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ictor (홍헌수) 날 짜 (Date): 2000년 4월 19일 수요일 오후 08시 26분 53초 제 목(Title): [펌] KBS 마의태자는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 [푼글] KBS 마의태자는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나? [주] KBS의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마의태자에 관한 것에서 의문되는 많은 부분을 논리정연하게 사실에 근거하여 반박한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퍼온 글입니다. 읽으시고 느낌을 가지 실수 있다면 퍼온 보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나그네 Access : 69 , Lines : 114 마의태자는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나?(내용 풍부) 지난 주 역사스페셜에서 마의태자가 강원도 인제에서 신라의 부흥운동을 하였다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내용을 다루었으나 방송을 본 많은 분들이 실상을 모른채 공감을 하는 것 같아 왜곡된 사실을 알리고자 "역사스페셜은 전설의 고향으로 전락하였는가"를 수차례 기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글 재주가 없어선지 아직 많은 분들이 보지 못한 것 같고, 여러차례에 걸쳐서 쓰다 보니까 연결해서 읽지를 않아 많은 분들의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하여 글을 올립니다. 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잘못 방영된 부분에 대하여 많은 분들께 알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다시는 이런 왜곡된 프로그램이 제작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역사스페셜에서 마의태자의 부흥운동을 검증해 나간 과정은 크게 부수적인 것을 빼면 3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김부리라는 지명에서의 김부(金富), 갑둔리에 남아있는 5층석탑의 새겨진 발원문에 나오는 금부(金富), 그리고 김부리와 갑둔리 사이에 있는 대왕각에 모셔진 마의태자의 위패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는 모두 사실과 다릅니다. 지명은 일제시대때 바뀐 것으로 원래부터 김부리가 아니고, 석탑의 명문도 사람이름이 아닌 "부귀"의 뜻이며, 대왕각의 위패도 1983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1. 인제지역의 마의태자 이야기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진실은 무엇인가? 이것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드리면 1980년 <삼국사기>를 번역한 김종권이란 분이 이 지역에 있는 경순왕 전설(전국적 여러 곳에 분포함)과 대왕각에 봉안된 철마(뒤에서 설명)를 가지고 가설을 제기한 것을 당시 갑둔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이태두 선생님이 <갑둔사적기>라는 것을 만들면서 모두 마의태자로 연결시키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후 인제지역의 향토사 자료에서 모두 이것을 베끼면서 인근 지역의 지명들이 함께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이후 많은 사람이 검증없이 베낀 자료가 또 악순환을 빚었음. 이러한 사실은 최근의 인제군 지명자료와 그 이전 자료인 <한국지명총람 2 -강원편- 1967년 한글학회 발간>을 비교하면 알수 있음.) 그러나 갑둔리 5층탑은 명문에 연대가 있어서 절대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탑이었기 때문에 1993년 6월 3일 강원도에서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을 하였고, 당시 불교미술전문가(석탑양식 검토), 한학자(명문 검토), 민속학자(대왕각과 전설 검토), 역사학자(경순왕과 마의태자 관련설 검토) 등 체계적으로 조사를 하였고, 그 결과를 토대로 마의태자와는 관계가 없으나 탑 자체가 중요하여 문화재로 지정한 것입니다. 그후 이 지역에 대하여 다시 신라김씨대종회에서 마의태자 관련사적이라고 하여 강원도에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을 하였고 이때 다시 이 문제가 재검토된어진 바 있었으나 전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에 검토된 자료는 제가 "역사스페셜은 전설의 고향으로 전락했는가(1)∼(4)"에서 개략적인 내용을 언급했습니다(뒤에 언급). 그리고 당시의 조사에 참여하셨던 분들의 조사내용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논문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역사스페셜팀에서는 이처럼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반박하는 분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오직 마의태자와의 관련성에만 촛점을 맞추어 간 것입니다. 마의태자의 이름은 그동안 "전(佺)" 또는 "일(鎰)"로 알려져 있으며, 김부(金富)라는 이름은 다른 자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김부리라는 마을이름에서의 "김부"와 5층석탑의 "금부(金富)"를 "김부"로 읽고 이것을 향찰로 해석하여 "鎰"과 "富"가 뜻이 같다고 하여, "富"는 마의태자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자료를 가지고 향찰까지 동원하여 주장하는데 대해 웃음 밖에 안나옵니다.(잘못된 점 뒤에 설명) 아울러 마의태자와 관계없는 김준을 금나라의 시조와 연결시켜 간 것도 비록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마의태자도 부흥운동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므로 마의태자와의 부흥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어이없는 내용에 대하여 비판할 필요도 없지만 TV라는 대중매체가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하여 글을 올리는 것이랍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담당 PD님께서도 이곳에 대하여 연구한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방송이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이런 내용을 방영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방송에 출연하여 고증하신 전문가님(마의태자와 관련없는 내용을 말씀하신 분들은 제외)들께도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최소한 학자라면 앞서 말한 논문에서 말한 내용을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증거자료를 대고, 학술적인 논문을 통해 다른 전문가들을 통해서도 충분한 공감을 얻도록 노력하셔야지 국민들을 우습게 알고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말도 안되는 말씀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내용에서 잘못된 점이 너무 많아 일일이 꼬집고 싶지만 뒤에서 마의태자와 관계있는 부분은 다시 언급하고, 마의태자와 직접 관계없는 부분은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 같고, 타자치는 제 손만 아파 생략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협동이 필요합니다. 역사학은 물론이거니와 민속학, 불교미술, 한문학 등 각 분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스페셜에서 주요 근거로 제시한 부분에대하여 하나씩 반박해 보겠습니다. 2. 우선 첫번째는 지명에 대한 사항입니다. 1) 김부리의 지명은 원래부터 김부리가 아니었습니다. 김부리(金富里)는 1759년에 쓰여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금보옥리(金寶玉里), 1830년경의 관동지(<關東誌>)와 1871년에 쓰여진 관동읍지(<關東邑誌>)에는 금보황리(金寶皇里), 대동여지도에는 금보동(金寶洞), 일제시대에는 금보리(金寶里)였다. 다시말하면 금보옥리 - 금보황리 - 금보동 - 금부리 - 금부리 - 김부리 순으로 변한 것이다. "금"이 "김", "보"가 "부"로 변한 것이며, 김부(金富)와는 원래부터 관계가 없는 것을 억지로 갖다가 붙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진보령(珍寶嶺)"이 "진부령(珍富嶺)"으로, "금천(金泉)"이 "김천(金泉)"이 바끤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2) 군량리는 마의태자와 관계가 없다. 군량리는 인제가 아닌 양구군에 있으며 이 지역은 강원도 산골에서는 비교적 넓은 뜰을 가진 곳으로, 1967년에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2, 강원도편)을 보면 "옛날에 군량을 쌓아 두었으므로, 군량골이라고 했다"고 나오지만 마의태자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다가 1980년경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마의태자 전설이 가미되고 있다. 3) 그 밖에도 황병골은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 아니다. 같은 한국지명총람에는 황벽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었다고 이 지역을 마의태자와 관련지으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항병골(降兵谷, 抗兵谷)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맹장군 전설과 관련한 맹개골은 방송에서 마치 인제에 있는 것 처럼 이야기 했지만 양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전설도 최근에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2. 두번째, 갑둔리의 5층석탑 명문의 "금부"와 "김부"에 대하여 이 명문은 이 지역의 김부대왕 전설, 마을이름과 함께 마의태자 관련설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이야기 하지만 실상은 복을 비는 일반적인 발원문(發願文)이다. 명문은 석탑 기단부의 면석에 음각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보살계제자구상?(菩薩戒弟子仇上?), 금부수명장존?(金富壽命長存?), 오층석탑성영충공양(五層石塔成永充供養), 태평십육년병자팔월일(太平十六年丙子八月日)이다. 여기서 "보살계제자"는 왕이 불제자임을 천명한 문구로써, 중국 양의 무제가 제왕의 존엄을 굽히고 보살계를 받아 승려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에서 칭한데서 비롯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하대에 이르면 귀족 및 지방관들도 이 칭호를 썼다. "보살계제자" 다음에 나오는 글씨가 사람이름으로 "구상?"으로 읽고 있으나 현재 마멸상태가 심해 잘 보이지 않으며 "구상"도 추정하여 읽은 글씨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 지역의 세력가 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문제는 역사스페셜에서 "금부수명장존?"의 "금부(金富)"를 "김부"로 읽고 인명으로 읽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귀(富貴)를 의미하고 다음 귀절은 장수(長壽)를 의미하여, 복(福)을 비는 일반적인 발원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엉뚱하게도 김부라는 사람이름으로 읽고나서 마의태자 이름인 "김일(金鎰)"과 다르니까 이것, 저것 시도하다 향찰로 넉넉하는 의미이므로 뜻이 같아 "김일"이 곧 "김부"이다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마의태자 이름이 김부가 되었고, 마을이름도 김부리이므로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마을이름도 원래부터 김부가 아니었고, 탑의 김부도 이름이 아니라면 도대체 마의태자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김부"는 어디가서 찿아야 한단 말인가? 다음 구절은 "5층석탑을 만들어 영원히 (부처님께의) 공양에 충단한다"는 뜻으로 충주 사자빈신사지 등 당시의 석탑에 상투적으로 쓰이던 글귀이다. 마지막줄은 건립연대로 태평 16년은 고려 정종 2년(1036년)인데, 시기에 문제가 있다. 다시말하면 신라가 망한 것은 935년이고 당시 마의태자가 반발을 했다면 이때 이미 마의태자는 어느정도 성장한 연령이었는데 1036년이라면 그로부터 100년후로 마의태자는 최소한 120~130살은 넘게 살았다는 말이 된다.(삼베옷에 초식을 하면 오래사나봅니다?) 그리고 탑의 양식도 문제이다. 방송에서 한 전문가가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을 말했지만 일부만 맞는 이야기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틀렸다.(한계사지 탑을 설명할때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한계사탑은 2개인데 방송에서는 남탑을 이야기 했다. 이 탑을 설명한 전문가는 8세기중엽에서 9세기탑으로 석가탑과 비슷하다고 했으나 이탑은 9세기 후반의 탑이며, 1998년 4월 6일 보물 제1275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비록 크기는 작지만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다층탑이다. 석탑을 연구하는 분들이라면 고려초기 석탑의 양식과 지역분포를 쉽게 알 수 있다. 옛 신라지역에는 신라양식, 옛 백제지역에는 백제양식, 옛 고구려지역에는 고구려(또는 고려)양식의 탑들이 세워진다. 만약 이 탑이 신라의 부흥세력이 만든 탑이라면 당연히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석탑(3층형식)이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정형화 되지만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특징적인 변화가 있다. 이것은 신라말의 호족세력과 후삼국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후삼국은 단지 정치적으로만 계승한 것이 아니다. 문화적으로도 계승한다. 옛 백제지역에서는 백제탑이 세워진다. 잘아시다시피 백제탑은 익산 미륵사지탑과 부여 정림사지 탑 2개에 불과하지만 옛 백제지역에는 고려시대에 들어 많은 백제계탑이 나타난다. 익산 왕궁리탑(미륵사지탑 계승), 서천 비인 5층석탑(정림사지탑 계승) 등 부지기수다.. 마찬가지로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계 석탑이 나타난다. 월정사탑, 보현사탑과 같은 다층석탑과 같은 것은 최근 고구려탑 양식이라고도 한다. 또한 다층석탑도 고려식이다. 결국 신라의 부흥세력은 신라를 계승한 문화를 갖고 있지 않았고, 적국인 고려의 양식을 만든 셈이다. 3. 인제 김부리의 대왕각과 마의태자 위패에 대하여 방영된 대왕각은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서 남면 갑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아래에 있는데 대왕각 안에 있는 위패는 역사스페셜에서 마의태자와 관련시킨 절대적인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원래의 모습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선 이 대왕각은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고 김부리의 중심지역에 있던 것을 6.25때 불에 타서 그후 다시 지은 것이고, 그후 이것이 다시 퇴락하여 1983년 인제군에서 지원하여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안에는 "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는 위패와 철마(쇠로 만든 말) 2개가 봉안되어 있다. 우선 대왕각의 신위는 마의태자를 조상으로 모시는 김씨대종회에서 1982년에 다시 모신 것이며, 교체하기 전에는 "경순대왕일자지신위(敬順大王一子之神位)"라고 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1982년 이전의 어느 시기까지란 뜻이지 원래부터란 뜻은 아니며, 여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김부리의 대왕각은 이곳과 항병골(=황병골), 상단지골 등 3개가 있었으며, 이곳과 상단지골에는 "경순대왕일자지신위"라고 되어 있었고, 항병골은 창호지를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경순왕을 모신 신당이라면 한지역에 3개씩 있을 필요가 있을까? 원래의 신당 모습은 항병골에 있었던 형태의 것이었으며, 나머지 2개는 나중에 변질된 것이다. 위패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선 "경순대왕"은 대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경순왕의 아들(마의태자)는 대왕이 아니므로 모순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대왕각"은 대왕을 모신 곳이나 그 안에 모신 신위는 대왕이 아닌 "대왕의 아들"인 것이다. 대왕각에서 대왕의 의미는 <삼국유사>에서 영험함으로 인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대왕으로 봉했고, <시용향악보>에서는 대왕에 관한 많은 노래가 있는데 모두 무가(巫歌)라는 점에서 무속신앙과 관계가 깊은 용어이며, 현재도 "大", "王"이란 글자는 서낭당의 위패에 많이 쓰인다.(城隍大神, 聖王大神 등) 또한 1967년에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서도 강원도편에 김부리의 대왕각은 "대왕각"이 아닌 "대왕당"으로 불려졌다는 점도 이 대왕각이 무속신앙과 관계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대왕각이 마의태자의 신당이라면 제일(祭日)이 마의태자의 기일(忌日), 또는 관련이 있는 날이어야 하나 1년에 2번씩 지내는 제일이 민간신앙에서 성황제를 지내는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이라는 점도 이 건물이 민속신앙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지금은 군사훈련장이 되어 주민들이 모두들 떠났지만 당시 이곳의 제사는 마을에서 먼저 산신제를 지내고 내려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민속신앙(부락신앙, 洞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김씨 문중에서는 같은 날 따로 제사를 지냈다) (부연 : 동제란 한 지역에서 생활여건이 같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재앙을 면하게 하고 마을의 화합과 번창을 기원하는 공통의 믿음을 동신신앙(洞神信仰)이라 하고, 그 제의(祭儀)를 동제(洞祭) 또는 부락제(部落祭)라고 한다.) 현재 대왕각의 형태가 주변의 신목(神木)이 둘러싸고 있으며, 건물 내부에 철마가 모셔져 있다는 점도 강원도의 산간지역에 있는 다른 성황당과 다르지 않다. 철마는 강원지역에서 서낭당에 모신 대표적인 신물(神物)로서 특히 산간지역에 집중적으로 있는데 삼척, 정선, 강릉, 평창, 인제지역의 약 30여개소에 대개 1~4개가 봉안되어 있다. 철마의 봉안은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강원지역은 철마가 남아있는 곳들이 지리적으로는 산간지역 내지 전통성이 강한 지역으로 호환(虎患)방지의 측면이 강하고, 이것은 철마의 대부분이 다리가 부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추된다. 따라서 대왕각은 마의태자를 모신 신당이 아니라 민속신당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으며, 이곳의 대왕각은 성황당의 옛이름을 보여주고 지리적인 궁벽함으로 인하여 고식(古式)을 유지하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이지역에 남아있던 3곳의 성황당중 원ㄹ해의 신위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항병골의 성황당이었으며, 나머지 성황당은 "대왕당"이라는 명칭과 주변의 일부 김부대왕(경순왕) 전설이 결합하여 유교식 위패를 모신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신당에 한지를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는 예는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성황당의 예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남아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한지와 함께 "상성황"이란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5. 글을 마치며 아뭏든 마의태자와 관련하여 방영된 역사스페셜의 내용은 일제시대 경에 변질된 마을 이름과 , 5층석탑에 남아있는 명문의 잘못된 해석, 그리고 대왕각에 남아있는 위패(변질된 것)를 모두 엮어서 만든 잘못된 프로그램이다. 이토록 이 프로그램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는 것은 방송의 위력 때문이다. 정확한 검증없이 불특정 다수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왜곡이 되겠는가?. 지금 그러한 현실이 인제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인제지역의 전설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실제로 이 지역에 경순왕의 전설이 약간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의태자의 것은 아니며, 비운의 왕 경순왕에 대한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경순왕에 대한 전설과 성황당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인제의 것은 최근에 변질, 왜곡된 것을 비판없이 받아드린 때문이다. 원래의 전설이 가진 의미를 찾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인제 김부리의 경순왕 전설, 마의태자의 문제점 등을 다룬 자료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이것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주변의 대학박물관 또는 도서관에서 다음자료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1) <정비.보수를 위한 인제 갑둔리일대 석탑조사보고서> (1996년 인제군과 강원대학교박물관 발간)에 실린 <갑둔리 5층석탑 명문과 관련된 역사해석의 문제>라는 논문 2) <고문화 제42.43집> 1993년 12월 한국대학박물관협회에서 발간한 논문집 속의 <강원도 인제군 남면 일대의 석탑>이란 논문 이 논문 속에 해답이 있으며 이것을 반박할 수 있다면 그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다른 역사스페셜은 감명깊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변질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끝으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것을 가설 설정을 통해 검증해 나갈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가설의 설정은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야 합니다.잘못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은 가설 자체를 세울 필요도 없답니다. 가설과 검증은 객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한번 이번의 마의태자편은 향토사 연구에서 범하기 쉬운 문제를 표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프로그램 제작진이 이러한 실수(고의?)를 범하지않기를 빕니다. 제작진의 변명도 듣고 싶습니다. [ 류만수 : mogoriaci@donga.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