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3월 22일 수요일 오전 12시 05분 08초 제 목(Title): 변상섭, 신규탁 '선어록 대담' 변상섭씨가 〈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에서 김용옥씨를 향해 비판한 “화두를 해설해선 안된다”는 지적에 대해, 신규탁교수가 “선어록도 해설돼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본지는 8일 두 사람의 의견을 듣는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편집자주〉 주제 : 선어록, 해설 대상인가 아닌가 대담 : 변상섭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신규탁 (연세대교수) 변상섭씨 “화두 해설은 불교 근본 멸각행위” 큰의심 촉발시키는 것이 바로 화두 선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 해설시도해 신규탁씨 “인간이 쓴 언어·문자는 해석 가능” 선어록 통해 선사들이 가르치는 점은 깨달음에 이르는 ‘자신의 방법’ 찾아가는 것 변상섭 : 선사들의 행장을 기록한 책과 화두는 구분해야 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화두는 결코 해설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처집안의 씨를 말리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옥 선생이 쓴 〈화두, 혜능과 세익스피어〉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딱 한가지입니다. 스스로 수행해서 도(道)나 선(禪)의 세계를 보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낱말풀이나 글 풀이를 통해 그 세계를 파헤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죠. 화두는 결코 해설대상이 아닙니다. 신규탁 : 저는 기본적으로 문헌으로 쓰여있는 것은 모두 해석할 수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구성과 부족 등 현실적인 제약과 조건이 여의치 않아서, 문헌을 해독하기가 어려운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만. 변상섭 : 방금 말씀하셨는데 번역과 해설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번역은 당연히 해야 됩니다. 그 기초적인 용어에 대해 철학적인 개념을 파악해, 현대의 철학용어로 번역해야 된다는 것에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선사들이 화두를 통해 거량해 주신 구절을, 나름의 의미와 정신으로 해설해 버리면 화두를 만들어 놓은 선사들의 근본취지와 목적을 멸각(滅却)시켜 버리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화두를 현대 용어로 번역하는 일을 넘어 해설하는 행위는 불교를 위한 일도, 불교 바르게 알려고 하는 자세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선과 화두의 근본 목적과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에 나온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신규탁 : 선생님은 화두를 ‘번역’할 수는 있지만 ‘해설’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화두 해설과 번역의 차이를 좀 말해 주시죠. 변상섭 : 선생님의 책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 에 나오는, 마조스님이 한 말인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을 줄여본 적이 없다’를 예로 들겠습니다. 이 화두에 대해 “오래 전에 시집간 딸이 사람을 통해, ‘길러 주신 덕분에 밥은 굶지 않고 살아요’라고 친정에 전하는 말이다 … 천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콧날이 시큰해진다”고 해설을 달아놨습니다. 화두를 읽으면서 이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거기에 간절하게 의단을 형성해 번뇌망상을 끊기 위한 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설을 붙여버리면, 이것을 읽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지 않게 되죠. 예를 들어 “부처가 뭐냐”고 물었을 때 선사가 “마른 똥막대기다”고 한 것은 그 화두에 대해 의심을 일으켜서, 번뇌 망상이 끊어진 상태로 끌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똥막대기’에 불교의 진리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도, 똥 눌 때도, 일할 때도 모든 의심이 거기에 모아져, 궁극에 이르면 심행처멸(心行處滅) 언어도단(言語道斷)에 이르게 됩니다. 화두는 이처럼 의심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인데, 해설해버리면 바른 수행자가 나오지 않게 되죠. 선생님도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에서 “나는 돌아가신 은사 스님의 깨달음이나 그 분의 도덕을 귀중하게 여기기보다는, 나에게 이러니저러니 설명해 주시지 않았던 점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동산양개 스님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해설해버리면 이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을, 완전히 쓸모 없는 말장난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규탁 : 선생님은 지금 화두 해설에 대해서 “틀렸다” “맞았다” 라는 인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선생님에게 화두가 해석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선생님도 화두를 해석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때문에 남들도 선생님처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화두 해석이 문제지, 해석하는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화두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화두가 무엇인지를 논의해보죠. 변상섭 : 그 전에 먼저 선은 왜 하는가부터 따져봅시다. 화두는 공부의 경지를 측정하는 수단으로도 쓰입니다. 때문에 선이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먼저 선이 무엇인지, 깨달음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죠. 신규탁 : 불교의 목적은 모두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기성품처럼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주체적인 체험’ 속에서 깨달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선사들은 강조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체험입니다. 그게 선의 본질입니다. 변상섭 : 무엇을 체험한다는 것입니까. 신규탁 : 어떤 대상이 있어서 무엇을 체험한다는 사고가 비불교적입니다. 변상섭 : 그게 바로, 선생님이 불교에 대한 소양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팔만사천대장경이 바로 깨달음에 대한 필요성과 깨달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교학은 깨달음의 내용이고 선은 수행방법론입니다. 선종에서 기치로 내걸고 있는 언어도단 심행처멸이 목표죠. 심행처멸이며 언어도단이 어떤 세계냐, 그게 과연 철학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냐를 알아야 왜 화두를 만들었는지가 나옵니다. 신규탁 : 화두를 드는 행위가 당나라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럼 무엇을 가지고 수행했습니까. 변상섭 : 묵조선입니다. 다른 여러 가지 수행법도 있었죠. 신규탁 : 화두 없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 변상섭 : 그렇습니다. 신규탁 : 그러면 화두의 기능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변상섭 : 〈벽암록〉 서문에 삼교(三敎)노인이 그것을 써놓았습니다. 신규탁 : 화두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한국불교계에 얼마나 깊이 깔려 있는지를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인간이 쓴 언어와 문자는 다른 사람의 언어와 문자로 다시 환원될 수 있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변상섭 : 잘못된 생각입니다. 선의 세계는 불립문자의 세계입니다. 신규탁 : 그러면 불립문자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지. 왜 말은 합니까. 변상섭 : 그 점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불립문자의 세계지만 남에게 이것을 설명하려면, 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만들었습니다. 신규탁 : 그럼 왜 언어를 사용합니까. 변상섭 : 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규탁 : 그렇습니다. 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에 의해 표현됩니다. 때문에 ‘표현된 언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화두는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 변상섭 : 화두를 이해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이것은 해설을 해서는 안되지만, 어쩔 수 없이 한가지를 들어보겠습니다. 남악회양 선사의 다른 제자가 마조스님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묻자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 본 적이 없다”고 마조스님은 답합니다. 수행자는 바로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의심을 일으키죠. “왜 소금과 장은 줄여본 적이 없다고 했을까?”하고 말입니다. 의심이 일어나 의단을 형성, 몸과 의단이 한 덩어리를 이뤄, 마음의 움직임도 없고, 언설마저 끊어져 버리는 그런 경지에 가서야 깨칩니다. 그런데 선생님처럼 “친정이 길러주신 덕분에 잘 살아요”라고 해설 해버리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수행자가 의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는 깨달음의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화두에 대한 해설을 ‘파설’이라고 해 금기시 합니다. 부처될 종자를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격외도리’입니다. 관념·언어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격외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수준에서, 관념과 개념에 사로잡힌 수준에서 해설하려고 한다면, 화두를 설해주신 선사의 의취와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나고 말아요. 화두를 완전히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죠. 화두를 들면서 선을 닦는 것은-우리 의식 속에서 항상 번뇌망상 하는 것을 끊는 것(我空), 그리고 인식주관의 작용성에 의해 인식되는 내용을 법이라 하는데 이를 끊는 것을 법공(法空)이라 한다-아공 법공을 모두 끊고,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입니다. 그런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선입니다. 화두를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가야만 선사들이 일러주신 화두가 바르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고, 화두를 해설해 버리면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깨달음 얻은 부처가 다시 이 땅에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불법을 망치는 것입니다. 신규탁 : 지금 이렇게 화두 해설을 하고 계시잖아요. 변상섭 : 이것은 화두를 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선을 바르게 수행한 것이며 화두라는 것을 만든 목적이 무엇이냐를 설명한 것이지, 화두의 구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신규탁 : 선사들이 ‘불립문자 직지인심’이라고 하는 것은, 말에 휘말리지 말고, 말귀를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을 읽는데 있어서도 그렇고, 남의 체험을 듣는데 있어서도 그렇고, 경전이나 남의 체험에 홀리지 말고, 거기에서 말하려는 말귀를 잘 알아들으라는 표현이 바로 ‘불립문자 직지인심’입니다. 마조스님과 남악스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조스님이 좌선하고 있으니, 남악스님이 마음을 깨달아야지, 앉아있다고 깨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죠. 이 말에 마조스님이 깨달음을 얻고 남악의 법통을 이어, 남쪽으로 가 선법을 널리 폅니다. 남악스님이 사람을 보내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는가”라고 물으니, 마조스님이 “자종호란후 삼십년 불소염장(自從胡亂後 三十年不少鹽醬)”이라고 했죠.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를 잘못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30년은 ‘일생’을, 호란은 ‘허둥버둥거리는 수행’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남악스님의 “마음을 깨달아야지”라는 말에 마조스님은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수행방법에 빠져 호란(허둥버둥)했지만, 스승님 말씀 듣고난 뒤 30년 동안 한번도, 생활의 필수품인 소금과 장물을 줄여보지 않고 넉넉하게 사는 것처럼, 마음 깨쳐 살아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 때 가르쳐 준 은혜가 참 고맙다”며 주고 받은 대화가 화두로 된 것이 바로 위의 것입니다. 이것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려다 보니 당시의 속어 생활어 등이 사용됐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 당시 의미가 퇴색되고, 현재의 우리가 그것을 몰라서, 제대로 해석을 못하는 것이지, 선어록에 적혀있는 대화인데 말이 어찌 이해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깨달음 자체를 해설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깨달음은 당사자가 직접 획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죠. 선어록을 통해서 선사들이 가르쳐 주려는 것은, 깨달음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너의 방법을 찾아라는 것입니다. 변상섭 : 깨달음의 세계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유마경〉에서도 참다운 불이문에 들어가는 법에 대해 유마거사는 묵연무언(默然無言)으로 답하죠. 이를 보고 문수사리보살이 “옳습니다. 진실로 언어와 문자가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고 찬탄합니다. 인간은 항상 언어를 매개로 번뇌망상하지만, 부처님의 세계는 언어도단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화두를 참구합니다. 그 세계는 언어와 문자가 끊어져 버린 불립문자의 세계죠. 화두를 주고받는 말로 이해해 버리면 불립문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니깐, 화두를 해설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깨달음을 해설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깨달음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엄경〉 〈법화경〉 등 의 경전입니다. 정리=趙炳活기자 bhcho@buddhism.or.kr 사진=金亨周기자 cooljoo@buddhism.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