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5년07월26일(수) 16시24분01초 KDT 제 목(Title): [이견] 1941년 겨울 동부전선 전황 음... 하얀까마귀님이 말씀하시길 1941년 겨울에 히틀러가 무리하게 동계전역의 퇴각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상당히 있습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최고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 등이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 장군 들과 전후에 수많은 대화를 하며 분석한 글을 읽어보면, 히틀러의 판단이 꼭 모두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독일군 제 2 기갑군, 제 3 기갑군이 주축이 된 중부집단군은 이미 7월에 스몰렌스크 를 유린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을 활짝 열어놓지요. 이때 북부집단군도 순조롭게 진격하여 북부집단군 휘하 제 4 기갑군은 발트 3국을 유린하고 레닌그라드 초입에 도달하지요. 그런데 남부집단군 전역에서 진격이 지지부진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중부집단군이 스몰렌스크를 통해 모스크바로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놨을때 남부도 키에프를 점령하고 드네프르강을 넘어 하르코프, 로스토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되었는데 키에프 전면에 출현한 티모센코의 강력한 소련군에 의해 진격이 막혔죠. 그래서 결국 모스크바로 직행하기로 되어있던 구데리안 상급대장 휘하의 제 2기갑군 을 90도 방향전환하고 역시 키에프 남방에 깊숙히 파고들었던 클라이스트 상급대장 휘하의 제 1 기갑군을 정북진시켜 결국 키에프 주위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 소련군 5개 군을 전멸시키는 개가를 올리며 무려 70만명의 포로를 얻는 실로 사상최대의 `전술적 승리'를 엮어내지요. 사실 이것이 히틀러의 중대한 실책이었다는 것은 맞습니다. 중부집단군의 모든 장군들은 제 2 기갑군을 남으로 돌려 중부집단군의 전력을 극히 약화시키는 일에 크게 반대했지만, 장군들은 히틀러의 묘한 카리스마에 눌려 결국 명령을 복종합니다. (히틀러는 육군과 계속 반목했지만 교묘히 자기 뜻대로 해나가는데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8월말에 이르러서야 중부집단군의 동진이 가능해지지요. 앞서 말했듯 제 2 기갑군이 스몰렌스크 훨씬 남방에 위치하게 되어 중부집단군의 집중력은 극히 약화됩니다. 원래 제 2 및 3 기갑군 모두 스몰렌스크-모스크바축으로 쐐기를 박고 그 뒤를 제 2 군이 따르기로 되어있었으나 난데없이 부대는 대단히 넓게 전개되어 버리지요. 결국 제 3 기갑군이 스몰렌스크-모스크바축을 담당하고, 제 2 기갑군이 오렐-툴라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는 진격로를 잡고, 제 2군이 그 사이를 책임지게 되자 심대한 전력부족을 메꾸기 위해 북부집단군 휘하의 제 4 기갑군, 제 9군까지 모스크바를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또 결국 레닌그라드 점령에 필요한 전력은 부족해지지요.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프 원수는 이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지요) 10월이 되면서부터 OKH 참모총장 할더 등을 비롯한 장군들은 이미 모스크바 공격의 기회는 놓쳤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가장 이때 독일장군들을 소극적으로 만든 것은 역시 나폴레옹의 전례였지요. 모든 장군들은 나폴레옹의 전례를 따르지 않기 위해선 이제까지 전진한 선에서 정지하여 월동준비를 모두 갖춘 후에 내년 봄에 재공세를 개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진언했습니다. 그러나 10월까지만 해도 독일군의 전진속도는 좀체로 지도상으로는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가 이때 중대 오판을 한 것은 지도상으로는 독일군이 꾸준히 진격하고 있었고 이 속도라면 무난히 모스크바에 돌입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전방에서는 진창 때문에 보급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던거죠. 이때 각 사단들의 최선도 부대들과 최후미 부대의 간격은 무려 100km에 이르기도 했죠. 여기까지는 히틀러의 잘못이었습니다. 결국 12월 5일, 독일 제 4군의 최선도부대가 모스크바 시 외곽에 진출했지만 그날 밤에 소련군 전차부대와 격심한 교전을 벌인 후에 다시 밀려나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전방의 독일군 장군들은 히틀러의 명령없이 임의로 부대들을 후퇴시키기 시작합니다. 히틀러는 펄펄 뛰고 각 부대들에게 현재 위치를 고수할것을 명령하지요. 혹자는 이 진지고수의 명령이 독일군의 참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43년 무렵에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사정이 약간 다른 것이 전방의 부대들은 이미 나폴레옹의 망령에 휩싸여 자칫하면 전선의 전면붕괴가 일어날 수 있던 상황 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많은 일선장교들이 전후에 지적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후퇴가 대대적으로 개시되면 정말 나폴레옹의 망령대로 한꺼번에 모든 것이 몰락할 수 있었지요. 히틀러의 추상같은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각 부대들은 약간 후퇴한 지점에서 일제히 화점을 구축합니다. 점령한 마을들을 요새화시키고 필사의 사수를 다지지요. 결국 이 겨울에 실로 독일군이 일궈낸 전설이 많이 생겨납니다. 홀름과 데미얀스크에서요. 홀름과 데미얀스크에서 퇴로마저 차단되었던 독일군 부대들은 강력한 화점을 구축, 진지를 사수하여 결국 그 겨울 내내 소련군을 막아내고 다음해 초겨울 공세에서 대 반전을 일궈내지요. 히틀러가 무리하게 모스크바 전면으로 많은 부대를 너무 깊숙히 돌입시켜 상당한 피해를 유발시킨 것도 사실이었으나, 히틀러가 그토록 강력히 진지 사수를 닥달하지 않았던들 그해 동계전역이 결국 그 이상의 참패를 가져왔을 것이란 점도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이건 독일 장군들의 의견이었습니다.) 단지 비극은 이때 진지사수의 긍정적인 면에 히틀러가 너무 맛을 들여 이후 모든 전선에서 수많은 참극을 빚어냈다는 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