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9일 목요일 오전 09시 01분 10초 제 목(Title): 역사적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동학농민전� [Image] 교수글(논문/기고) 역사적 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 : 동학농민전쟁의 기념물 박 명 규 (서울대 교수, 사회학) 1. 머리말 역사는 두 가지의 시간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건이나 행위가 일어난 시점과 그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는 시점이 그것이다. 전자를 사실로서의 역사라고 한다면 후자는 해석으로서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카가 잘 언급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과거에 대한 현재적인 재해석은 지식인의 지적 행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사회구성원들의 집합적인 기억과 경험 속에서도 그러한 대화는 있게 마련이다. 이 경우는 정치한 지식의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집합적인 문화양식의 형태로, 또 당연시되는 상식의 모습으로 작용한다.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사회적으로 기념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사회적 기념행위는 지식의 형태로 쓰여지지는 않지만 집합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현재 속에서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인 것이다.(Schwartz 1982:374) 사회적인 기념행위 가운데서도 기념물을 건립하는 것은 가장 전형적인 방식에 속한다. 기념물은 과거의 사건이나 그에 부수되는 의미체계가 가시적인 물체로 형상화한 것으로 그 속에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집합적인 해석이 담겨있게 된다.(Lerner 1994:178) 기념물은 구체적인 가시성을 통해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한 과거사를 현재 속에 재현해 주고 지식인의 해석체계를 대중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기억 속에 접목시켜주는 문화적인 매개물인 셈이다.(Gillis 1994:6) 따라서 기념물은 과거사에 대한 집합적 해석이 형상화된 문화적인 상징물로서 특수한 시공간 내에서의 역사인식을 반영한다. 기록된 문서자료를 통해 확인하기 어려운 집합적 정서나 인식의 틀 등을 확인하는 자료로서 기념물이 선택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Schwartz 1996) 이 연구는 한국 근대의 문화적 변화상을 해석하는 방법의 하나로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한 기념물의 사회사를 분석해 보려는 것이다. 문화의 역사, 집합적 의식의 흐름을 밝히려는 사회사의 한 영역으로서 '망탈리테사'와(김영범 1991), '기억으로부터 역사'로 연결되는 심층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구술사(윤택림 1993)가 소개되었고 또 최근 이러한 관심 하에 쓰여진 서구의 저작들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시각을 한국사회에 적용하여 얻어낸 연구결과는 많지 않다. 정근식(1996)은 소안도 항일기념탑 건립의 과정을 분석하여 그 과정에 나타나는 의미와 드러내지 못한 세계를 밝히려 하였는데 그의 연구는 기념탑의 분석이 집합적인 기억과 역사적 경험을 드러내는 유효한 지표일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분석대상이 비교적 좁은 지역사회에 한정되어 있어서 전체사회 수준에서 논의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이 연구는 좁은 지역에 국한하여 보는 인류학적인 방법보다는 같은 사건에 대한 기념물의 전국적 분포를 시대적으로 정리하고 그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사회 전체 수준에서의 집합적 역사인식의 변화상을 확인해 보려 한다. 동학농민전쟁은 사건 직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각종 기념물들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어온 흔치 않은 사례이다. 이 기념물의 사회사에 대한 분석은 좁게는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집합적인 해석의 변모를, 넓게는 한국사회의 집합적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기념물의 상징성과 집합적 정체성 기념물은 사라진 기억들을 가시적인 형태로 정형화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재현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기념물은 기념하는 대상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승전기념비는 국가를 위한 전쟁의 소중함, 전쟁에서의 승리 자체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국가 자체를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민족적 영웅의 동상은 민족의 영구한 힘과 자부심을 신비로운 형태로 부각시킨다.(Lerner) 따라서 기념물의 상징성은 곧 집합적 정체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위를 추앙함으로써 그들과 자신이 하나의 민족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러한 헌신성을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혁명기념물은 혁명의 의의와 그 혁명을 주도한 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고 독립을 기념하는 탑은 독립된 민족단위 자결권에 대한 자부심의 표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기념물의 조성은 집합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특히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기념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앤더슨은 근대 민족주의 문화의 상징으로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무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고 말하였다.(Anderson 1991:25-28) 즉 실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영국을 위해 또는 프랑스를 위해 죽은 용사들을 기념하는 기념비 자체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념비는 개인적 사건을 집단적인 것, 필연적이고 의미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은 힘을 발휘하는데 특정한 영웅이나 지배신분이 아닌, 평범한 사회구성원들을 하나의 성스러운 범주로 통합시키는 문화적인 힘이야말로 근대 민족의 본질이며 그러한 민족적 정체성이 무명용사의 기념비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전체 차원에서 대규모 기념물이 조성되고 과거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기념행위들이 제도화된 것은 모두 근대 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진전되던 곳에서였다. 유럽에서는 18세기 이래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상징물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을 표상하는 여러 형태의 기념물들이 만들어지고 세워졌다. 홉스봄이 '전통의 발명'이라고 부른 내용의 하나인 이것은 민족을 상징하고 민족을 위하여 희생을 바친 행위를 성스럽게 만드는 각종 깃발, 음악, 의식, 상징 등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Hobsbawm) 특히 이들 가운데서도 기념물은 그것이 영구적이고 가시적이며 큰 규모라는 점에서 매우 강렬한 힘을 가진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모습, 프랑스 군인의 용맹스런 상, 민중의 혁명적 봉기를 나타내는 동상을 곳곳에 세웠는데 이것들은 프랑스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Lerner:181-91) 이 기념물들은 개인들의 삶과 죽음을 넘어서 영속하는 집단의 가치와 중요성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뒤르껨은 자유,평등,박애 등의 이념을 성스러운 상징으로 파악하였고 이를 다시 종교의 본질과 결부시켜 이해하였다. (Durkheim:306) 미국도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전후로 많은 기념물들이 조성되었다. 특히 링컨의 상징화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문화현상이었다.(Schwartz 1996) 메이지 일본의 경우 천황에 대한 상징화를 비롯한 과거 전통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행위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S.Tanaka) 2차 대전 이후 독일은 여러 기념물의 조성을 통해 나찌 체제와의 역사적 단절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였다.(Koshar) 전세계가 이념적인 대립으로 냉전의 긴장이 심화되었을 때 기념물은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상징물로 적극 활용되었다. 특히 사회주의권은 각종 영웅, 전쟁, 혁명 등과 관련한 기념물의 정치적 효과를 철저하게 활용하였다.(Gillis:12-13) 국가를 단위로 한 민족정체성이 강조된 기념물은 전체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지식인,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반영한다. 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보다는 대외적인 저항과 승리의 역사가 부각된다. 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기념의 대상으로 되는 까닭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계급간 갈등이나 지역적 분리주의 운동과 같이 민족적 통합에 부정적인 효과가 있는 상징은 가급적 억압된다. 기념물의 대상으로 어떤 사건과 인물이 왜, 어떤 형태로 선택되고 묘사되고 조형되는가의 배후에는 단순한 미학적, 예술적인 차원의 것 이상으로 정치적인 물음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근대국가의 형성기에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하나의 민족정체성으로 통합시키는 일이 중요하였고 국가적 기념행위나 기념물은 그러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기념물은 과거 사건의 상징화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문화적 통합을 높이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3. 동학농민전쟁의 기념물과 의미체계 (1) 유교적 충절론의 상징화 : 1910년 이전의 기념물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전통적인 규범과 질서에 매우 혁명적인 변혁을 꾀했던 사건이었고 또 그 과정에서 신분간, 계층간 갈등이 심했던 만큼 그 사건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매우 다양하고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대립성이 곧바로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갈등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그 까닭은 농민군이 철저하게 패배함으로써 반농민군의 세력이 정치적인 힘은 물론이고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의 주도권을 완전하게 장악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표1>은 이 사건 직후에 건립된 각종 기념물들의 종류인데 그러한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표 1> 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물 (1895-1910) ======================================================================= 기념물 장소 건립연도 ---------------------------------------------------------------------- 장충단 서울 성동구 장충동 1895 초토사 이공승우 淸德碑 충남 아산군 도고면 1895 관찰사 박공제순 애민선정비 충남 홍성군 갈산면 1895 행목사겸초토사 이공승우 백세불망비 충남 홍성군 광천면 1895 초토사 이공비 충남 서산군 고북면 1895 금성토평비 전남 나주시 과원동 1895 유회장 유학 박순식 著德비 충남 서산군 고북면 1895 증 군무참의 김공병돈유공지비 충남 홍성군 광천읍 1895 증 군무참의 김공병돈충절전망비 충남 서산군 해미면 1896 의사 한기경 정려비 충남 홍성군 홍성읍 1896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 전남 장성군 신호리 1897 영회단(당) 전남 장흥읍 예양리 1898 광서이십년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 전남 장흥읍 내양리 1899 벽사도찰방 김후일원청사복성불망비 전남 장흡읍 충열리 1900 흥룡단 전남 장흥군 부산면 1901 공조참의 정숙조 순의비문 충남 금산읍 하옥리 1902 군관 정지환 순의비문 " 1902 모충단 " 1904 박봉양비 전북 남원군 운봉면 갑오전망장졸기념비(각) 충북 청주시 당산 1905 ====================================================================== 농민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적지 않은 기념물들이 조성되었는데 모두가 반농민군측의 순절,순의,충의 등을 기리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서울의 장충단과 청주의 모충단, 장흥의 영회단 등과 각종 순의비를 들 수 있다. 장충단은 을미사변 이후 경향각지에서 죽은 전몰장병들을 위해 조정이 설단(設壇)한 것이었는데 처음에 배향된 5명 가운데 진남영 영관 염도희와 대관 이종구, 그리고 장위영 대관 이학승은 농민전쟁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장교였고 홍계훈은 을미사변때 희생된 인물이었지만 역시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양호초토사로 활약한 관군의 대표격인 인물이었다. 장충단에서는 염도희, 이학승, 이종구, 홍계훈 등을 배향함과 함께 '전망사졸(戰亡士卒)'도 함께 추모하도록 되었는데 당시 조정이 농민전쟁과정에서 죽은 장졸을 이듬해의 을미사변에서 죽은 장졸과 같이 조정을 위해 죽은 충절의 상징으로 해석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충사는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에게 일시에 죽임을 당했던 청주병영의 전몰장병 73인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장충단의 설단과 같은 시기에 별도로 건립되었다. 1894년 10월 동학군과의 전투에서 영관 염도희를 비롯한 장병 73인이 전사하자 11월 왕명에 의해 청주목사 임택호가 갑오전망장졸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95년 봄 조정의 특전으로 전국의 전몰장병을 모두 서울 장충단에 배향케 할 즈음 충청병영은 향사일을 전사일인 음력 10월 3일로 고집하고 독자적인 향사답을 마련하고 군부로부터 직,단호, 향사비 등을 하사받아 설단하였다. 1905년에 대대장병들의 자금갹출로 갑오전망장졸기념비(각)을 세웠다. 1907년 구한국군 해산으로 폐영된 이후 1908년 해산장병들과 유족들이 합동하여 모충계를 설립하고 계속 전몰장병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냈다. 장흥의 영회단은 1894년 12월 5일 장흥부를 수성하다가 동학농민군에게 죽음을 당한 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수성장졸 96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관에서 건립한 단이다. 갑오년 당시 우선봉장 이두황이 포상을 베풀고 어사 이승욱이 주상하여 1898년 설단하였다. 전몰장병들의 제사는 후손과 지방관 등이 참여하는 영회계에서 주도하였는데이 계의 절목은 1896년 8월 당시 장흥부사가 작성하였고 필요한 자금은 관의 지원금과 각면에서 자발적으로 낸 갹출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단의 옆에는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가 세워졌다. 영회단이나 모충사는 농민전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장졸들에 대하여 관 차원의 단을 설함으로써 농민군 진압의 역사적 정당성과 당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자발적인 반농민군의 활동을 기리는 비석류도 이 시기에 건립되었다. 나주의 반농민군 활동을 거대한 비석에 새겨 놓은 금성토평비나 운봉의 박봉양의 반농민군 활약상을 역시 돌에 새겨 놓은 박봉양비 등이 그 예다. 금산의 반농민군을 이끌었던 정숙조와 정지환의 순의비에는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혹독히 진압하였던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편 장흥의 유학자로서 농민군의 활동을 비판하고 이들에 대적하다가 죽임을 당한 김한섭의 제자들이 그를 위해 세운 흥룡단이 1901년에 세워졌다. 한마디로 이 시기에 세워진 기념물에는 한결같이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관, 위정척사론적인 관점에 근거한 해석이 부각되어 있다. 농민군의 혁명성이나 애국적인 반일항쟁의 의미를 나타낸 것은 하나도 없다. 임진란의 의절을 준거로 삼는 유림들의 비문에서도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진압한 반농민군의 의절을 칭송할 뿐 맨손으로 일본군의 화력에 대항하였던 농민군의 희생과 절의를 평가한 대목은 전혀 없다. 그 이유는 완전히 패배한 농민군측이 자신들의 의미를 부각시킨 기념물을 조성할 수 있는 힘이나 자원을 전혀 보유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일차적으로 찾아진다. 그러나 이 시기 지배적인 지식체계, 역사인식의 성격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은 전통적인 유교적 명분론을 대체하는 주체적인 민족사적 인식체계가 채 형성되지 못한 시기였다. 위정척사론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형태의 사서로 소개되던 계몽주의적 역사인식도 농민전쟁의 의의를 부각시킬 수 있는 지식체계는 못되었다.(조동걸,1989)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사회적으로 구성해줄 지적 자원이 없는 곳에서 그 의미를 기념하는 행위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2) 민족적 역사인식의 성장과 기념의 부재: 1910-1945 일제는 식민지 지배의 효율성을 위해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념행위나 기념물들을 파괴했다. 조정을 위해 죽은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장충단의 제사는 구한국군대가 해산된 직후인 1908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모충단의 제사 역시 구한국군의 해산으로 공적인 성격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유교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의 상징으로 조정이 관리하던 각종 제사나 기념행사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광화문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세우는 것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가혹한 식민지 지배 하에서 민족적인 정체성은 더욱 뚜렷하게 강화되었고 이에 기반한 역사인식의 틀도 발전하였다. '역사는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는 신채호의 말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민족주의 사학은 이 시기의 시대상에 뿌리박은 과거사의 재해석, 현재적 의미부여를 위한 지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3.1운동은 이러한 지식체계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근대적인 민족의 현재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상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변화 속에서 동학농민전쟁도 새로이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박은식은 1915년 {한국통사}에서 동학당의 난에는 정치를 개혁하고 민생을 구제하려는 혁명성이 있었음을 인정하였고 3.1운동 후 쓴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이라고 평가하였다.(신용하,1982;290) 1922년 황의돈은 '갑오의 혁신운동'이 계급적 고통에서 신음하던 다수 민중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일어난 '혁신' 또는 '혁명'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심승구;134) 천도교는 여러 매체를 통해 당시의 여러 경험과 기록들을 동학의 관점에서 수록하였고 동학을 주제로 하는 소설들도 나타났다. 김상기는 1931년 동아일보에 [동학과 동학난]이라는 연재물을 기재하면서 이를 혁명운동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저작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의 회고와 전문자료들을 근거로 3.1운동의 동력을 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찾는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이성규;271-72) 1936년에 장봉선이 정읍군지를 편찬하면서 수록한 '전봉준실기'나 1941년에 간행된 오지영의 {동학사}는 자신들의 경험과 채록한 이야기를 함께 묶어 동학농민전쟁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하의 공식교육에서는 식민지 관학이 자리잡고 있었고 민족주의적인 역사인식이 사회적 차원에서 주도적인 지식체계로 자리잡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설사 일부 지식인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대중적 정서를 일깨우는 집합적인 차원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싹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기념행위는 매우 어려웠다. 다음 <표2>에서 보듯 일제하에서 이 사건과 관련되어 건립된 기념물은 매우 적었다. [표2] 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물 (1910-1945) ==================================================================== 기념물 장소 건립연도 ---------------------------------------------------------------------- 의사 한홍규 순절비 충남 금산군 1912 모충사 충북 청주시 당산 1914 칠의비 충남 홍주군 1935 ==================================================================== 1912년에 건립된 한홍규 순절비와 1935년에 건립된 칠의비 두 사례는 모두 지방유림이 주도하여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두 곳 모두 한말 의병운동에도 참여하였던 위정척사 지식인인 기우만이 찬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내걸고 싸운 의사(義士)들의 충절에 빗대어 그의 순절을 칭송하였다. 건립시점이 경술국치 직후라는 점, 그리고 유림들이 국망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임란 당시 의사들의 충절을 칭송한 것이 민족적인 의식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여전히 척사론적인 시각을 중시하던 유교 지식인의 사유구조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된다. 모충사는 한말에 설단되었던 모충단 자리에 1914년에 전몰장병의 후손과 해산된 구한국군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사당이었다. 이 사당은 구한국군 및 전몰장병의 후손들이 선조를 배향하는 사적인 공간이었을 뿐이었지만 그것조차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 일제는 1923년에 모충단의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일본 신사를 건립하였다. 조정에의 충절을 상징하던 모충단이 일본지배를 상징하는 신사로 바뀐 것 자체가 바로 이 시대의 역사적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념의 부재, 민족적인 의미를 전혀 내포하지 않는 유교적 절의론을 내세운 두 개의 기념비와 후손의 사당건립을 제외한 어떤 형태의 기념물도 세워질 수 없었던 현상 그 자체가 곧 식민지 하의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3) 분단체제의 형성과 이데올로기적 규정력 : 1945-1960년 해방과 함께 한국은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독자적인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제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해방후 새롭게 건립할 민족국가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인가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과 이해관계의 상충을 포괄할 수 있는 민족적인 상징을 정치적으로 창출해 내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제의 지배라는 최대의 적이 무너진 후, 근대국가를 지향해온 민족주의적 사상과 운동이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것은 당연하였는데 해방정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3.1운동과 해외의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은 실제 한국민족의 근대적인 자기인식이라는 경험에 있어서나 상징성에 있어서 해방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집합적인 자원이었고 따라서 그 기념행사는 좌우를 막론하고 매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또한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애국자들에 대한 기념행위도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우 및 남북으로의 정치세력의 분열과 대립이 점차 격화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점점 차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평가하는 자들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서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임정법통론이 현실적인 정치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면서 이들 사건의 상징성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서중석,1992;305-316)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동학농민전쟁을 강조한 것은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전석담은 1946년 3.1절을 전후하여 '갑오동학란'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하고 이를 봉건제 말기의 농민전쟁으로 파악하였다. 박헌영은 역시 자랑스러운 민족투쟁으로 세가지 사건을 들고 그 첫째를 동학농민란이라고 하였다. 그는 3.1운동과 '10월 인민항쟁'을 함께 묶어 {동학농민란과 그 교훈}이라는 책자를 출판하였다고 한다.(심지연;46) 해방 정국에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결국 어떤 과거사를 어떻게 부각시킬 것인가 하는 역사해석의 대립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세력의 몰락과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은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될 수 없었다. 아직은 그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세대들도 생존해 있었을 터이고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재해석될 여지를 충분히 가졌으면서도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이데올로기적인 규정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건립된 기념물로 지금까지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는 현재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서있는 '갑오민주창의통수 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고 새겨진 단비이다. 그나마 이 단비가 누구에 의해 어떤 연유로 서게 되었는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건립 자체가 공개적으로, 또 사회적인 관심 속에서 추진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가지 해석이 전해지는데 전봉준과 관련이 있는 모 국회의원이 세웠다는 설과 해방직후 천안전씨 문중에서 전봉준 장군 사당을 세우려는 기념사업을 추진하다가 관의 압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이 단비건립에 그쳤다는 설이다. 어쨋든 이 비에는 태극문양과 함께 '민주통수'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해방 이후 민주국가의 건설과정에서 농민전쟁을 재해석하려는 기운이 일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새로운 국가가 조선왕조에서와 같이 중세적인 충절을 강조하는 복벽주의적인 지향을 가졌더라면 한말 조정이 건립했던 기념물들이 새롭게 부각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근왕주의적 충절론을 매개로 민족적 통합을 꾀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실제로 유교적 충절의 상징으로 세워졌던 기념물은 해방 이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점을 매우 애석해 하고 있는 한 후손은 '8.15 해방을 맞이한 모충사는 국민의 추모를 받게끔 성역화되어야 했을 것인데.....서둘지 않고 있다가 민주화의 물결에 밀리게 되는 바람에 그만 손도 못대고 말았다'고 쓰고 있다. 그 바람에 '현충사나 다름없고 충혼탑과 동질'인 이 모충사가 푸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물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리의 문제를 별도로 하고 본다면 이것은 한말의 '충절'과 해방후의 '애국'이 결코 같은 내용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농민전쟁은 한말의 해석체계로 돌아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학란을 새로이 조명하여 대중적인 정치의식의 상징적 자원으로 부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50년대 말 국사편찬위원회가 새로운 한국사의 정립을 위해 당시의 자료들을 모아 {동학란기록}으로 간행하였던 것과 대학 교수에 의해 농민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문이 쓰여지기 시작하면서 일제 하에서 진전되었던 새로운 역사인식의 전통이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4) 혁명의 상징성의 정치적 이용과 근대화론 : 1961-1979년 [표3] 동학농민전쟁관련 기념물 : 1961-1979 ===================================================================== 기념물 장소 건립연도 ---------------------------------------------------------------------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전북 정읍 덕천 1963 의암손병희동상 서울 파고다공원 1966 동학혁명모의탑 전북 고부 신중 1969 만석보유지비 전북 정읍 이평 1973 동학혁명군위령탑 충남 공주 금학 1973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충남 태안읍 1978 동학혁명군위령탑 강원 홍천 서석면 1978 해월최시형 동상 경주 황성공원 1979 =======================================================================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자신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군사혁명'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상징적 자원을 한국의 역사 속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한편으로 '피곤한 오천년의 역사', '모든 악의 창고와 같은 우리의 역사'의 낙후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구체제를 철저히 뒤엎는 국민혁명, 민족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박정희,1963;24,249) 이 맥락 위에서 박정희는 프랑스 혁명, 손문주도의 중국 혁명, 일본의 명치유신, 터어키의 케말 파샤 혁명, 그리고 이집트의 낫셀 혁명 등을 중요하게 부각시켰고 한국에서는 4.19 학생혁명과 '동학혁명'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63년에 처음으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관의 주도 하에 건립되었다. 일부 지식인들 이외에는 별달리 그 역사적 의의를 주목하지 않았던 이 사건이 70년이 지난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그것도 관에 의해 '갑오동학혁명'으로 불리우고 기념탑까지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5.16 후에는 그 당시의 반란군을 민주혁명군으로 미화해서 받들어 모셨'다고 모충계에 속한 인물이 비난하고 있는 것도 그 전환의 급작성을 반영한다. 관이 주도하여 결성한 [동학혁명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1963년 황토현 자리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웠는데 이 탑은 동학농민전쟁을 '혁명'으로 부각시킨 최초의 탑이자 기념물이었다. 이 탑의 건립은 동학농민전쟁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비로소 대중의 역사의식 속에 새로이 해석되고 전승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탑의 건립을 계기로 이후 여러 곳에 기념물들이 건립되었다. (표3 참조) 그러나 5.16의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의 관점에서 동학혁명의 혁명성은 부패한 조선조정과 제2공화국 정부를 동일시하고 농민군을 쿠데타세력과 동일시하려는 상징조작에 이용되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웠다. 사실 지금껏 반란으로 이해되어 오던 사건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관이 주도하여 거대한 기념탑을 건립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으나 이 탐의 건립은 관의 사업으로 그치고 말았다. 유신을 준비하던 70년대 초반 동학혁명은 다시 한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71년 박정희는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두 개의 획기적 사건을 언급하였는데 하나는 갑신정변이고 다른 하나는 갑오동학혁명이다.(박정희,1971;) 동학혁명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동학혁명은 우리 역사상 드물고도 놀라운 민중의 자발적인 항거운동이었다. 개화독립당이 서구적인 근대화를 지향한 것이라면 동학혁명은 반서구적인 근대화를 지향했다....동학에는 두가지 정신이 있는데 ...만족적 주체정신...농민에게 만민평등의 복음을 주자는 민주적 자유정신의 강조였다'. 박정희의 이런 평가는 비록 쿠데타 세력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이용이라는 측면이 강한 것이었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농민전쟁이 더욱 중요하게 평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 경우 '혁명성'은 5.16의 '혁명'적 성격을 정당화시키는 수준에서 머물렀을 뿐, 문자 그대로의 민중적 자유정신의 확대를 꾀하려는 상징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동학혁명은 '근대화'를 추진한 운동이었고 그것은 상징화를 통해 5.16 '군사혁명'으로 연결되었다. 1973년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산화한 자들을 기리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건립되었다. 특정 개인이나 사건 자체가 아닌, 이름 없는 농민군의 희생을 추모하는 '혁명군 위령탑'이 건립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혁명군 위령탑은 성격상 1895년 장충단에서 행해지던 '전망장졸'에의 배향과 유사한데 기념하는 대상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다.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한 것은 지방의 천도교도들이었지만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시기는 유신이 선포된 극단적인 억압체제 하에서였던 만큼 동학혁명은 민중의 자발적인 혁명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체제수호의 상징조작에 이용된 측면이 강하였다. 이 위령탐에는 다음과 같은 건립문이 쓰여 있다.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의 피어린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그러나 일단 권력이 이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인식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특히 이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면서도 해방후 한국사회에서 그 힘이 매우 약화되었던 천도교측은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의 천도교도들과 천도교 조직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동학혁명에 대한 기념물 조성을 추진하였다. 그 첫 열매가 66년 파고다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이 서게 된 것이었다. 손병희는 물론 3.1운동에서의 민족대표로서 더욱 부각되었던 것이지만 그가 동학혁명의 한 당사자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민간의 단체로 처음으로 정읍을 중심으로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가 1967년에 결성되었고 68년부터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가 정읍을 중심으로 하여 거행되었다. 동학혁명으로 평가가 바뀌어지는 과정에서 농민군의 저항성과 민중성을 새로이 부각시키려는 움직임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긍정적인 시각이 학계로부터 일반 시민에게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의 하나가 1968년에 발견된 사발통문이었다. 사발통문은 고부봉기 당시의 주도적 인물의 후손에 의해 공개되었고 곧 학계의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부 신중리의 주산마을에는 이 사발통문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갑오혁명 모의탑이 건립되었는데 이 역시 농민전쟁이 역사적으로 재평가되는 과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1978년에는 서산의 태안, 강원도 홍천 등지에도 농민군의 봉기와 애석한 죽음을 기리는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탑의 건립에서도 '님들이 가신지 80여년, 5.16혁명 이후 제3공화국은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되살림에 있어서...'하여 동학혁명과 5.16혁명을 연결시키고 농민군의 항거를 순국정신으로 규정하여 새로운 국가에의 충성의식을 강조하였다. (5) 상징적 자원의 민주적 해석과 그 억압 : 1980-1987년 [표4] 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물 ; 1980-1987 ========================================================================== 기념물 장소 건립연도 ------------------------------------------------------------------------- 전봉준장군고택 전북 정읍 이평(사적 293호) 1981 황토현전적지 전북 정읍 이평(사적 295호) 1981 백산성지 전북 정읍 고부 1983 황토현 기념관 전북 정읍 이평 1983 갑오기미무오 삼대운동기념비 전북 임실 1983 춘암상사 박인호 유허비 충남 예산 삽교 1985 의암손병희 어록비 독립기념관 (충북 청원) 1986 전봉준장군동상 전북 정읍 이평 1987 전봉준장군 사당 전북 정읍 이평 1987 ==========================================================================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5.16 쿠데타로 형성된 권위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하자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는 민주화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다. 이 흐름은 다시 군부의 권위주의적인 권력장악으로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 정부에 의해 동학농민전쟁은 대대적으로 기념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이 역설적 현상은 1980년 초 전북 정읍의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동학제가 계기가 된 것이었다. 이 기념사업회는 1967년에 결성되어 이듬해부터 기념문화제를 주관해 온 지방의 민간단체였는데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이 시기에 거행되는 동학제에 오랫동안 억눌렸던 시민적인 불만과 민주화에의 요구가 터져나올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동학제에 당시 정치규제법에서 갖 풀려난 야당 정치인이 참석하여 연설을 함으로써 이 집회는 매우 민감한 현실문제를 다룬 정치집회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이 야당 정치인을 초청한 이유는 그 정치인이 '동학정신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김은정 외;560) 이것이 정치적 탄압과 지역차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조그만 지방의 모임이 미친 사회적 파장은 매우 컸다. 이 집회로 인해 도지사,경찰서장이 물러났고 기념사업회 회장도 구속되어 40여일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학제를 주최해오던 기념사업회도 해산을 종용받게 되었고 결국은 해체되고 말았다.(김은정외;560) 지방에서 개최하는 동학제가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물론 당시의 한국적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정 야당 정치인의 참가를 떠나서도 정치현실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과 자율적 시민운동의 장이 억압되는 상황에서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기리는 민간의 집회가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이 부패한 정부와 탐관오리들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 봉기였다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권위주의적 정권의 위상은 불안정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5공화국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부각시키는 황토현 전적지 정화사업을 추진하였던 것일까? 정부는 한편에서 지역의 민간단체와 그들의 자율적 활동을 억압하면서 이들이 활용하던 역사적 상징화 작업을 관 주도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정읍의 기념사업회가 추진해오던 기념문화제, 동상, 사당, 기념관 및 강당의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81년에 황토현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되고 전봉준 고택이 역시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황토현 기념관 건립지시가 내려져 1983년에 황토현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84년 다시 대통령의 '현충사처럼 성역화하라'는 지시로 황토현 일대가 거대하게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정부가 황토현 전적지를 성역화하고 전봉준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우게 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기념행위가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비판의 상징적 자원으로 활용되지 않은 채 추상적 의미에서의 애국심, 자기희생의 정신, 전봉준이라는 개인의 위대함 등으로 상징화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80년대 전반의 기념물 건립의 과정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의미부여와 위로부터의 의미부여 간에 야기된 긴장과 갈등을 잘 보여준다. 한편 1983년 임실에 건립된 3대혁명 기념비는 임실의 후손과 천도교도가 중심이 되어 건립한 매우 흥미있는 비이다. [갑오동학혁명], [기미 삼일운동], [무인멸왜운동] 등 3대 운동을 기념하여 한 곳에 세 개의 비를 건립하였다. 갑오동학혁명비에는 동학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을 강조하고 임실의 지도자들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민폐를 일소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비는 '임실에서 동학군이 기포한지 90년만에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고 되어 있다. 특히 이 비들이 흥미있는 것은 3대 운동에 모두 최승우, 김영원, 한영태 등 임실의 동학지도자들이 참가하였다는 사실이다. 최승우는 임실의 도접주로 김영원은 접주로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였는데 3.1운동에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취승우는 독립선언서를 임실,남원 등지에 배포하였고 최영원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하였고 한영태 역시 고문을 받던 중 자결하였다. 무인멸왜운동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패망을 기원한 운동이었는데 역시 임실 천도교도들과 후손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이 비는 지방의 수준이지만 동학농민전쟁과 3.1 운동을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운동으로 가시화해 놓은 흔치 않은 사례이다. 특히 최승우, 김영원, 한영태 등 주동자들이 모두 양 운동에 적극적인 주동자들이었던 점에서 이러한 연결은 명료한 구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 비는 국가적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지방과 개인의 수준에서는 한국의 근대사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한 사례로 볼 만하다. (6) 민중의식, 지방의식의 확대와 역사의 대중화 : 1987-1996년 [표5] 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물 : 1988-1996 ========================================================================== 기념물 장소 건립연도 ------------------------------------------------------------------------- 동학혁명백산창의비 전북 정읍 고부 1989 용계 김덕명장군 추모비 전북 원평 1989 해월신사 추모비 강원 원주 호저면 1990 내칙 내수도문 반포백주년기념비 경북 금릉 구정면 1991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 전북 전주시 1991 동학농민혁명기념탑 전남 장흥읍 충열리 1992 김개남장군추모비 전북 전주시 1993 해월신사 독공지비 강원 정선 고한 1993 공주 우금치사적지정 충남 공주 1994 고승당 기념비 경남 진주 1994 무장 창의 포고비 전북 고창 공음면 1994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정읍 고부 신중리 1994 의암성사 생가성역화 및 동상 충북 청원 북이면 1994 장성 황룡촌 기념탑 전남 장성 1995 원주 최시형 체포지 기념비 강원 원주 1995 보은취회 기념비 충남 보은 1995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 전북 전주시 풍납동 1996 ========================================================================== 80년대 중반이후 동학농민전쟁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크게 두가지 현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하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민주화와 더불어 크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학문을 표방한 새로운 지식체계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사회의 여러 하위범주들도 각기 제 나름의 정체성과 목소리를 찾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사회에서는 피지배 민중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을 발전의 동력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 강하게 등장하였다. 70,80년대 한국사회과학의 기본개념이었다고 할 민중의 역사적 실체로서 농민의 정치적 의식과 활동이 부각되었다. 혁명의 경험이 부재한 한국의 역사에서, 또 민중의 힘을 강조하고 싶은 지식인들의 관심과 맞물려 동학농민전쟁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근대화의 길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적극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때마침 백주년을 맞이하는 것을 계기로 기념물들도 다수 건립되었다. 87년 이후의 기념물에서는 몇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의 특징은 이전의 기념물에 비해 민중적인 해석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학혁명으로부터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어 표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정읍의 기념사업회는 갑오년 이름없이 쓰러져간 무명동학농민군을 위한 위령탑을 건립하고 위령제를 지내는 일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사발통문이 발견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이 건립되었다. 이 탑은 순수한 지역민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 이외에도 '무명동학농민군'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민중적인 해석이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개남의 기념비를 세우려는 움직임도 민중적인 해석을 표방하였다. 지방의 지식인과 문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된 이 기념물 역시 동학농민전쟁이 지나치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해석된다고 비판하고 보다 '민중적이었던 지도자' 김개남의 비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지방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사건에 대한 연구가 보다 깊어지고 지방사적인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과도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의 지방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현실적 필요성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보국안민을 위한 혁명을 주도했던 지역, 애국적인 반일 투쟁의 역사를 지닌 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4년이 백주년이라는 것을 계기로 이 사건에 대한 기념행사는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전주,정읍,고창,장흥,임실,진주 등 각 지방자치단체도 독자적으로 농민전쟁과 연관된 지역적인 사건을 상징화함으로써 자기 지방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 결과 국가 대신 '우리 고장'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992년 장흥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건립은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념탑은 장흥의 동학군의 희생과 그들의 혁명적 정신을 기린 기념탑으로 장흥읍의 어귀에 우뚝 솟아있다. 탑문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를 몰아내어 패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지려고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혁명'이라고 성격규정한 후 장흥 농민군의 봉기와 희생을 서술하고 '이 자랑스런 농민군의 후손인 우리들은 선인들의 그 위대한 정신을 오래오래 기리고 본받고자' 이 탑을 세운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장흥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미 1895년에 농민전쟁에서 죽은 장흥부사 외 95인의 순절을 기리는 영회당이 건립되어 있는 고장이다. 영회당에서는 오랫동안 지방의 유지와 후손들이 나라를 위한 충절의 상징으로 당시 수성장졸들의 죽음을 기리는 제사를 행해왔다. 이제 바로 그 장흥에 농민군의 혁명적 의의를 높이는 기념탑이 세워진 것이었다. 기념탑이 제막되기 전 필자가 만났던 영회계의 후손은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당시로서는 엄연히 관군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의의 집단이요 농민군은 반란의 집단인데 이제 반란군을 혁명세력으로 미화하고 희생당한 관군을 비난한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는가 하는 울분을 털어놓았다. 장흥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과 영회당은 농민전쟁에 대한 지난 한세기의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이 지역적 정체성의 강화와 강하게 연계된 곳은 아무래도 이 사건이 발발했던 전북지방이었다. 일찍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고 80년 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했던 정읍의 기념사업회는 고부봉기와 황토현의 전투를 강조하면서 동학농민전쟁을 정읍의 지역적 정체성과 결부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던 혁명의 전주곡이 이 땅 정읍에서 울려 퍼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정읍을 혁명의 발상지라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을 고부면 신중리에 건립하였고 활발한 지역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고창 지역에서도 동학농민전쟁이 지방적인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각되었다. 고창의 부각은 동학농민전쟁이 고부봉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무장봉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학계의 연구와 전봉준의 생가가 고창 당촌이라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고창동학기념사업회는 무장봉기 포고문비를 제막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무장땅에서 거사의 사전계획과 모의 아래 ....당산골에서 제1차 봉기가 이루어졌고 그 영도자가 당촌 태생인 것으로 확실히 규명됨으로써 ....이제 고창땅은 가히 '농민봉기의 성지'로서 '의장 고창'의 맥을 잇는 뜻깊은 역사의 고장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지방의 자부심과 결부되는 뚜렷한 사례이다. 한편 단순히 기념물을 건립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집단적인 축제나 기념행사의 형태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특징의 하나다. 예컨대 고부에서는 고부봉기를 기념하는 걷기 대회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전주에서는 농민군의 전주입성을 재현하는 축제가 거행되었다. 무장에서는 무장포고재현대회라는 이름으로 걷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행사들은 물론 90년대 초반에 조직된 각 지방의 기념회들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도 있고 특히 정치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념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전쟁의 의의와 역사를 강연하는 강연회들도 조직되었고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시민적 토론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꾀하는 활동들과 연결되었다. 미술제가 열리고 각종 문화행사가 전국의 기념회들이 한데 결합하여 만들어진 동학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또 무장봉기, 고부 봉기, 전주 입성 등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이 지역별로 거행되었다. 바야흐로 동학농민전쟁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유산으로, 새로이 해석되고 수용되는 사건으로 부활한 셈인데 주로 그 사건을 경험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적 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3. 기념물의 형태와 상징화의 내용 이상에서 살펴본 지난 백년에 걸친 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물의 역사를 좀더 분석적으로 정리해 보고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화적 변동의 단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건립주체와 기념물의 형태 기념물은 누가 건립하는가 하는데 따라 그 성격과 의미가 적지 않게 달라진다. 지난 백년동안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을 건립한 주체는 누구인가를 살펴보자. 다음 표는 이 사건과 관련된 기념물의 건립주체를 분류한 표이다. [표6] 동학농민전쟁 기념물의 기념주체 1894-1910 1910-1945 1945-1960 1961-1986 1987-1996 계 중앙정부① 2 4 6 관(정부) 지방정부② 5 1 6 (관변단체) 천도교③ 4 4 8 문중,후손④ 1 1 2 지방민⑤ 1 1 민간 사회단체⑥ 3 3 유림⑦ 7 2 9 보부상⑧ 2 2 ②+③ 1 1 ②+⑤ 7 5 1 13 ③+④ 2 2 ③+⑤ 2 2 4 ④+⑤ 1 1 ⑤+⑥ 2 2 ①+③+⑥ 1 1 계 23 3 1 17 17 61 이 표를 보면 시기별로 기념물의 건립주체가 매우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한 기념물을 조성하거나 건립한 주체는 크게 다섯 범주로 구별된다. 즉 국가(정부), 유림, 천도교, 민간단체, 그리고 후손이다. 농민전쟁 직후 조정은 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전몰장병을 위한 기념물을 설치하였는데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제3공화국이나 군부의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5공화국의 정권 등은 모두 농민혁명을 기리는 기념물을 조성하였다. 유림의 경우는 농민군과의 적대적 관계에 서있었던 관계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데 주로 농민군에 의해 희생되었거나 반농민군으로 큰 역할을 한 유림을 기리는 기념물을 만들었고 조정과 관점이 같았다. 천도교는 동학농민전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높이려는 노력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체이다. 해방후 남한사회에서 세력이 매우 위축된 천도교로서는 동학농민전쟁이야말로 천도교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부각시키는 가장 좋은 자원이었다. 실제로 각 지방에서 이루어진 기념탑설립이나 기념행사등은 천도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한 것이 많았다. 후손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이들은 스스로 농민전쟁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지만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거나 만들어진 기념물을 유지하는 등의 일에는 적극적이다. 농민군의 지도자 가운데 김덕명,이방언,이사경 등 묘소와 묘비가 잘 관리되고 있는 경우는 모두 후손들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반농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장흥의 영회당이나 충주의 모충사 등이 모두 농민전쟁 당시에 죽은 관군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유지되고 있다. 한편 민간단체로 들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민간단체라 하더라도 관의 도움을 받거나 천도교의 후원을 바탕으로 설립,활동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민간단체는 60년대 말부터 활동한 정읍의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와 92년에 발족한 전주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들 수 있다. 1945년 이전에는 주로 조정이나 지방관아, 유림 등이 기념물의 조성을 전적으로 주도하였고 민간의 참여는 전무하였다. 60년대 이후 정부의 긍정적 해석을 배경으로 천도교, 지방민, 후손 등이 적극적으로 기념물의 건립에 참여하였다.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지방 단위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단체들이 등장하였고 실제로 기념물을 건립하는 주체들도 좀더 다양해졌다. 건립주체의 변화는 곧 한국사회에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공적으로 표방할 수 있는 사회세력이 다양하게 등장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방자치의 실행과 더불어 지방적 정체성이 추구되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기념물의 형태는 어떠한가를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7] 동학농민전쟁 기념물의 시기별 형태 1894-1910 1910-1945 1945-1960 1961-1979 1980-1987 1988-1996 계 비 19 2 1 1 3 10 36 단(사당) 4 1 1 6 기념탑 5 3 8 동 상 2 1 1 4 기념관 1 2 3 사적지 3 1 4 계 23 3 1 8 9 17 61 위의 표를 보면 1910년 이전에 건립된 기념물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단 또는 사당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의 내용이나 특정인의 활동상을 기록하여 남겨놓은 석비의 형태이다. 장충단,영회단(당), 모충단, 흥룡단 등이 전자의 예라면 전몰장졸순절비, 순의비, 토평비 등이 후자의 형태이다. 원래 단은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조선왕조에서 국가의 의례와 관련하여 그 종류와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선롱단, 선잠단, 성황단 등이 그렇거니와 임진왜란 당시의 의절을 기리는 정충단 등도 조정이 국가의 의례로 규정한 단이었다. 가장 많은 형태인 비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념물의 양식이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의미를 기록된 문자로 돌에 기록해 두는 것은 영구히 그 의미를 보존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는 그 규모가 작고 기념물로서의 가시성이 현저하지 못해서 상징화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단이나 사당은 매년 사망한 일시를 기억하여 제사가 모셔지고 이 반복되는 의례적 행위를 통해 사건이 끊임없이 재해석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징화의 기능이 강하다. 일부 비는 사당과 함께 세워지거나 같은 장소에 위치함으로써 그 상징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제사가 갖는 공공적 의미가 현저히 약화되면서 단이나 사당의 상징성도 약화되었다. 대신 동상, 기념탑, 기념관이 주요한 기념물의 형태가 되었다. 동상은 사건이나 인물의 동적인 성격과 현실감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봉준, 손병희, 최시형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해방 이후의 기념물로서는 기념탑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점한다. 기념탑은 기념비에 비하여 그 규모가 크고 조형적인 형상 자체의 의미가 좀더 큰 기념물이다. 정읍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장흥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 태안의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기념탑은 개인보다는 사건 자체를 대상화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2) 기념대상과 상징화된 의미체계 이들 기념물들이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과 궁극적인 의미체계는 무엇인가.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은 결코 단순한 물체가 아니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건이나 활동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매우 종합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기념물은 이러한 복잡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오히려 특정한 측면을 부각시켜 그 사건의 의미를 확인시키고자 한다. 먼저 이들 기념물이 무엇을 기념대상으로 삼았는지를 보자. 표8 동학농민전쟁 기념물의 기념대상 1894-1910 1910-19451945-1960 1961-1979 1980-1987 1988-1996 계 관군 14 1 15 수성군,민보군 9 2 11 인물 농민군지도자 1 3 4 4 12 무명농민군 2 2 4 사건 (봉기,전투,혁명) 1 2 6 9 농민전쟁관련 2 3 1 6 사적지 동학관련 4 4 계 23 3 1 8 9 17 61 위의 표를 보면 기념대상은 인물과 사건 자체로 크게 나누어진다. 처음에는 인물에 대한 기념이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역사적인 사건들을 중요한 인물들 중심으로 해석하려 했던 엘리뜨주의적 인식체계가 일정하게 작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지도적인 인물의 행적과 활동을 통해 한 시대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집합적 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1945년을 기점으로 대상의 성격은 현저하게 달라졌다. 즉 해방 이전에는 반농민군측의 인물들, 관군이나 지방의 수성군, 민보군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의 공적이나 충절을 기리는 기념물들 뿐이었고 농민군측의 활동을 기념하는 기념물은 전무하였는데 반해 해방 이후는 그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관군이나 수성군을 기리는 것은 하나도 없고 농민군측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건립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80년대 이후 무명농민군을 구체적인 기념 대상으로 드러내는 기념물의 건립이다. 특별한 개인이 아닌, 이름없는 희생자들을 기념한다는 것은 곧 사건 자체의 의미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면서 결국은 다수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점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70년대 이후로 인물 보다는 사건 자체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주로 혁명의 의미와 보국안민의 애국충절을 근대적인 형태로 강조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이제 이들 기념물이 상징하려는 내용, 사람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기억하기를 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은 건립주체의 역사인식, 그들의 집단적 이해관계, 사건과의 직접적 연계성 등에 따라 적지 않게 차이가 있다. 이를 국가권력의 힘, 유교적 충절, 민중의 혁명성, 보국안민의 애국심, 동학사상의 위대함 등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9 동학농민전쟁 기념물이 상징하는 의미체계 1894-1910 1910-1945 1945-1960 1961-1979 1980-1987 1988-1996 계 국가권력의 힘 8 8 유교적 충절 15 3 18 민중의 혁명성 2 1 8 11 보국안민의 애국심 1 5 6 5 17 동학사상의 위대함 1 2 4 7 계 23 3 1 8 9 17 61 농민전쟁 직후에는 주로 국가권력(당시로는 왕조권력)의 힘과 유교적 충절이 매우 강조되었다. 모든 기념물은 초토사나 관군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고 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유림, 보부상, 아전 등을 기념하면서 유교적 충절을 가장 소중한 의미체계로 부각시키고 있다. [영회당시서]를 쓴 어사 이승욱은 영회당을 충렬사와 같은 차원에서 논하고 있다. 즉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의 화이무분(華夷無分)에 분격하여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자들을 기리는 충열사와 꼭같이 갑오동비의 난에서 나타난 인수무별(人獸無別)에 분격하여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자들을 기리는 곳이 곧 영회당이라는 것이다. 이도재가 쓴 금산의 순의비 내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도재는 정숙조의 죽음을 임진왜란 당시의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의 선절과 비교하면서 이 두 의사의 영령과 의백이 이곳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5년 이후에는 국가권력이나 유교적 충절을 상징의 핵심으로 내세운 것은 없다. 어사 이승욱이 충열사에 비교했던 영회당도 해방후 후손과 지방의 사적인 공간으로 축소되었다. 후손이나 천도교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관군의 기념물들은 훼파되어 버리고 말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중세적인 근왕사상이나 유교적 충의론은 완전히 소멸되다시피 했고 대신 근대적인 국가의식, 민족정체성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제3공화국 시기에는 동학혁명군의 보국안민을 향한 애국심이 매우 강조되었다. 동학란이 동학혁명이 되었고 관군의 충절이 아닌, 동학농민군의 보국안민사상이 기념의 대상이 되었다. 1963년 최초로 황토현에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는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60년대 초 보국안민이라는 의미체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권이 바람직하게 여겼던 사회상, 즉 권력자의 통제하에 전민족이 일사분란하게 동원되는 사회, 국가중심적 논리 앞에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보국안민의 의미체계 속에 개재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유신이후에는 더욱 국가중심주의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체계는 80년대 전반기 대대적인 황토현 기념사업의 추진과정에서도 역설적으로 강하게 등장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막연한 보국안민의 애국심 보다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하는 기념물들이 나타난다. 이 의미체계의 변화에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은 지식인의 존재와 시민사회의 활성화였다고 생각된다. 점차 사건의 이름이 동학혁명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었고 기념의 대상 역시 무명의 농민군이 강조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동시에 각 지방의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상징으로 이 사건이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의 주무대가 되었던 지방일수록 이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상징화를 통해 '자랑스런 고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 내면에는 부패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비판정신을 강조하는 시민의식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의 기념물도 사회전체의 집합적 상징으로 부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이 사건은 사회전체가 지키는 기념일이 없다. 공식적인 사회적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 사건의 의미를 반추할 만한 기념일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일부 무장기포일이나 백산창의일, 전주함락일 등을 기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념은 어디까지나 지방적이고 매우 제한적인 기념일 뿐 전체사회 수준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공간적으로도 이 사건은 주로 호남과 충청 일원에 국한되어 기념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이 사건이 발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80년대 후반 이래 지역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문화적 자원으로 지방의 사건들이 부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일부 지역의 정체성과 동학농민전쟁의 기념행위는 매우 잘 부합할 수 있었던 반면 전국적 차원에서 민족적인 정체성의 상징으로 표상될 가능성은 오히려 약화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4. 결론 : 지식체계와 집합적 정체성 한세기에 걸친 동학농민전쟁의 기념물들을 살펴보면 역사적 사건의 해석과 기념행위가 시대별로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사건 직후 관군의 충절과 유교적 지식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던 기념물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농민군의 혁명성과 보국안민의 애국심을 드높이는 혁명의 기념물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지난 한세기에 걸친 한국사회 자체의 변화상이 놓여있다. 1945년을 전후한 변화에서는 유교적 충절론에 기초하였던 중세적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근대적인 민주국가가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뚜렷이 확인된다. 반농민군 수성장졸의 죽음을 기리던 사당과 농민군의 보국안민을 높이는 혁명기념탑 사이의 차이는 곧 유교적인 왕조체제와 근대적인 민주국가 간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부패한 조정과 외세의 침탈에 적극 저항했던 농민군의 모습이 숭고한 혁명정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설정하고 있는 스스로의 체제가 그러한 정신 위에 건립된 것으로 이해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60,70년대의 기념물과 80년대 후반의 기념물에는 각 시기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긴장이 반영되어 있다. 5.16과 10월 유신을 찬양하면서 건립되었던 동학혁명탑과 순수한 민간단체에 의해 건립된 무명갑오농민군위령탑의 차이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념물을 건립하는 주체가 달라져 온 사실로부터 한세기에 걸친 시배세력의 변화를 읽을 수도 있다. 유교적 지식인이 지배하던 시대, 계몽주의적 지식인 조차 우민관의 한계를 벗어버리지 못하였던 시대로부터 국가권력이 일방적인 힘을 지니고 시민사회의 성장을 억눌렀던 시대를 거쳐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통한 민주적 지배세력이 형성되어 가는 역사적 변화의 과정이 기념물의 변모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기념물의 변화에서 읽어야 할 내용은 지배적인 지식체계, 사회의식의 변화과정일 것이다. 한말의 사회의식은 여전히 유교적 충절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일부 계몽주의적 지식체계 조차도 개인과 사회, 민족과 국가, 주권과 외세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설정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내용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농민전쟁 직후 건립된 여러 기념물의 보수적 상징성은 그러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일제 하에서 이 사건은 망각을 강요당하였고 개인적인 회상이나 기억으로 머문채 민족적 차원의 집합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부각될 수 없었다. 그 결과는 빈약한 기념물, 상징의 부재로 나타나고 있다. 해방 후 분단체제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역시 오랫동안 이 사건의 의미를 부각시킬 사회의식은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60년대 권위주의적 정권에 의해 이 사건의 의미가 혁명으로 상징화된 것은 국가주도 근대화론이 지배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이 5.16 및 10월유신과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일부 기념물의 의미구조는 억압적인 위로부터의 애국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여러 기념물들이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또 다양한 의미를 띠고 건립되게 된 것은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성장을 반영하는 새로운 문화, 지식체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학농민전쟁의 기념물에 나타나는 현재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보국안민이라는 개념이다. 거의 모든 기념탑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보국안민'의 의미체계에는 민중운동의 의의를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해석과 국가의 안위와 발전을 위한 개개인의 희생과 헌신이라는 위로부터의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시민의 권리와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과 국가의 통합성과 안정을 강조하는 것은 밀접하게 관련되면서도 성격상 매우 차이가 있는 것으로, 관이 조성한 기념물은 종종 후자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활용되었고 정읍의 사례에서 보듯 양자 간의 긴장이 드러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농민전쟁에서 해석될 수 있는 두가지 측면, 즉 민중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강조하는 상이한 입장이 합쳐져 있는 셈인데 시민사회와 민족정체성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만하다. 민주화, 지방화의 진전과 함께 농민전쟁의 기념물들은 점점 지방적인 정체성과 결부되는 경향을 보인다. 인내천의 종교윤리를 강조하는 종교적 정체성 역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의 흐름과 문화적인 교류확대가 진전되면서 이 사건이 사회 전체의 집합적 상징으로 부각될 가능성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민중주의의 한계가 인식되고 저항적 민족주의가 미래의 대안일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될수록 이 사건의 상징성은 더욱 지방화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으로 예견되는 남북한의 사회적 통합과정에서 공동의 역사적 상징이 새롭게 요청될 때 이 사건은 다시 전민족적인 기념의 대상으로 부각될지 모른다. 참고문헌 자료/ 영회당 소장자료, {永懷堂史輯} ('우선봉 이두황 장계등본'(1896), '영회계안'(1896), 어사 이승욱 영회당시서(1896)) '모충사실기'(1903), 모충단서(1903) 팜플렛/ 정읍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다시 살아오게 하는 역사의 불길로",1994. 김개남장군 추모사업회, "역사의 돌을 세우자", 1992.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고부 봉기 기념 걷기대회", 1993.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무장봉기포고 기념대회", 1994. 금석문/ '고 장흥부사 박공급각위순절비문'(기우만 찬),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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