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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4일 토요일 오전 12시 37분 31초
제 목(Title): 강수돌/경제와 사회, 그리고 생활문화 


경제와 사회, 그리고 생활 문화 - 경제위기에 대한 비경제주의적 이해

 

 강수돌, 고려대 교수, 경영학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다. 하나는 최근에 우리가 직면한 'IMF 
신탁통치 시대'라고도 불리우는 경제위기를 가능한 한 비경제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경제주의적 관점이란 경제 현상, 
특히 경제위기를 설명할 때 생산과 수출, 소득과 소비 등의 계량화된 수치를 
중심으로 삼는 입장에 대해 진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구조적인 것과 행위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사회문화적인 것 등을 
통일적으로 고려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위기란 결코 
외환 위기나 기업의 수익성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삶의 위기이다. 왜냐하면 
경제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하나는 
이러한 경제위기, 즉 삶의 위기를 올바르게 극복하고 희망 있는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대안의 모색 과정에 있어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비경제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우리가 내면화해온 온갖 편협한 가치관과 신념 체계, 경제 발전의 방법론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 태도, 그리고 당연시해온 생활방식 전반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다시 허리띠를 세게 졸라매더라도, 그리하여 설사 또다시 
몇 년 전의 흥청거리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손 치더라도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삶의 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닥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승승장구 
잘 나가게 된다손 치더라도 누구인지는 모르나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는 현재의 
우리와 같은 삶의 위기를 심하게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좁아진 지구촌 전체가 삶의 위기를 진정으로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 모색 과정에서 우리가 더 이상 기존의 경제주의적 패러다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발전시켜 나가는 진지한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2. 경제위기와 수출지상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과서를 통해 학습해온 수출지상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부존 자원이 부족하고 자본과 기술도 빈약하므로 
오로지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양성하고 활용하여 이를 통해 상품을 
값싸게 만들어 가급적 외국 돈을 많이 벌어들여야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사회가 
온다고 했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70%가 산"인 우리 
국토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외국 돈을 빌어 
와서 산을 깎아내거나 바닷가를 더렵혀서라도 수출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고 
그 속에 수많은 노동력을 데려다가 값싸게 열심히 일시키는 것만이 나라가 사는 
길이라고 소리높여 외쳤다. 이 논리에 따르면 비교적 자급자족적인 농어업은 
가능한 한 축소되고 수출산업화에 도움이 되는 광공업, 제조업은 가능한 한 
확대되어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러한 논리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말까지 
약 30년 정도에 걸쳐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총생산(GNP)과 해외 수출액은 
날로 증가했고 1인당 국민소득과 국민의 소비 수준도 날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방식도 드디어 1990년대에 이르러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대외적인 측면을 보면, 이른바 선진국으로부터는 덤핑 판정을 받는 
등 통상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고, 경쟁국이나 후진국으로부터는 끊임없는 
가격경쟁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민주 노동운동의 
급성장으로 더 이상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병영적 노동통제 등에 의한 경쟁력 
확보가 불가능해졌고, 국가도 더 이상 예전처럼 재벌 대기업과 사이좋은 유착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정치경제적 
정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이런 것이다. 첫째,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70%가 산"이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을 단지 약점이라고만 파악했기에, 그 자체가 
지닌 엄청난 가치를 무시한 채 '수출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오로지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왔다는 점이다. 동쪽, 서쪽, 남쪽의 대부분의 
바닷가에는 공단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수와 폐유가 쏟아져나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1) 수산업이나 어업조차도 외화 획득에 눈이 먼 나머지 
남획을 하거나 거대한 인공 양식장을 곳곳에 만들어 마침내 해양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바닷가는 건강한 먹거리를 얻는 곳, 
나아가 호연지기나 청운의 꿈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기름내 나는 곳, 나아가 돈 
냄새만 우러나오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아직도 부분적으로 예외는 있지만, 그 
깨끗하고 건강하며 아름답던 "3면의 바다"는 이제 대체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70%가 산"이기 때문에 산을 마구잡이로 깎아내거나 농경지를 뒤집어엎어, 
'고용창출과 수출신장, GNP 증대'에 이바지할 공장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였다. 산은 
훼손되고 농경지는 급속도로 줄었다. 이와 더불어 농촌공동체도 빠른 속도로 
파괴되었다. 그나마 농업이 상업화되면서 제초제, 농약, 화학비료의 사용이 농민들 
스스로에게 당연시되었다. 이것은 다시 농경지를, 아니 땅과 물 모두를 훼손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래의 나은 삶에 대한 꿈도 사라지고 건강한 먹거리도 
사라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경제위기, 즉 삶의 위기 중 
한 측면이다.

둘째, "양질의 값싼 노동력" 문제이다. 수출 경쟁력 증대라는 이름 아래, 모든 
사람들이 건강한 인격체나 지혜로운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장려되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오로지 승리자가 되는 방법만을 
배우도록 장려되었다("일등·일류주의, 권력지상주의, 명문학교 콤플렉스"). 특히 
사람들이 수출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양질의 노동력"으로 길러질 수 있도록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온 사회가 '공장'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나는 노동 능력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 자세의 측면이다.2) 노동 능력이란 건강한 육체는 
물론 국어, 수학, 영어, 컴퓨터, 기술 등의 실력이며, 노동 자세란 작업 명령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복종하며 일할 수 있는 태도이다. 대부분은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아니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부모님과 선생님, 어른들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일)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여기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노동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이며,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은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태도, 즉 노동 자세를 가다듬기 위함이다. 특히 한 학기나 한 학년이 끝나면 몇몇 
학생들이 우등상장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바로 그 속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 "…위 학생은 행동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라는 상장 문구에서 "행동이 방정하고"는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노동 자세가 올바로 길러지고 있다는 뜻이며, "성적이 우수하여"는 노동 능력이 
뛰어나게 길러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소수의 우등생을 모범으로 하여 
수많은 다른 학생들이 이를 따르도록 '보상을 통한 강제'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양질의 노동력"을 위한 노동 능력과 노동 자세의 양성 
과정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건강한 인격체나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기 위한 
감성과 이성, 분별력과 판단력, 주체성과 생명력, 자율성과 창의성의 연마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갈수록 마음 속의 꿈은 파괴되고 
자기 목소리는 죽여야 하며, 교과서 외적인 것보다는 교과서 내적인 것을 더 많이 
익혀야 하고 더불어 살기보다는 남을 짓밟고 자기만을 내세워야 하는 한심한 삶을 
억지로 살아야 한다. 경쟁력 향상이라는 이름 아래. 바로 이 점이 인간 내면 
세계의 파괴이자 또다른 삶의 위기를 이룬다.

 

3. 경제위기와 애국주의

 

여기서 말하는 애국주의란 애국심에 눈이 어두워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자신이 사는 땅과 사회를 사랑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랑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편협화되어, 마침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땅과 사회를 적대시 또는 경쟁 상대시하는 경우, 우리는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마침내 그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맹목적인 경쟁과 분열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전쟁까지 부른다. 역설적이게도 애국주의가 경제위기 
또는 삶의 위기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자본은 근대 민족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간단히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본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에 국가의 힘이 필요하다(공권력으로서의 국가). 다른 하나는 
자본이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에도 국가라는 경쟁 단위가 
필요하다(경쟁 단위로서의 국가). 

먼저, 공권력으로서의 국가란. 국가가 자본을 위하여 예컨대 새마을 운동 같은 
것을 통해 이촌향도를 조장하여 광범위한 노동시장을 창출하다든지, 양질의 노동력 
양성을 위해 곳곳에 학교를 세운다든지, 노동쟁의를 합리적으로 다스리고 
'산업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든다든지, 부의 불평등과 사회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복지 정책을 실시한다든지 하는 역할을 말한다.

반면에 경쟁 단위로서의 국가란,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자본 일반이 노동 일반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데에 있어 국가라는 단위가 매우 중요한 분할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치는 간단히 이렇다. A라는 나라와 B라는 나라 사이의 
자본주의적 경쟁 관계, 즉 자본A : 자본B 사이의 경쟁 관계는 자본a/노동a : 
자본b/노동b 사이의 상대적 경쟁력의 크기에 따라 좌우된다. 이것은 달리 보면 
노사관계A : 노사관계B 사이의 경쟁력이고 그것은 자본 A와 B 중에서 어느 것이 
자기의 노동을 확실히 관리하고 통제하느냐, 즉 어느 나라 자본이 자국 노동의 
주체성을 확실히 장악(지배)하느냐에 따라 노동생산성과 국제경쟁력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설령 자본A가 경쟁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자본 
자체가 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세 또다른 자본 C가 생길 
수도 있다. 문제는 자본끼리의 경쟁 관계가 지속될수록 각 자본들은 각각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경쟁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어떤 개별 자본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자본 일반의 노동 일반에 대한 지배력은 계속 유지, 강화된다는 
점이다. 결국 자본간 경쟁관계는 자본주의 지배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형태일 
뿐이다. 즉, 자본 일반이 노동 일반을 나라별로 갈라놓고 서로 경쟁을 시키게 되면 
나라별로 노동과 자본이 협동하여 애국주의 깃발 아래 다른 나라와 싸우게 되므로, 
바로 그 과정에서 각 나라별 자본은 각각의 노동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고('참여와 
협력'의 확보), 따라서 자본 일반은 그 지배력을 그만큼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3) 이것은 마치 어떤 행사 때, 사회자가 조별로 박수를 쳐보라고 하면서 
조별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참여자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남들이 모두 경쟁하는데 우리만 게을리 하면 패배하지 않느냐" 하는 논리는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목소리이든지 아니면 문제의 줄기와 뿌리를 
잘못 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 결국 자본 입장에서 본다면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제 경기(스포츠 전쟁)는 그 자체로 엄청난 초국가적 사업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자손손 국가별 애국주의를 장려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고리가 된다.

이와 같이 시장지배력을 둘러싼 자본 사이의 경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쩔 수 
없는 외적 강제로 보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자본이 자기 몸을 불려나가고자 하는 
내적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되도록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자!"라는 식으로 '애국주의'에 흠뻑 빠져, 자본 
사이의 경쟁에 노동이 동참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몸 불리기를 
도와주는 일이다.4) 자본의 증식이란 자본이 노동을 매개로 자기 몸을 불려나가는 
것이므로, 바로 이것이 노동에게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많은 경우 
물리적 생명 자체의 죽음도 의미하지만(산업재해, 과로사), 더 중요한 측면은 살아 
움직이는 주체적 역량의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위기, 
삶의 위기의 본질이 아닐까?

 

4. 경제위기와 외자 유치

 

최근에 우리나라의 경제위기가 왜 하필이면 '외환위기'로 나타났는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입장들이 나오고 있는 반면에, "외자 유치를 원활하게 해야지만 
외환위기로 대변되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돈이 될 
만한 공기업을 골라내어 해외 자본가들에게 매각하기로 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배자들은, 지금까지 애국주의에 길들여져온 국민들이 "왜 우리나라 
기업을, 그것도 수익성 높은 공기업을 외국 자본에게 팔아 넘기려 하느냐"며 
걱정을 하자, "웬 쓸데없는 걱정이냐! 외국 자본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제거해야 
한다"며 바로 그 애국주의를 호되게 나무랐다. 애매한 국민들은 이래도 얻어맞고 
저래도 얻어맞는다.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은 98년 7월 3일에 공기업 민영화 계획을 밝히면서, "해외 
투자자를 참여시킴에 따라 수요자가 그만큼 늘어나면서 공기업의 가격을 높일 수 
있다"고 하여 공기업 해외 매각 추진에 대한 배경을 친절하게도 경제학 원론에 
기초하여 설명하였다. 특히 한국전력과 담배인삼공사도 값만 제대로 쳐주면 외국 
자본가에게 언제든지 팔기로 하였는 바, 이제 애국심에 불타는 국민들이 제아무리 
국산 담배를 많이 애용하더라도 더 이상 애국이 아닌 시절이 다가올 판국이다.

우리가 보기에, 외자 유치가 경제위기, 삶의 위기와 맺는 관련성이란, 그 출처가 
외국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이 민중과 맺는 관계가 잘못되는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외자(외국 자본)든 내자(내국 자본)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물론 내자에 비해 외자는 대체로 그 운동 반경이 훨씬 더 클 뿐만 
아니라, 운동 속도나 기동력, 융통성이 더 클 것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 차원에서 
움직이는 노동 입장에서 보면, 그에 마땅히 대응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외자 유치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는 것인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민중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능력을 갈수록 많이 잃어버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만큼 삶의 과정 자체가 외적인 힘에 대해 종속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현재 세계에는 약 4만개 정도의 다국적기업이 있어 전세계의 정치경제를 
쥐고 흔든다. 또한 수십조 달러 규모의 세계금융자본은 하루에도 지구를 수십 
바퀴씩 돌며 순식간에 높은 수익을 뽑아가려 하고 있다. IMF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세계 자본의 대변자이자, 동시에 단기고리채 자본이 아니던가. 이러한 거대 
권력체인 자본 앞에 특정 나라의 생산 조직과 민중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은 
자립성의 상실과 종속성의 강화로 귀결되고, 이것은 결국 민중이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게 삶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의 위기, 즉 삶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은 그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의사결정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객체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빌려 오는 돈은, 돈과 함께 정치·경제 및 사회·문화 운영의 방식까지 그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고자 한다. 이렇게 외자라는 빚을 얻어 빚을 
갚아나가는 일이 일상화되면, 우리의 후손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름대로의 
독자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물려받은 빚을 갚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운명, 즉 삶의 위기 그 자체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세대의 삶의 위기가 세대를 뛰어 넘어 대대손손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그런데 한국 노총이 스스로 외자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다. 
한국 노총의 박인상 위원장은 6월 17일에 영국 상공회의소 오찬회, 6월 23일 영국 
투자단 방한에 따른 브리핑, 24일 미국 상공회의소 브라운 회장과 오찬 등 연일 
외국대사관 및 투자자 집단을 만나 '위기 극복과 외자 유치를 위해 상호 긴밀히 
협조하기로' 약속하였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노총의 외자 유치 
노력에 대해 많은 내부 세력과 주변 세력들이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 활동에 
나섬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인정받는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주간노동자신문』, 1998. 6. 30 참조).

생각건대 앞서 말한 수출지상주의적 경제성장 과정은 외자 도입과 더불어 전개되어 
왔고 따라서 모든 자연자원(땅, 흙, 물, 공기, 돌, 나무 등)과 사회자원들(인간 
노동력, 가족관계, 친구관계, 공동체적인 유대 등)이 수출 경쟁력을 통한 외화 
벌이에 총력 동원됨으로써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의 파국 
국면에 와있다. 특히 '수출자유지역'과 같은 경제 특구에서는 노동권이 심각할 
정도로 부자유스럽게 억압되었고 바로 이것이 전사회적으로 표준화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성장하여 더 이상 적정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 
자본은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날 것이고 그때에 남는 것은 골병든 
몸뚱아리와 썩은 냄새 나는 공장 부지 및 오염된 바닷물 같은 것일 게다. 어릴 
적에 가졌던 창창한 꿈은 어디로 사라지고 병든 삶만 남게 되었는가! 바로 이런 
점은 한국 자본의 해외 진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5. 경제위기와 중독성 강한 기업문화

 

오스트리아 상공회의소가 최근 펴낸 '한국인과의 비즈니스 상담 지침서'에는 
한국의 기업문화가 솔직하게 반영되어 있다(『동아일보』, 1998. 7. 16). 이러한 
내용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기업과 경제 교류를 원하던 해외의 여러 나라들에서 
주요 지침으로 등장해 때때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첫째, "한국에서 명함을 내밀 때는 직종과 함께 직급을 꼭 기재하라. 한국인은 
신분을 중시하고 그래야 존중받으며 사업 상담을 할 수 있다." 90년대초에 
독일에서 나돌았던 한 지침서에도 "한국 가면 반드시 명함을 소지해야 하며, 
그것도 가능하면 자신의 지위가 높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점은 
한국 기업은 물론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사회이며 
불평등사회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관계 아래서는 수평적이고 양방향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그에 기초한 조직 혁신이나 사회 진보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둘째,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간 간부보다는 최고경영층과 접촉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한국의 중간 간부들은 아무리 높아도 실권이 없다. 
최고경영층이 거절하거나 기분나쁘게 생각하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도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최고경영층이 하루 아침에 어떤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게 되면 모든 조직적 자원들은 즉각 총동원되어 숨을 죽여가며 그 
아이디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정은 사람들이 어느 
조직에서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일상적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권력지향적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성원 
스스로 자신의 내면 속에 들어있는 삶에 대한 주권을 이러한 권력자들에 
넘겨줌으로써 '자기 소외'를 자초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최고경영층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최소한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는 
당연시되어 왔다.

셋째, 따라서 높은 지위를 가진 한국인 경영자와 상대를 하더라도 "겸손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지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인 경영자는 자신이 그동안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참을성있게 억제해왔던 자존심이나 자기 주장이 더 이상 
억압당하지 않고 이제 남들 앞에 호령을 하듯 자유로이 실현되는 것을 원하게 
된다. 마치 자기 상사가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 최고경영자는 같은 
말이라도 상대방이 자기를 낮추면서 얘기하게 되면 보다 진지하게 들어준다. 
더욱이 최고경영자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넷째, 바로 그러한 고자세의 이면에는 매우 공격적인 심리 상태가 깔려있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상냥하게 양보를 해줄수록 무슨 약점이 있어 저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쉽게 양보하지 마라"는 것이 "겸손하라"와 
동시에 지침으로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고자세와 
공격적인 심리 상태야말로 최고경영자의 약점을 스스로 감추기 위한 증거이다. 
권력과 물질적 부에 대한 무한 욕구, 신분상승에 대한 갈망, 바로 그 이면에는 
내면의 공허함이 갈수록 높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럴수록 내면을 올바로 
채워나가려 노력하기보다 돈이나 물질 소비, 외형적 치장, 신분상승 등으로 
보상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대한다. 이것은 한국 기업 조직 구성원들에게서 대체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다섯째, "귀국 일자를 미리 말하지 말라"라는 지침도 주목할 만하다. 이에 따르면 
대개 한국인은 중요한 사항은 바이어가 떠나기 전날 밤에야 다루기 시작한다. 
따라서 귀국 일자를 미리 말하지 말고 귀국 항공편을 복수로 예약하는 등 
돌발사태에 대비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한국의 기업문화 내지 
사회문화의 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문제를 차분하게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최종 마감 시각이 가까와져야 비로소 서둘러 한꺼번에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대개 많은 '중독조직'(addictive organization) 안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론 이는 기동성이 있어 좋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분별력있는 
판단이 이뤄지기보다는 혼란과 오판으로 귀결되기 쉽다.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은 
한편으로는 자기중심적 권위주의 의식을, 다른 편으로는 일상화된 임기응변적 위기 
대처 양식을 증명하고 있어, 전형적인 중독 조직의 특성을 많이 보여준다.

물론 한국의 기업문화에는 이러한 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외 매우 중요한 
요소로는 경영가족주의, 애사주의, 연공주의(나이와 근속연수를 중시), 학벌주의, 
연고주의 등이 손꼽히는데, 이러한 점들은 대개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민주노조운동의 급성장과 노동자의 가치관 변화와 더불어 약화 내지 
무력화되거나 오히려 기업 경영에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기도 한다.

예컨대, 그동안 현대자동차의 신화를 가능케 하였던 '경영가족주의'(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회사와 한솥 밥을 먹는 관계라는 인식에 기초한 문화를 
말함, 특히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은 남편의 회사가 잘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등 오랫동안 "자본과의 동일시"를 강화해왔다)가 이제는 저항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98년 4월 이후로 조합원들이 모여 사는 울산 
북구의 주민 거주지를 중심으로 조합원 가족들을 참여시켜 고용안정을 위한 
간담회와 설명회, 노동자가족 결의대회를 많이 개최해왔다. 그 한 성과가 가족들의 
자발적 조직인 '두레회'로 나타났다. 그간 고용불안에 대해 문제의식을 강화해오던 
중, 5월 20일에 드디어 회사측의 8,200명 해고 방침이 나오자 즉시 조직이 
결성되었다. 특히 5월 28일, 현대자동차 파업 진행 중에 노동자 가족인 부녀자들이 
아파트에서 삼삼오오 몰려나와 현수막과 피킷을 들고 시위를 벌인다. "가족들이 
똘똘 뭉쳐 정리해고 막아내자!" "여보, 사랑해요" "정리해고 이뤄지면 우리 가정 
무너진다" 등의 주장이 사람들의 연대를 강하게 촉구하였다. 고용보장 서명운동도 
강하게 진행되었다. 참여한 5천여명에게는 체면이나 두려움은 하나도 없어지고 
남편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절박감이 강하게 맴돌았다. 이미 파업 하루 전날인 
5월 26일에는 조합원 가족 250명이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 철회를 촉구하며 공장 
정문에서 농성까지 벌였다. 가족 모임인 '두레회' 회장 이영자씨는 "남편 여러분, 
집에 돌아가시면 가족들이 함께 할 때만이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얘기해 주십시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들이 주야 막교대에다 
특근까지 해서 회사를 16년 동안 흑자를 내도록 했는데, 몇 개월 좀 어렵다고 
무조건 해고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애사주의, 
경영가족주의를 이미 깊이 내면화하고 있는 노동자나 가족들이 '그동안 한식구라고 
믿어오던 회사로부터 헌신짝 버림을 당하듯' 일자리 위기를 경험하게 되면서 
그만큼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6. 경제위기와 사회심리

 

1960년대 박정희 시대 이후로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계획이 체계적으로 진행되면서 
매우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급속한 성장의 이면에는 매우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사회심리적 기초가 놓여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것이다.5) 이것은 자신을 공격하고 지배한 사람들에 대해 
아예 저항을 않거나 저항을 하다가도 도중에 포기하고, 더 이상 대안적 전망에 
관해 고민하거나 결사항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공격자나 지배자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하고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6)

한국 사람들에게는 35년 정도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나 해방정국, 
빨치산전쟁,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편으로는 패배의식 
내지 희생자의식이 강화되면서, 바로 이것이 다른 편으로는 강자와 승리자에 대한 
선망의 감정과 동시에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재강화되었다. 미국이나 
미국 사람들, 심지어는 미국 유학생들까지도 무의식 중에 구원군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7) 이처럼 공격자와 자신을 
동일하게 보려는 이면에는 약자를 깔보고 패자를 희생시키려는 심리가 매우 강하게 
배어있는데, 바로 이런 사회 심리가 지난 30년 동안의 한국 산업화에 있어 매우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 심리가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 삶의 위기와도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권력자 자본에 의해 희생당한 
자신이 스스로 자본을 지양하기 위한 싸움을 전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본 편에 
서서 그에 저항하는 세력을 분쇄하는 데에 동참하게 된다면, 이것은 자기 스스로의 
삶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자에게까지도 삶의 위기를 안겨다준다. 
노동자들이 나라별로, 또는 기업별로 분열되어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 아래 서로 
싸우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공격자와의 동일시가 바탕으로 깔려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파업을 하면서 생존권 투쟁을 힘차게 벌이는 자들에 대해, "나라 파산 지경에 
웬 파업이냐"며 싸움을 말리는 자들의 깊은 내면에도 이러한 사회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한국 노동자들의 의식과 태도는 한마디로, 좌절과 걱정, 두려움이라는 
한 축과 실망과 분노, 저항이라는 다른 축 사이에서 고도의 긴장된 관계를 
체험하고 있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좌절과 
걱정이라는 축을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실직을 당했거나 실직을 당하는 사람을 
옆에서 본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자기 삶에 대해서도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세계에서도 우수한 나라(예컨대 '11대 경제대국'), 또는 '우수한 
민족'이라던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이 하루아침에 꺾임으로써 이러한 
좌절은 더 이상 개인적 좌절이 아닌 사회적 좌절로 연결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분노하는 마음으로도 연결된다.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일하던 기업, 
그리고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조국과 민족'으로부터 뭔가 속았음을 느끼면서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노, 즉 기득권을 가진 지배자들에 대한 분노가 
곧장 자동적으로 저항으로 연결되기보다는, 대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장래에 
대한 걱정, 파산 선고에 대한 두려움 등과 함께 뒤섞이면서 노동자들은 매우 심한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여태껏 애국심과 애사심을 
너무나 가슴 깊이 내면화해 왔기 때문이다.8) 바로 이러한 심리 구조를 적극 파고 
들어가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고자 하는 관리 방식이 종업원지주제나 
우리사주제 도입, 그리고 참여경영 전략 또는 노동자의 중산층화(재산형성) 
전략이다. 만일 이러한 여러 기법들이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앞서 말한 
"공격자와의 동일시"가 더욱 강화되어, 마침내 '싸움의 상대방'이 뒤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아군이 적군이 되고, 적군이 아군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1998년 2월 6일 새벽에 제1기 노사정 위원회 논의가 타결된 뒤, 민주노총 
비대위는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에 합의한 지도부를 분노와 함께 불신임하였고 
즉각 파업을 결의하였다(1998. 2. 9). 그런데 이 비대위 역시 그 파업 결의를 
3일만에 스스로 거두었다(1998. 2. 12). 바로 그러한 과정은 앞서 말한 한국 
노동자들의 불확실한 심리상태를 매우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파업을 결의한 
노동자들은 매우 분노한 상태에 있었음에도 한편으로 "또다시 총파업으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정말로 나라가 파산(지불불능상태)을 선고받는 게 아니냐"는 
식의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인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 저항의식이 애국적 민족의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애국주의적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진 
'시민들'(노동자 포함)이 이미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데다가 지배적 언론들마저 
'참여와 협력'의 사회적 분위기로 사람들을 몰아가게 되면, 분노하는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는 엄청나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 국가는 공권력의 발동을 
강하게 시사하면서 지금까지 조용히 감추고 있던 '호랑이 이빨'을 위협적으로 
내보이면서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의식 공간을 뚫고 들어간다.9) 다시 말해 
흔들리는 노동자의 마음을 뚫고 "노동규율"의 강화, 즉 노동자의 군기잡기를 
끊임없이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실례가 곧 5월 1일, 메이 데이 
시위와 그 사후 처리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검찰총장은 5월 4일 
대국민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5월 1일 시위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발생한 대규모 가두 폭력 시위로서 
노사정 합의정신에도 배치되는 명백한 공권력 도전행위이다. 검찰은 국난극복 
차원에서 국가공권력을 총동원, 단호히 대처할 것이다. 특히 1일 폭력행사에 대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관여 여부를 면밀히 수사, 혐의가 드러날 경우 사법처리를 할 
것이다(김태정 검찰총장, 『주간노동자신문』, 1998. 5. 6. 강조는 필자).

 

실제로 5월 11일에 가서는 국민승리21의 조직국장 박용진씨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게다가 경찰청은 민주노총 지도부를 포함한 79명의 수사대상자를 확정한 
뒤, 출석요구서 발부 등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이는 새 정부가 누누이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하면서도, "국난극복"이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배제전략을 구사하겠다는 생각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청와대 측에서도 메이 데이 싸움 직후에, 
노동운동계를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대처하면서 온건파와는 대화를 계속하되 
강경파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설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노동운동측은 매우 조심스럽게 '자기통제된 투쟁'을 조직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메이데이 투쟁 이후 '폭력 충돌'을 매우 우려하는 사회적 논란의 와중에 서울 등 
전국 여러 도시에서 치뤄진 5월 16일의 가두집회에서는, 민주노총의 경우 
'질서유지단'까지 등장하여 "경제의 심각성"과 "국민의 우려"를 신중히 고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슷한 모습은 5월 20일에 현대자동차가 3만 5천명의 조합원 
중 8천명 이상을 정리해고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주기적으로 반복된 시한부 파업(5. 
27, 6. 29, 7. 6, 7. 14, 7. 20)에서도,10) 민주노총이 정부측 협상안을 수용하여 
스스로 6. 10 파업을 철회했을 때에도, 또 6월 29일, 5개 퇴출 은행 발표 직후 
일부 전산 요원들의 태도나 7월 15일 총파업 개시를 결의했다가 이를 슬그머니 
접어버린 금융노련의 태도에서도, 또한 은행 퇴출과 공기업 구조조정 강행에 
항의하는 양대 노총의 공동 '평화 집회'(7. 12)에서도, 그리고 7월 10일 제2기 
노사정위 탈퇴 선언에 연이어 7월 14-16일까지의 민주금속, 공공연맹 등 민주노총 
총파업(7만여명 참여)에서도 여전히 반복해서 나타났다. 이것은 한편으로 사회적 
신뢰감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운동 측의 고민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일상의 사회의식 자체가 얼마나 지배자 논리에 포섭되어 있는가, 즉 "공격자와의 
동일시"가 어느 정도 강한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러한 "공격자와의 동일시" 현상은 노조가 고용 위기의 시대에 
가장 열악한 조건 속에서 주변화되거나 배제당하는 집단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불법체류에 대한 벌금을 면제받는 
대신 98년 1월부터 4월말까지 무조건 출국을 해야만 했던 5만여 미등록(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영세사업장 노동자나 여성노동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해고와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되는 데 대해서도,11) 또한 용역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용 조정 과정에서, 그리고 7월 1일 이후 근로자파견제의 시행으로 
무차별 해고를 당한 경우에도,12) 실업자나 노숙자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과정에서도13) 구체적으로 증명되었다.

 

7. 나가는 말: 총체적 삶의 위기에 대한 대안의 모색

 

지금까지 앞에서 우리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단순한 외환 위기나 경쟁력 위기, 
수익성 위기로 해석하지 않고 그 대신 총체적인 삶의 위기라 규정하고, 그것이 
경쟁지상주의, 수출지상주의, 애국주의, 자본과의 공범관계 및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성(무책임성) 등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원리 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하는가? 
요컨대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경제 패러다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쟁과 분열, 오만과 남용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연대와 협동, 겸손과 외경의 원리에 기반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있을 것이다. 현재의 조건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나가는 노력은 매우 힘들 것이지만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음과 같은 운동을 사회적으로 힘차게 전개한다면.

첫째, '뒤집어 보기'를 해야 한다. '주어진' 조건을 주어진 대로만 받아들이고 그 
속에 적당하게 적응하거나 순응하려고 해서는 아무런 창조적 진보를 이룰 수가 
없다. 주어진 조건조차도 원래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행위 속에서 만들어지고 
구조화되어 우리 눈앞에 마치 거대한 물결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경쟁이라는 거대한 물결도 우리 눈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경쟁이라는 게임에 모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의 압력'이라는 구조가 탄생하는 것이다. 만일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면서 더 이상 경쟁하기를 그만둔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는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연대와 협동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이 구조와 
행위는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뒤집어 보았을 때 문제의 뿌리와 
가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또다른 예는 '경제'라는 말이다. 앞서 살핀대로 경제란 
결국 먹고사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위기란 먹고사는 것의 위기, 다시 말해 삶의 
위기이다. 이처럼 삶의 위기를 경제위기라고 해야지만 '경제 바로잡기'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만일, 외환위기나 기업수익성 위기를 경제위기라고 
규정짓고 들어가면 우리는 금 모으기나 달러 모으기, 아니면 기업수익성 높이기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고, 마침내 '경제 살리기'를 한답시고 오히려 
삶의 위기를 계속 부채질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다르게 느끼기'를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상품광고와 제도언론,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지배문화 및 사회풍토 속에서 자라나고 생활하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광고나 언론, 사회 분위기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내면이 진정으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우리는 날마다 '생산성 향상'만이 치열해지는 세계시장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길이라 얘기를 듣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 경영자들조차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생산성' 향상 과정에서 '파괴성'이 더욱 향상되고 있음을 느낀다. 가만히 
느껴보면 우리의 몸과 정신, 인격, 그리고 공동체나 생태계가 갈수록 파괴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성과주의나 경쟁력 지상주의 때문에 이러한 솔직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거나 억지로 참자는 식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 결과는 불행하게도 큰 병이나 죽음으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생동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 '이어 보기'를 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총체적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이 사실은 일상적 생활과정 속에 모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노동 문제와 여성, 생태계, 평화 문제 등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문제들이 생산이나 소비, 그리고 노동을 매개로 하여 서로 
얽히고 설켜있다. 예컨대 평화 문제와 군수산업의 노동자 일자리 문제는 서로 얽혀 
있고, 생태계 파괴와 공해산업 노동자의 생계도 서로 맞물려 있다. 또 노동자의 
여가 시간과 생태계, 사회적 효율성 문제도 서로 얽혀있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성공해서 노동자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한다면 사람들은 한나절만 일하고 
그외는 낚시를 가거나 아이들과 들놀이를 나갈 수 있다. 만일 낚시를 해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였는데 뭔가 국물에서 기름내가 난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아차! 바로 내가 일하는 공장 폐수가 이 물고기 몸 속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내 몸 속으로 들어오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그가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다시 일터로 돌아오면 그는 자기가 만드는 제품에 대해, 그리고 자기 
회사에 대해 뭔가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만일 이런 문제의식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조직적으로 공유된다면 그 회사는 질적으로 다른 '효율성'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질적인 효율성 문제는 서로 밀접히 
맞물려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행위가 다른 부문에 여러가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14)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책임성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빠져 나오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거대한 구조 속의 한 톱니바퀴이기를 
거의 강요받다시피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거대한 구조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우리로 하여금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는 '겨우 
나 하나가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느냐'고 한탄만 한다. 그런데 곰곰 살펴보면, 바로 
우리 하나 하나가 그 구조 속에서 톱니바퀴로 움직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거대한 
구조는 잘 지탱되고 술술 잘 돌아가게 된다. 만일 우리 스스로 더 이상 
톱니바퀴이기를 그치고, 과감히 그 기계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면 그 기계는 더 이상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계를 
뜯어고치거나 취사선택을 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촌지 문제를 들 수 있다. 
우리는 많은 학부형들이 자기 자식을 위해서 돈 봉투를 갖다주면서도 "선생들이 
돈받는다"고 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해서는 촌지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해결되려면 학부형과 선생 모두, 일단 자기 먼저 
갖다주거나 받는 사람의 대열로부터 '빠져 나온' 상태에서, 다른 이들이 주고받는 
행위를 나무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자본가 아래로 들어가 열심히 
'생산성' 향상 운동을 해주면서 고용불안이나 노동소외가 일어난다고 분노하는 
것도. '빠져 나오기'를 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당장은 생계유지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개년 계획을 
세워서 서서히 시도하더라도 빠져 나와야 한다. 따라서, '빠져 나오기'란 반드시 
사직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일단 생계유지 
때문에, 비록 몸은 자본 아래에 머물러 있더라도 '내면적 사표'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빠져 나올 수' 있다. 만일 이러한 '빠져 나오기' 
운동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기존의 착취와 지배, 경쟁과 분열 구조는 상상 
이상으로 급격히 허물어질 것이다.

다섯째, '새롭게 만들기'를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여러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살아있는 주체적 생명력을 충분히 키울 수 있고, 이 힘을 바탕으로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사회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노동, 여성, 
평화, 생태계 문제 등의 각 영역이 살아있는 주체들에 의해,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그것도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새롭게 만들기' 운동이 결코 완전한 설계도를 
가지고 완벽하게 진행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학습과 
실습을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과정은 창의성과 자율성, 다양성이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누군가 똑똑하거나 힘있는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고 감독, 통제하는 과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지배 관계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롭게 만들기 과정이 우리 
모두의 일상적 생활 과정으로 되어야 한다.
 
 

1) 안산 시화 공단에서 나온 폐수가 맑은 바닷물을 검은 색과 악취로 물들인 
시화호, 한화그룹에서 계획 중인 메추리 섬의 원유저장탱크가 들어설 대부도, 공장 
및 축산 폐수와 농약, 비닐류 등으로 더렵혀진 갯벌, 미군의 포사격 훈련장을 위한 
최적지인 매향리, 현대건설에 의해 농경지용으로 확보되어 농약 투성이에다가 더 
이상 갯벌의 자정 능력을 상실한 천수만 서산AB지구, 공군의 폭격훈련장이 
자리잡은 독대섬, 세계 최대의 공사로 알려진 새만금 갯벌에 대한 간척사업(그나마 
김성훈 농림부장관이 98년 7월 16일, 이곳 1억 2천만평에 공업단지 조성 대신 
생태마을과 농지 등 환경친화적 개발을 하겠노라고 약속했으나 이미 간척 그 
자체가 갯벌 가치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한려수도로 이름난 여수 지역의 기름띠 
오염, 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된 마산만, 오염된 공기와 
공장 폐수로 망가진 울산만 등 3면의 바다가 이미 신음소리를 크게 내고 있는데도 
지배자들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대처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방식을 
'현재에도 그대로 진행'시키고 있다(영종도 공항이나 김포매립지 등). 허욱, 
「개발, 폭격, 인간의 오만에 신음하는 서해안 1천 5백리」, 『말』, 1998년 6월호 
참조.

2) 강수돌, 『경영과 노동: 사회생태적 경영을 위한 밑그림』, 한울출판사, 1997, 
53쪽 이하 참조. 

3) H. 하이데, 「자본의 전략변수로서의 민족: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에 근거한 
비경제주의적 해석」, 『이론』, 1993년 가을 참조. IMF 구제금융 직후 98년 1월에 
시작되어 4월말에 막을 내린, '나라 살리기를 위한 금모으기 행사'(전국적으로 
351만 명 참여, 4가구당 1가구꼴로 평균 65그램을 내놓음)도 결국에는 이러한 
애국주의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행사는 불행하게도 사랑과 우정의 
징표까지도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국내외의 사업가들한테 갖다 바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것은 저들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이른바 "외환위기" 극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일부 장사들만 배를 채워 주고 전체적으로는 
'밑진 장사'를 하고 말았다(『한겨레 21』, 208호, 1998. 5. 2).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98년 7월 17일부터 8월 15일까지 열리는 
'전국 일주 태극기 달리기' 행사는 "태극기와 함께 달리며 국난극복의 의지를 
다지자" 그리고 "도약21, 힘찬 한국"이라는 구호와 함께 출범하면서 동시에 전국의 
모든 가정들에 거의 의무적으로 태극기를 달도록 종용하고 있다. 특히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은 관리사무소로부터 각 가정으로 일방적으로 연결된 단지내 
방송망을 통하여 "앞으로 한 달간 매일 태극기를 답시다", "아직도 태극기를 달지 
않은 가정은 지금 속히 다시기 바랍니다"라는 등의 내용을 반복해서 짜증스럽게 
들어야 했다. 또한 그래도 달지 않은 가정에 대해서는 통·반장이 직접 그 가정을 
찾아가 "자꾸만 위에서 무어라고 하니 빨리 태극기를 달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5)  H. 하이데, 「한국 경제-축적양식의 위기」, 『녹색평론』, 1998년 5-6월호, 
녹색평론사.

6)  이러한 "공격자와의 동일시"(H. 하이데, 한국 경제??축적양식의 위기, 
『녹색평론』, 1998년 5-6월호)는, 내가 보기에, 지난 50년 동안 한국의 민중이 
일상생활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공의식을 체득하고 있는 "생체화된 
반공무의식"(김진균, 『한국의 사회현실과 학문의 과제』, 문화과학사, 1997, 
86쪽)과 명백히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7) 김종철, 「'보살핌의 경제'를 위하여」, 『녹색평론』, 1998년 7-8월호, 14쪽.

8)  98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가 끝난 뒤에 민노총 사무실에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즉 집회 직후에 민노총 사무실로, 시민이라고 자처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항의 전화가 빗발쳤는데, 그들은 "80% 이상이 아줌마들이었고, 
전라도 사투리를 썼으며 내용도 하나같이 '주가가 떨어진다', '정권교체했는데 
1년간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2월초에 
민노총 비대위가 파업을 결의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주간노동자신문』, 
1998. 5. 13).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시민들'의 항의 전화가 민노총의 
투쟁에 대한 부정적 국민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라는 점 이외에, 그 
항의의 내용이 전형적으로 "국익"과 "국난극복"이라는 이름 아래 "주식 가격"이나 
"수익", "이윤" 등 기득권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적극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9) H. 하이데, 「노동 사회로부터의 탈출구: 노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조건」, 고려대 노동문제 연구소(편), 『미래의 일과 노동』, 미래인력연구센터, 
1998.

10) 현대자동차는 7월 16일, 7월 31일자로 최종 정리해고 대상자 2,678명을 
해고하고 900명의 여유인력에 대해서는 2년간 무급휴가를 보내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노조는 17일부터 19일까지의 연휴가 끝나는대로 파업 등 투쟁 계획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김광식 위원장은 7월 14-16일까지의 파업으로 특별검거령이 
떨어진 57명 속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노조 집행부는 위기 의식을 느낀 나머지 
이미 7월 11일의 노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임금삭감안과 정리해고 철회안을 
맞바꾸자"라는 양보교섭안을 제시했다. 물론 대의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러한 제안 속에서도 노동조합 지도부의 내면적 갈등을 읽을 수 
있다.

11) 97년 3/4분기 고용 동향에 따르면 전년도 대비 여성 실업자 증가율이 남성에 
비해 무려 7배나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5인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이 
60% 이상인데다 경영 위기에 빠진 대기업의 하청영세기업들이 폐업과 부도로 몰려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이 퇴직금은 고사하고 밀린 임금도 못받고 거리로 쫓겨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조직인 노동조합은 이렇다할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매우 소중한 예외도 있다. 한국기계 노조의 경우다. 97년 
12얼 27일에 '조립부 14명 중 여성노동자 9명 모두를 31일자로 해고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한국기계 노조가 "여성 노동자에게 먼저 적용한 정리해고 바람은 결국 
모든 노동자에게 닥치게 되며, 당장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해고 바람이 회사 전체에 몰아칠 것"이라며 조합원을 설득, 
대부분의 남녀노동자들이 함께 밤샘 농성에 참여하여 불과 1주일만에 
회사측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경우도 있다. 손영주, 「실업의 한가운데 서있는 
여성노동자」, <노기연>, 『민주노동과 대안』, 1998년 4월, 58쪽.

12) 현대자동차 노조는 회사측이 6월 30일, 식당, 전화 가설, 발간 업무, 수출 
차량 이송 등 10개 항목 938명에 대한 하청 이관 계획을 밝힌 데 대해서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98년 6월까지 약 6천여 명(총 노동자의 
20%에 육박)에 이르는 하청노동자들이 정리해고되는 것에 대해서도 "정규직원 
8천여명에 대한 정리해고 문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하청이나 용역사원, 
파견근로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고 하며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물론 
한국중공업, 현대중공업, 아시아자동차 등 곳곳에서 용역하청 노동자들에 의한 
자생적인 생존권 요구 투쟁과 원청 노조의 지원이 부분적으로나마 함께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결코 정규직과 비정규직,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우리 기업 
노동자와 다른 기업 노동자 사이의 '유리벽'을 뚫어내지 못하였다.

13) 서울역, 용산역 등 서울의 주요 역 부근에는 3천여 명의 노숙자가 몰려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98년 2월에는 하루에 1만명씩, 5월에는 5천명씩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조차도 노동자와 실업자, 노숙자 모두가 
연대하여 총체적인 공동 대응을 모색하는 데 주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기존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한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 
주엇다.

14) 이러한 인식은 곧 자본주의 사회 과정에서 잃어버린 영성(spirituality)을 
회복하는 것이다("재정신화", H. 하이데, 「노동 사회로부터의 탈출구: 노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조건」, 고려대 노동문제 연구소(편), 『미래의 일과 
노동』, 미래인력연구센터, 1998, 80쪽 참조). 나 자신과 세상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나와 우주는 다른 개체가 아니라는 인식,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 그리고 나와 남이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몸뚱이라는 인식이 곧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성을 회복하고 실천할수록 우리는 진정 
자율적이고 책임성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나는 이 영성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와 더불어 철저히 분리되어 나간 과학과 종교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매개고리가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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