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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3월 22일 수요일 오전 12시 04분 20초
제 목(Title): 신규탁 에 대한 변상섭씨의 반론


대한불교진흥원이 발행하는 격월간 불교종합잡지 〈불교와 문화〉 3·4월호에 실린 
신규탁 교수의 글 ‘김용옥 선생의 선불교 이해는 정확하다’에 대한 반론을 
변상섭씨가 보내왔다. 신규탁 교수의 글은 본지[불교신문] 제1757호에 소개됐었다. 
〈'불교신문' 편집자 주〉


“화두 해설은 부처집안 씨 말리는 행위”
道 소개한 古典서, 도 이외 무엇을 배우라는 건가
변 상 섭


신규탁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그 분 또한 김용옥선생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선(禪)의 세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신교수나 김용옥선생의 공통적인 잘못은 선을 수행해보지 않고서 선을 논의하기 
때문에 선사들이 추구하는 세계가 어떠한 것이며, 선사들이 화두를 제시하는 
목적과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선을 수행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는 마음속에서 언어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사량과 분별을 끊어버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선종에서 표방하고 있는 것이 
심행처멸(心行處滅),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통해 헤아리고 생각하는 사량과 분별이 있다.

이러한 사량과 분별로 인하여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켜 고통을 받으며, 바른 
지혜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부처님께서 이러한 
번뇌와 망상을 끊어버리면 곧 열반을 증득한다고 설하여 주신 것이 불교이다.

따라서 선사들이 화두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도학자로 하여금 그 화두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촉발시켜, 화두에 대한 의심에 사무치게 함으로써 일체의 번뇌와 
망상을 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만약 화두에 대해 바른 의심을 일으켜서 그 의심에 사무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 헤아려 따져보고 있는들, 번뇌와 망상을 더욱 증장시키는 결과밖에 
되지 못한다.

바로 신교수와 김용옥선생이 이렇게 화두를 대하고 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혼자서만 하고, 남들을 망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탓하고 욕하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어줍잖게 공부한 지식을 남들에게 팔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그래서 
화두를 해설하는 책을 팔아먹고 있다. 이 책을 사 본 사람들이 화두를 해설해 놓은 
것을 읽고 “화두의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잘못 이해해 버리고, 다시 이 
화두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 땅에 도인이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될 종자를 송두리째 썩혀 버리는 폭거이고 만행이다. 

화두를 만들어 제시하는 선사들이 결코 화두를 헤아려 알아맞히려 하지 말라고 
간곡히 설명하여 주고 있는데, 기어코 화두를 해설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가? 부처 
집안의 씨를 말리려는 악의에 찬 만행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번역의 문제이다. 이렇듯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경전이나 화두를 번역하면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신교수가 김용옥선생의 번역이 맞다고 주장하는 그 구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有語言 是揀擇 是明白” 여기에서 본인이 가장 문제 삼는 부분은 바로 
“재유어언”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을 김용옥선생이 “인간의 언어가 있다면”하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원오극근 선사는 이 부분을 “옳거나 그르다고 따지자 
마자(有是非)”라고 번역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분별하고 사량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언설한다는 
것은 바로 언어를 통해 분별하고 사량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즉 이 구절은 
“분별하고 사량하여 말하자마자”라는 의미로 번역하여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번역해 보자면 “사량하고 분별하여 말하자마자, 간택이라고 
하는 분별적 경계이거나 명명백백한 절대 경지일 것이다”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불교는 이렇게 이제(二諦)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은 본인의 책 〈김용옥 선생 
그건 아니올시다>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설명하였다.

우리가 생각하고 분별해 보건대, 번뇌 망상하여 취하고 버리는 세속제이거나 
이러한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 버린 깨달음의 경지이거나 이 두 가지밖에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김용옥 선생의 번역을 그대로 읽어보면, “인간의 언어가 있게 되면 곧 
선택적 판단에 떨어지지 않으면, 곧 명명백백한 절대 경지로 가게 되지”라고 
번역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가 있게되면”으로 번역을 하면 명명백백한 절대 
경지도 인간의 언어가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명명백백한 깨달음의 경지는 이미 언어와 문자가 
없는 세계이다.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해서 도달하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이제(二諦)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잘못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김용옥선생이 옳게 번역하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김용옥선생을 두둔하기 위해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학문수준에서는 이러한 번역의 내용이 옳다고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우리말만을 읽고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해야 
바르게 번역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을 읽으면서 꼭 한문의 
원문을 대조해보아야만,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A가 아니면, 곧 B이다”라는 어법 구조는 가정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문장을 가정문이 아니고 대등절로 되어 있다. 즉 “A이거나, B이다”라는 
구절이다. 동격의 대등절을 가정문으로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이 바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가 아닌가?

신교수의 비판을 읽어보면 한결같이 무식한 반론뿐이다. 지면관계로 모두 반박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점을 더 살펴보자. “많은 이들이 ‘불변의 진리’ 내지 
‘도(道)’를 통하기 위해 동양고전을 읽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도(道)를 설명하는 책에서 도를 배우려고 그 책을 읽지, 다른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도(道)의 세계를 인용하여 여타의 다른 학문을 설명하거나, 그 
학문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道)의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것에서 다른 것을 배우려고 
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인가!? www.buddhistnews.net 2000년03월21일(화)제17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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