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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6일 금요일 오후 11시 59분 37초
제 목(Title): 강준만/리영희의 뒤를 잇는 김민웅 


리영희의 뒤를 잇는  김 민 웅

강 준 만

김민웅의 칼럼을 좋아하는 독자는 많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런 독자 중 한 
명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탁월한 능력, 그리고 그의 시각을 좋아한다.

‘프리랜서 언론인’ 김민웅

우리 사회가 자랑할 수 있는 리영희라고 하는 한 뛰어난 논객은 우리 나이로 올해 
71세이며 글을 매우 아껴 쓰고 있다.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 자신의 말을 빌면 “나의 시대는 끝난 것 같은, 나의 지적인 활동의 전성기는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더 큰 이유가 아닌가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후학들이 있기에 
리영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의 후계자를 따진다는 것이 다소 
우스꽝스러운 발상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상의 지향점과 내용에 있어선 리영희를 
빼다박은 듯한 느낌을 주는 지식인이 있어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김민웅이다.
김민웅은 195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귀국하여 경복고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델라웨어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정치 철학)을 수료한 뒤 뜻한 바 있어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다시 신학을 
공부했다. 아마 지금쯤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 기독교 윤리학 박사과정을 마쳤을 
것이다. 그는 현재 미국 뉴저지 소재 길벗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과거 전공을 포기하지 않은 채 국내 매체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
김민웅은 고등학교 시절 학교 신문과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한 바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코리아 타임스」 기자로 일했으며 미국 유학을 가서도 
「미주동아」 기자로 활동하는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철저한 언론인으로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말」, 「시사저널」, 「한겨레 21」, 
「내일신문」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프리랜서 언론인’으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김민웅의 칼럼을 좋아하는 독자는 많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런 독자 중 한 
명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탁월한 능력, 그리고 그의 시각을 좋아한다. 나는 언젠가 우연히 대학 후배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그가 김민웅과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김민웅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쪽바리’로 놀림받은 고교 시절

김민웅은 외로운 학생이었다. 그 외로움은 ‘천재의 외로움’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워낙 책을 많이 읽은 탓에 동년배 학우들과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그런 지적 수준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김민웅은 단지 지식만 많이 
쌓은 그런 학생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된 그런 
‘문제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는 자신이 그런 독특한 길을 가게 된 
배경에 대해 그의 저서 「패권시대의 논리」(한겨레신문사, 199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 급우들에게 툭하면 ‘쪽바리’라고 놀림 받으면서 
‘민족’의 문제는 내 마음 속에 아주 일찍이 파고들어 왔다. 민족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어린 가슴에 상처를 주고 고달프게 만드는가? 일본에서 
컸더라면 ‘조센징’ 소리를 듣고 울분에 찼을 내가, 돌아온 고국에서는 쪽바리가 
되어 기를 펴기 어려웠다. 그러면서 소년 시절의 내 정신은 ‘집단의 문제’를 
파고드는 습관이 형성되었다. 개인은 집단의 의식, 무의식과 긴장관계를 갖거나 
아니면 흡수되는 두 가지 길에서 스스로를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긴장 쪽에 나를 걸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유를 느꼈다. 폭력이 
교육수단의 하나였고 한 개의 정답만 강요하며 정해진 것 이외의 다른 접근은 
허용하지 않고 창조적인 의견을 묵살해 버리는 교육에 나름대로 저항했다. 교사 
편에서 보면 질문이 많은 골치 아픈 학생인 셈이었다.

당시 세칭 일류 고등학교엔 공부만 잘 하는 바보들이 득실거렸을 게 틀림없다. 그 
공부라는 게 그야말로 ‘폭력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닌가. 순전히 1류 대학에 
가기 위한 그런 공부말이다. 김민웅은 그런 공부를 거부하고 이미 그 나이때부터 
독자적인 사상을 키우고 다듬는 공부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매우 참신하고 정의로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패권시대의 논리’

긴말해 무엇하겠는가. 독자들께선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김민웅의 글을 접한 바 
있겠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책을 일독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최근에 낸 책들로 
패권시대의 논리와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당대, 1996)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패권시대의 논리는 한반도의 선택, 클린턴 정부의 정치와 외교, 미국의 세계 전략, 
전쟁과 군수산업, 미국 사회의 이해 등 5개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 리영희가 파고 들었던 주제들이다. 패권시대의 논리 ‘발문’에서 
리영희는 김민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김민웅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면서 자기는 ‘전환시대의 
논리 제1세대’라고 말한다. 이십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 내가 사십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냈던 책을 읽은 한 청년이 어느덧 그때 나와 비슷한 마흔의 
중년이 되어 오늘의 조국과 세계를 치열하게 사색하면서 써 나간 글들을 보면서, 
그동안의 세월에 진 빚을 어느 정도는 꽤 갚는 느낌을 갖는다.

사실 그 정도면 말을 매우 아껴서 하는 리영희로선 극찬이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 진보적 지식인들은 많이 있지만 리영희가 했던 독특한 
작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그런 지식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김민웅의 글은 글의 주제와 글쓰기 방식에 있어서 리영희와 비슷하다. 리영희의 
말을 더 들어보자.

냉전 이후의 급격한 상황 변화에 대한 지적 대비가 없는 것은 결국 조국의 내일을 
절뚝거리게 할 것이다. 김민웅의 글은 그런 염려를 더는 일에 일조할 것을 예감케 
한다. 나는 내가 쓰지 못한 시대 분석과 내일의 전망 제시를 그의 글 속에서 
읽는다.…… 우선 나는 그의 글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의 광범위함과 그 깊이 
있는 천착이 놀라웠다. 국제 정세에 대한 정교한 이해와 그것을 역사의 총체적 
관점에서 파악해 들어가는 그의 지적 자세는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모범적 소양이다. 그는 몇 안되는 빈곤한 자료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강변하려는 그런 유형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공을 들인 자료 
조사와 치밀한 판독의 과정이 축적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글 한편 한편에서 
금세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는 글을 간단하게 쓰지 않는다. 글 하나 하나에서 
이유와 근거가 분명하고 이론적 틀이 단단하다. 나 자신이 자료에 대한 엄격한 
판독과 그런 글쓰기 원칙 및 방법론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입장에서, 김민웅의 글은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난해하게 꼬아트는 문화주의적 세련’이 담고 있는 
허영스러운 논리들과 날카롭게 대조될 것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

패권시대의 논리가 전환시대의 논리와 비슷하게 좀 딱딱한 책이라면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와 비슷하게 
비교적 좀 부드럽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역사 논쟁의 
핵심,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 역사의 진로 방해자들, 
미디어시대의 ‘말’의 ‘눈’, 파시즘적 야만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침묵, 욕망의 
땅을 향한 눈먼 질주, 통일은 재앙이다, 20세기를 정리하며 등 8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의 제목이자 기본 테마라 할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 달걀은 둥지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어미새가 품기 좋게 
하기 위해 타원형으로 돼 있다. 그건 생명을 지키는 원초적 방어선으로서 생명의 
섭리인 것이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그걸 어떻게 했던가? 그걸 세우려고 했다. 아니 
세웠다.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 김민웅의 말을 들어보자.

따라서 이것을 세워보겠다는 것은 그런 생명의 원칙과 맞서는 길밖에 없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진 생명체를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고정시켜 장악해야겠다는 생각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가능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식을 깬 발상 전환의 모델이라기보다 생명을 깨서라도 
자신의 구상을 달성하겠다는 탐욕적, 반생명적 발상으로 확대된다.

콜럼버스는 서구 세계를 상징한다. 아니 이건 상징인 동시에 상징을 넘어서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김민웅의 말을 더 들어보자.

콜럼버스의 달걀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고의 원형이 
된다.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달걀 세우기’를 당했는지 모른다. 우리도 
그 중 하나이다. 콜럼버스의 손에서 달걀이 지표면에 내려치기까지의 거리는 짧고, 
그 힘은 그 개인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그 거리와 힘 속에는 제국주의라는 문명사적 
탐욕이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달걀세우기’는 콜럼버스 시대 이후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구의 생명이 파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지식 수준만 높이면 
된다는 교육관은 아이들의 정신 생명을 시들게 해도 무감각하고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생각은 국민들의 정치 생명을 상처내는 현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팔아먹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들은 음란물들을 양산하여 인류의 
문화생명, 그 밑둥을 으스러뜨려놓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김민웅의 모든 글은 그렇게 ‘콜럼버스의 달걀’을 보는 시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해방 50돌’을 보는 그의 시각도 그러하다.

항일투쟁의 내용을 민족과 민족간의 싸움이라는 일차원적 수준에서만 이해하려 
들면 한·일관계의 과거와 미래만이 아니라 향후 동북아시아 질서의 재편 방향에 
대한 우리 나름의 분명한 평가와 방향 설정을 할 수 없게 된다.…… 과거의 
‘반일’ 또는 ‘반미’는 그 민족주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민족간의 갈등 
차원을 넘어서서 그 ‘갈등의 기본 성격’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있는 운동 개념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중심에 놓고 보아야 할 
문제가 미국인, 일본인과의 ‘종족싸움’이라는 차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우리와 이들이 혈연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발생하는 인류학적 
투쟁이 아니라, 이들의 역사적 행태 속에 존재하는 제국주의적 야만이다. 항일에 
반제투쟁의 개념이 결합되지 못한 경우가 바로 이승만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민웅의 ‘바른 이름 붙이기’

김민웅의 글이 깊은 사색만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아니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들면서도 읽는 재미도 아주 뛰어나다. 이 책엔 그런 재미가 담긴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예컨대, “법의 정신”이라는 글을 보자. 1960년대 한창 학생운동이 
미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을 때 하버드 법대의 한 학생이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 나라 전국의 거리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다. 대학가는 반란과 
난동을 부리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파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법과 질서가 필요하다! 법과 질서가 
없다면 이 나라는 생존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참 동안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시국이 어수선한 중에도 하버드 법대 졸업생의 소신에 찬 졸업사라는 뜨거운 
반응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박수 소리가 가라 앉을 무렵, 이 학생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방금 한 말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내용이었다.”
김민웅은 그런 ‘반전의 묘미’를 우리 현실과 연결시켜 자신의 논지를 기가 
막히게 드러내고 부각시킨다. 독자들께서는 그 책을 직접 읽으면서 그런 재미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언론인 김중배의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한마디로 그의 글은 뜨겁다. 그를 만나본 적은 없으나, 그의 ‘정신적 체온’은 
그와 마주친 듯 실감된다. 아무래도 그 뜨거움의 뼈대는, 외로움의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전향의 거부인 것으로 보인다. 타고난 감성과 지성이 화음으로 
어우러지는 그의 글쓰기는 ‘이름붙이기’가 아닌가 싶다. 그의 말대로 거꾸로 
붙여진 이름, 잘못 붙여진 이름, 잊혀진 이름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이름들을 
새롭게 붙여나가는 아픔과 기쁨이 바로 그의 작업인 것으로 읽혀진다. 이를테면 
‘콜럼버스의 달걀’을 다시 한번 깨뜨려 새 이름을 붙이고, 문명사의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의 새 이름을 찾는 작업도 그 일단이다. 새로운 이름, 바꾸어 
말해서 바른 이름 붙이기야말로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정신의 반석일 터이다. 
그러나 변혁의 새로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열어가야 하는가. 그는 
‘출로’라고 말하고, 나는 ‘출구’라고 말해온 그 ‘길 찾기’는 여전히 
고뇌로부터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그의 
글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막힌 가슴을 뚫어줄 그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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