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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7일 토요일 오전 12시 12분 19초
제 목(Title): 강준만/역사의식의 빈혈과 싸우는 정운현


역사의식의 빈혈과 싸우는  정 운 현

강 준 만

정운현은 그간 친일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뤄왔으나 그 연구의 당연한 귀결로 감히 
웬만한 언론학자들이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언론사학자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정운현이라는 기자가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운현이라는 이름을 알까? 
허명(虛名)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게 꼭 자랑이라고 할 순 
없겠으나, 마땅히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그런 이름도 있는 게 아닐까? 
정운현은 바로 그런 이름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김승수는 정운현이 엮은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학병권유 친일문장선집」이라는 책을 읽고 감탄하여 
정운현이 우리 나라 최초의 전문 대기자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 교수의 말은 
그만큼 우리 언론계에 대기자가 드물다는 걸 말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정운현이 
많은 사람을 감탄시킬 만큼 어렵고 힘든 일에 한 우물을 파온 기자라는 걸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운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올해 나이 41세다.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대구고와 
경북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조사부 기자를 거쳐 
중앙일보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 기자로 일했으며 지난 98년 
대한매일신문으로 옮겨 역사 전문기자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친일문제연구회의 
편집위원으로도 활약해 온 정운현은 그간 친일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뤄왔으나 그 
연구의 당연한 귀결로 감히 웬만한 언론학자들이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언론사학자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간 정운현이 엮거나 지은 책으론 「친일파-그 인간과 논리」(학민사, 1990), 
「친일파 II」(학민사, 1992), 「친일파 III」(학민사, 1993), 「친일파 
죄상기」(학민사, 1993), 「창씨개명」(학민사, 1993), 「중국-대만 친일파 
재판사」(한울, 1995), 「서울시내 일제문화유산답사기」(한울, 1995),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없어지지않는이야기, 1997), 「호외, 백년의 기억들」(삼인, 
1997) 등이 있다.
정운현은 오랫동안 재야 사학자로 활동해 온 현 대한매일 주필 김삼웅의 뒤를 
이어, 이젠 더불어 같이, 학계의 사학자들이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88년경부터 친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제시대 신문을 
뒤적이면서 지금과 같은 연구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김삼웅이나 정운현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런 연구는 정말 외롭고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더욱 그들에게 뜨거운 격려와 박수가 필요하다.

‘언론계의 친일인맥’

정운현이 친일파 III에 쓴 “언론계의 친일인맥”이라는 글은 그간의 친일연구가 
소홀히 해온 분야인지라 더욱 돋보이는 글이다. 이 글에 나와있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친일 행각을 살펴 보도록 하자. 정운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방응모는 조선일보 폐간 전부터 시국강연회 등 각종 친일행사에 참여하더니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조광」을 통해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조광은 창간 5주년 기념호(1940년 11월호) 권두언에서 ‘이 역사적 대변혁기에 
그때 그때 따라 본지에 허여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하여 왔다’고 그동안의 
업적을 자찬하면서 ‘자유주의·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이 국책과 신문화정책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는데 일단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1941년 들어 조광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기념하는 특집물을 
잇달아 게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노선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나섰는데, ‘지나사변 
4주년’(1941. 7월호), ‘만주사변 10주년’(1941. 10월호), ‘대동아전쟁 
1주년’(1942. 12월호) 등에 이어 ‘해군특별지원제도의 광영’(1943. 6월호),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청년의 영예’(1943. 6월호), ‘대동아전쟁의 
성전의식’(1943. 9월호) 등 징병제 찬양 논설을 집중적으로 싣기도 했다. 조광은 
물론 방응모 일 개인의 친일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국어(일본어를 말함) 
보급률이 같은 식민지인 대만에 비해 뒤떨어진다며 전국적으로 일어상용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창했는가 하면, 1943년 11월 14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서 ‘출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이밖에 사재로 
고사포를 구입해 일본군에 기증하기도 하고,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업회사에 
출자하여 중역으로 피선되기도 했다(1943. 9. 8).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매우 어렵다. 한국 
사회의 상층부를 여전히 친일 세력이 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운현이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의 ‘머리말’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런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존 출간된 매일신보 축쇄판은 본문 해독이 곤란하여 원본을 소장한 곳을 찾아 
다니는 것이 가장 큰 번거로움이었다. 더욱이 원본의 상태가 불량한 데다 대부분 
어려운 한자투성이어서 해독과 입력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즐거움도 컸다. 
특히 나 같은 연구자 입장에서 원문을 접한다는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이었는데 이번에 그 기쁨을 만끽했다. 이 자리를 빌어 원본자료를 제공해주신 
개인과 기관에 대해 감사드린다. 그러나 여기서 그 분들의 성함과 기관명을 일일이 
거명치 못함이 아쉽다. 이는 내게 그 같은 자료를 제공해준 이유로 그 분들이 본의 
아니게 불필요한 오해나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한 내 나름의 마음의 배려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음을 종종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정운현은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책으로 또는 신문 칼럼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왜 정운현의 그런 활동이 필요한지 그걸 잘 
말해주는 좋은 사례가 하나 있다. 
지난 94년 6월 22∼23일 일부 신문들은 85살을 일기로 타계한 원로 시인 김용제의 
부음 기사를 실으면서 그가 “도쿄에서 반일 프롤레타리아 시운동으로 3년 동안 
투옥되기도 했으며, 해방 뒤에는 민족시·서정시에 주력했다”고 보도하는 등 그를 
‘항일 시인’ ‘원로 민족시인’ 쯤으로 오해하게끔 만들었다. ‘친일문제 
연구가’로 소개된 정운현은 「한겨레신문」 94년 7월 3일자에 기고한 “언론이 
눈감은 김용제 시인의 친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그가 일제하에서 1급 
친일문인이었음을 지적했다.
정운현의 그 칼럼은 단지 한 원로 시인의 과거를 밝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의식은 물론 감각조차 전혀 없는 우리 사회의 몰역사적인 풍토 자체에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이다. 사회적 공인이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만 지나면 
끝이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그러한 삶이 무난하게 통용된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이며 누가 자신의 지조와 양심을 소중하게 여길 것인가. 
그런 점에서 정운현의 작업은 과거에 관한 것인 동시에 현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호외, 백년의 기억들’

정운현은 친일문제 연구를 위해 일제시대 신문을 파고 들었다. 그래서 정운현은 
한국 언론사(言論史)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언론학계가 직무유기를 범했거나 
비교적 소홀히 해온 분야를 파고 들어 이미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게 바로 신문 호외 연구이다. 그는 지금까지 신문 호외 2,000여 
점을 모았으며, 지난 94년 4월 6일부터 10일까지 한국기자협회와 공동으로 ‘호외 
백년전’을 서울역 문화관 제1 전시실에서 열기도 했다. 정운현의 연구 성과는 
지난 97년 8월 호외, 백년의 기억들이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아주 유익하고도 
재미있는 책이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을 소개하겠다.
호외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국내 최초의 호외는 일본계 신문인 인천의 
「조선신보」가 1894년 7월 23일 ‘경성비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의 경복궁 
급습사건을 다룬 것이었다. 한국인이 발행한 신문의 최초 호외는 「독립신문」의 
호외로서, 이는 1898년 2월 19일에 미국 군함 메인호가 쿠바 아바나항에서 침몰한 
사실을 보도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호외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언론사에 있어서 호외 전성기는 1930년대 중반이었다. 중·일전쟁 시기인 
1937년 7월 7일부터 8월 7일까지 1개월 동안 「조선일보」는 50여 회의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호외 전성기는 1960년대 였다. 일부 신문들은 거의 
하루 걸러 호외를 남발했는데, 자사 사업 홍보나 학생층을 대상으로 한 학습 
문제지와 합격자 명단까지도 호외로 발행했다. 
65년 4월 한달 동안 「중앙일보」는 25번이나 호외를 발행했다. 이 신문이 발행한 
호외의 순수 뉴스 부분은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쿠데타 사건 등 7가지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전국체전 화보와 시험 예상 문제지였다. 선거철에는 거의 
하루에 한번꼴로 호외가 나왔다. 호외 경쟁이 지나쳐 신문업계에서 스스로 자정 
결의를 하기까지 했다. 65년 6월 23일 호외의 판형을 타블로이드판으로 한정시킨 
것도 그런 결의의 일환이었다. ‘올림픽 호외’가 대량 남발된 것도 빼놓을 순 
없겠다. 84년 LA 올림픽 때에는 조선일보는 호외를 12회나 발행하기도 했다.
호외, 백년의 기억들이라는 책은 일반 역사서에선 맛볼 수 없는 ‘실감나는 역사 
지식’을 제공해준다. 정운현의 말마따나, 이 책은 ‘언론사’인 동시에 
‘사회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록과 보관에 인색한 
국민이다. 그러니 역사 의식이 있을 리 없고 과거에 대한 책임 의식이 있을 리 
없다. 정운현이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그런 이상한 풍토에 대한 꾸짖음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호외 발행은 대사건의 색인 작업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호외는 단순히 ‘언론사(史)’로서의 의미를 넘어 ‘사회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외 발행의 주체인 신문사에서조차 호외 발행 
일지같은 기본적인 관련 기록을 전혀 남겨 놓지 않은 것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신문사의 역사가 길고 짧은 것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그런 실정이다. 자사가 발행한 
호외를 제대로 보관하고 있는 국내 신문사는 한 군데도 없다. 이 점은 언론학계도 
마찬가지다. 논문도 없고 수집가도 없다. 이렇게 학계에서조차 방치된 것이 바로 
호외이다.

신문박물관을 세우자

어찌 호외 뿐이랴. 모든 게 다 그 모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무지 
‘기록과 평가’가 없다. 그래서 마음 놓고 못된 짓 하는 사람과 집단들이 너무 
많다. ‘오늘만 지나면 끝’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언론사 연구는 현재를 중심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 나는 정운현의 
작업이 그 점을 간접적으로 웅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운현은 기자협회보 95년 9월 23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신문박물관’의 건립을 
주장한 바 있다. 정운현은 그 칼럼에서 이미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6개 관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우선 「한성순보」 이후로 국내에서 발행된 모든 
신문의 창간호, 복·폐간호를 모은 ‘고(古) 신문관’, 구한말 언론인부터 현재 
활동중인 언론인들까지를 대상으로 그들의 사진 저작물 신변 자료를 모은 
‘언론인관’, 역대 신문과 관련한 저작물 인쇄시설 등을 전시한 ‘신문자료관’, 
세계 각국의 유수한 신문들의 실물을 전시한 ‘해외신문관’ 그리고 대사건이 
터졌을 때 속보용으로 발행한 호외를 모은 ‘호외관’, 첨단 신문의 형태인 
‘전자신문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정운현의 제안에 100% 찬성한다. 사실 IMF 사태 직전까지의 ‘거품 시대’에 
언론계에 돌아다녔던 ‘눈먼 돈’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돈 
가운데 조금만 떼내어 썼더라도 신문박물관은 진작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힘 있는 개인과 집단이 너무도 구린 과거와 현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에 대해선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걸까? 그래서 
신문박물관의 건립이 어려운 걸까?
우리 모두 인정하자. 우리는 ‘역사 의식의 빈혈’ 증세를 심각하게 앓고 있다. 
정운현은 그런 사회적 빈혈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외롭고 힘든 작업을 하고 있다. 
마음으로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그가 낸 책을 부지런히 사서 읽는 
것도 아주 좋은 격려와 지지의 방법일 것이다. 정운현과 함께 역사 의식의 빈혈 
증세를 치료하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불투명한 현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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