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9일 목요일 오전 09시 15분 03초 제 목(Title): 하버마스 이론의 확장,한반도통일의 네가지 교수글(논문/기고) 한반도 통일의 네가지 핵심 쟁점 : 하버마스 이론의 확장 韓 相 震 (서울대교수: 사회학) 출처: 하버마스 (저), 한상진 (편),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하버마스 한국방문 7강의, 서울: 나남, 1996, 231-251. 세계화 시대에 민족통일을 생각하는 것은 어딘지 역설 같기도 하고 도전처럼 들 리기도 합니다. 세계화는 인력이나 상품, 자본, 정보의 국경 없는 자유로운 유통을 촉진시키지요. 셰계 도처의 일들이 다양한 네트워크를 따라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종래의 시간과 공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하지요. 이것은 탈국가적, 탈민족적 추세입니다. 이에 반하여 민족통일은 그 낱말의 뜻에서 이미 영토주권을 전제하고 있 으며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 또는 복원을 지향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오늘날 세계화와 함께 한반도 통일 문제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에 있습니 다. 이 두 발전의 축이 잘 조화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의 긴장에 주목해야 할 것 같 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버마스교수의 서울대 강의가 관심을 끕니다. 두개의 강의를 했 는데요, 하나는 직접 한반도의 통일과 국민주권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죠. 다른 하나 는 유럽의 경험을 중심으로 국민국가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가 지 테마는 서로 연관된채 한반도 통일을 생각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처럼 보 입니다. 따라서 일단 하버마스의 메세이지를 간략히 정리해볼까 합니다. 그런 다음, 만일 우리가 그의 관점에서 우리의 통일문제에 접근한다고 할 때, 어떤 문제에 부딪 칠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족형성의 두 경로와 세계화의 도전 먼저 국민국가에 관한 콜로키엄을 볼까요? 하버마스는 민족이나 국민의 구성에 관하여 혈통이나 땅 같은 자연적 조건을 중시하는 입장과 시민적 결사와 연대 등에 의하여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을 구별하였습니다. 편의상 전자를 종족주의라 하고 후자를 시민주의라고 합시다. 하버마스는 물론 후자에 속합 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랑스 혁명이래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자유주의에 접목하 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종족주의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럽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의 장에서 민족주 의는 종종 대중 선동과 조작을 수반했기 때문이지요. 나치즘은 좋은 보기입니다. 오 늘날에도 구 유고에서는 민족간의 분규가 참혹한 전쟁으로 계속되고 있고, 발칸반도 를 포함하여 동구 여러 나라에서 -- 서구 유럽에서도 -- 소수 민족을 둘러싼 증오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하버마스는 서구 국민국가의 역할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을 분 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족주의와는 다른 민족 형성의 전통에서 온 것이 지요. 시민권의 확산을 통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참여와 결사가 국민국가의 형 태로 제도화된 것이 보기입니다.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권리와 의무, 자유를 보장한 것은 보편적 지향을 가리킵니다. 이런 국민적 사회통합의 가장 좋은 보기는 복지국가 이겠지요. 문제는 이런 국민국가의 역할이 근래의 세계화 추세로 인하여 현저히 쇠퇴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을 객관적 추세로 받아드린다면, 우리는 적어도 두가지 질문을 던져야 하겠지요. 첫째, 경제의 세계화라 할까요 또는 초국가 적 기업들이 선도하는 세계화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하버마스 의 진단은 밝지 않습니다. 서구의 경우, 복지국가가 휘청거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 이 아닙니까? 실업과 사회적 격차도 도처에서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 서 위기 이론의 힘찬 부활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노동운동과 다 양한 사회운동을 통하여 국민국가의 형태로 제도화된 복지와 연대, 진보의 이념이,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라는 이중의 압력 에 부딪쳐, 약화되거나 마모되는 현실을 곤혹스럽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계화를 떠나 민족주의로 피신할 수 있 을까요? 또는 세계화라는 배에 편승하는 자세로 부국 강병의 논리를 들고 나올까요? 국제적 무한 경쟁에서 우리가 이겨야 한다는 논리, 세계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투박하지만 강력한 민족주의적 에토스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버 마스의 응답은 전연 다릅니다. 90년대에 들어와 우리가 발견하는 하버마스의 새로운 면모는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세계적인 정부, 세계적인 갈등 조정기구, 시민 연대 등으로 나가고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경 제의 세계화로 야기된 불균형과 모순은 종래의 국민국가 모델로는 더 이상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양육강식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계급타협과 복지를 가능하게 만든 국민국가는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이 있지만, 이제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국민국가 안에 내재된 보편주의적 가치를 진정으로 세 계적인 것으로 발전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근래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 보기로 하버마스는 유럽 연합에 대하여 적극적입니다. 국민국가로 분활되어 있는 개별 국가 시민들의 정체성을 유럽인의 정체성으로 발전시켜 보다 보편적인 규 범과 연대로 유럽통합의 문화적 기반을 다지려는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이지 요. 당연히 그는 유럽통합을 관세 협정이나 화폐 통합과 같이 주로 경제적, 행정적 관점에서만 보는 입장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똑 같은 논리로 그는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요.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서독 시민들이 공적 토론과 의 사소통으로 국민적 합의를 모으고 시민적 연대를 확산하는 것이 중요한데, 실제로는 법 위주의 행정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새로운 통일 독일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할 신뢰와 유대의 시민문화가 사정 없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지 요. 그 후유증이 오늘날 동서독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입니다. 여기에는 벌써 여러가지 메세이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한가지 만 집고 넘어 가겠습니다. 나머지는 뒤에 곧 다시 보지요.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19 세기적 부국강병의 논리로 우리가 통일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 제를 해결하려다 더 많은 문제와 부담을 미래에 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통일 의 구상은 오히려 지역의 평화와 안전, 이웃 나라 시민들 사이의 이해와 협력을 증진 시키는 지역 공동체의 구상과 더불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럽공동체의 큰 틀 안에서 독일 통일과 동유럽까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에서 우리는 이것 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세계화와 민족통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울러 통일에 대한 감수성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와 연대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촉구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민족 통일과 국민 주권 다음으로는 민족통일과 국민주권의 문제를 다룬 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버마 스는 여기서 민감한 문제의 핵심으로 직접 뛰어든 셈입니다. 그의 강의는 몇가지 중 요한 가정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북한에 관한 것입니다. 북한은 오 늘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 국제 환경의 변화도 비우호적이지만, 그럼에도 동독이 무너졌듯이 북한도 조만간 무너질 것으로 가정하기는 어럽다는 것이 그의 첫번째 가정입니다. 동독과 북한의 차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남한에 관련 됩니다. 그동안 남한은 군부 독재, 대외 의존, 불균형 발전 등으로 많은 진통과 갈등을 겪었지만 오늘날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경제적 번영도 같이 가는 획기 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그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남한은 이제 시민적 민주주의 의 기반 위에서 북한에 대해서도 여유 있게 사고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두번째 가정입니다. 셋째는 통일 방식에 관한 것이지요. 독일 통일은 실제적인 면과 규범적 인 면에서 한반도 통일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실제적인 이유로는 무엇보다 독일식 통일이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아울 러 통일 이후를 관리하는 능력에 있어서 남한은 아직 서독의 수준에 와있지 않다는 점도 고려되어야겠지요. 규범적인 이유로 중요한 것은 행정 위주의 통일 방식이 새로 운 공동체 건설에 필수적인 도덕적 자원을 근본적으로 황폐화시킬 위험이 크다는 것 입니다. 이 논의가 하버마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버마스의 논의는 사회문화적 차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는 선입관을 버릴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통 일 과정에서 경제적, 군사적, 국제정치적 측면은 핵심적이고 중요하지만 사회문화 부 문은 다루기도 어렵고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단견입니다. 마음의 통일은 커녕 반대로 장벽만 높아지는 통일은 수많 은 후유증을 가져옵니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올 가 능성도 있지요. 어떻게든 통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대체로 19세기적 부국강병의 힘 논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를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대내적인 평화와 통합이 깨지는 방식의 통일은 많은 화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9세기적인 국가의 시대에서는 이러한 균열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부국강병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안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 의 삶과 세계화가 직접 만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변 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국민주권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됩니다. 통일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 아닙니까? 이것을 군사적 정복이 아닌 민주적 방식으로 성취하 려 한다면, 무엇보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시민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으로 통일 에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하고 통일에의 의지를 모으는 것, 이것이 국민주권의 출발 점이 되겠지요. 이를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시민적 권리와 자유 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이렇게 형성된 연대와 협력으로 문제들을 집합적으로 풀어 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런 연대의 민족 정체성은 일차적으로는 문화적인 힘이 지만, 사실은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의 초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힘이 튼튼해야만 통일 과정과 이후의 문제들을 풀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것이 약하다면 시장의 불평등이나 행정의 수단성 등에 의하여 동질성은 쉽 게 침식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보면 하버마스가 모든 민주주의 이론과 입헌 국가론의 근저에 있는 국민 주권의 개념을 언술 이론의 틀로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많은 암시를 줍니 다. 그에 의하면, 국민주권의 최후의 보루는 시민사회와 공론의 장입니다. 이 단순하 고 명료한 명제가 그로 하여금 독일 통일을 매섭게 비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독일의 경우 통일의 정당성은 형식상 연방 의회 선거를 통하여 확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동서독 다수의 유권자들이 콜 서독 총리가 이끈 정당들에 투표했습니다. 이런 외 양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에 의하면, 통치 엘리트와 관료가 통일 과정을 일방적으로 밀고 갔을 뿐 공론의 장은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일상적인 정치와는 달리 통일처럼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중대한 사안에 관하여 행정 위주의 발상으로 정당성을 얻으려 한 것 자체가 단견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버마스는 통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통일은 모호한 민족 감정에 의존하기보다 시민적 연대와 자유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형성으로 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기술관료주의와 다른 실천적 지향을 강하게 갖습니다. 기존의 헌법이나 집권자의 통치 행위 또는 선거 절차와 같은 수준으로 국한시켜 국민 주권을 해석하는데 대하여 하버마스는 비판적입니다. 오히려 국민주권의 개념을 언술 이론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급진적 민주주의의 지평을 열고자 합니다. 통일은 여기서 안성마춤의 주제가 아닌가 생각 됩니다. 통일은 새로운 정치공동체에 참여할 시민들 이 민주적 자기 입법의 주체가 되어 그들의 의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이 발상은 우리의 분단 현실과 통일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기존 의 낡은 고정 관념과 이데올로기적 구속을 떠나 문제를 조명하는 데 신선하고 유용한 충격을 주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버마스는 공개 강의를 통하여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에, 또 바람보 다는 이른바 햇빛으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견해에 분명히 손을 들어준 셈입니다. 그가 제안한 것은 독일 식의 성급한 통일 여정이 아닙니다. 반대로 '국가 연합'과 같은 방식을 통하여 가는 점진적이고 완만한 통일 방식을 제안 하였습니다. 쌍방의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어느 집단이건 소외됨이 없이 자유로 운 의사소통으로 국민주권에 참여할 수 있는 보편성과 개방성을 강조했습니다. 이것 은 몇사람의 잘 훈련된 전문가나 관료가 매스터 풀랜을 세워 기회가 왔을 때 이것을 일사천리식으로 밀어부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현실 적용의 문제점 하버마스의 제안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국가 연합'과 같은 느슨한 형태로 남북한 쌍방의 협력에 의해 단계별로 진 행되는 긴 과정의 점진적 통일방안을 추진한다면, 이것은 분명 역사에 선례가 없는 새로운 통일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례가 없는만큼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고 신중해야 할 쟁점들이 많지요. 그러 나 한번쯤은 상상력을 동원해볼만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할 때 어떤 문제가 제기될 것이며 그럼에도 이것이 진행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보기로 경제 문제를 살펴 볼까요? 통일이 되고나서 서독의 경제학자들은 동 독의 경제가 그래도 괜찮은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부실했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맞는 말이겠죠.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동독 경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통 일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콜 수상이 칼자루를 쥔 구체적인 통일 방 식 때문에, 서독에 비하면 낙후되었지만 그래도 동구권에서는 좋은 수준에 있던 동 독의 경제가 하루 아침에 전면적으로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부담을 서독이 온통 뒤집어쓰게 되었지요. 그 때 만일 서독이 급격한 동독의 흡수로 나가지 않고, 하버마스가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공존 공영을 지향하는 점진적 방식을 택했 더라면 이런 대규모 실업이나 파산 등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경험은 상당히 교훈적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질문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때 점진적 방식을 택했다고 합시다. 동독 경제의 생산성을 높히는 것이 통일 비용을 줄이고 통일 이후의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서독이 동독에 대하여 경제 협력과 지원을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반드시 통일에 긍정적인 것이 될까요? 체제가 안정화되 면 통일은 더 멀어지는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유사한 발상으로 남북한 의 경제교류와 협력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는 사이에 만일 자유화의 효과 가 북한 사회에 퍼져 체제 관리가 어렵게 된다면, 이것은 또 다른 흡수 통일로 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요? 차제에 하버마스가 강조했던 '차이'의 문제도 뒤집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 다. 그는 북한과 동독의 차이, 남한과 서독의 차이를 부각시켰습니다. 남한은 오늘 날 세계를 향하여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지만 북한은 그 반대입니다. 아마도 그 덕 분에 북한 체제가 오늘날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상 대적으로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고 내부적으로는 결속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 게다 가 동독과 동유럽의 전철을 본 집권층이 남한이 주도하는 흡수 통일의 가능성에 대 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남한은 서독보다 더 지능적인 게임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훌륭한 리더십이 있으면 이것 이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남한과 북한이 일대일로 티격태격하 는 꼴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과 편견만 높아지고 있지요. 어쩌면 이런 호전적인 게임 양식이 북한 집권층으로서는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 는지도 모릅니다. 전의를 살리면서 내부 단속을 철저히 할 수 있으니까요. 하버마스 는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이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국민 국가, 민족주 의, 세계화 등에 관한 하버마스의 진단과 처방은 사실 유럽적인 상황에 근거한 것입 니다. 혈통보다는 시민적 연대를, 부국강병의 국가 논리 보다는 지역 평화와 안전을 그가 중시한 데는 유럽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을 한반도와 동아시아 에 적용하기에는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민족은 분명 문화적으 로 가꾸어진 공동체이지만,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민족의 뿌리가 매우 깊고 오래된 것이지요. 게다가 이곳에는 국가주의적 전통도 강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유럽 연합과 같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요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차이들을 의식하면서, 또 '통일은 질풍처럼 다가온다.'는 표현에 암시되 어 있는 우연의 몫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일단 하버마스의 국민주권 프로젝트를 발 전시켜 보려고 합니다. 즉 기회가 왔을 때 우리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엄청난 부담과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보 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전진적인 통일 방안을 일관되게 걸어간다고 가정 해 보려고 합니다. 그 방법론적 전제위에서 우리가 건너야 할 관문이나 난제가 있다 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북한 경제의 개방과 국제 협력 첫번째 질문은 위기에 처한 북한 경제를 살려내기 위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지원 과 협력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북한 경제가 과연 정상화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공존 공영의 길로 나갈 때 맨 처음 부딪치는 난관입니 다. 북한은 그동안 선별적 개방을 위한 법적 제도적 준비를 해 왔고 나진, 선봉 등 이른바 두만강 프로젝트 등에서 보듯이 국제 경제 협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고 한국 경제계의 참여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 나 그들은 남한 정부를 상대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하고 거부적입니다. 이로 인해 여 러가지 난맥상이 노정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얼마전 한반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핵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우여곡절 끝에 관리 가능하게 되었듯이, 현재의 난조도 머지않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일단 전망해 봅시다. 그러면 문제는 북한이 어느 정도의 범위와 속도로 개방을 추진할 것이며, 국제 사회가 어느 정도로 북한 경제 재건에 협력할 것인가에로 모아집니다. 일단 가닥이 잡히면, 우리로서도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즉, 명분과 실재가 다른 모호한 게 임을 하지 않고 민족 공영의 대원칙에 의하여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우방 국들의 정책을 적극 환영해야 하고, 국내 기업의 북한 진출도 적극 권장해야 하겠지 요. 이렇게 해서 북한 주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 그 만큼 민족에게 이익이 되고 통일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매스미디어의 권력이 폭증하면서 이것이 남한 사회의 분위기를 끌고 가는 것을 봅니다. 미디어는 대체로 보수주의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햇빛에 의한 북한의 연착륙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남한 의 여론이 확고하게 변할 수 있을지 의문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압니다. 이웃나라 일본 을 보면 정치의 보수화는 더 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현금의 극우 보수화는 80 년대의 급진화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극우 집단의 목소리가 큰 것 같지 만, 변화를 요구하는 세대가 이미 사회의 중간 허리 이상으로 올라와 있지요. 일본의 학생운동은 60년대 말에 끝났지만 우리는 줄곧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일본 의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차이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풀려 간다면, 북한은 지금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개혁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하겠죠. 준거로 삼을 수 있는 모델이 주변 에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에 이 변수는 북한에게 그나마 다행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북한은 미국,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일본의 전쟁 배상금을 포함하여 미국, 일본, 한국 기업의 진출, 국제 차관 등으로 경제를 재 건하려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할 때 북한 경제가 과연 일어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호적인 요인 으로는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이 많다는 것이지요. 교육 수준은 높고 임금은 싸기 때 문에 투자의 좋은 조건이 될 것 같습니다. 또 남한 노동자들이 잘 살아보자고 열심히 일했듯이 북한 노동자들도 높은 노동 의욕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처럼 독재를 수반했지만 효율적인 발전 지향형 관료제가 북한에 있는지 불분명합니다. 장기 독재에 따른 체제의 경직성과 부패가 관료제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다면 정치의 모순이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을지도 모르지요. 북한의 엘리트를 개혁 파와 보수파로 구분할 때, 개혁파가 사회구조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도 우리로 서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통찰에 접하게 됩니다. 북한의 경제 건설을 위해서는 물 론 자본이나 기술, 공장이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생산 요소들을 효율적으로 투 입하는 기업가적 정신을 갖춘 인적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육성도 문제 이지만 이들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과 틀이 갖추 어지가도 중요합니다. 만일 정치 엘리트들이 관료제를 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부패 현상이 만연되어 있다면, 설사 국제 협력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경제발전은 기대하 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깨진 독에 물붓기 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단 북한 경제가 뜨기 시작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인적 자본의 형성과 공급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여기에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할 중요한 몫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회 모든 부문에 관련됩니다. 결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통일 이후 북한의 엘리트 계 층을 모두 폐품 처리하는 식이 아니라, 공존 공영의 길로 가는 통일을 모색한다면, 북한 사회를 관리하고 국제 사회에 적응시키는 인적 자본의 형성이 모든 발전의 관건 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적 자본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단순한 자본이나 기술과는 다 릅니다. 기술과 함께 가치와 윤리가 들어갑니다. 이 점이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 입니다. 국제사회가 인적 자본의 형성을 돕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할 때, 그 효과 가 북한 체제를 위협한다고 할 때 북한 집권층은 두려워하겠지요. 실제로 북한 경제 가 활력을 되찾고 개방화가 진행되면서, 중간층의 눈이 뜨이고 물질적 가치관이 스며 든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이들이 북한 체제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우리식'으로 이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다른 식으로 사는 것도 좋다면 차라리 남한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북한 체제의 내파 를 불러올 수 있는 전복적인 힘이 됩니다. 북한 체제의 안정화 우리는 여기서 두번째의 불확실성에 직면합니다. 즉 국제 협력으로 북한의 경제 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것이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냐, 아니면 반대로 안으로 부터의 체제 붕괴를 재촉할 것인가의 분기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경제 협력의 결과 가 북한 체제의 안정화로 이어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 법론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통일 프로그램에 이미 내장된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경 제 협력은 하되 체제의 안정화는 막아야 한다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투명성과 배치되 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북한 내부의 동태에 의해서 경제 성장이 체제 안정화 대신 내 파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안정화란 무엇일까요? 안정화란 쉽게 말해 북한 주민이 북한 정권을 믿 고 그들의 리더십 하에서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지요. 그러나 동독이 무너진 당시의 경험은 정반대였습니다. 동독이 무너진 이유는 결국 동독 주민이 문제 해결을 서독 정부에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즉 정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것이 매 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보듯이, 안정화를 재는 하나의 척도는 국민들의 변화 욕구와 체제의 성취 능력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없 으면 체제는 일단 안정화됩니다. 좀 더 정치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안정화의 원칙은 서로가 상대방의 체제 불안 을 야기하거나 유인하는 행동을 자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냉전적 대결 풍조에 젖은 사람은 북한 체제의 안정화에 도움이 되 는 모든 행동을 이적 행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이런 가정으로는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모든 국제 협력을 막아 야 하고 남북한 정부간의 접촉도 반대해야 하지요. 우리가 안정화에 관하여 말할 때 중요한 점은 상대방 체제의 안정화를 '적극적으로' 돕기보다는 체제 불안을 야기하는 행동을 '소극적으로' 자제한다는데 있습니다. 체제가 안정화되는냐 못하느냐는 기본 적으로 각 체제 내부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예컨대, 북한이 남한의 사회 문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심지 어 남한 사회 내부의 봉기를 선동한다면, 이것은 명백히 안정화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만일 남한이 북한 체제의 붕괴가 임박하고 있음을 선전하거나 북한 사회 내부의 봉기를 선동한다면 이것 역시 서로를 벼랑 끝으로 모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공존공영의 통일 목표를 향하여 서로의 체제를 존중한다는 것은 이 런 행동을 목적 의식적으로 자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안정화의 보다 깊은 뜻은 양체제가 서로를 향해 변해가는 것을 함축합니 다.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확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대 남한이 북한을 의식하여 사회보장제도를 증진하듯이, 북한이 남한을 의식하여 정치 제도에 경쟁성과 대표성을 도입하는 개혁을 한다면 이것은 쌍방의 안정화의 좋은 보기가 될 것 같습니다. 아울러 남북한 주민이 공유할 수 있는 기본 권리를 통일 한국의 시민권 으로 발전시켜 가는 노력도 매력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체제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주민의 기대 수준에 부응하고 국제화의 추세에 적응 하면서 체제개혁을 솜씨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이 조건 역시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 관료제는 자전거 바퀴 의 살처럼 수평적으로는 연결되지 않은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때문에 초기의 경제 성장을 관리하고 촉진하는데는 유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른바 '내 포적' 발전단계로 진입하면, 그 구조로는 체제의 복잡성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권력의 분화와 함께 민주화가 언제 어떻게 도입되느냐가 여기서도 중 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정화 문제를 다룰 때,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문제는 국경의 관리 문제이지 요. 동서독 관계에서 현실로 드러났듯이, 만일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과정에서 북한 주민이 대거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결과가 쌍방에 엄청난 부담과 긴장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공존공영의 점진적 통일을 위해서는 이런 파국 적 사태를 막고 관리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런 제도 적 장치로 쌍방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방안의 하나가 이른바 '국가연합'이 아 닌가 생각됩니다. 현상 고착화의 위험 일단 여기까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에 부딪치는 문제는 현상 고착화의 위험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많은 진통과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냉전논리에 따른 역풍을 누를 수 있는 고도의 정치력과 합리 성이 쌍방에게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교류와 협력이 역풍을 뚫고 계속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하여 남북한 쌍방에 안정된 정치체제가 들어서고 경제성장이 계속된다 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통일은 왜 필요한가의 질문에 부딪칩니다. 쌍방의 집권층 과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지 않을까요? 이들이 기득권을 양보 할 용의를 가지고 통일과정에 임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정 치학의 상식에 의하면, 현상 고착화의 위험이 큰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 의식에도 변화가 올지도 모릅니다. 분단이 모든 한(恨)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통일이 모든 문제 해결의 알파요, 오메가로 간주 되는 분위기라면 통일의 당위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경제성장이 일어나고 체제의 안정화가 이룩된다면, 타산적, 공리적 가치가 사회에 확산될 것이 고 그러면 통일 지상주의적 감성은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동아시아에 새로운 지역협력체계가 형성되어 시민사회간의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된다면, 근대적 의미의 영토주권에 대한 집념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이런 개연성이 현재 시야 에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존공영의 점진적 통일 방안을 방법론적으로 일관되게 추진한다면, 이것이 성공을 거둘수록 현재와 같은 절박한 통일에의 욕구는 오히려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현상고착화에 이 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버마스의 국민주권이론을 사려깊게 활용해야 하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독일식 합병 모델을 떠나 공존공영의 통일 방안을 추구한다 면, 이것이 민족전체의 이익과 화합에 어울리는 길이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남북한 쌍방의 정치체제는 국가연합의 틀 안에서 각각 자율성을 누리게 됩니다. 문제는 이 자율성과 통일을 어떻게 양립시키느냐에 있습니다. 해결의 열쇠는 평범한 진리, 즉 쌍방체제를 통일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은 결국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는데 있습니다. 국민주권은 여기서 분단 민족의 통일 을 향한 민족자결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주제에 관한한, 우리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분단을 인위 적인 것으로 느끼고 통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정서가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오랜 통일국가의 전통을 지녀왔기 때문이지요. 비록 근대적 국민국가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로 형성된 민족 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통일 정서가 권력을 정당화시키 는 상징으로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강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요. 나치즘의 악몽 때문에 민족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많은 지식인이 거부했던 서독에서 조차, 여러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통일이 가까운 시일에 이루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절대 다수는 통일이 되는 것을 바람직스럽게 보았습니다. 특히 나이가 든 집단일수록 이 경향은 현저했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서독 보다 동독의 주민들 사이에서 민족적 정서는 더 강했다고 봅니다. 때문에 이들은 통일을 요구했고 서베를린으로 대거 몰려나왔습니다. 이들은 서독인의 소비수준을 탐냈지 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 다른 민족이라면 이런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죠- 동등한 대우와 삶을 누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는 점입 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곧 무너졌고 이에 따른 후유증이 심각해졌습니다. 점진적 통일 방안은 실현 불가능한 소비의 환상으로 국경이 무너지는 것과 같 은 이런 사태를 막는 장치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동시에 현상고착화의 경향을 방지할 수 있도록 남북한 주민의 의식에 강하게 침 윤되어 있는 통일정서와 민족적 정체성을 육성하고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지요. 이를 위한 관건은 결국 사회문화 프로그램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대중매체의 역할은 중요하지요. 민속, 역사, 전통, 예술, 문학, 종교, 음악, 연극, 언어, 교육 등 많은 영역에서 남북한 체제가 공통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적극 활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핵심은 국가연합과 같은 점진적 통일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제들은 쌍방의 주권을 전제하고 합의제에 의하여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 향으로 처리되어야 하겠지만 사회문화 영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영역은 상대적 으로 정치적, 경제적 부담은 적은 대신 마음의 공동체를 넓혀가는데 핵심적이기 때 문에, 처음부터 쌍방에 의무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통일과정에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 문화적 하부기반을 넓혀가려는 프로그 램에 대해서는 쌍방의 합의가 상대적으로 용이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두말할 필요없이, 이 프로그램들은 개방된 공론의 장에서 검증되고 토론 될 때 비로소 오래가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주권은 음 모와 중상모략 대신 이성과 합리성이 보장되는 공론의 장을 전제합니다. 그러면 사 회문화적 힘이 밑으로부터 결집될 수 있겠지요. 그 효과가 정치, 경제, 군사 영역 등으로 넘쳐 흘러가 현상고착화를 막고 통일을 밀고가는 모델을 생각할 수 있습니 다. 민족자결권의 문화적 해석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택했던 통일여정에서 부딪치기 쉬운 세가지 관문을 검 토했습니다. 첫번째 관문은 북한에 경제성장이 과연 일어날 것인가 입니다. 이를 위 한 조건의 하나로서 인적 자본의 문제를 강조했습니다. 두번째 관문은 남북한 교류 과정에서 북한이 체제안정을 이룩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세번째 관문은 그 과정에 서 현상고착화의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었죠.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민족주의의 문 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민족 문제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쟁점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특히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통일과제는 당위와 현실에서 근거가 명확한 것이지요. 하버마스도 지적했지만,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민족이 강대국에 의하여 분단되었을 때, 그것도 분단을 자초한 원인 제공도 없이 일 방적으로 분단되었을 때, 통일을 향한 운동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리주의가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민족자결권에 주목할 필요가 있 습니다. 그러나 민족자결이 폐쇄적 민족주의를 가져온다면 시대착오가 아닐까요? 민족 지상주의는 어디서나 이웃 나라와 심한 긴장을 조성하며 이들의 폐쇄적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민족주의가 충돌하면 그 사이 에 있는 우리가 큰 피해를 보기 쉽다는 역사적 경험도 기억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 가 부국강병의 민족주의로 통일을 추진한다면 주변국이 꽤 긴장할 겁니다. 남북한의 군사력은 결코 미미한 수준이 아니니까요. 해답은 '개방적' 민족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개념에 있는 것 같습 니다. 여기서 '자유주의적'이란 뜻은 자유주의의 시각을 도입하여 민족자결의 권리 를 재해석하려는 입장을 가리킵니다. 그 핵심은 모든 개인은 민족적 정체성에 입각 한 삶의 양식을 선택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민족 자결의 뜻을 영토주권이나 국가주권에 연결시켜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보다 개인의 문화적 삶의 양식에 관한 선택권으로 심화시켜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중요 한 인권으로 보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균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통일을 위해서 는 이를 끌고 가는 에너지가 필요하지요. 이 힘이 강해져야 앞서 언급한 현상고착화 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버마스의 시각을 도입하자면, 통일정서가 지 나치게 종족주의적인 것이 되면 부작용이 크다는데 있지요. 통일 지상주의적인 멘탈 리티도 문제지만, 자칫하면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띌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 서 강한 에너지를 시민적인 문화로 여과시켜 발산시키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네번째로 부딪치는 난관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종족주의적인 의식과 이에 기반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시민적이고 문화 적인 코드로 길들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밟아 온 통일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으려면 이런 개방적 민족주의에 눈을 떠야 합 니다. 그러면 통일이 필요한 가장 분명한 이유는 문화적 삶의 양식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며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 성이 굴절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민족분단의 극복과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적 자긍심과 자기 존중의 조건이기도 합니 다. 즉 남북한 주민은 그들이 공유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풍요롭게 발전시켜 가는 것 이 동아시아에서, 또 세계화 시대에 의미있고 보람찬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통일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결권의 해석은 부국강병의 이미지로부터 올 수 있는 모든 부담을 털어 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협력과 평화와도 어울립니다. 맺는말 하버마스의 강의를 이렇게 한반도의 통일과정에 적용해 본 것은, 모두에 적었 듯이 상상에 기초한 것입니다. 자유로운 상상은 모든 이론의 기초가 되지요. 그러나 이 상상은 몇가지 가정에 근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문화민족'의 전통에 관 련됩니다. 우리는 지난 30여년간 돌진적인 방식으로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매우 성공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돌진적 산업화의 부작용과 냉전체제의 폐해를 깊이 반성 해야 할 때입니다. 대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중국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의 교량 으로서 우리 민족이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발전시켜온 전통을 계승하고 재정립하 는 일이지요. 그러면 통일의 목표는 평화주의를 잇는 문화국가로 떠오를 것입니다. 두번째 가정은 우리사회의 내부 동태에 관련됩니다. 점진적 통일과정에서 자유 로운 의사소통과 계몽에 근거한 국민주권의 역할을 기대한 것은 그럴만한 사회학적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사회에서는 사회정 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근대화 과정을 따라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건강한 민중성을 획득한 세대가 이미 사회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 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편견과 터부를 방법론적으로 회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 잠재력이 잘 개화되기에는 토양이 척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 력에 취한 언론과 그들이 펼쳐논 마당에서 활개치는 극우적 보수주의에 머리를 흔드 는 사람들도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땅이 움직이면서 중용의 원리가 새롭게 구성될 것으로 봅니다. 마지막 가정은 타자로서의 북한의 의미입니다. 북한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이 지만 또한 우리 남한의 눈으로 일방적으로 채색된 타자에 속합니다. 북한에 비쳐진 남한도 마찬가지이지요. 마치 서구 제국주의가 그들의 눈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 동의 문화를 왜곡하고 식민화했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대화가 없지요. 이 대화를 복원하는 것이 국민주권의 관점에서 시급한 과제라고 봅니다. 진정한 대화를 복원하려면 타자로 하 여금 그들의 목소리를 내게 해야 합니다. 남한은, 그리고 북한은 이 소리를 서로 마 음을 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타자로부터 배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버마스의 국민주권개념은 이처럼 상호 평등의 보편적인 대화 윤리를 밑에 깔 고 있는 개념입니다. 서로가 상대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는 경험적인 문제입 니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그들의 온전한 목소리로 참여하는 대화의 지평을 여는 것 이지요. 한쪽은 다 쓰레기요, 다른 쪽은 보물이라는 흑백논리로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발견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그만큼 확고해지겠지요. 그러나 차이점을 발견한다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다 원사회이고 이에 맞추어 국민주권도 발전해야 할테니까요.이를 통해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을 발견한다면 국민주권은 그만큼 다원화되고 복합적인 것으로 발전할 것입니 다. 말하자면 차이와 더불어 공존하는 통일모델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현대와 탈현대를 잇는 의미심장한 프로젝트를 발견합니다. 하버마스 이론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심층적인 메세이지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