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9년 10월 28일 목요일 오후 04시 19분 26초 제 목(Title): 일본발전이 토끼와 거북이로 설명될까요? 하이에나 님의 글은 잘 보았는데, 일본과 영국의 공통점을 열거하시면서 그것이 국가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라고 이야기하신 부분에 많은 오류가 있지 않나 합니다. 특히 6번에서 일본이 대규모 유혈혁명없이 민 주주의를 정착시키고 후퇴없는 점진적 발전을 해온게 큰 요인이라고 하 셨는데 역사적으로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장 페리제독의 쿠로후네(黑船)가 내항하면서 시작된 토쿠가와 바쿠후 (德川幕府)말기의 혼란상, 그리고 숨가쁜 암투와 테러, 정변, 전쟁 등을 거치며 대정봉환(大政奉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세이난전쟁 종식을 이뤄내기까지 일본도 엄청난 혼란을 겪었습니다. 대략만 살펴봐도 개항의 소용돌이 속에서 13대 쇼군이던 토쿠가와 이에 사다의 후계 문제로 난키(南紀)파와 히토츠바시(一橋)파로 나뉘어 대립 하던 양상이, 또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좌막(佐幕)파의 충돌로 이어지 면서 양측간의 격심한 테러와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사쿠라다몬가이(櫻 田門外)의 變 이래 쿄토(京都)에서 이어진 조직적인 살해극.....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신센구미(新選組)의 활약 - 대표적인게 이케다야 혈투 - 이 이어졌지요. 거기까지는 그래도 그냥 봐줄만한데, 이후 사쓰마항(薩摩藩)의 시마즈가 무력으로 上洛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이래 찬밥 신 세였던 쵸슈항(長州藩)에 존양파 불만세력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점차 거 의 내전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8.18 정변이 이어지고, 쿄토에선 쵸슈의 군대와 바쿠후의 중앙군이 일대 충돌하며 '禁門의 變'이 나서 많 은 피해가 나기도 합니다. 또한 외부 열강들과의 충돌도 이어져서 사쓰 마와 쵸슈는 각기 사츠에이전쟁, 시모노세키전쟁을 통해 영국, 미국측과 한판 붙으며 오히려 좀더 세련된 반막(反幕)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후 토쿠가와 바쿠후의 제 1 차 쵸슈정벌이 본격적인 무력충돌의 서막 을 열었고, 거기에 대응해 사이가 서로 안좋던 사쓰마항, 쵸슈항이 사카 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의 노력으로 극적인 "薩長同盟"을 이뤄내어 바쿠 후측의 제 2 차 쵸슈정벌을 승리로 이끌면서 사쓰마, 쵸슈, 도사, 히젠 등 세력이 일본사의 주력으로 떠올랐습니다. 결국 이들의 공작으로 孝明 天皇 사후 등극한 明治天皇에게의 대정봉환과 왕정복고 선언들이 이어지 며 토쿠가와 바쿠후는 조직적인 반격을 시도하지만 鳥羽-伏見 싸움 등에 서 패배하면서 연달아 에도(江戶)를 내주고 사실상 붕괴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벌어진 戊辰戰爭(우에노전쟁, 토호쿠전쟁 등 1868~9년 에 벌어진 전쟁을 모두다 포함해서 말합니다)은 숱한 좌막파들을 제거하 며 역사의 뒤안길로 묻어버렸고, 신정부 수립 이후에도 정한론이 촉발시 킨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세이난(西南)전쟁이 구마모토에서 좌절 되기까지 일본은 엄청난 혼돈의 시기를 겪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정치는 그후에도 사실 기형적인 측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암투와 정변, 내전으로 성립된 정부라서 1880년대에 이르면 내각의 대부 분이 사쓰마와 쵸슈 두 항 출신으로 거의 메꿔지게 됩니다. 거기에 육군 인맥은 쵸슈가, 해군인맥은 사쓰마가 가히 독점이라고 할 정도로 장악을 해버리며 이른바 "藩閥"의 전성시대를 누립니다. 우리나라에서 TK 인맥 이 한 30여년간 설치던 것보다 더욱 심한 정도였지요. (다른 지방사람으 로 정권교체?가 되기까지 일본은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또 일본은 세이난전쟁 이후 국내파가 대거 숙청되면서 견외파(遣外派)에 의한 드라이브가 이어지는데, 이때 일본의 모델이 된 것은 독일 제 2 제 국이었습니다. 프로이센 출신 중심으로 빌헬름 1세 하에서 비스마르크에 의한 강력한 산업육성과 국가발전이 이뤄지는데 자극받아서 일본도 이를 답습하게 되었죠. 영국과 일본이 같은 섬나라라지만 일본의 발전을 영국 과 끼워맞추기엔 무리한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오늘날 모습을 지속적인 발전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 또 한 그다지 적절한건 아닙니다. 일본도 전국시대를 거쳐나오며 토쿠가와 바쿠후로 넘어가면서 심한 정체와 혼란, 퇴보가 있었습니다. 전국시대에 일본에는 전세계 총의 80%가 몰려있을 정도로 어찌보면 막강한 군사적인 역량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키가하라 합전 이후 토쿠가와 바쿠후의 폐쇄적인 정책은 쿠로후네의 내항에 극도로 무력한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일본의 발전은 오히려 그것보다는 장기간 계속된 느슨한 봉건 사회의 성 격들쪽에 더 기인한다고 하는 쪽이 많습니다. 유럽이 세계사에서 주력으 로 등장한 것이 여러 중위권 국가들이 아옹다옹 모여서 숱한 상호경쟁을 겪으며 민족국가로 거듭나면서 이뤄낸 것인 것처럼, 토쿠가와 바쿠후 체 제의 폐쇄적이고 느슨한 정치 상황 속에서 여러 항(藩)들이 서로 경쟁체 제를 통해 억압된 불만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게 주요한 요인이란 것입니다. 일본은 '토끼와 거북이' 의 거북이라기 보단 쌈박질하며 큰 토끼였습니다. 한국과 같이 정체된 사회현실에서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자유로운 사상들 이 19세기 말 일본에서는 幕末의 혼란을 타고선 수많은 지사들에 의해서 구현되었고, 그것은 극도의 왜곡된 형태였긴 하지만 일본을 열강의 반열 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역시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 투쟁은 불가피한 존 재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