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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onzert (#$%&~_^\{})
날 짜 (Date): 1999년 11월 23일 화요일 오전 05시 40분 45초
제 목(Title): [펌] "일본에서 배울 문화는 하나도 없다."


한겨레신문       1999년 11월 21일


[일본] 불상 복원 외길 '일본속 이방인'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복잡한 역사만큼이나 기구한 사연들이 숨은 
그림처럼 곳곳에 잠복해 있다. 

고도 교토의 동북쪽에는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호(비파호)가 펼쳐져 
있다.  기차로 한시간 남짓 비와호 왼편 호안을 따라 북상하면 시가현 
오미이마즈라는 소읍에 닿는다.  다카하시 도시오(80) 노인은 그곳 
단독주택에 홀로 살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반도시 
오쓰에 있는 절 온조지의 전통기법교습소 교수다.  전통기법이란 
문화재복원 기능을 말한다.  그는 일본 제1급의 문화재복원 전문가다. 

교습소에는 현재 그로부터 일본 최고의 문화재복원 기능을 전수받으려는 
7명의 젊은이들이 다니고 있다.  모두 무료다.  비용은 모두 절에서 
댄다.  몇몇 대학에서 문화재복원 관련학과를 두고 있긴 하지만 
이론학습이 아니라 이곳처럼 현장에서 실습을 통해 복원기능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는 곳은 일본 전국에서도 드물다. 

96년에 18살에서 25살 사이의 교습생을 모집했을 때 57명이 몰려들었다. 
지금은 7명이 남았다.  “이 분야 전문가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다카하시 교수는 말했다.  “교습소가 키우려 하는 것은 철저한 장인이지 
학자가 아니다.” 

수업은 오전 9시반부터 오후 4시반까지 20여평의 작업장을 중심으로 
계속된다.  지난 3년간 주로 불상을 대상으로 석고데생, 점토로 불상빚기, 
나무로 깎기 등 3단계를 1년씩 철저히 가르쳤다.  데생은 누가 봐도 
석고상을 대상으로 그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질감을 
살려내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현장실습 단계다. 

다카하시 교수는 지난 60년부터 87년까지 27년간 일본의 보물들이 모여 
있는 교토 국립박물관 미술원에서 문화재복원 전문가로 일했다.  74년부터 
13년간은 그곳 국보 수리소의 불교 33간당 1000본 불상 보수담당 계장으로 
있으면서 500본의 수리를 끝냈다.  작업 틈틈히 붓으로 그린 불상 
28부중(수호신) 사생도는 그가 손댄 수많은 일본 국보·중요문화재들 
중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것인데, 나중에 대판 `그림집'으로 출간됐다. 
결국 이 작업을 위해 수리소를 그만두게 되자 미술원 오노데라 히사유키 
원장은 훈장 수여를 상신했다. 

그러나 그는 주기로 확정된 훈장을 받지 않았다.  “말하기 어려운” 
소신을 따로 갖고 있지만 “훈장을 받게 되면 보도기관이 몰려들어 내가 
조선인이라는 게 드러나 여러가지로 어려워지기 때문”이라는 것도 훈장을 
사양한 이유의 하나다.  그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공업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만주에서 봉급자 생활을 하다가 일제가 패망하던 
해에 25살 나이로 일본에 건너갔다.  본명은 고준부다.  일본이름
다카하시 도시오(고교준부·高橋俊夫)는 성과 이름 사이에 교자를 끼워 
만든 것이다.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고, 만주에서 보던 야만스럽고 실망스런 일본이 
아니라 책에서 읽었던 진짜 일본을 보고 싶었다.”  문화학원 미술과를 
졸업하고 도쿄예술대에서 미술해부학을 공부한 뒤 4년간 일본 전국 절을 
떠돌며 불상들을 연구했다.  당시 신분증을 잃어버려 경찰에 불려갔을 때 
도쿄예술대 교수가 “그가 손을 놓으면 다른 기술자들도 쉴 수밖에 없다”며 
석방을 탄원한 편지를 그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는 그때 이미 그
분야의 일인자였다. 

“일본에서 목조불상이 등장하지 않았던 아스카시대 유물인 일본국보 1호 
목조불상은 신라나 백제에서 제작됐다고 본다.”  “교토 치옹잉절에 있는 
국보급 관세음보살 비단그림은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서 가져간 것임을 
확인했다.”  “그 시대 최고기술의 경지”를 보여주는 토함산 석굴암 불상 
보존문의 등으로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해 지금도 한해 한번 이상 한국에 
간다.  “내 분야의 사람들이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 나이에 제대로 
맡을 일도 없어” 영구 귀국은 포기했다. 

그는 70년께 귀화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한 “진짜 일본”은 결국 없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를 보고 이 혼돈스럽고 절망적인 세상에 내 
자손을 남기고 싶지 않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작심”한 25살 때의 생각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배울 문화는 하나도 없다.”  한국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일본 
대중문화는 그에겐 “문화가 아니다.”  “문화재는 한 민족의 지적 수준을 
나타내는 증거물이다.  자긍심을 갖고 보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50여년이나 
맡겼지만 아무것도 해결 못한 정치가들이나 관료에게 더이상 기대하지 말고 
남북한이 민중 차원에서 서로 교류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도쿄/한승동 특파원sdhan@hani.co.kr 






 
Lingua Franca [It. = 'Frankish tongue']: a mixed language or jargon used in 
the Levant, consisting largely of Italian words without their inflexions.  
Also, transf., any mixed jargon used for intercourse between people speaking 
different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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