  이 전투 결과로 
北魏는 淮水 유역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479년 나약한 송왕 준(準)으로부터 선양(禪讓) 형식을 빌어 남제를 건립한 
소도성(蕭道成)은 대북위와 다년간 사투를 벌인바 있던 송의 용장이며, 백제인 
고달(高達), 양무(楊茂)과 회매(會邁) 등의 도움을 크게 받아 정권을 
수립하였다[각주 33 : 文定昌, {앞의 책}, p.346, / {南齊書}(권58 列傳百濟), 
p.462,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淸亮. 
忠款夙著.往太始中. 比使宋朝].  이에 북위는 남제의 기선 제압을 위해 선공을 
감행하였으나, 소도성의 아들 소색(蕭 )이 왕위에 오르자, 북위는 사자를 보내 
화해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양국의 이러한 합의에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던, 
요서 백제군를 섬멸하기 위한 묵시적 합의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각주 34 :  
북위가 남제에 화호(和好)를 청한 것은 백제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함이며, 남제는 
이를 기화(奇貨)로 세습적인 백제의 기반(羈絆)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한편 472년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를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한 
이후[각주 35 : {魏書}(권100 列傳百濟), pp.1076∼1077 / {三國史記}(百濟本紀 
蓋鹵王), pp.187∼189 / {北史}(권94 列傳百濟), pp.1371∼1372에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魏書}(권7상 帝紀第7 高祖紀上), p.65, 延興二年 
八月丙辰 百濟國遣使奉表請師伐高麗.  {北史}(권3 魏本紀 第3 高祖), p.35, 
延興二年 八月 百濟遣使請兵高麗라 간략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백제와 북위는 
488∼494년까지 3차에 걸쳐 대규모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

488년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관하여,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위가 병을 파견하여 우리를 침입하였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라고[각주 36 : {三國史記}(百濟本紀 東城王), p.192, 十年 
魏遣兵來伐爲我所敗.], "위가 병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패하였다(진이후 백제는 요서·진평 2군을 점령하였다)"[각주 37 : 
『資治通鑑』(권136 帝紀二 世祖武皇帝上之下), (臺北, 宏業書局, 1973), p.1162,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陳壽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其一也. 
據李延壽史, 其先 以百家濟海, 後浸强盛以立國, 故曰百濟. 晉世句麗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  이러한 역사 기록으로 볼 때,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동아시아 대륙의 산서(山西)·하남북(河南北)·산동(山東) 등 현 중국 동해안 
백제군 접경지역에서 수십만 대군이 동원된 전투에서 백제는 북위에 대승함으로써 
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게 되었다.


첫째, 백제의 산동 반도 지역을 영유한 사실이다.

이 사실은 동성왕이 임명한 성양태수 왕무(王茂)가 있고, 이곳 성양이 훗날 
동청주(東靑州)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각주 38 : {北齊書}(권8 帝紀 第8 後主), 
p.54, 武平二年 春正月戊寅 以百濟王餘昌爲使之節. 都督. 東靑州刺史].

둘째,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백제는 해상교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각주 
39 : 李道學,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제 63집, (서울, 
一志社, 1991), pp.67∼105, 이시기 百濟는 韓半島·九州·琉球列島·臺灣 그리고 
인도지나반도를 잇는 거대한 국제적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이같은 백제의 
교역체계는 정치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그 문화의 세련도를 높였으며, 
東아시아상 백제 중심의 한 블럭을 형성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이『주서』(백제전)에 언급된「자진송제양거강좌 
후위택중원(自晉宋齊粱據江左 後魏宅中原)」이라는 기록과도 시기적으로 
부합하며[각주 40 : {北史}(권94 列傳百濟), p.1372, 自晉宋齊梁據江左右.  
{周書}(권47 列傳百濟), p.365, 自晉宋齊梁據江左. 後魏宅中原.

한국학계의 일반적 해석은 晉宋齊梁이 江左右에 거하면서부터 百濟가 朝貢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공은 방문자가 방문국에 선물을 하는 의례적인 것에 불과한 
것 이였으며, 자체 문구상으로는 百濟가 주체이기 때문에 百濟가 晉宋齊梁이래 
江左(右)에 거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현 동아시아 대륙의 
[산서·하남북·산동] 그리고 [강소·절강·복건·호남·광동·광서장족자치구] 
지방을 점령한 결과라 하겠다[각주 41 : {隋書}(권81 列傳百濟), p.908, 
"其南海行三月. 有담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 鹿. 附庸於百濟(위치, 
거리, 크기를 고려해 볼떄, 지금의 臺灣으로 비정된다)", 「黑齒常之墓誌石」의 
“府君諱常之 字桓元 百濟人也 其先出資扶餘氏封於黑齒”라는 내용과 1998년 3월 
일반에 공개된 고대 일본 아스카문화의 요람인 奈良縣 明日香의 「기토라 고분」의 
천정벽화 星宿圖의 별자리를 통하여, 당시 백제의 해상활동 능력과 국가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梁起錫([百濟의 海外進出], {季刊京鄕} 여름호, 서울, 경향신문사, 
1987, p.82.)은 {三國史記}(권46 列傳崔致遠)의 기록에 근거하여, "百濟가 楊子江 
남부인 吳·越과 華北·山東地方인 幽·燕·齊·魯까지 진출했으며, 北史와 周書의 
百濟傳에서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이 지역은 百濟 毘流王 이후 100여 년 정도 점거한 百濟의 
식민지였고, 長城 이남의 百濟 근거지이자 대륙 진출의 전략 기지이며, 저 멀리 
東南亞 제국과의 해상 무역과 외교의 교두보로 활용 되였던 지역이라고 한다.

이렇듯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도 성왕 사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백제는 당과의 「세력관계」타파를 위한 전쟁에서 
660년 참패하고, 663년 백제의 부흥운동 마저 실패로 끝나자[각주 42 :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刮兵大戰于白江(今湖南稚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 焚燒刮船四百余 ,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刮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刮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백제의 대륙지배 실체인 백제군들도 사라져갔다[각주 43 
: 『杜氏通典』(권185 백제전) : (光緖二十七年八月 
上海國書集成局遵武英殿聚珍版校印) 城傍余象後漸寡弱散投突厥及 駕 
其王扶餘崇竟不敢還舊國 ---中略--- 扶餘氏君長墜絶].



Ⅴ. 맺 음 말  : 백제에 대한 재평가

백제는 우리의 통념처럼 건국 초기부터 한국의 서울부근에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대륙 발해연안에 건국해 있다가, 3세기말∼4세기 중반경 한반도로 남하를 
시작하였다.  대략적으로 이 시기는 전세계적인 기후 한랭화 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아시아 민족 대이동기, 기마민족 이동과 그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 근초고왕 때 수군을 강화하여 한반도에서 대륙지방으로 진출하였다는 
요서진출의 실체는, 초기 건국지인 대방고지(발해연안)에서 백제가 대왕국으로 
발전해 감에 따라, 장성이남 현 중국의 요지인 
하북·하남·산동·강소·절강·복건과 호남·광동 그리고 광서장족자치구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가 백제군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한 대륙지배로 봄이 타당하다.

이와 같은 백제는 교사(천자가 하늘과 땅에 지내던 제사)를 지내고, 왕([천자])의 
죽음에 「붕(崩)」자를 썼고, 왕실([황실])의 물품을 생산하고 보관하던 
상방(尙方)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군사 열병식 때 5방제에 의거하여 
노란색 깃발을 사용하여 동아시아의 중심국가(제국)임을 당당히 표명한 것으로 
증명된다.  또한 1993년 12월 충남 부여에서 
발굴된「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백제의 「제국」국가위상을 
입증해 주고 있는데 ; 이 유물은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권력의 
상징인「봉(鳳)」(유목민 : 기마민족)과「용(龍)」(농경민)을 각각 머리와 
받침으로 하고 있어, 당시 백제가 양 문화권의 패자(覇者)임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이십오사』와 『삼국사기』에는 백제(전성기인 근초고왕∼성왕 
: 346∼554년) 대륙왕조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책봉(冊封)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실상을 몇 가지 정황을 고려하고 판단해보면, 
기 설정된 백제와 남북조의 관계는 반드시 재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게 된다.

첫째, 백제는 동아시아 대륙과 한반도 등 삼한 땅에 수많은 왕후를 두었고, 마한의 
권리를 계승하였으며, 교사(郊祀)를 지낸 정통왕국이었다.

둘째, 백제는 남북조 시대에 최강국으로 알려진 북위의 수십만 대군을 수차 
격파하였을 정도로 강한「군사대국」이며, 호 150만에 인구 750만 명의 대국이었다.

셋째, 백제는 당시 고도의 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고대 왕국 가야와 
이 기간중 독립 왕국으로 알려진 왜와 신라를 후국으로 둔 [대왕국]이었다.

넷째, 백제는 저 멀리 동중국해의 대만(담모라국)과 태평양상의 흑치국(黑齒國)을 
봉국(封國)으로 삼고 동남아 여러 나라와도 해상교역을 하였고, 대부분의 국토가 
구릉과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산물이 풍부하여 국가경영이 원만하였다.

다섯째, 백제는 왕(「천자」)의 죽음에 崩을 썼고, 태자([후왕])의 죽음에 薨을 
사용하였다(1971년 충남 公州에서 발굴된 [斯麻王(武寧王)의 誌石]에 崩표기, 
1920년 中國 河南省 洛陽에 발굴된 [扶餘隆(義慈王의 아들)의 墓誌石]에 薨표기) 
등을 고려하여 볼 때, 百濟의 국가위상은 분명히 帝國이었다).

따라서 백제는 중앙 22부와 담로제에 의한 안정된 힘을 배경으로 4세기 중반∼멸망 
전까지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 유지자] 역할도 수행하였던, 
「대왕국(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새로운 천년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우리들([東아시아 인])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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