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5년07월26일(수) 19시45분56초 KDT 제 목(Title): 스탈린그라드와 독일의 운명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의 운명이 결단났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전후 서방측의 시각에서는 물론 이 `스탈린그라드의 전투'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고 이쪽 방면을 별로 가르치치도 않는 우리나라 교과서들에도 이 전투만은 꼬박꼬박 나오건만 사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죠. 물론 스탈린그라드의 전투가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더욱 높히 평가되어야 할 전투는 1943년 7월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였습니다. 독일 제 6 군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어 전멸되었지만 독일의 전력은 대단히 끈질긴 면이 있었지요. 1942년 11월에 난데없이 스탈린그라드 측면에서 소련군 110개 사단이 대반격에 나서서 제 6 군이 포위되자 즉시 11군 사령관이던 만슈타인 원수를 사령관으로 새로운 돈 집단군을 편성해서 스탈린그라드 구출작전 및 코카서스 방향으로 진격했던 클라이스트의 제 1 기갑군을 무사히 퇴각시키게 하지요. 결국 돈 집단군 소속 제 6 기갑사단의 최선도 부대가 스탈린그라드 전방 27km 지점에까지 도달하지만, 거기서 측면에 새로이 전개된 소련군의 반공 때문에 결국 퇴각하여 스탈린그라드 구출작전은 무산되고 만슈타인은 제 1 기갑군의 무사퇴각을 위해 돈 강 하구의 유일한 관문, 로스토프 사수에 전력합니다. 결국 제 1 기갑군 병력은 전원 완전장비 퇴각이라는 실로 대단한 업적을 일궈내고 무사히 돈강 서안으로 전원 철군합니다. 만슈타인은 이때 도착한 SS 기갑군단 및 GD(그로스 도이칠란트) 기갑사단 등의 전력을 조금씩 후퇴시키며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 6군이 최후의 임무를 다하며 상당수 적을 스탈린그라드에 묶어 두는 동안 전선을 안정시키지요. 그러나 여기서 전쟁의 주도권이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43년 1월 31일에 파울루스 원수가 항복하고, 동년 2월 2일에 나머지 6군 잔여병력이 모두 항복하였지만 만슈타인은 이때 동부전선에서 세계 전사상 실로 믿기지 않는 빛나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드네프르강 라인까지 크게 퇴각한 독일군의 전선에 소련군 부대들은 큰 구멍을 뚫고 만슈타인의 사령부가 있던 자포로제 방면으로 맹진격하지요. 히틀러는 이때도 계속 만슈타인에게 현 진지 사수령을 내리지만 만슈타인은 이를 거부하고 독일군 남부전선의 중앙부를 아예 텅 비워놓으며 계속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SS 기갑군단이 버티고 있던 하르코프에서도 2월 15일 포위직전에 전 군단을 시 외곽으로 퇴각시킵니다. 그런데 2월 18일, 스탈리노 방면 자포로제 직전방에서 소련군은 일제히 정지하죠. 소련군은 지나친 맹진격으로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져 보급품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이를 기해 즉시 만슈타인은 대반격 명령을 내려서 드네프르강 라인을 따라 서북방과 남동방향에서 일제 압축공격을 개시해 퇴로를 차단하고 이 일대에서 소련군 3개군 이상을 격파합니다. 이때 독일군 : 소련군의 비는 무려 1:8에 이르렀건만 만슈타인의 사상 최고의 기동방어 전략에 의해 세계전사상 최악의 열세를 딛고 대승을 이룹니다. 즉시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은 북상하여 3월 초에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벌여 2월 15일 퇴각했던 하르코프에서 SS 기갑군단 소속 LAH, Das Reich, Totenkopf 기갑 사단 및 국방군 최정예 GD 기갑사단 등을 총투입, 우회기동으로 하르코프를 재탈환 하고 재차 북방기동, 비엘고로트까지 점령합니다. 스탈린그라드로 전면붕괴의 위기까지 몰렸던 독일군은 1943년 2~3월의 실로 놀라운 역공으로 순식간에 다시 전선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소련군 중부전선은 이 역공에 의해 전 예비대가 소진됨으로서 소련군 중부전선 최악의 위기에 몰리게되죠. 이러한 대반전의 무드가 완전히 꺾인 것이...... 바로 1943년 7월 5일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였고, 이 전투 이후 독일 기갑부대는 다시 전선의 주도권을 잡지못하고 패전의 그날까지 계속 밀리기만 했죠. 실제로 룬트슈테트 원수 등을 비롯한 많은 독일 장군들의 견해를 봐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는 줬어도 결정적이라고 까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